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12 13:40최종 업데이트 22.04.12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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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윤석열 당선자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한 박보균 전 <중앙일보> 편집인은 문화정책과 어울리지 않는 역사인식을 갖고 있다. 4·19 혁명으로 쫓겨난 이승만에 관한 글을 읽어보면 그가 문체부 장관으로 과연 적절한지 생각해보게 된다.

이승만은 친일 정당인 한국민주당(한민당)의 도움을 받아 대통령이 됐다. 결국에는 한민당과 사이가 틀어졌지만, 이 연대는 이승만이 친일청산을 방해하게 된 것과 무관치 않다. 이승만은 미국의 도움도 받았다. 이는 그가 미국의 세계전략에 따라 한반도 냉전을 구축하는 데에 영향을 줬다. 그래서 한민당과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승만 정권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이다, 통찰력과 리더십으로 성취했다"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가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열린 윤석열 정부 8개 부처의 장관 후보자 인선 발표 기자회견에 참석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유성호

 
박보균 후보자는 2009년 8월 16일 자 <중앙선데이> 기사 '[박보균의 세상 탐사] 이승만과 김구를 화해시켜라'에서 김구와 이승만은 다를 바 없다는 논지를 펼쳤다. "3류 친북좌파들"은 이승만을 싫어하고 김구를 좋아하지만, 두 인물이 실상은 차별성이 별로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에서 박 후보자는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이다"라고 한 뒤 "그것은 미국의 지원 덕분이 아니다"라며 "그의 통찰력과 리더십으로 성취했다"라고 평가한다. 한민당과 미국의 지원에 의한 이승만의 집권 과정을 제대로 담지 않은 이 같은 평가는 이승만의 친일청산 방해 및 냉전 구축에 대한 정확한 평가까지 덩달아 방해할 수밖에 없다.

그런 다음, 그는 이승만 집권기를 이렇게 정리했다.
 
그는 국가의 틀을 짰고 한미동맹 성사에다가 공산주의를 막았다. 그의 선택들은 민족 번영과 국가 발전의 기반이다.

이승만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간 1948년 헌법은 제54조에서 대통령 취임선서 문구를 규정했다. "나는 국헌을 준수하며 국민의 복리를 증진하며 국가를 보위하여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에게 엄숙히 선서한다"라는 문구가 그것이다.

이 조문은 1987년에 개정된 현행 헌법에서는 제69조로 편입돼 있다. 현행 헌법 제69조에는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로 적혀 있다.


현행 헌법은 '국가 보위'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보다 앞에 뒀다. 그에 반해, 1948년 헌법은 '국민 복리'를 '국가 보위'의 앞에 배치했다. 법조문에 나오는 '국민'은 피지배층을 의미할 때가 많고, '국가'는 지배기구나 지배층을 의미할 때가 많다. 국가보다 국민을 앞에 뒀다는 점에서 1948년 헌법 제54조는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은 자기 집안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들의 일을 대신 처리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을 가장 앞에 놓고 직무에 임하는 게 당연하다. 대통령을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다. 주인인 국민들에게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우선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1948년 헌법처럼 국가보다 국민을 앞에 놓고 대통령을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박보균 후보자는 이승만이 "국가의 틀을 짰고 한미동맹 성사에다가 공산주의를 막았다"라고 평가했다. 이승만이 지배기구를 정비한 점에 우선적으로 주목한 것이다. 그런 뒤 국민과 이승만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다.
 
이승만은 말년에 독재의 과오가 있었다. 4·19 학생혁명으로 망명을 갔다. 민주화 열망이 거셀수록 이승만의 실책만 비춰졌다.
 
이승만은 주인인 국민들에게 죄를 지어 4·19라는 국민적 심판을 받게 됐는데도 그 심판을 피해 하와이로 망명했다. 이처럼 국민들에게 큰 죄를 지었는데도, 박 후보자는 '말년에 독재의 과오가 있었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그런 뒤 민주화 열망으로 인해 "이승만의 실책만 비춰졌다"라고 언급했다. 국민들에 대한 범죄만큼 중요한 죄악이 없는데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처리한 것이다.

뉴라이트 관점과 매우 유사

이승만은 1952년 발췌개헌 및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국민을 배반하고 독재의 길로 들어섰다. 국회 간선제로는 장기집권을 이어갈 수 없는 현실을 타파하고자 한국전쟁 와중에 헌법을 바꿔 직선제를 관철했고, 대한민국 정부 하의 초대 대통령인 자신에 한해서만 대통령직을 3연임할 수 있도록 했다.

이승만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재임했다. 1952년부터 독재정치가 본격화됐으므로 "말년에 독재의 과오가 있었다"가 아니라 '초반부터 독재의 과오를 범했다'로 서술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박보균 후보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국민'보다 '국가'를 앞세우는 관점에 입각해 이승만의 정치를 미화했다.

이 같은 편향된 시각은 2013년 9월호 <한국논단>에 실린 '이영훈 교수의 새로운 대한민국사' 제6편을 떠올리게 만든다.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를 지내고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과 이승만학당 교장을 맡고 있는 이영훈 교수는 대표적인 뉴라이트 학자다.

