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10 14:22최종 업데이트 22.07.2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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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이주자는 살아 숨 쉬는 자인가. 존 버거는 <제7의 인간>에서 이들을 가리켜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라 했다. 오직 노동하는 몸으로 기능하기를 요구받고, 표류함이 당연시 여겨지고, 존재할 권리를 국가의 허락에 구해야 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와 난민의 현주소이다. 체류권을 '허가'받은 이주민들조차 한국 사회의 성원권을 제대로 획득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국가는 잔혹하고, 사회는 무심하다. 그럼에도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일. 한국사회에서 살아 숨 쉬는 이주민들의 삶을 르포르타주로 담고자 한다.[편집자말]
"1998년이라고요?"

나는 마스크 밖으로 나온 조이의 눈을 보며 소리를 높였다. 내 반응에 놀란 조이의 눈이 더 동그래졌다. 1998년이라니. IMF로 환율은 폭등했고 굳건한 생업을 가진 자들의 삶이 너나없이 흔들렸고 빈털터리로 거리에 나 앉는 사람이 드물지 않았던 그 해, 나는 한국을 떠났고 그는 한국으로 왔다. 그로부터 24년 동안 스물넷의 방글라데시 청년 조이는 서울 언저리에서 나는 밴쿠버 언저리에서 이주민의 삶을 살았다.


2021년 겨울이 시작되던 즈음, 우리는 인터뷰이와 인터뷰어로 마주 앉았다. 미등록 이주자로 건너온 그는 지난한 세월을 거쳐 이주민 복지를 위한 상담과 통역 일을 하고 있었고, 캐나다로 독립이민을 간 나는 오랜 이국 생활에 지쳐 한국에 머물며 소설을 쓰고 있었다.

"저도 외국인이에요."

캐나다 여권으로 입국을 했고, 외국인 등록증을 만들어 주민증 대신 사용하고, 한국인만을 보호하는 제도와 혜택에서 멀어진 내 처지를 자조해서 한 말이었지만 그의 경계를 풀어주자는 마음도 없진 않았다. 그는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엷게 웃었다. 아무래도 내가 같은 처지로 보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한국에는 두 종류의 외국인이 있어요. 미국인과 다문화라 불리는 저희들이요. 피부가 희고 영어를 사용하는 그들은 귀한 손님 대접을 받죠. 저희 같은 이주자들은 가난한 조국을 떠나 돈을 좇아온 노동자로만 생각해요. 어디에서든 두 분류는 구별되고 차별당합니다. 마트에만 가도 대접이 달라요."

"왜 이곳으로 오게 되었나요?"

인터뷰가 무르익을 즈음 나는 망설이던 질문을 했다. 캐나다에서 내가 그들에게 자주 받던 질문이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내 머릿속은 얼마간의 혼란과 회한이 들어차곤 했었다. 왜 고국을 떠났는지. 왜 하필 그게 캐나다인지를 묻는 질문이었겠으나, 나는 늘 그 말 속에서 어리석음을 탓하는 질책과 네가 선택한 길이니 네가 책임지라는 차가운 시선을 느끼곤 했다. 그 질문을 내가 조이에게 했다. 공격적으로 보이지 않게 애를 써보았지만 조이의 얼굴은 복잡해졌다.

"그냥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었어요. 대학을 다니다가 싱가포르로 공부를 하러 갔는데요. 그 경험이 너무 좋았거든요. 방글라데시에서 대학을 다닐 때, 정부의 정책에 불만이 많았어요. 그 때문에 부모님도 늘 아슬아슬하게 생각했고요. 무엇보다 더 넓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아보자 했죠. 그때 제가 생각했던 최고의 나라가 한국이었어요."

그도 나와 다르지 않은 이유로 고국을 떠났다. 그도 나만큼 나이브했다. 고국을 떠나 사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 대신 상상하지 못했던 자유를 잃는 것이란 걸 그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한국에서 산다는 것

1998년 11월 조이는 관광비자로 한국에 들어왔다. 내국인도 일거리가 없던 IMF 시절이었지만 그는 그 사실을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야 알았다. 유색인종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길에서 대놓고 욕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곧 겨울이 되었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추위였다. 한국만 도착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방글라데시에서 월급 20만 원을 받던 시절 브로커에게 1200만 원을 주고 들어온 참이었다. 그나마 가져온 돈은 쉬이 떨어졌다.

