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17 06:08최종 업데이트 22.07.2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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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이주자는 살아 숨 쉬는 자인가. 존 버거는 <제7의 인간>에서 이들을 가리켜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라 했다. 오직 노동하는 몸으로 기능하기를 요구받고, 표류함이 당연시 여겨지고, 존재할 권리를 국가의 허락에 구해야 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와 난민의 현주소이다. 체류권을 '허가'받은 이주민들조차 한국 사회의 성원권을 제대로 획득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국가는 잔혹하고, 사회는 무심하다. 그럼에도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일. 한국사회에서 살아 숨 쉬는 이주민들의 삶을 르포르타주로 담고자 한다.[편집자말]
인터뷰 요청을 하고 처음 전화 통화를 했을 때였다. 전화기 너머에서 쏟아지던 한국어를 자르고 조심스럽게 던진 나의 질문은 "몽골분이라고 들었는데 혹시 한국분이세요?"였다. 공동체 당사자 운동가인 몽골 여성을 소개받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며 다시 인터뷰이를 수소문할 각오를 한 내게 그가 답했다. "몽골 사람 맞습니다."

2019년 250만 명에 육박하던 체류 외국인은 2021년 11월 말 현재 197만여 명으로 감소했다(법무부 발간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 이하 동일). 감염병의 위세가 확인되는 부분일 터이다. 몽골인의 경우 2019년 12만 명 가까이 되던 입국자 숫자가 작년에는 5천1백여 명(11월까지)으로 확연히 감소했다. 2021년 11월 현재 국내 체류 몽골인은 약 3만9천 명. 2019년의 4만8천여 명에서 1만 명 가까이 감소했다.


이주민의 전체 규모를 감안한다면 국내 거주 몽골인의 규모는 크지 않은 편이다. 그럼에도 몽골 기준으로 가장 많이 이주해간 국가는 대한민국이다. 국내 체류자 규모는 몽골 전체 인구의 1퍼센트가 넘는다. 시소는 여기에서부터 기울어져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국적별 국내 체류 외국인 수 9번째이면서도 단기체류자 수는 5번째인 통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 상태에서 단기체류의 비율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불안정한 상태의 몽골인들이 많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렁거스, 무지개의 나라

1924년 구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던 몽골은 이후 사회주의 체제를 거쳐 1980년대 중반 시장경제 체제와 민주화를 통해 아시아의 사회주의 국가 중 최초로 탈사회주의 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도한나씨는 그 시절의 변혁과 활기를 먹고 자란 세대이다. 그가 성인이 되던 2002년, 한국에서 월드컵이 개최되었고 몽골의 청춘은 '다이내믹 코리아'를 향했다. 몽골에서는 한국을 '설렁거스'라고 일컬었다. '무지개의 나라'라는 뜻이다.

"그 뜨거운 열기에 압도당했습니다. 반했어요. 관광으로 왔다가 몽골로 돌아간 후 준비를 마치고 다음 해 다시 입국했지요. 한국에서 살면서 연애도 결혼도 했고 현재는 고등학생 아이가 있습니다."

삶의 터전을 이 땅으로 옮긴 것이다. 1년여 전 귀화한 그는 몽골인이면서 한국인이다. 성장기를 제외한 기간을 오롯이 한국에서 살았다. 그는 지금 (사)노동인권회관 부설 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의 상근 노동자이다. 상담사로 주로 일하고 있으며 통·번역 및 문화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의 일은 2012년부터 하기 시작했으니 햇수로 11년째다.
 

도한나씨는 한국 이주 16년차로 한국의 매력에 반해 이주했다. 몽골이름은 나랑토야. 도씨 성은 아버지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따왔다고 한다. ⓒ 이경란

 
이주민 공동체 당사자 운동가 인터뷰라는 목적을 갖고 만나지 않았더라면 평범한 직장 여성, 학부모, 살가운 이웃으로 인식했을 터이다. 언어도 외모도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쌓인다고 모든 이주민들이 선주민과 동등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똑같은 몽고반점을 갖고 태어난다고 선주민인 우리가 몽골인들을 우리의 가족, 친지들과 동일한 감각으로 대하게 될까. 어쩌면 선주민과 이주민 사이에 선을 긋고 이런 점검을 하는 것조차 위험한 발상은 아닐까. 우리가 구별이라 변명하는 차별은 여기에서 배태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추방 공포

2012년 10월 1일 밤 몽골인 이주노동자의 자녀인 고교생 K가 한국 청소년들과 몽골 청소년 간의 싸움을 말리다 참고인 자격으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고 미등록자임이 드러나 10월 5일 강제추방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 수갑이 채워지기도 한 그는 교육을 받을 권리, 부모와 분리되지 않을 권리를 가진 미성년이었다. 대한민국정부가 1991년 비준하여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획득한 유엔아동권리협약의 제2조 비차별의 원칙, 제3조 아동이익 최선의 원칙은 그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그는 비자가 없다는 이유로 부모와 강제로 격리되어 혼자 한국에서 쫓겨났다.

