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24 13:19최종 업데이트 21.12.24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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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이 끝날 무렵까지 커피는 생두 상태로 거래되었다. 카페든 가정이든 커피를 즐기려면 생두를 구입해서 직접 볶아야 했다. 장작을 태우는 난로 위에서 프라이팬을 이용하여 볶든지, 모닥불 위해 냄비를 걸어 놓고 그 속에 넣어서 볶든지 하는 방식이었다. 그런 다음에 갈아서 가루로 만들고, 물과 함께 끓인 후 따라 마시는 방식이었다. 커피콩을 볶는 일은 소비자의 몫이었지, 볶아진 커피가 상점의 진열장에 놓여 있지는 않았다.

15세기 중반에 커피라는 음료가 탄생한 이후 400년 동안 이어져 온 방식이었다. 그러다 보면 볶은 커피 상태가 일정하기 어려웠고, 완전히 타버린 생두나 부패한 생두 하나가 섞여도 커피는 매우 거북한 쓴맛이나 곰팡이 맛이 나곤 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커피를 만드는 전 과정 속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로스팅, 즉 커피 볶는 일이었다. 그래도 가끔은 잘 볶아진 원두로 만든 최상의 커피를 마시는 즐거움 때문에 커피는 인기가 있었다.


이런 오랜 전통과 결별을 하고 공장에서 대량으로 커피를 볶는 업체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840년대였다. 가정이나 카페에서 소규모로 하던 커피 볶는 일을 대형 공장에서 하기 시작한 것이다. 1830년대의 커피 가격 하락으로 촉발된 커피 소비의 급증과 미국의 공장형 산업화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혁신적인 로스팅 기계

남북전쟁을 전후하여 커피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이것을 기회로 여긴 발명가가 등장하였다. 자베즈 번스(Jabez Burns)였다. 그는 1826년에 런던에서 태어났다. 1829년에 스코틀랜드 던디로 옮겨 살다가 1844년에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뉴욕에서 번스는 커피 가게 운반기사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커피 로스터 발명의 출발점이 되었다.

1847년에 결혼한 그에게는 7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이 있었는데 1866년에 낳은 여섯째 아들 이름은 1년 전 암살당한 대통령 이름을 따라 에이브러햄 링컨, 1869년에 낳은 막내아들은 초대 대통령을 따라 조지 워싱턴으로 지었다. 이런 대단한 이름을 붙인 것은 이들의 성공을 바라는 부모 마음 때문이었는데 이후 이들 두 아들이 미국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는 못했다.
 

커피 로스팅 ⓒ pixabay

 
번스는 1860년부터 독창적인 대용량 로스터를 개발하여 이미 수백 대를 판매하였다. 그가 자동 배출 기능을 가진 대형 로스터 기계를 발명함으로써 커피 산업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것이 1864년이었다. 볶은 커피 원두를 자동으로 밖으로 배출하여 식힐 수 있는 구조를 가진 혁신적인 로스팅 기계였다.

번스는 이어서 로스팅 된 뜨거운 커피를 자동으로 식히는 기계와 자동 그라인더를 발명함으로써 커피의 대중화와 커피 산업의 발달에 초석을 놓았다. 그는 커피 로스팅 기계 관련 특허만 해도 여러 개를 출원하였다. 이런 번스의 노력으로 커피는 대량 가공이 가능한 상품으로 점차 나아갈 수 있었다. 자베즈 번스는 1878년에 <스파이스 밀>(Spice Mill)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였는데 이는 커피, 차, 향신료를 다룬 최초의 전문 잡지였다.

커피 마케팅의 귀재

번스에 이어 존 아버클(John Arbuckle)이라는 마케팅의 귀재가 커피 업계에 등장하여 돌풍을 일으켰다. 아버클은 1838년 피츠버그 근처의 알레게니시티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도 번스와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한 사업가로 주로 면직공장과 식품점을 운영하였다.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 아버클은 중퇴를 하고 남북전쟁이 끝나던 해인 1865년 동생 찰스 아버클(Charles Arbuckle)과 함께 식품점을 운영하며 커피를 팔았다. 당시만 해도 커피는 로스팅된 채 큰 자루에 담겨서 식품점에 들어왔고, 고객이 원하는 만큼 작은 양으로 덜어서 파는 식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처음 개봉하였을 때는 신선하던 원두가 며칠 지나면 공기에 오래 노출되어서 쉽게 변질되는 것이 문제였다.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는 오래되지 않은 신선한 원두와 오래된 저급한 원두를 섞어서 팔아야 했다.

아버클 형제는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들은 커피를 볶은 후 균일한 품질의 커피를 일정한 무게의 개별화된 작은 포장 용기에 담아서 등급화된 가격에 판매함으로써 자신들이 파는 커피 제품의 무게, 질, 가격을 보장하였다.

사업은 번창하였고, 아버클 형제는 상업의 중심지인 뉴욕의 브루클린으로 이주한 후 '아버클 브라더스'라는 커피 회사를 차렸다. 손으로 하나하나 하던 포장 과정이 주는 불편함을 대신해 줄 원두 자동 분류 및 포장 기계를 발명함으로써 10배 빠른 속도로 포장된 커피 패키지 상품을 만들 수 있었다.

