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1.12 13:43최종 업데이트 21.11.12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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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커피에 우유를 타서 마시는 카페오레(Café au Lait)라는 음료, 간단하게 에스프레소를 만드는 프렌치프레스라는 도구를 개발한 나라다. 파리에 있는 카페프로코프는 34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지금 프랑스는 커피 선진국일까? 커피 소비량에서나 커피 음료의 수준에 있어서나 결코 선진국이 아니다. 커피 소비량은 이웃 나라 독일의 1/3 수준이고, 대표할 만한 커피 브랜드조차 없다.

"가짜 커피의 원조" 또한 프랑스이고 그 주인공은 나폴레옹이다. 1804년에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은 주변 국가들을 하나 둘 점령하거나 영향력 하에 두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바다 건너 영국은 굴복시킬 수 없었다. 1805년 10월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 함대에 크게 패한 후 영국에 대한 복수심은 더욱 커졌다.


그가 내린 결론은 섬나라 영국의 완전한 고립이었다. 나폴레옹은 1806년 군대를 이끌고 프로이센의 베를린에 입성하여 대륙봉쇄령을 선포하였다. 유럽 대륙의 모든 나라에 영국 배의 입항 금지, 영국과의 무역 금지, 그리고 지역 내 영국인의 억류와 영국 재산 몰수를 시행하도록 강요하였다.

시민혁명에 성공한 프랑스와 산업혁명을 달성한 영국 사이에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영국의 물품과 프랑스의 권력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모든 유럽 국가에 몸을 낮추어야 하는 치욕적인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의외의 결과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있던 모든 유럽 대륙 국가의 제조업자들과 농민들은 산업국가 영국뿐 아니라 영국이 지배하고 있던 모든 식민지와의 거래를 끊고 자급자족을 실천해야 했다. 나폴레옹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가 함께 꿈틀거렸다. 하나는 물론 영국에 대한 복수심이지만, 다른 하나는 영국이 먼저 완성한 산업혁명을 따라 제조업을 발달시키고자 하는 욕심이었다. 무역의 시대에서 생산의 시대로 넘어가는 시대적 변화를 프랑스가 스스로 완성하겠다는 야심이었다.

대륙봉쇄령 기간 그가 매뉴팩처의 중요성을 자주 언급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과학자들과 발명가들이 노력한다면 영국이 가진 제조업 기술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믿었다. 실제로 프랑스의 산업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제조업 발달에 필요한 원자재를 조달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광물이나 식재료와 같은 대부분의 원자재는 떼루아(와인의 원료가 되는 포도를 생산하는 데 영향을 주는 토양, 기후 따위의 조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처럼 기후나 토양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방직 산업의 성장을 위해서는 면화를 조달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면화씨를 들여와 각 지방에서 재배하도록 권장하는 동시에 생산자들에게는 다양한 혜택을 부여하였다. 방직 기계나 염료를 개발하는 사람들에게 포상금을 주는 정책도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 모든 영역에서 연구와 발명이 줄을 이었고, 프랑스뿐 아니라 많은 대륙 국가들이 스스로의 힘과 자원을 활용해 산업혁명을 시작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나폴레옹의 봉쇄령이 만든 의외의 결과였다.

설탕이 더 큰 문제였지만 다행스럽게도 해결 기술이 이미 발명된 상태였다. 1750년경 독일의 화학자 안드레아스 마르그라프(Andreas Marggraf, 1709~1782)가 사탕수수 대신에 사탕무(sugar beet)로 설탕을 만드는 법을 발견하였고, 1801년에는 그의 제자로 알려진 프란츠 아샤르(Franz Achard, 1753~1821)라는 사람이 사탕무로 설탕을 만드는 공장을 세운 바 있었다. 비록 생산비는 더 들었지만 해볼 만한 일이었다.
 

커피 ⓒ pixabay

 
커피는 어땠을까. 일찍이 커피 대체품을 발견하여 널리 활용한 경험이 있던 나라는 프로이센, 지금의 독일이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커피 과음이 가져올 건강상의 문제, 커피로 인한 노동자들의 과소비, 커피 수입으로 인한 외화 낭비, 커피 소비의 폭발로 인한 맥주 소비의 감소 등을 염려하였다. 그는 커피에 높은 세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지만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커피 밀수입과 밀거래에 따른 가격 상승만 초래하였고, 간접적으로 커피 대용품 시장을 활성화시켰을 뿐이다. 커피를 대신할 수 있는 것으로 밀·보리·무화과·옥수수, 그리고 치커리 등이 등장하였다. 중국 송나라 시절 고급차 재료값이 치솟자 처음에는 저급한 차를 섞었고, 이어서 감나무 잎이나 감람나무 잎 같은 이물질을 섞어 팔았던 것과 다르지 않다.