2010년 12월 국가인권위원회는 아동들의 보호규정을 마련할 것, 초중고 재학 중인 아동의 경우 비자가 없어도 강제추방을 유예할 수 있는 규정을 마련할 것을 권고하였다. 다음해 6월 법무부는 이를 전면 수용하여 '비자 없는 아동의 체류를 허용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도 K는 무슨 근거로 추방당했을까. 당시 인권단체 회원들로 구성된 '추방학생 대책회의'는 K의 재입국 허용과 재발 방지를 강력하게 촉구하였다. 그러나 사건 이후 몽골에서 힘든 시간을 보낸 K는 2014년 대학에 입학할 때가 되어서야 유학생 비자를 발급받아 재입국할 수 있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취업비자 E7으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몽골인 이주노동자 자녀인 고교생 K의 추방을 규탄하는 기자회견. ⓒ 고기복

 
유학생 비자 D2로 입국했다가 구직활동 비자인 D10으로 갱신하고 체류 중이던 몽골인 청년 P의 경우를 보자. 지난해 10월 그는 횡단보도 적색 신호에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보험사, 경찰에 접수된 사건이었고 도한나씨가 상담을 맡았다.

"한국어는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법을 잘 몰랐습니다. 경찰에 접수되니까 겁을 냈던 것 같아요.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체류에 문제가 생길까봐 빨리 마무리하고 싶어 하더군요. 불안이 가장 큰 걸림돌이에요."

아주 작은 문제로도 쫓겨날 수 있다는 불안감은 이주민들을 어눌한 사람으로 만든다. 정확한 법 조항과 그 의미를 알기 어렵기 때문에 두려워지고, 쫓겨나는 사람들의 선례를 보고 들으면서 두려움은 증폭된다. 법의 힘은 강하고 경험은 구체적 공포를 낳는다. P는 응분의 보상을 포기하면서 사건이 서둘러 종결되기만을 바랐다. 교통 법규를 위반했기 때문에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같은 경우 선주민들은 제대로 된 치료와 보상이라는 다른 경험에 기댔을 것이다.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불거질지도 모르는 차별에 대한 불안이 그에게 불리한 선택을 강요한 셈이다.

누가 죽어도 바뀌지 않는

최근 몽골인 단기비자 체류자들은 더욱 불안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감염병이 창궐하면서 항공편이 여의치 않아 출국 희망자들도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3개월 관광 비자로 들어와 기간을 넘긴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월 1회씩 체류 기간을 연장해 왔다. 그런 상태로 1년을 넘긴 사람도 있다. 문제는 연장된 체류 기간 동안 생계를 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남성들은 주로 건설 노동이나 이삿짐센터의 일을 합니다. 여성의 경우에는 청소 노동이나 식당 노동을 하지요. 모두 임시직입니다. 애초부터 비전문취업 비자인 E9나 전문취업 비자인 E7과는 처우가 달라요. 이들은 1년 자동연장이 되었습니다."

체류 자격과 고용 형태가 불안정할수록 문제도 많이 발생한다. 도한나씨는 거의 매일 비슷한 내용의 전화를 받는다. 국제결혼 등의 법률상담도 있지만 최근의 상담 내용은 주로 임금 체불과 퇴직금 관련이다. 들어주고 조언하는 데에 그칠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에 그가 해결할 수 없는 사건은 그 분야의 전문가인 변호사나 법무사에게 연결한다. 자원봉사자들이다.

"상담 목적은 문제 해결입니다. 예를 들면 이주노동자가 납입한 외국인 출국만기보험금을 퇴직금 전액이라고 속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돈은 출국 때 수령할 수 있고 퇴직금과 차액이 발생하면 고용인이 지급해야 하는 거예요. 이주민들은 심지어 퇴직금이 발생했는지 모르는 경우도 있어요. 또는 퇴직금을 정산해서 받았는데 금액이 틀려요. 가령 50만 원을 덜 받았다고 우리가 항의를 하면 30만 원만 주고 말아요. 거듭 항의를 하고 조목조목 따져야 받아낼 수 있지요. 임금의 경우에도 본인이 출퇴근 시간대를 기록한 것을 근거로 받아내기도 하고요."

