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27 12:45최종 업데이트 22.07.27 17:59
  • 본문듣기
한국에서 이주자는 살아 숨 쉬는 자인가. 존 버거는 <제7의 인간>에서 이들을 가리켜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라 했다. 오직 노동하는 몸으로 기능하기를 요구받고, 표류함이 당연시 여겨지고, 존재할 권리를 국가의 허락에 구해야 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와 난민의 현주소이다. 체류권을 '허가'받은 이주민들조차 한국 사회의 성원권을 제대로 획득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국가는 잔혹하고, 사회는 무심하다. 그럼에도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일. 한국사회에서 살아 숨 쉬는 이주민들의 삶을 르포르타주로 담고자 한다.[편집자말]
 
대한민국 인구의 4%, 약 250만 명의 이주민이 새로운 꿈을 찾아 한국에 삶의 터전을 꾸렸습니다.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민의 약 45%가 여성입니다. 꿈을 실현하면서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한국에서 이주여성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고 고달픕니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홈페이지 소개 글의 내용이다. 2021년 10월 기준 법무부 출입국 통계월보에 따르면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은 약 198만 명이다. 코로나 이후 50만 명 이상이 감소했지만 대구광역시 전체 인구 약 240만 명에 가까운 이주민들이 우리 사회에 있다.

내가 살고 있는 경기도의 작은 마을에서도 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나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새벽 골목길에서. 식당과 마트와 우리 집 창밖 이층집 마당에서도. 이층집 마당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방글라데시어일 때도 있고 베트남이나 필리핀어일 때도 있고 서툰 한국어일 때도 있다. 영어와 한국어가 섞인 아이들의 목소리도 있다.


주로 늦은 밤이나 이른 아침에 들리는 것으로 보아 일층 세든 방에서 머무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는 같은 마을에서 함께 살고 있지만 제대로 마주본 적도,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사무국장 한가은씨는 2005년에 베트남에서 이주해 올해로 14년째 이주여성 당사자 운동가로 살아가고 있다. 그녀의 고국 베트남에서는 전쟁 이후 홍콩이나 미국, 캐나다 등지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했다. 그들이 보내는 자금이 실제로 베트남 가정과 경제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이주에 대한 거부감도 없다.

자신과 가족의 삶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희망으로 베트남 사람들이 이웃나라인 대만이나 한국 등지로 떠났듯, 한가은씨 역시 학교를 졸업한 뒤 진로를 모색하다가 자연스럽게 한국으로 왔다.
  

국제결혼 광고 모니터링 보고회. ⓒ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가은씨가 한국에 온 2005년 당시에는 국제결혼으로 이주한 여성들이 많지 않을 때여서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곳도 별로 없었다(2008년에야 다문화가족지원법이 제정되어 현재 전국 200여 곳에서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가은씨는 우연히 베트남 친구를 통해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이하 이여인터)를 알게 되어 한국어와 컴퓨터 교육 등을 받을 수 있었고, 센터를 찾아오는 이주여성과 선주민('먼저 살던 사람'이란 뜻으로 이주민 입장에서 한국인은 선주민이 된다) 활동가를 연결하는 통·번역 자원 활동도 하게 되었다. 그것이 가은씨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었다.

이여인터는 2000년 한국 최초의 이주여성 쉼터인 '여성노동자의집'으로 문을 열어 올해로 20주년이 되었다. 가정폭력, 성폭력 피해를 입은 이주여성들을 보호하고 개인지원부터 입법운동까지 도맡아 온 유일한 이주여성 기관이었다. 이여인터는 쉼터와 상담소를 운영하며 이주여성의 인권과 자립을 위한 여러 활동과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도망칠까봐 문을 열어주지 않았어요."

센터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자원 활동을 하다가 어떻게 단체 상근까지 하게 되었냐는 질문에 가은씨는 2007년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사건을 이야기했다. 27명의 이주민이 사망하거나 다친 참사였다.

화재 당시 보호소에는 스프링클러나 화재 경보기, 비상탈출구가 없었다. 불길이 번지고, 안에서 쇠창살을 흔들며 구조를 요청했지만 직원들은 그 시간에 소화기를 가져온다며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열 명이 목숨을 잃었고 화상을 입은 사람들은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사고의 진상이 밝혀지기도 전에 보호소 안에 있던 이주민 22명이 강제로 조기출국을 당했다.

다문화 사회 진입에 필요한 충분한 정책을 갖추지 못했던 정부는 이 일을 계기로 이주단체에 인건비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그해 여름 가은씨는 이여인터에 고용되어 활동가로 일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주 당사자인 자신이 같은 처지의 이주자를 돕는 것은 너무나 보람 있는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나를 위한 활동이었어요."

언어, 실무, 이주여성의 이혼을 부추기는 단체라는 오해, 센터에 도움을 요청한 여성의 시가족들의 협박, 폭력으로 쉼터에 입소한 내담자의 가족상담 시 느꼈던 위협 등 모든 것이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가장 힘들었던 것은 공공기관의 차별을 직접 겪을 때였다.