아버클 형제는 번스의 자동 배출 및 냉각 기능을 지닌 로스팅 기계를 사들여서 커피 생두를 볶은 후 달걀과 설탕물로 광택이 나게 커피를 코팅하여 향과 맛을 보존하는 방식을 개발하여 특허를 냈다. 달걀은 끓이는 과정에서 커피 가루를 가라앉히는 역할을 하였고, 설탕은 커피에 단맛을 내게 하는 역할을 했다.

역시 특허를 낸 밀봉한 1파운드 패키지 포장 제품으로 '아버클 아리오사 커피(Arbuckles' Ariosa Coffee)'라는 이름을 붙여 판매를 하자 이 커피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서부 카우보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1파운드짜리 원두 패키지 100개를 넣은 나무상자를 가득 실은 마차가 서부를 휩쓸었다. 카우보이들은 더 이상 모닥불을 피워 생두를 직접 볶을 필요가 없어졌다. 아리오사 마차를 기다리기만 하면 커피를 맘대로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카우보이들은 '커피=아버클 아리오사'라고 생각했고, 이 상표 이외에는 커피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알 필요도 없었다. '아리오사 커피'라는 원래의 이름보다는 이 상표에 붙은 '카우보이 커피'라는 별명이 더 유명했을 정도였다. 카우보이가 있는 곳에는 아리오사 커피가 있었다.

아버클 형제는 마케팅에서 인류 역사에 또 다른 기록을 만들었다. 마케팅의 귀재였던 아버클 형제는 역사상 처음으로 쿠폰이라는 것을 발행하였다. 커피 봉투 뒤에 인쇄된 쿠폰을 붙였고, 이 쿠폰을 모으면 개수에 따라 손수건, 면도기, 가위, 심지어는 결혼 반지까지 교환할 수 있다는 광고를 하였다. 대성공이었다.

이후 지금까지 미국인들이 즐기는 쿠폰 모으기 문화가 바로 아버클 형제의 커피 판매에서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커피 봉투에 스틱 캔디를 넣기도 하였다. 판촉 제품이었다. 이런 판촉 아이디어를 담은 광고는 아리오사의 폭발적 인기를 가져왔다. 이렇게 하여 아리오사가 지역을 넘어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최초의 커피 브랜드가 되었다.

최초의 캔 커피

아버클에 이어 또 다른 커피 사업자가 등장하였다. 보스턴 출신 케일럽 체이스(Caleb Chase)였다. 그는 번스의 자동 배출 로스팅 기계가 발명된 1864년에 커피 로스팅 사업을 시작하였고, 1878년에는 메인주 출신 제임스 샌본(James Sanbon)과 함께 '체이스&샌본'이라는 커피 회사를 차렸다.

최초로 밀봉된 캔 용기에 담아 신선도를 유지한 커피를 판매했다. 샘플 시음 과정을 거쳐 커피를 판매한다는 광고로 기업 이미지를 높인 최초의 커피 회사이기도 하다.

캘리포니아 금광 주변에서 커피 판매를 시작하였던 제임스 폴거(James Folger)가 세운 J.A.폴거&컴퍼니는 1870년대 서부를 대표하는 커피 회사로 성장하였다. 향유 고래잡이 가문에서 태어난 제임스 폴거는 골드러시를 따라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고, 이곳에서 광부들에게 커피를 팔아 사업 밑천을 마련하여 성공하였다.
  

커피 그라인더 ⓒ pixabay

 
19세기 후반에 아버클, 체이스&샌본, 그리고 J.A.폴거 등 미국을 대표하는 대형 커피 로스팅 및 판매 기업들이 등장한 것은 미국인들에게는 축복인 동시에 불행이었다. 균일한 품질의 커피를 싸고 쉽게, 필요할 때는 언제든 동네 식품점에 가서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마시는 커피가 어느 나라에서 생산된 커피인지, 어떤 고유한 맛과 향을 지닌 커피인지를 모른 채, 비슷비슷하게 균일화된 커피를 판매 회사의 이미지에 따라 마시게 된 것은 불행이었다. 커피를 마시기보다는 브랜드를 소비하는 문화가 등장한 것이다.

1869년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이어주는 횡단 철도의 개통은 동부의 공장에서 생산된 물건이 서부로 쉽고 빠르고 싸게 움직이고, 서부에서 거두어들인 많은 원재료들이 동부로 편리하게 이동하도록 하였다. 커피도 이 철도를 타고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편리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커피의 확산에 기름이 부어졌다. 철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밀려난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이나 사망한 2천 명의 중국인 이민 노동자들의 생명이 존중받던 시대는 아니었다.

남북전쟁을 전후한 19세기 후반은 커피의 역사에 있어서 미국이라는 소비 공룡이 등장한 시기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전 시기보다 저렴해진 커피 가격이 만든 커피의 대중화 시기였고, 전쟁으로 인해 만들어진 커피에 대한 무조건적인 탐닉의 과정이었으며, 공장에서 만든 균일화된 커피에 익숙해져 가는 탈미각화 과정이었다. 커피의 산지, 품종, 특징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마시는 저급한 문화로 달려가는 시간이었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길상. <커피세계사+한국가배사>(푸른역사, 2021)
Mark Pendergrast. Uncommon Grounds: The HIstory of Coffee and How It Transformed our World. N.Y.: Basic Books.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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