언어도 유창하지 못하고 부당함과 불합리를 겪어온 이주민들이 이런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기란 지난한 일이다. 수많은 한국인 노동자들이 조합을 설립하고 노동운동을 하면서 완강한 벽에 부딪히는 현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누가 죽어야 바뀌거나 죽어도 바뀌지 않는 열악한 현실. 도한나씨의 활동은 그래서 사각의 사각 지대에서 도전하고 부딪치는 일이다.

"처음에는 언어가 가장 어려웠습니다. 지금도 어렵지요. 한국어는 너무 어려워요. 하지만 제게 더 어려운 부분은 법률입니다. 계속 바뀌는 법 조항을 이해하고 숙지하는 것이 만만치 않아요. 법률용어, 특히 인권침해와 관련된 단어를 해석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일상어가 아니기 때문에 조심스럽죠. 법 조항이 바뀌면 제도도 바뀝니다. 이걸 놓치면 안 되고 계속 따라잡으면서 이주민들에게 정보도 제공해 드려야 되거든요. 의료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문적인 용어가 많아서 환자에게 제대로 통역해 주기가 어려워요."

통역과 문제 해결이 일상이 되는 삶. 도한나씨는 먼저 이주한 사람으로서 길을 개척하고 후에 온 사람들이 넘어질 때 일으켜주는 자라고 자신을 인식한다. 이주 10년이 넘으면서부터 한국 국민이라는 자각도 강해졌다. 그러나 그의 자부심과 의지를 흔드는 아픈 일들은 끊이지 않는다.

무지, 혐오, 폭력은 하나의 고리

지난 7월 경남 양산의 몽골 국적 여중생이 또래 여중생 4명으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하고 그 영상이 유포된 사건이 12월 뒤늦게 화제가 되었다. 가해자들은 속옷 차림인 피해자의 손과 다리를 묶고 뺨을 때렸고 술과 담배꽁초를 강제로 먹였다. 사건 당시 관련 신고가 3건 있었고 피해 학생이 다음날 피해 사실을 경찰에 호소했다. 조사는 한 달 후에 이루어졌다. 피해 학생은 영상 유포 혐의도 주장했으나 경찰은 이들에게 폭행 혐의만 적용했다.

사건이 부각되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외국국적 여중생을 묶고 6시간 가학적 집단폭행한 가해자 4명 강력처벌·신상공개를 촉구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원이 올랐고 답변 기준인 20만 명 이상의 동의를 받은 상태이다. 인권위는 경찰과 학교의 초동조치가 적정했는지 직권으로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주한몽골여성총연맹에서 거듭 항의 집회를 열고 호소한 이후였다.

12월, 몽골의 울란바토르에서 호텔에 근무하는 한국인 남성이 5명의 몽골인들에게 '묻지마 폭행'을 당한 사건이 보도되었다. 몽골 국영방송 등의 현지 매체들이 양산 여중생 사건을 보도한 며칠 후였다. 범행 동기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각 언론은 보복 범행으로 의심하는 기사를 내놓았다.
 

지난 7월 경남 양산의 몽골 국적 여중생이 또래 여중생 4명으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하고 그 영상이 유포된 사건이 12월 뒤늦게 화제가 되었다. 관련 뉴스를 보도하는 MBN 뉴스 화면. ⓒ MBN

 
두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대처해야 할지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1월 양산 여중생 사건에 대해 교육당국이 제대로 절차를 밟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학폭위는 피해 학생을 배제하고 열렸고 가해 학생들은 사회봉사 처분만을 받았다. 피해 학생은 학폭위가 열린 사실조차 몰랐다고 전해졌다. 등기우편으로 학폭위 개최를 알렸으나 우편물이 반송되었다.

사건 담당 수사관이 한 달 만에 진정서를 반려한 사실도 드러났다. 수사관은 피해 학생 부모의 동의를 얻었다고 했으나 가족 측의 주장은 달랐다. 한국어에 서툰 이주민 가족에게 이 절차는 정당했는가. 도한나씨의 다음 설명은 그래서 더욱 중요해진다.

"2021년 통계청과 여성가족부가 작성한 청소년 통계에 의하면 전체 초중고생 535만 6천 명 중 다문화가정의 학생은 2.8%입니다. 장기적으로는 꾸준한 증가세이고요. 아이들이 학업을 잘 못 따라가는 경우가 많아요. 학교 수업만으로는 어려운 현실에서 경제적 이유로 사교육이 쉽지 않지요. 그렇게 되면 친구들과의 소통도 힘들어집니다. 교사들이 학생들과의 소통 이외에 학부모와의 소통에도 노력해주기를 바랍니다. 가정통신문 하나도 이주민들에게는 어려운 과제가 됩니다."