이주민들의 불편이나 차별을 파악해 해당 기관인 출입국관리사무소, 경찰서, 구청과 주민센터 등에 의견을 전달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공공기관 개선 프로젝트'에서 만난 공무원들이나 센터를 방문한 공무원들조차 담당자이자 당사자인 그녀의 존재를 무시하고 한국인 활동가만을 찾았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어떤 물리적인 힘겨움이나 위협보다 치명적인 셈이었다.

"이주여성 당사자 활동가가 있는 조직에는 늘 이주여성들이 찾아옵니다."

2017년에 베트남 이주여성이 시아버지에게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인 남편의 구타로 사망한 스무 살 베트남 여성 '탓티황옥'의 추모 기자회견에서 '나도 그 베트남 이주여성일 수 있습니다'라고 발언한 여성이었다(관련기사: 남편에 맞아 죽은 열아홉 여성... 10년 지나도 변한 게 없다 http://omn.kr/nooy). 그로부터 7년 후 서른한 살의 그녀는 또 다른 탓티황옥이 되었다. 그 소식이 곧바로 한가은씨에게 전해졌다. 충격과 슬픔 속에서도 가은씨는 센터와 함께 장례를 치르고 그녀의 유골이 베트남으로 갈 수 있도록 대사관을 오갔다.

한국어에 능숙한 이주여성들도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정보가 필요하면 가장 먼저 가은씨를 찾는다. 같은 이주여성에게 갖는 동질감이 홀로 이주해 살고 있는 여성들에게 센터를 친정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주었다.

이주여성으로서 그리고 당사자 운동가로서 오랫동안 이주여성들을 만나고 상담하고 문제를 해결해오면서 가은씨는 그녀들이 원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고, 함께 성장했다. 한국에 오지 않았다면, 인권센터에서 활동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공부하고 활동하며 성장할 기회가 없었을 거라고 가은씨는 말했다.
 

이주민 코로나 재난 지원 배제 항의 기자회견 ⓒ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 이주민에 대한 혐오와 오해의 시선이 많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쁜 짓을 하려고 고향을 떠나 이주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렇지 않나요?"

2007년 결혼해 입국한 지 두 달 만에 남편의 폭력으로 숨진 열아홉살 베트남 여성 후안마이는 죽기 전에 베트남어로 편지를 썼다.
 
저는 한국에 와서 당신과 저의 따뜻하고 행복한 삶, 행복한 대화, 삶 속에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서로 믿고 의지하는 것을 희망했습니다.

후안마이가 남긴 편지는 가은씨의 위 반문에 대한 답이자, 이주자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근원적인 마음일 것이다.

"선주민이든 이주민이든 더 성장하고 더 나은 삶을 살려고 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또 각각 다른 사정이 있지 않겠습니까. 노동이주든 결혼이주든 문제의 원인은 다양합니다. 창창한 나이의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주로 3D업종에서 일을 하며 자신과 가족의 삶을 꾸려갑니다. 그들의 노동은 한국사회에서도 필요로 하는 거잖아요. 어디서든 일을 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 자신이 번 돈을 자국으로 보내든 어디에 쓰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선주민 사회에서도 있는 일입니다. 아니, 법적으로든 소통의 어려움 때문이든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이기 때문에 뜻하지 않게 범죄자로 내몰리는 경우도 많아요.

결혼이민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심지어 가족 중에도 국적을 받으면 도망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안에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결혼이주자들이 거주한 지 20~30년이 지나니 보통 10살 이상 차이가 나는 남편이 사망하는 경우도 있고, 가정폭력 때문에 헤어지는 경우도 있고, 한국 가정처럼 여러 가지 갈등으로 헤어질 수도 있는 거죠. 그런 사정을 잘 알지 못하고 무조건 나쁘게 보는 것은…"

- 이주여성들에게 현실적으로 가장 큰 어려움은 뭘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불안정한 체류 문제일 겁니다."

- 법적인 부분이겠네요.
"그렇죠. 지원할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되어 있어도 체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 바뀔 수 있을까요?
"바뀌어야죠. 그래서 인권단체들이나 이주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거고요."

결혼이주여성은 3년마다 출입국사무소에 체류기간 연장 신청을 해야 하는데, 2011년 이전에는 그때마다 배우자의 신원보증이 필요했다. 어떤 이유로든 배우자가 신원보증을 해주지 않으면 곧바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거나 미등록 체류자가 되는 것이다.

베트남 이주여성 K씨는 입국 후 발급받은 외국인등록증과 여권을 시어머니에게 빼앗겼고, 3년 후 체류 연장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다시 빼앗겼다. K씨는 누구나 처음은 다 낯설고 서로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했지만 갈등이 생길 때마다 남편은 '아이는 두고 나가라'고 협박했다.