몇 달을 헤매다 마석의 한 가구공장에 미등록 노동자로 취업을 했다. 한국인의 반도 안 되는 월급이었지만 불만을 품을 처지가 아니었다. 사측은 허가 받지 못한 노동자를 함부로 취급했다. 입맛에 맞지 않으면 신고를 들먹이며 협박했고 착취했다. 출입국에서 단속을 나오면 산으로 도망가 숨었다. 건물에서 뛰어내리다가, 창으로 빠져나오다가, 다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사람들은 다친 채로 본국으로 돌려보내졌다.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고 누구의 보호도 받을 수 없었던 미등록 노동자의 삶은 비참했다. 노동자로서도 그랬고 인간으로서도 그랬다.
 

조이는 2017년부터 남양주시 외국인 복지센터 이주민 사업부에서 일하고 있다. 남양주시 외국인 복지센터는 한국 최대의 가구단지인 마석가구단지 내에 있다. ⓒ 반수연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미등록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이주노동자 평등노조에 합류했다.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끼리 목소리를 모아 항의도 하고 저항도 했다. 세미나도 하고 피켓도 들었다.

"노동운동에 관심이 있는 한국의 대학생들과 민주노총이 힘을 보태줬어요. 그들과 있을 때면 든든했어요. 한국의 활동가들이 헌신적으로 저희를 보호해 주었거든요."

숨어 다녀도 언제 본국으로 송환될지 모르는 불완전한 체류 상태에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느냐는 내 질문에 그는 대답했다. 부당한 폭력과 임금체불과 인정되지 않는 산재를 당한 이들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렇게라도 뭔가를 바꾸어야했어요. 저희는 일을 하러 왔지 노예가 되기 위해 온 게 아니잖아요."

2004년 그는 정식 절차를 밟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노동운동을 하다 만난 한국인 활동가와 결혼을 했고 2009년에는 아이도 낳았다. 그즈음 대규모 합법적인 이주노동자가 한국에 들어왔다. 문제가 많았던 산업연수생 제도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고용허가제가 들어섰지만 이주노동자의 처우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은 부당한 착취와 임금체불에도 적절히 대처할 수 없어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언어지요. 그들의 처지를 제대로 통역해주기만 해도 억울함이 얼마간 덜어지지 않겠어요?"

조이는 고용노동부 산하 의정부외국인력지원센터에서 통역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체불된 임금을 받기 위해 서류를 만들어주고, 문화의 차이로 벌어지는 오해를 풀고 서로를 이해시키기 위해 양쪽의 주장을 대변했다. 해를 거듭하면서 한국인들이 회피하는 힘든 직종은 착실히 이주노동자로 채워졌다. 하지만 나라의 법과 사람들의 인식은 쉬이 바뀌지 않았다.

"누군가 다치고 죽은 후에야 뭔가 달라져요."

그 사이 누군가는 일터에서 죽거나 다쳤다. 비닐하우스에서 살던 이주노동자 가족은 얼어 죽거나 화재로 모든 것을 잃었다.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한국에 남을 수도 없어, 고립된 채 자살을 택하는 이주자도 속출했다. 팔이 잘린 채로 고향에 돌아가야 하는 이도 있었다. 수많은 이주노동자의 희생 위에 느리게 법이 생겨났다.

2021년 현재는 이주노동자도 최저임금이 보장되고, 근로기준법이 비슷하게나마 적용된다. 부당한 착취와 폭력은 법의 보호 아래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고쳐져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여전히 생사여탈권은 회사에

조이는 가장 큰 문제점으로 고용허가제를 든다.

"한국으로 들어와 일을 하기 전까지는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 그 일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면 돌아가는 수밖에 없는 거죠. 하지만 어떻게 돌아갑니까? 빚을 내서 엄청난 경비를 지불했고 고향에서는 그 돈을 갚을 수가 없는데요."

입국 전에 노동계약서에 미리 사인을 하고 오는 이주노동자들은 3년 동안 일자리를 옮길 수 없다. 예외적으로 정부가 고시하는 '사유', 즉 사용자의 근로계약 해지와 근로계약 만료 후 갱신 거절, 사업장의 휴·폐업으로 고용허가가 취소된 경우, 사용자의 근로조건 위반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 외에는 사용자의 동의를 얻거나 노동자의 책임이 없다는 점을 노동자가 입증해야 한다.

