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19 10:43최종 업데이트 22.04.1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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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를 맞이하던 무렵, 식민지배와 전쟁의 참혹함을 두루 경험한 한국인들이 특히 '민족'이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호응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함께 고통받고 함께 안도해온 경험은 개인을 넘어서는 민족이라는 공동운명체의 위력을 실감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60년 5월 16일 '조국재건'을 약속하며 군사정변을 일으킨 이들에게 기대를 품는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3년 뒤 민정이양을 표방하며 대통령으로 변신한 박정희가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건 것도, 그런 요구와 기대에 대한 호응이었다.

하지만 만주군 장교 출신 박정희가 이끄는 군인집단이 이끌어갈 수 있는 민족주의란 '친일청산'과 '통일'을 근본적으로 배제하는 것이었고, 남은 것은 '미래의 민족 번영에 대한 약속' 뿐이었다. 그래서 국가운영의 중심적인 목표가 경제발전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지만, 좀더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성과 역시 필요했다. 경제발전의 성과는 단기간 내에 가시화되기 어려우며, 아무리 폭력으로 얻은 권력이라도 성과를 통해 대중을 납득시키지 못하고는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광스러운 민족의 이미지를 당장 대중 앞에 보여줄 방법이 필요했고, 그것이 가능한 유일한 영역이 스포츠였다. 1964년 제 18회 하계올림픽에 역대 최대 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도쿄 올림픽의 도전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1964년 올림픽에 한국은 16개 종목 165명의 선수를 출전시켰는데, 59명의 임원과 지원인력, 응원단, 참관단 등을 모두 포함하면 4450명에 달할 정도였다. 그것은 4년 전인 1960년 로마 올림픽에 35명, 4년 뒤인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 54명의 선수를 보낸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고, 210명의 선수를 보낸 1984년 LA 올림픽 이전까지 가장 큰 규모였다. 그 대회에 참가한 93개국 중에서도 5번째로 큰 파격적인 규모이기도 했다.

그 대회에 그런 대규모의 인력 파견이 이루어진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개최지 일본이 가까워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들었다는 점, 그리고 재일동포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던 남북한의 체제경쟁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서도 세계무대에 태극기를 내거는 일이 중요했다는 점을 들 수 있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충분한 지원을 하기만 하면 금메달 획득은 물론이고 세계를 놀라게 할 만한 성적을 거둘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8년 런던 올림픽 선수단 환송 1976년 이전까지 올림픽은 늘 열광적인 환송과 초라한 환영 행사로 열리고 닫혔다. 정부 수립되기도 전인 1948년 7월에도 올림픽 출전 선수단이 출발하는 서울역 앞에 수십 만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돌아올 때는 가족과 체육회 관계자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사진이 '환영식'으로 잘못 소개되는 경우가 있지만, 환송식이 정확하다.) ⓒ 독립기념관

 
원로 체육인들의 증언들로 구성된 다큐멘터리들은 종종 1970년대 이전을 '배고프고 어렵던 시절, 올림픽 금메달은 꿈도 꿀 수 없던 시절'로 묘사한다. 하지만 실제로 한국인들이 금메달을 기대하지 않은 올림픽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올림픽 출전 선수단 환송식은 희망과 기대의 열기로 끓어올랐고, 과정을 전하는 언론지면에는 '참패'와 '분통'이라는 제목과 '안일한 정신자세'를 질타하는 내용이 도배되었으며, 초라한 귀국길엔 달걀세례와 돌팔매질과 각종 협회 임원 총사퇴의 씁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올림픽 참가 과정을 총괄하던 대한체육회는 1948년 런던 대회 직후엔 참패의 책임을 둘러싸고 난투극을 벌였고, 1952년 헬싱키 대회와 1956년 멜버른 대회 직후에는 선수단 구성 과정의 문제와 경비 사용에 대한 진상조사 요구를 둘러싸고 내분에 휩싸였다. 회장과 임원단의 총사퇴가 올림픽 주기에 따라 4년마다 되풀이된 것은 물론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당연해 보이기도 하는 초라한 성적들은 왜 당시 국민들을 그렇게 실망하게 만들었을까? 무리한 기대로 보였던 금메달 획득을 왜 현실적인 목표로 생각하고 있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너무 빨리 세계를 놀라게 했던 초창기 한국 선수들의 기적적인 활약 때문이었다.

