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08 06:20최종 업데이트 22.04.08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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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프로이센에서 커피 로스팅은 국가만이 할 수 있었다. 세금을 걷기 위해서였다. 불법 로스팅을 단속하기 위해 냄새를 맡고 다니는 '스니퍼'라는 직업이 있을 정도였다(관련기사: 정확히 60개 커피콩 갈아 커피 한 잔 마신 베토벤 http://omn.kr/1v8lu).

비슷하게 우리나라에는 '술조사'라는 것이 있었다. 사전에도 나오는 이 말은 "몰래 담근 술과 관련된 행위에 대해 조사하는 일"을 일컫는다. 1966년부터 1977년까지 술을 가정에서 담그는 것이 불법이었다. 세무서에서 나오는 술조사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마을에 들이닥치기 일쑤였고, 술조사가 나온다는 소문이 돌면 사람들은 술항아리를 여기저기 숨기고, 땅에 묻기에 분주하였다. 아예 집을 걸어 잠그고 피신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걸리면 술도 빼앗기지만 벌금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양곡관리법'이 단속의 근거였다. 그러나 아무리 법으로 금지를 해도 제사나 차례 때 사용해야 할 술이었고, 농사로 힘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술이었다. 관습과 의례를 하루아침에 법으로 다스리겠다는 것이 무모한 짓이었다. 식량부족을 핑계로 무식한 정치인들이 벌였던 역사 속 촌극이었다.

불가사의한 시대

역사적으로 금주 운동이나 금주법 제정이 추진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전쟁이나 곡물 부족이 공통된 원인이었다.

미국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금주법(National Prohibition Act) 제정을 둘러싼 논쟁이 뜨거웠다. 다수당이던 공화당 소속 앤드류 볼스테드(Andrew Volstead) 의원이 주도하여 통과시킨 법에 대해 민주당 출신 윌슨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이를 의회가 1919년 10월 28일에 재의결함으로써 1920년 1월에 법이 시행되었다.

와인과 맥주를 포함해서 0.5% 이상의 알코올이 함유된 모든 주류의 제조와 판매가 금지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곡물 부족을 극복하기 위한 선의로 출발한 금주 운동은 적대국인 독일의 음료 맥주에 대한 반감, 경건한 삶을 강조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주장, 심지어는 과음으로 가정폭력을 일삼던 남편들에 대한 주부들의 불만 등이 결합하여 금주법을 탄생시켰다. 노동자들의 과음으로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한 산업자본가들도 지지하였다.
 

밀주를 단속하는 디트로이트 시 경찰국 직원들 ⓒ Wikipedia Public Domain

 
금주법의 시행과 함께 재즈의 시대, 광란의 1920년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법은 법이고, 현실은 현실인 것. 몰래 술을 만드는 밀조, 몰래 술을 거래하는 밀매가 성행하였고 이를 둘러싼 갱단들의 폭력이 도시를 어지럽혔다. 유명한 알 카포네의 마피아 전성시대가 도래하였다. 술은 불법이었는데 술꾼은 거리에 넘치던 이상한 시대였다. 술은 불법인데 음주운전이 증가하였고, 술은 불법인데 알코올 중독 사망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난 불가사의한 시대가 1920년대 미국이었다.

금주법으로 이익을 본 것은 마피아만이 아니었다. 코카콜라, 포도주스 웰치스, 그리고 커피가 술 대용품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코카콜라는 겨울철 매출을 늘리기 위해 산타클로스가 콜라 마시는 장면이 담긴 광고를 시작하였다. 이 광고로 코카콜라 매출은 급성장하였고, 빨간 옷을 입은 산타클로스 이미지는 대중화되었다.

성찬식 용 와인이 예외적으로 제조와 유통이 허용돼 기독교 인구의 증가를 가져온 것도 흥미로운 결과였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크리스마스이브에 교회등록증을 지닌 사람에게만 야간통행금지 조치를 적용하지 않자 등록 교인 수가 증가하였던 것과 비슷한 일이다.

술의 빈자리 대체한 커피

술이 없는 세상에서 코카콜라와 광고 경쟁, 시장 경쟁을 격렬하게 벌인 것이 다름 아닌 커피였다. 결과적으로 콜라와 커피의 대중화 속도가 빨라졌다. 술집이 있던 자리에 카페가 등장하였고, 음식점의 디저트 목록에 커피가 처음으로 나타났다. 금주법으로 생긴 술 시장의 공백을 대체한 식품 중 대표적인 것이 커피였다.

커피 소비를 확산시키는 데 과학자들도 동원되었다. MIT 교수로서 식품과학 분야에서 명성이 자자하였던 새뮤얼 C. 프레스콧(Samuel C. Prescott)은 전미 커피 로스팅업 협회의 의뢰를 받아 3년간 커피의 유해성 여부를 연구한 끝에 1924년에 그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는 커피가 "성인 대부분에게 안전한 음료"라고 과학의 이름으로 선언하였다. 커피유해론자들의 목소리를 잠재운 발표였다.