남편에게서 이혼 소장을 받아 이혼 소송을 시작할 때부터 체류 연장을 위해 출입국사무소에 갔을 때, 아이를 만나기 위해 면접교섭권 소송을 할 때, 귀화불허처분 취소 소송을 할 때, 남편도 시어머니도 판사도 베트남으로 돌아가라고만 했다. 그러나 한국에 아이를 두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K씨는 이주해 살던 8년 동안 5년을 소송으로 보낸 뒤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이 모든 과정을 이여인터가 함께했다. K씨는 '한국인' 미싱사로 일하며 아이와 만날 날을 꿈꾼다.

2011년 법무부는 신원보증제도를 폐지했으나 실제로 배우자의 도움 없이는 어려운 절차상의 문제가 남아있다. 초기 입국 시의 신원보증제도는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에 이혼을 하게 되면 다시 체류가 불안정해진다. 상대에게 혼인 단절의 주된 책임이 있는 경우 재판이나 구제 절차가 종료될 때까지 체류를 연장할 수 있다는 출입국관리법 규정이 신설되었지만, 이주여성으로서는 배우자의 귀책 사유를 증명하는 것도 힘든 일이다.

어쨌든 이러한 변화는 이주여성의 삶의 근간을 흔드는 가부장적이고 종속적인 체류법에 대해 인권단체나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고, 어렵지만 잘 살아가는 이주민 가정도 당연히 많습니다. 그러나…"

예컨대 '잡종 강세', '사회에서 잘못 지도하면 프랑스 파리 폭동처럼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등 2019년 익산 시장의 다문화 가정 자녀에 대한 인종차별적 발언 같은 것은 어려운 상황에서 자녀를 키우는 이주가정에 모욕과 상처를 준다. 하지만 익산 시장 발언 당시 이주당사자 운동가들과 이주여성들은 가은씨조차 놀랄 만큼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보통 그런 일이 있을 때 인권센터가 먼저 나서면 물러서서 발언을 하는 정도였는데, 이주여성연합회 왕지연 대표 주도로 밤사이 수백 명이 익산으로 달려가 항의했다. 2013년 이주여성 미투 당시에도 이주여성들은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다문화 가족 자녀 모독 발언 정헌율 익산시장 규탄 기자회견 ⓒ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2018 이주여성들의 미투 ⓒ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생각나무 BB센터'의 안순화 대표, '이주민센터 동행'의 원옥금 대표 등 이제는 다양한 영역에 이주여성 당사자 활동가들이 있고, 활동가들과 이주민, 시민사회의 연대의 목소리가 여성가족부의 이주여성상담소 신설, 이주여성 성폭력 피해 전담 직원 지원 등 제도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주민만을 위한 활동이 아닙니다. 한국사회가 조금 더 완전한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기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가은씨가 한 말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주민의 인권과 생존을 위한 활동뿐 아니라 모든 소수자 운동과 그들의 활동으로 변화되는 것, 누구든 차별 없이 보호받아야 한다는 가치를 제도로 굳건하게 지키는 것은 한국사회를 더 '완전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이 아닌가. 그런 그녀의 생각은 '언제든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 무력한 존재가 아닌, 한국사회의 주체적인 구성원으로서의 입장이었다.

이주여성 당사자 운동가 한가은씨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대구 시민의 수와 맞먹는다는 놀라운 수치 정도로 이주민의 존재를 이해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간 한국 사회에서 흘러나온 부정적인 인식과 '소문'들에서 자유롭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주민이 처한 폭력적인 상황이나 반인권적인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우리 사회가 이래도 되나,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바다를 건너고 국경을 넘은 사람들에게 이래야 하는 건가 괴롭기는 했지만, 어쨌든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와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눈 72분은 오랫동안 닫혀있던 창이 열리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생김새, 피부색, 국적, 언어. 그녀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들을 걷어냈을 때 거기에는 이 세계에서 살아내기 위해 분투하는 두 사람이 마주앉아 있을 뿐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국경을 넘든 시골에서 도시로 가든, 이주는 우리 시대의 본질적 경험이다. - 존 버거

저명한 작가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우리는 어디로든 이주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곳이 어디든 무엇을 위한 것이든 더 성장하고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희망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주여성을 위한 활동이 결국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한가은씨의 말처럼 누군가의 희망을 지켜주는 것은 내 미래의 희망을 지키는 것이 아닌가.

"힘들지만 우리도 성장하며 열심히 살고 있어요. 이 말을 꼭 전해주세요."

베트남에서 온 이주여성 당사자 운동가 레티마이투, 한가은씨가 말했다.
덧붙이는 글 <이주민 르포 :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사람들>은 '익천문화재단 길동무'와 <오마이뉴스> 공동 기획으로 2021년부터 진행되고 있습니다. 익천문화재단 길동무는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심화 발전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한 소박한 일들에 힘을 보태기 위해 김판수·염무웅 선생님, 송경동 시인, 민변 조영선 회장, 김소연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운영위원장 등의 발의와 참여로 만들어졌습니다. '길동무 청년문학학교', '길동무문학·예술창작기금', '한국사회기층문화보고' 등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gildongmu21.com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10만인클럽후원하기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