이 말은 임금을 받지 못하거나, 위험한 일을 거부하다가 출신국으로 돌려보낸다고 협박당하거나, 근로기준법에 금지된 위약금을 갈취당하거나, 유해한 유기용제를 다루다 산재를 당한 노동자의 보호장비 요구가 묵살당하거나, 중대한 산재를 당한 후 트라우마에 시달려도 법에 명시된 '사유'에 해당되지 않아 사업장 변경이 불가하다는 말이다(실제로 이런 사유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5명의 노동자가 헌법소원을 냈으나 합헌결정이 났다).

사측은 이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므로 강제노동을 시키는 데 악용하기도 한다. 어렵게 사업장 변경신청이 받아들여진다 해도 3개월 안에 재취업에 실패하면 곧바로 본국으로 돌려보내진다.

그 불안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4년 10개월을 착실히 일하면 재고용이 허용되지만 그 또한 사측의 협조와 허가가 필수다. 그러니 여전히 생사여탈권은 사측이 쥐고 있는 셈이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내·외국인 사이의 임금 격차가 크고, 그나마 5인 이하의 사업장에서는 야간·휴일·연장 수당과 연차휴가, 법정 근로시간 등에서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사업장을 쪼개어 5인 이하의 사업장을 여러 개 만들어 영세성을 유지하는 업체도 드물지 않다. 10년을 일해도 최저임금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싫으면 돌아가라는 말로 노동자의 입을 틀어막는다.

"이주노동자가 없으면 이 공단은 돌아가지가 않아요."
 

조이는 2017년부터 남양주시 외국인 복지센터 이주민 사업부에서 일하고 있다. ⓒ 반수연

 
조이는 2017년부터 남양주시 외국인 복지센터 이주민 사업부에서 일하고 있다. 남양주시 외국인 복지센터는 한국 최대의 가구단지인 마석가구단지 내에 있다. 1997년 성공회 이정호 신부님이 이주노동자와 결혼이민자를 돕기 위해 '살롬의 집'을 만든 것이 시작이었다. 지금은 남양주시와 협업으로 운영된다.

"노동현장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법률상담을 하는 것이 주된 업무지요. 임금체불과 폭력, 강제노동 같은 거죠. 그렇다고 무조건 노동자의 편을 들지는 않습니다. 둘 사이의 분쟁을 원만하게 조정하고 해결하는 것이 목표니까요. 문제가 생겨서 센터에 찾아오면 2주 동안 조정하는 기간을 가집니다. 사측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입장을 듣고 이주노동자의 입장을 전하며 서로 수습하고 해결할 시간을 주는 거죠. 의외로 쉽게 해결되는 문제들도 있어요. 좋은 사장님들도 물론 아주 많고요."

2주일의 숙고 기간에도 해결이 되지 않으면 해당 관청에 사건을 접수한다. 분쟁 과정에 오갈 데 없는 노동자의 숙식도 돕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심신단련을 위한 체육프로그램을 짜기도 하고 집을 얻거나, 아이들의 학교 문제를 상담하고 긴급지원이 필요할 땐 생필품을 사다 주거나 지원금을 챙겨주기도 한다. 병원에서도 경찰서에서도 통·번역이 필요할 땐 언제든 달려간다. 근래에는 한국말이 서툰 이주자를 위해 코로나 백신 예약을 돕고 정부의 방역정책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오염된 말, 다문화

센터에는 이주자와 그 가족을 위한 한국어 교실도 있고 결혼이민자의 취업을 돕는 프로그램도 있다. 부모가 상담이나 공부를 할 동안 아이들을 돌봐주는 어린이집도 있다. 마침 조이와 내가 마주 앉은 곳은 장난감과 작은 책걸상이 가득 한 놀이방이었다. 일요일이라 텅 빈 교실을 둘러보며 나는 이주자 자녀의 어려움에 대해 물었다.

"이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 다문화라고 불리며 놀림을 받기도 하죠. 다문화, 손 들어봐! 다문화는 오늘 좀 남아! 이런 식이죠. 원래 다문화는 여러 문화가 어울려 더 폭넓고 다양한 문화를 이룬다는 의미지만, 그런 의미는 퇴색된 지 오래예요. 다문화라는 말은 이주자들을 구분해서 밀어내고 고립시키는 단어로 오염 되었어요. 한국에서 나고 자라 한국 국적을 가진 아이들까지 부모의 출신 때문에 이런 편견과 차별을 받는 건 참 가슴 아픈 일이죠."