많은 커피 대용품 중에서 치커리가 가장 성공적이었다. 커피 역사학자 야콥의 표현대로 나폴레옹은 치커리와 동맹을 체결하였다. 적대국이었던 프로이센에서 성공을 거두었던 치커리를 커피 대용품으로 지지하였다. 물론 커피 대체품으로 치커리를 사용하는 것은 사탕무보다는 덜 성공적이었지만 불가피한 일이었다. 치커리 뿌리를 말려서 가루를 만들고, 이것을 우려서 만드는 음료의 맛과 향이 커피를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영국을 이기기 위해 기꺼이 마셔야 했다.

마지못해 마시던 치커리가 프랑스인들의 입맛을 길들인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대륙봉쇄령 해제 이후에도 프랑스인들 사이에 치커리 커피 혹은 치커리를 섞은 커피를 찾는 습관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19세기 전반 유럽인의 일상을 담은 그림들 속에서 목격하는 커피잔을 든 파리지엔느들의 잔에 담겨 있는 것은 대부분 향기 나는 커피가 아니라 쓴 치커리 커피였다.

다시 찾아온 진짜 커피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는 실패로 끝났다. 대륙봉쇄령에 지친 스웨덴, 포르투갈, 러시아 등이 반기를 들거나 프랑스의 군대 동원 요청을 거부하였다. 스웨덴에 대한 보복 공격에 참여하라는 요청을 거부한 러시아를 응징하고자 1812년 겨울에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 나폴레옹은 추위와의 싸움에서 결국 지고 말았다.

러시아와의 전쟁 이전에도 이미 대륙봉쇄령은 여기저기서 흔들리는 증상 혹은 부작용을 노출하고 있었다. 밀수입과 암거래로 인한 시장질서의 붕괴가 대표적이었다. 커피와 설탕 등 아열대 작물을 제외한 곡물이 풍부한 프랑스와 산업혁명의 결과물인 각종 공산품이 풍부한 영국 사이에 밀수입이 열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수출이 막힌 영국에서는 물품 가격이 폭락하고, 수입을 못하는 대륙에서는 물품 가격이 폭등하는 기현상이 초래되었다.

영국 전체의 커피 소비량은 연 100만 파운드 정도였는데 재고는 그 1000배에 달하였다. 18세기 중반부터 커피 대신 차를 마시는 문화에 빠져 있었던 영국인들 앞에는 커피 재고가 나날이 쌓여 갔고, 2000개가 넘는 카페에 시민들이 넘치던 파리 시내에는 커피 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1813년 즈음에 런던에서 40실링 정도 하는 커피가 함부르크에서는 500실링에 거래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프랑스의 약점을 눈치챈 영국이 도리어 대륙과의 무역을 금지하고 밀무역을 단속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영국의 프랑스 봉쇄로 인해 프랑스와의 무역에 방해를 받아 피해를 본 미국이 1812년에는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하여 전쟁을 시작하였고, 2년 이상 지속된 이 전쟁으로 영국의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1813년부터 시작된 반 나폴레옹 동맹국들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결국 1814년 4월에 퇴위당하여 지중해의 엘바섬으로 추방되었다. 그를 이어 즉위한 루이 18세에 의해 1814년 4월 23일에 대륙봉쇄령은 폐지되었다. 커피 거래가 다시 활기를 찾았고, 진짜 커피가 유럽인들의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나폴레옹이 지배하던 시대, 특히 대륙봉쇄령으로 고통받던 19세기 초 유럽인들의 희망 중 하나가 '진짜 커피를 마시는 것'이었다는 것은 사실에 가깝다. 그러나 커피가 나폴레옹에 대한 프랑스와 유럽인들의 불만을 초래하였고, 이로 인해 나폴레옹 체제가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는 해석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당시 유럽 시민 사회에서 커피가 차지하는 위상이 그 정도로 높지는 않았고, 유럽 정치에서 나폴레옹이 차지하고 있던 영향력도 커피에 의해 무너질 정도로 취약하지는 않았다. 커피는 나폴레옹의 인기를 약화시킨 수없이 많은 요인 중의 하나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몰락을 가져온 결정적 요인은 아니었다.

치커리로 만든 가짜 커피에 익숙하던 프랑스인들은 진짜 커피가 넘치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커피에 우유를 듬뿍 넣기 시작하였다. 카페오레가 탄생한 것이다. 프랑스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는 미국 뉴올리언스 지역에서는 지금도 치커리 뿌리를 넣어 만든 커피에 뜨거운 우유를 듬뿍 넣은 프랑스식 카페오레가 인기를 끌고 있다. 치커리도 우유도 커피에 넣는 이물질이기는 마찬가지이고, 성공한 가짜 커피의 대명사인 치커리 커피와 카페오레 모두 나폴레옹이 다스리던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푸른역사)
Antony Wild(2004). Coffee: A Dark History.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Heinrich Eduard Jacob(1934). Kaffee: Die Biographie eines Weltwirtschaftlichen Stoffes, 남덕현 옮김(2013), 《커피의 역사》, 자연과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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