인간의 행동은 얼마든지 조작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이론을 정립하여 행동주의 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존 B. 왓슨(John B. Watson)은 존스홉킨스 대학의 교수직을 그만두고 1921년에 광고회사 JWT에 입사하여 행동주의 심리학적 기법을 광고에 적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회사에 입사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부사장에 오른 왓슨은 자신이 맡았던 맥스웰하우스 커피 광고를 기획하며 커피 브레이크(coffee break)라는 개념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커피 브레이크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과 관련해서는 몇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19세기 후반 미국의 위스콘신주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이다. 마차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르웨이 이민자들이 많이 살던 스토턴(Stoughton)이란 도시에 담배농장이 생겼다. 수확 시즌에 일손이 필요했던 담배 농장주들은 해결책을 고민하였다. 결국 주로 남자였던 마차 공장 노동자들의 아내들에게 담배농장에서 일할 것을 요청하였다.

부인들은 오전과 오후에 한 번씩 집안일을 하러 집에 다녀오는 것을 허용한다면 담배 수확하는 일을 도울 수 있다는 제안을 하였다. 뜨거운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정도의 시간을 달라는 주장이었고, 이것이 받아들여진 것이 커피 브레이크의 탄생이라는 이야기이다. 지금도 스토턴에서는 커피 브레이크 탄생을 기념하는 일명 '커피 브레이크 축제'가 열린다.

커피 브레이크를 공식적으로 도입한 때는 1902년이었고 지역은 미국 뉴욕주 버펄로 시였다. 라킨(Larkin)이라는 비누회사와 바콜로(Barcolo)라는 철물 제작회사였다. 어느 회사가 먼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두 회사가 종업원들에게 오전과 오후 지정된 시간에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을 부여하였다.

영국에서 티 브레이크(Tea Break)가 생긴 것은 1900년대 초 영국 정부가 심리학자 켄트(A. F. Stanley Kent)에게 산업 피로에 대한 조사를 의뢰한 것이 계기였다. 켄트는 산업 피로가 주는 재해 증가와 생산성 저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휴식 시간이 필요하다는 제안을 하였고, 이것이 티 브레이크를 제도화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티 브레이크는 커피 브레이크로 발전하였다.

"당신 스스로에게 커피 브레이크를"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즈음에 이렇게 등장한 커피 브레이크 개념이 왓슨의 맥스웰하우스 광고를 타고 미국 직장 문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1920년대의 커피 소비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물론 당시 커피 브레이크라는 풍습이 요즘처럼 거의 모든 형태의 직장에 두루 적용되지는 않았다.

커피 브레이크가 완벽한 미국 직장 문화가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50년대 초였다. 1952년 범미주커피협회가 "당신 스스로에게 커피 브레이크를 주세요. 그래서 커피가 주는 혜택을 누리세요(Give yourself a Coffee-Break — and Get What Coffee Gives to You)"라는 커피 소비 촉진 광고를 대대적으로 전개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를 전후해 커피 브레이크는 대부분의 일터에서 노사 간에 체결하는 협약문에 반드시 들어가는 용어가 되었다. 노동자들이 누려야 하는 작은 기본권의 상징이 된 것이다.
 

커피 브레이크 광고 ⓒ flying cork

 
금주법의 영향 그리고 커피 브레이크 광고 덕분에 1920년대 중반에 드디어 미국인 1인당 커피 소비량은 연 6킬로그램을 넘어섰고, 18세기 유럽의 파리나 빈처럼 커피하우스가 미국 대도시를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대형 마켓에는 저렴한 커피 원두들이 넘쳤다. 미국인들은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일을 하다 지치면 큰 머그에 채워진 따듯한 커피를 들고 사무실이나 휴게실을 서성이면서 커피 브레이크라는 새로운 문화를 자유롭게 즐기기 시작하였다.

북유럽 국가에서는 커피 브레이크 이상의 일터 휴식 문화인 피카(Fika) 혹은 휘게(Hygge)의 중심에 커피가 자리를 잡았다. 1920년대 10년 동안 늘어나는 소비 붐을 타고 커피 재배가 가능한 모든 나라들이 경쟁적으로 커피 재배를 확대하여 나갔다. 중남미, 아프리카 그리고 동남아시아 지역이 커피 생산을 확대하는 것만큼 커피 소비가 다시 늘어나는 선순환의 시간이었다. 법 만능주의자들의 오만과 오판이 만든 1920년대 미국의 혼란 속에서 탄생한 것은 폭력 집단 마피아와 새로운 문화 커피 브레이크였다. 

1932년 선거에서 금주법 폐지를 공약으로 내건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듬해에 금주법은 폐지되었다. 경제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술에서 이득을 취하는 주체가 마피아가 아니라 국가여야 한다는 여론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 미국의 경우 술을 대하는 태도에서 여론, 마피아, 국가권력 간에 차이는 없었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 푸른역사.
Marie Nadine Antol(2002). Confessions of a Coffee Bean: the Complete Guide to Coffee Cuisine. N. Y. :Square One Publisher.
Mark Pendergrast(2010). Uncommon Grounds: The History of Coffee and How it Transformed our World. N. Y.: Basic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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