학교에서는 다문화 가정을 조사해서 특별히 관리한다고 한다. '다문화'는 결핍과 가난을 전제한 편견의 단어가 되어 부주의한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낸다는 말에 나는 동의했다. 어떤 일은 구별하는 순간부터 차별이 되기도 하니까.

내가 사는 북미에서도 동양인 이민자를 한꺼번에 통칭해서 사용하는 '오리엔탈'이라는 단어가 있다. 그 말은 이미 사전적 의미를 떠나 끊임없이 변주되며 폭력성을 가진 단어로 변질되었다. 그 단어가 '너희들은 결코 아메리칸이 될 수 없어', '너희들의 나라는 동쪽의 어느 곳이야' 라는 의미를 내포한다는 것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되자 정부와 학교에서는 이제 동양인 이주자를 '오리엔탈'이라 부르지 못하게 했다.

대신 수많은 이주자들이 모인 교실에서 멀티 컬처(다문화)와 다이벌서티(다양성)가 국가의 경쟁력이자 잠재력이라고 교육한다. 개인이 가진 성격을 출신국의 특성으로 오인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자주 경고한다.

이국의 불안한 삶

코로나 이전까지 한국에 거주하는 등록·미등록 이주노동자는 2백만 명에 달했다. 그들은 남해안 굴 양식장에도 있고, 고기잡이 배 위에도 있고, 마스크를 만드는 공장에도 있고, 제주도의 밀감 농장에도 있다. 기계가 돌아가는 공장마다, 위험한 일일수록, 힘든 일일수록, 열약한 현장일수록 더 많은 이주노동자들로 채워졌다. 그 결과 죽거나 다치는 이주노동자의 비율이 한국인보다 여섯 배나 많아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조용히 숨죽여 위험을 감내한다.

<프렌치 디스패치>(The French Dispatch)라는 영화에는 유괴당한 아이를 구하는 경찰이자 요리사인 동양인 남자가 나온다. 그는 유괴범의 소굴로 들어가 독이 든 음식을 요리해 범죄자들을 유인하고 갇혀 있는 아이를 구해낸다. 어떻게 그리 용감할 수 있었냐는 동료 경관의 질문에 그는 대답한다.

"아무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나는 외국인이거든요."

그는 그 극을 통틀어 가장 위험한 일을 한 사람이자 유일한 동양인 남자였다. 인터뷰 내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던 조이에게서, 한국 사람도 방글라데시 사람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신중히 말을 고르고 고르는 조이에게서, 영화 속 동양인 남자가 떠올랐다. 목수 일을 하며 손가락을 잘리고도 서둘러 일터로 돌아가 묵묵히 일자리를 지켜내던 캐나다 이주자 나의 남편 생각도 났다.

한국인의 70퍼센트는 한번쯤 이민을 생각해봤다고 한다. 세계 곳곳에서 살고 있는 재외동포는 700만 명이다. 그들은 조금만 실망시키면 적의로 가득 찬 등을 보일 것 같은 이국의 불안 속에서 꿈을 심고 키워내며 제각각의 역할을 감당한다.

세계 최강국이라는 미국의 인구 40퍼센트는 뉴욕항을 통해 들어온 이주자의 후손이다. 중동에서 유럽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가정을 일으키고 나라 살림을 얼마간 담당했던 우리의 부모님들도 수십만에 달한다.

이백만이 넘은 한국 체류 이주민 중에는 우리가 필요해서 한국으로 초대한 사람들도 있고, 도저히 제 나라에서 살 수 없어 건너온 이들도 있다. 그들의 수고가 필요할 때면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라는 이름으로 두 팔 벌려 그들을 환대했다. 하지만 우리의 환대는 그들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때에 한해서 조건부로 사용되는 건 아닐까. 과연 고국을 떠나 산다는 것은 원죄인 걸까.
 
덧붙이는 글 <이주민 르포 :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사람들>은 '익천문화재단 길동무'와 <오마이뉴스> 공동 기획으로 2021년부터 진행되고 있습니다. 익천문화재단 길동무는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심화 발전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한 소박한 일들에 힘을 보태기 위해 김판수·염무웅 선생님, 송경동 시인, 민변 조영선 회장, 김소연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운영위원장 등의 발의와 참여로 만들어졌습니다. '길동무 청년문학학교', '길동무문학·예술창작기금', '한국사회기층문화보고' 등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gildongmu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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