22.04.19 21:22최종 업데이트 22.04.19 21:22
  • 본문듣기

지난 2013년 12월 5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2층 크리스탈 볼룸에서 열린 일왕 생일 축하연에 '기모노'를 차려입은 일본 여성들이 들어가고 있다. 행사장 입구에는 행사를 알리는 어떤 안내문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초청장을 든 일부 참석자들이 두리번 거리다 호텔 직원에게 "여기가 일본대사관..."이라고 묻는 모습이 수차례 목격되었다. ⓒ 권우성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와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후보자가 2013년 12월 5일 일왕 생일 축하연에 참석한 일이 논란이 되고 있다. 그달 23일인 아키히토 일왕(현 상왕)의 생일에 맞춰 주한일본대사관 주최로 서울시청 근처 롯데호텔에서 열린 이 행사에 참석한 사실이 도마 위에 올랐다.

설령 일왕의 생일이지라도, 수교국 국가원수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것을 나무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일왕의 생일은 다르다. 일본 국가원수의 생일이라서가 아니다. 일본 정부가 이날을 경축하게 된 경위를 살펴보면, 가지 말아야 할 자리라는 게 역력히 드러난다.


한국에서는 '일왕 생일'이라는 다소 격하의 뉘앙스가 담긴 표현이 사용됨에 따라, 이 행사에 담긴 본래의 취지가 감춰지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공식 표현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천장지구

지금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는 천황탄생일(天皇誕生日)이다. 이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미군정 때인 1948년이었다. 그 전에는 천장절(天長節)이었다. 왕비(황후)의 생일은 지구절(地久節)이었다.

노자의 <도덕경>은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 간다(天長地久)"며 "천지가 길고 오래 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스스로의 뜻으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뒤 "그래서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자기 뜻대로 살지 않는 무(無)사심의 자세를 갖고 세상 만물을 생육시키려는 자세로 살아야 영구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다. 이 문구에 나오는 '천장지구'를 따서 일왕 부부의 생일을 지칭하게 됐다.

<도덕경> 문구를 따를 것 같으면, 지구절과 천장절 주인공들은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만백성과 우주만물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일왕 부부의 위대함을 표현하는 동시에, 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도출하려는 기획을 읽을 수 있다.

일왕의 역사는 오래됐지만, 천장절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 천장절이 생겨난 것은 메이지유신 5년 뒤인 1873년 1월 4일이다. 무신정권인 도쿠가와막부(에도막부)가 무너지고 일왕이 정치의 중심으로 우뚝 선 뒤에 천장절이 제정됐다.

일본에서는 1871년부터 조선을 정복하자는 정한론이 대두됐다. 1874년에는 일본군의 타이완(대만) 침공이 있었다. 1875년에는 운요호사건(운양호사건, 강화도 사건)이 있었다. 일본에서 대외침략 기운이 솟구치던 시절에 천장절이 제정됐던 것이다.

재작년에 <한국사상사학> 제65집에 수록된 역사학자 조누리의 논문 '일제강점기 초기 축·제일의 시행과 그 의미'는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이 천장절을 비롯한 각종 축일과 제일(祭日)을 제정한 동기와 관련해 "백성들을 천황 중심으로 결집시키는 동시에 현인신(現人神)으로 규정된 천황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려는 의도에서 창출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런 뒤 "그 결과, 메이지 시기 전 국민에게 축·제일로 대표되는 천황 중심의 시간적 동시성이 확장될 수 있었으며, 천황 중심의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데에도 축·제일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말한다.

한국·오키나와·타이완·중국과 동남아·태평양을 짓밟은 일본제국주의·일본군국주의의 구심점이 됐던 것이 일왕이다. 그런 일왕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시키고 일본의 국가통합을 촉진할 목적으로 고안된 정치 행사가 천장절이다. 단순한 생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을 맞아 2020년 3월 5일 오전 서울 광화문네거리 조선일보사 부근 원표공원에서 오종선 작가의 '조선일보 백년전'이 열렸다. 오종선 작가는 일제강점기 당시 1월 1일마다 1면에 일왕 부처의 사진을 싣고, 제호 위에 일장기를 올려 놓았던 조선일보를 '두루마리 휴지'로 만들어 전시했다. 2020.3.5 ⓒ 권우성

 
김원봉, 한용운, 윤봉길의 격분

천장절에 담긴 그 같은 의미는 천장절 제정 뒤에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인들을 격분케 만들었다. 훗날 의열단장이 될 소년 김원봉은 국권침탈 뒤에 맞이한 천장절 때 일본 국기에 화풀이를 했다. 한상도 건국대 교수의 <대륙에 남긴 꿈: 김원봉의 항일 역정과 삶>은 "일본 천황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을 맞아 일본기를 학교 화장실에 처넣어버렸다"고 말한다.

일본의 침략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에는 천장절이 4월 29일이었다. 히로히토 일왕의 생일이 그날이었다. 이날 <님의 침묵>의 저자인 만해 한용운의 집에 동회 서기가 찾아왔다. 천장절을 맞이해 조선신궁에 다녀오시든가 집에 일본기라도 달아두시든가 하라고 통보하기 위해서였다.