이영훈 교수 역시 발췌개헌·사사오입 개헌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이영훈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신생 독립국들 중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된 나라는 별로 없다면서 "1950년대의 한국 정치에 대해서는 민주냐 독재냐의 이분법적 시각을 떠나 이 같은 비교정치의 시각에서 공정하게 접근하고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한다. 이승만이 독재자인지 아닌지는 여타 신생국들과의 비교·대조를 통해 재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뒤 이승만 독재를 '권위주의 정치체제의 성립 과정'이라는 말로 모호하게 평가했다.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과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을 거치면서 한국의 권위주의 정치체제가 성립하였다"라고 한 뒤 "그것에는 신생국들이 겪게 마련인 정치체제와 어려운 국가상황 간의 타협이라는 역사적 의미도 게재되어 있다"라고 변호한다.

이영훈 교수는 이승만의 권위주의 정치가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고 합리화한다. "이승만은 국민 일반이 자발적으로 수용한 거대한 카리스마였다"는 말로 그 독재를 합리화한다. 당시 국민들이 "못 살겠다! 갈아보자!"며 이승만 퇴진을 촉구한 사실을 무색게 하는 궤변이다.

이영훈 교수는 이승만의 불법적인 직선제 개헌을 두고도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 세력은 대통령 직선제의 쟁취를 최고의 목표로 삼았으며 결국 1987년에 성취하였다"라고 말한다. 이승만이 추구한 직선제와 민주화 세력이 추구한 직선제가 엄연히 다르다는 점을 무시한 것이다.

이처럼 이승만 독재를 미화한 이영훈 교수는 1956년부터 이승만 체제의 경직화 조짐이 나타나더니 1950년대 후반부터 이승만 개인 숭배가 강해졌고 이것이 1960년의 정권 몰락으로 연결됐다고 정리한다. 이승만 정권이 말년의 체제 경직화 때문에 몰락했다는 식으로 서술한 것이다. 이승만 독재를 말년의 현상으로 축소하는 박보균 후보자의 역사인식과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국가를 국민보다 앞자리에... 국민에 대한 범죄 대수롭지 않게 취급
   

발췌개헌안에 서명하는 이승만 (1952년 7월 7일) 물리력까지 동원한 끝에 개헌을 이루어낸 이승만 대통령은, 훗날 영구집권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까지 불사하게 된다. ⓒ 국회기록보존소

 
국민보다 국가를 앞세우는 박 후보자의 가치관은 이명박 대통령의 8·15 경축사를 평가한 2008년 8월 17일 자 <중앙선데이> '[박보균의 세상 탐사] 8·15 식장에서 역대 대통령 이름을 외쳤어야'에서도 표현된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 대통령은 '기적의 역사를 쓴 주인공은 국민'이라고 말했다. 옳은 평가다. 하지만 전체를 아우르지 못했다. 현대사 업적은 국민 역량만으로 쌓은 게 아니다. (중략) 국민을 내세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국민만을 되풀이 강조하면 연설의 힘은 떨어지고 공허해진다.
 
그런 뒤 "이 대통령은 9명의 대통령을 거명하고 기억했어야 한다"라면서 "이승만의 건국과 공산 침략 방어" 등을 거론했어야 했다고 안타까워한다.

이승만에 대한 그의 애착은 진보 진영을 겨냥한 2019년 1월 3일 자 <중앙일보> 기사 "문재인의 '대한민국 100년' 원조는 이승만이다"에서도 확인된다. 진보 진영이 김구뿐 아니라 이승만도 재평가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이 글은 "둘은 임정의 최고 지도자다"라며 "첫 지도자(초대 대통령)는 이승만, 마지막(주석)은 김구"였다고 말한다.

그런 뒤 "둘은 형님·아우님이었다. 이승만(1875년 생)이 한 살 많다"라고 서열 관계를 정리한다. 이승만이 임시 대통령 책임을 방기해 1925년 3월 11일 임시정부에서 탄핵받은 사실을 무시한 채 이승만을 '임정의 최고 지도자'로 높이 평가한 것이다.

1995년 12월 국회에서 채택된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진상 국회 조사보고서>는 '백범 암살은 정권 차원의 범죄'라는 최종 결론을 내렸다. 김구 암살이 이승만 정권의 범죄라는 점이 이렇게 이미 오래전에 규명됐는데도 박 후보자는 "둘은 임정의 최고 지도자", "둘은 형님·아우님이었다. 이승만이 한 살 많다"라고 말했다.

위 기사에서 박 후보자는 "백범은 이승만 정권 내 충성 분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라고 말했다. 이승만 추종자들의 과잉 충성이 백범 암살을 낳은 것처럼 서술한 것이다. 이승만의 죄악을 '톤 다운'시키는 그의 심리적 경향을 여기서도 읽을 수 있다.

이승만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1960년 4월 19일에 끝났다. 이미 오래전에 국민적 단죄를 받고 이른 새벽 하와이로 도주한 이승만을 박보균 문체부 장관 후보자는 높이 평가했다. 시대에 뒤처져도 한참 뒤처지는 역사인식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국민보다 국가를 앞자리에 놓고 국민에 대한 범죄를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는 그의 역사인식이 너무 무섭다. 그가 대한민국 문화정책을 관장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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