마라톤과 역도의 기적, 그리고 언론의 허풍

우선 한국인들은 올림픽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인 1936년에 이미, 그것도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마라톤 종목에서 금메달(손기정)과 동메달(남승용)을 휩쓰는 사건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특히 마라톤 종목에서는 세계를 놀라게 하는 소식이 이어졌는데, 올림픽과 더불어 가장 권위 있는 마라톤 종목의 세계대회인 보스턴 대회에서도 1947년 우승(서윤복)에 이어 1950년 대회에서는 1, 2, 3위(함기용, 송길윤, 최윤칠)를 석권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역도에서도 1930년대 후반부터 남수일, 김성집 같은 선수들이 세계신기록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스포츠에 대한 한국인들의 자신감을 확장시키기도 했는데, 그것 역시 '세계신기록'이라는 개념을 한국인들이 미처 알기도 전에 이룬 성과였다.

마라톤과 역도에서 그렇게 빠른 성공을 이룬 원인은 나름대로 연구해야 할 문제지만, 최소한 한국인들이 선천적으로 세계 최강의 신체능력을 가진 우월한 민족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은 자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당대 한국인들의 자신감과 기대 수준을 현실과 거리가 먼 수준까지 끌어올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더불어 한국인들의 스포츠에 대한 기대 수준을 한 없이 높인 또 한 가지 원인은 언론의 허풍이었다. 한국 스포츠는 마라톤과 역도를 제외한 종목들에서는 세계 수준과 상당한 격차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당시의 언론들은 국민적 기대감에 편승해 엉뚱한 보도들을 하곤 했다. 1948년 4월 26일에는 여자 원반던지기 박봉식이 37.08m의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는 기사가 실렸고 1952년 4월 15일에는 100km 도로 사이클 종목 올림픽 선발전에서 4명의 선수(권익현, 임상조, 김호순, 황산웅)가, 1956년 8월 29일 194km 도로사이클에서는 무려 11명의 선수들이 한꺼번에 세계신기록을 돌파했다고 보도되었다. 또 1963년 11월 29일에는 역도의 원신희 선수가 인상과 용상, 합계에서 모두 비공인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한국 최초의 올림피언 박봉식 이화여중에 재학중이던 박봉식은 원반던지기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는 기사를 통해 화제가 되며 올림픽 출전 기회를 얻었지만, 그 기사는 오보였고 올림픽에서의 성적도 초라했다. 하지만 그 오보 덕분에 한국 여성의 올림픽 진출이 조금이나마 앞당겨진 것도 사실이다. ⓒ 대한체육회

 
하지만 그 선수들 중 올림픽에서 실제로 메달권에 근접한 선수는 없었다. 박봉식은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18위에 그쳤는데, 자기 최고기록에 3미터 이상 못 미친 부진(33.80m) 때문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개인 최고기록인 37.08m가 세계신기록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직전 1936년 대회 우승자 독일의 지셀라 마우어마이어(Gisela Mauermayer)의 기록이 이미 47.63m였으며 박봉식의 기록 37.08m는 당시에 대입해도 6위에 불과했다. 또한 개최지마다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치러지는 장거리 도로 사이클 경기의 경우 애초에 '세계기록'이라는 개념 자체가 큰 의미가 없었으며 당시 한국은 육상 마라톤 코스인 42.195km를 정확히 계측할 기술조차 가지고 있지 못했다. 100km의 도로 사이클 구간 측정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무더기로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고 보도된 한국의 도로사이클 선수들은 대부분 국내 예선과는 완전히 다른 경사도와 도로환경, 거리를 달려야 했던 실제 올림픽 경기에서 완주조차도 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63년 대전고에 재학 중이던 원신희 선수의 기록은 '주니어 세계기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는 '세계신기록'이라고 표현해 결과적으로 성과를 과장했다. 그 밖에도 통산기록과 시즌기록, 주니어기록과 시니어기록, 공인기록과 비공인기록을 혼동하거나 당시의 세계기록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수 년 전의 세계기록을 넘어선 것을 두고 '세계신기록 수립'이라고 표현하는 기사들이 꽤 많았다. 그런 부정확한 보도들은 올림픽을 비롯한 국제대회 직전에 집중되었고, 대중의 기대를 한껏 부풀린 다음 무참히 깨뜨렸다.