실제로 이주민 학부모의 경우 가정통신문을 사진으로 찍어 그에게 보내오기도 한다. 글자는 읽어도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손 글씨일 경우 해독 자체가 어려워서이기도 하다. 통신문을 번역해서 답을 작성해주면 글자를 베껴 그리다시피 해서 학교나 어린이집으로 회신을 하는 형편이다. 이런 문제들을 사소하게 넘길 수 있을까. 우리는 자녀교육을 사소하게 여겨왔던가.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야 하는데 대기자가 많습니다. 당장 일하러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는 거지요. 신청서류를 작성하는 데도 곤란을 겪습니다. 원장을 대신 만나고 통화를 대신해주기도 하지요. 하지만 미등록의 경우에는 대기 명단에 올리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물론 교회 부설기관이나 민간어린이집도 있겠지요. 그쪽은 원비가 더 비쌉니다. 외국인은 국공립이든 민간시설이든 정부지원을 못 받아요. 다행히 최근에는 일부 지역에서 보육료 지원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어린이집을 거치고 초등학생이 되면 다문화 인권수업을 받기도 한다. 이주민 자녀들만 따로 문화체험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도한나씨는 인권수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아이들이 무심코 던지는 말이 상처가 되고 이런 무지와 무관심이 쌓이고 굳으면 차별과 혐오,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도한나씨는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은 사람이었다. 입국해서 자신이 체험한 고난과 그를 이겨내고 일구어낸 상대적 안정보다는, 나중에 온 이들의 어려움을 말하고 싶어 했고, 이 땅에 뿌리내리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했다. 두 시간 가량 이어진 인터뷰의 말미에 본인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이주민으로서 지금 당면한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아이가 이제 입시생이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어려워요. 다문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사교육에 매달렸지요. 아이가 학원을 쉬고 싶대요. '뺑뺑이 돌린 돈이 아깝다, 계속 다녀라'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제가 입시 정보에 자신이 없어서였어요."

결국 학원을 그만둔 아이의 얼굴이 밝아진 것을 보고서야 머리가 굵어진 아이에게 강요는 나쁜 약임을 그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이 땅의 선주민 엄마들과 같은 깨달음이었고, 그는 한 번 더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음을 확인했을지도 모른다.

본인이 지향하는 공동체는 몽골이냐 한국이냐, 짓궂은 농담이었던 마지막 질문에 그가 조용하게 미소를 지었다. 답은 인터뷰 후 보충 자료를 보내온 소포에 담겨 있었다. 상자 안에는 <미등록 이주아동의 체류권 실태조사 보고서>((사)한국이주민건강협회 발행)라는 책자와 함께 차곡차곡 정리되어 묶인 마스크 수십 개와 다섯 통의 손 세정제가 들어 있었다. 인터뷰 장소였던 그의 일터 한쪽에 천장까지 높게 쌓아올려진 상자들의 압축판이었다.
 

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 사무실에 쌓여 있는 코로나 방역물품. 한국의 몽골인 단체에서 십시일반으로 모은 것으로 몽골로 보낼 예정이다. ⓒ 이경란

 

이주노동자의 안전한 노동을 위한 안내책자도 제작 배포하고 있다. 한글과 외국어로 함께 쓰인 책자의 서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어느 업체에서도 이주노동자의 안전한 노동을 위해 안전장치설치나 작업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또한 이들을 작업에 투입하기 전에 안전교육이나 안전한 작업을 위한 한국어 교육을 충분히 시키는 경우가 없다. 산업기술연수생이나 고용허가제로 입국하는 경우에도 불과 3일간의 한국어 교육만 시킨 채 산업현장에 투입한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그나마의 교육도 없이 작업에 투입된다." ⓒ 이경란

 
상자들은 몽골로 보내기 위해 이주민들이 정성을 모은 방역 물품들이었다. 스무 개 가량 결성되어 있는 몽골인 커뮤니티가 결속한 구체적 증거. 그것이 선주민인 이웃에게까지 흘러온 것이다.

개봉한 상자를 앞에 두고 속절없이 시인 이성부의 <벼> 중 몇 구절을 중얼거렸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기대고 산다/햇살 따가워질수록/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덧붙이는 글 <이주민 르포 :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사람들>은 '익천문화재단 길동무'와 <오마이뉴스> 공동 기획으로 2021년부터 진행되고 있습니다. 익천문화재단 길동무는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심화 발전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한 소박한 일들에 힘을 보태기 위해 김판수·염무웅 선생님, 송경동 시인, 민변 조영선 회장, 김소연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운영위원장 등의 발의와 참여로 만들어졌습니다. '길동무 청년문학학교', '길동무문학·예술창작기금', '한국사회기층문화보고' 등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gildongmu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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