이 장면을 대화체로 묘사한 역사 저술가 임중빈의 <만해 한용운>에 따르면, 한용운은 배급 통장을 던지듯이 내어주면서 "이제부턴 그따위 심부름일랑 두 번 다시 오지 마소"라고 쏘아붙였다. 한덕수·박보균 같은 일부 한국인들은 잘 차려진 현대판 천장절에 참석했지만, 한용운은 굶어 죽을지언정 그런 데는 안 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천장절에 대한 분노를 가장 격렬하게 보여준 한국인은 윤봉길이다. 그가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킨 날은 히로히토의 31회 생일인 1932년 4월 29일이다. 그날 그곳에서는 천장절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한국인들만 천장절을 부정적으로 바라봤던 것은 아니다. 일제 패망 당시의 미국인들 역시 그런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이 일본을 지배하던 시기에는 천장절이란 명칭이 천황탄생일로 격하됐을 뿐 아니라 천장절 분위기에 재를 뿌리는 일도 있었다.

크리스마스에 발행된 1998년 12월 25일자 <조선일보> 기사 '이준 특파원의 도쿄저널'은 "12월 23일은 일본국 상징인 아키히토 일왕 탄생일이다"라며 "일본에서 크리스마스는 평일이지만 일왕 탄생일은 국가적 축일로 정해 기리고 있다"고 한 뒤 이렇게 설명했다.
 
"하지만 이날에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2차 대전 A급 전범 7명의 사형이 집행된 날이다. 2차 대전 종전 이듬해인 46년, 연합국은 일본의 전쟁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극동국제군사재판소를 설치했다. 이른바 도쿄재판이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도쿄재판은 현 일왕의 아버지로 전쟁 책임자로 지목됐던 쇼와 일왕의 탄생일에 시작됐다. 그리고 2년 8개월간 끈 재판 결과, 현 아키히토 일왕 탄생일에 도조 히데키 등 7명의 전범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들은 히로히토(쇼와)를 비롯한 일본 지배층을 면밀히 분석했다. 그런 연합국들이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인 천장절과 겹치는 줄도 모르고 도쿄재판 일정을 정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천장절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보안검색대 설치된 '일왕 생일 축하연' 지난 2013년 12월 5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2층 크리스탈 볼룸에서 일왕 생일 축하연이 열리는 가운데 행사장 입구에 보안 검색대가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주위에는 행사를 알리는 어떤 안내문도 설치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인지 초청장을 든 일부 참석자들이 두리번 거리다 호텔 직원에게 "여기가 일본대사관..."이라고 묻는 모습이 수차례 목격되었다. ⓒ 권우성

 
2013년이 어떤 해였나

천장절의 의미와 역사를 감안하면, 천장절을 계승한 행사인 일왕 생일 축하연에 가지 않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도 일부 한국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대사관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있다. 한덕수·박보균 두 후보자도 그런 사람들에 속한다. 한덕수 후보자는 고위 공직자 출신이고 박보균 후보자는 언론인이므로 초대에 더욱 더 응하지 말았어야 했다. 2013년 행사 때는 특히 그랬다.

2006년 9월부터 1년간 총리로 재임한 아베 신조가 제2기 내각을 꾸린 시점이 2012년 12월 26일이다. 3년간의 민주당 집권에 뒤이은 아베의 재집권이라서 2013년에는 일본 극우세력의 도발이 한층 두드러졌다. 이 해에는 일본에서 망언도 많이 나왔다.

일례로, 그해 7월 29일 아소 다로 부총리는 독일 나치의 방식을 본받아 일본의 개헌을 성사시켜야 한다면서 "그 수법을 배우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발언했다, 11월 14일에는 아베 신조 총리가 '한국은 단지 어리석은 국가'라고 발언한 사실이 일본 언론에 보도됐다. 11월 19일에는 훗날 총리가 될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안중근은 범죄자'라는 말로 한국을 자극했다.

아베 신조 극우정권이 재등장한 직후인 그해의 망언들을 죄다 열거하기는 어렵다. 그런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반영한 것이 그해 12월 26일 벌어진 현직 총리 아베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였다.
  

"아베 총리 야스쿠니 신사참배 규탄" 27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평화통일을여는사람들의 한 회원이 든 피켓에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규탄하는 문구가 적혀있다. 2013.12.27 ⓒ 이희훈

 
한덕수·박보균 후보자가 일왕 생일 파티에 참석한 것은 12월 5일이고 아베가 야스쿠니에 참배한 것은 26일이다. 아베가 국제적 반발이 예상되는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할 수 있었던 것은 12월 5일 이전에 이미 일본 내에서 분위기가 무르익었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는 각종 망언에 대한 보도를 통해 한국에도 잘 전달되고 있었다. 일본이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는 상황에서 한국인이 그런 행사에 참석했다면 역사의식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10만인클럽후원하기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