그리고 그런 몇가지 근거가 없거나 혹은 빈약한 자신감은 1964년 올림픽을 앞두고 다시 한 번 고조되었고, 정부 역시 동조했다. 1948년과 1952년 올림픽 역도 동메달리스트이며 태릉선수촌장을 지낸 김성집 선생은 당시 정부와 체육회는 자체적으로 정부수립 이후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 증언했다. 복싱, 레슬링, 유도, 역도에서는 메달 획득이 가능하며 마라톤과 사격, 사이클은 상위권(6위 이상) 진입이 유력하고 축구, 농구, 배구, 승마, 수영도 예선 통과는 가능하다고 예상하고 있었다. 시차가 적어 선수들의 피로감이 적고 재일교포 사회의 협조 아래 친숙한 식사와 편안한 휴식을 제공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으며, 군사정변 이후 강화된 국가적인 지원 속에 경기력이 향상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도쿄 올림픽의 실패, 그리고 방향전환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그 대회에서 한국 선수단의 성적은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에 그쳤고 축구, 농구, 배구 등 국민적 관심과 기대가 높았던 구기종목들에서도 남녀를 통틀어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축구 3패, 농구 9패, 여자와 남자 배구가 각각 5패와 9패였고 육상은 마라톤 11위 이상훈 외의 전원이 중도 기권하거나 예선 탈락했다. 오히려 정부 수립도 되기 전, 혹은 전쟁 중에 참가했거나 며칠 씩 뱃멀미에 시달리며 출전했던 이전 대회들에 비해서도 부진한 성적이었던 셈이다.

특히 북한의 출전이 좌절되면서 남북대결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주최국인 일본이 16개의 금메달을 따내며 종합 3위에 올라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것과 대조되면서 국내에 전해진 충격은 더욱 컸다. 대회 직후 선수들의 집에 돌이 날아드는 일이 속출했고 한국올림픽위원회(KOC)와 대한체육회부터 축구협회, 농구협회, 배구협회, 육상연맹 등 각 경기단체들에서 임원총사퇴나 회장 사임이 이어졌다. 국회에서도 올림픽 대표팀의 부진에 대한 질타가 이어졌는데, 특히 야당 의원들은 선수단 규모에 비해 성적이 저조했다는 점과 마라톤 종목 선수들이 중도에 포기한 점, 그리고 구기종목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점을 비판했고 답변에 나선 문교부장관도 선수들의 체력과 정신력이 부족했고 정보도 부족했다며 동조하기도 했다.
 

손기정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그의 금메달은 미처 한국인들이 올림픽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이룬 기적이었고, 동시에 1992년 이전까지 올림픽 선수단 귀국 때마다 한국인 마라토너들이 고개를 들 수 없게 만든 이유였다. ⓒ 국가기록원

 
1964년 도쿄 올림픽은 스포츠에서 세계를 제패하는 모습을 통해 영광스런 민족의 미래를 앞당겨 보여주고자 했던 박정희 정권의 승부수였지만, 그 승부는 완벽한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스포츠는 여전히 경제에 비해 쉽고 빠르게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 수 있는 영역이었으며, 특히 국가대항전은 전쟁보다 안전하면서도 그 못지 않게 전국민을 하나로 결속시켜 에너지를 응집시키고 정치적 비판의식은 무마할 수 있는 매력적인 통치 전술이었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의 다음 수순은 두 가지 경로로 이어졌다. 하나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선수를 배출하기 위한 중장기 계획으로서 태릉선수촌의 건설과 과학적 훈련 방식의 도입이었고, 또 하나는 당장 혹은 단기간 내에 세계를 제패하는 모습을 연출할 수 있는 또 다른 스포츠 이벤트의 모색. 바로 프로레슬링과 프로복싱이었다.

1964년 가을 중앙정보부 요원이 일본으로 파견돼 스타 프로레슬러 김일을 접촉했고, 1965년 가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대한중석 사장 박태준에게 김기수를 지원해 세계챔피언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 그들의 무대가 될 실내체육관인 장충체육관은 1963년 2월에 개장해 준비를 마쳐두고 있었다. 1965년과 1966년, 프로레슬링과 프로복싱에서 '한국인 세계 챔피언'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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