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17 18:36최종 업데이트 21.08.17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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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가짜뉴스와 프로보커터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들은 각종 사회 이슈부터 정치담론에 이르기까지, 왜곡과 소란을 일으키며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합니다. 세계 각국에서 맹위를 떨친 가짜뉴스와 프로보커터들의 활동을 조명하고, 이에 대한 각 나라의 고민과 대안을 소개합니다. 이와 함께 이 현상을 역사적으로 톺아봅니다.[편집자말]
"인간은 사회적 동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을 처음 듣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관련 분야 연구자가 아니면 의미까지 따져볼 여유를 갖기는 어렵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번역부터 논란거리다. 폴리티콘(politikon)을 '사회적'이라고 보는 게 옳을까, '정치적'이라고 보는 게 옳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둘 다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

아리스토텔레스가 '폴리티콘'이라는 표현으로 하고자 했던 말은 현대의 영어 사용자들이 사용하는 '소셜'(social)의 의미도, '폴리티컬'(political)의 의미도 아니다. 현대 한국어의 '사회적' 또는 '정치적'이라는 표현이 담고 있는 의미도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집단을 인간이 살면서 구성할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연합체로 봤다. 작게는 가정부터 크게는 폴리스(polis, 도시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위의 집단은 따라서 '필연적' 연합체다. (이것이 17세기 영국 정치철학자들과의 차이점이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작은 단위의 집단들은 가장 큰 단위인 폴리스라는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이렇게 해서 결국 인간은 필연적으로 폴리스를 구성하는 존재, 즉 폴리스적(politikon) 동물(존재)이 된다. 이 '폴리티콘'을 영어권에서 '사회적'(social)이라고 번역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폴리티콘'은 흔히 사용하는 '사회적'이라는 표현보다 더 필연적이고 적극적인 뉘앙스를 갖는다. 그리고 '정치적'이라는 표현보다는 덜 선동적인 느낌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본래의 의미를 따르자면 (자치적 정치단위로서의) 국가는 사회적 연합체의 최종 목적이고 인간은 그 최종 목적의 필연적이고 능동적인 구성 주체다. 그래서 시민이 국가의 존재 근거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그리고 참여적 시민 정신은 모든 국가 경영의 필연적 의무이자 필연적 권리가 된다.

흔히 말하는 개인↔집단 사이의 대립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성립하지 않는다. 집단이 없는 개인이 있을 수 없고 개인이 없는 집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충만한 권리를 가진 능동적 구성원이다. 시대적 한계인 성차별, 신분차별이라는 치명적 과오만 제외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당시 획기적인 그리스의 민주주의 사상을 잘 정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세련된 사회학 이론서였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소위 '소피스트'들의 시대부터 모든 자유인들에게 평등한 발언의 기회를 주고 있었다. 평등한 법적, 정치적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적 판단을 신뢰하고 거기에 근거한 합리적 의견을 표출할 기회를 보장한다는 의미였다. 그것이 수사적(레토릭) 권리다.

참주정을 끝내고 민주정 시대를 연 그리스인들에게 말이란 이처럼 시민의 가장 기본이 되는 권리이자 민주주의의 보루였다. 이제 정치의 꿈을 가진 젊은이들은 창검술과 기마술 대신 차가운 논리(로고스)에 근거한 연설 능력을 익혀야 했다. 그런 시대적 배경은 새로운 직업군을 필요로 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수사가(rhetorician)들이다.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 : 수사가들의 등장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Agora). 아고라는 도시 국가에서 시민들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던 공공의 광장이었다. 아크로폴리스가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였다면 이곳은 시민의 경제 생활과 예술 활동이 이루어진 장소였다(표준국어대사전). ⓒ pixabay

 
남보다 강한 논리로, 그것이 부족하다면 뭔가 다른 장점이 있어야 대중들에게 더 어필하고 말의 싸움터에서 조금이라도 자신을 내세울 수 있다. 때문에 수사가들은 말을 포함한 다양한 기술들을 보유하거나 남에게 전수한다. 목소리에 호소력이 있거나, 인격이 신뢰감을 준다든가 등의 자질 역시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는 설득의 중요한 요소였다. 인격의 설득력,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수사학>에서 이처럼 설득의 윤리적 요소를 '에토스(신뢰)'라고 불렀다.

만약 이 모든 것이 부족하다면 도발적인 방법으로 상대방 또는 대중들을 흥분시켜 자기의 그라운드 안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냉정한 논리로 설득을 하는 대신 열정적 감정을 자극함으로써 상대방을 끌어들이려는 전략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에 필요한 이러한 열정적 요소를 '파토스(감성)'라고 불렀다.

사실 차가운 논리의 싸움에 뜨거운 열정이 개입한다면 자칫 낯 뜨거운 막장 싸움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실제 그런 일들이 당시 그리스에도 수없이 많았다. 창과 칼 대신 말과 글을 사용할 뿐 이기기만 할 수 있다면 모든 수단은 허용된다. 이것이 논리의 향연장 그리스 민주주의의 어두운 그늘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논리의 허울을 쓴 가짜 논리로 상대방이나 대중을 현혹시킬 수도 있다. 얼핏 보면 삼단논법의 추론 전개 같지만 엉터리 같은 논리도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추석날엔 송편을 먹는다' '오늘 나는 송편을 먹는다' '고로 오늘은 추석이다'는 식이다. 흥분한 논쟁 속에 있다 보면 알면서 당하는 게 이런 가짜 논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천재적 직관과 집요한 끈기로 모든 종류의 사이비 논리와 진짜 논리를 '논리적으로' 구별해내는 엄청난 저작들을 남겼다. 이것이 그 유명한 <오르가논> 시리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열정의 수사학을 일정 부분 복권시키기도 했다. 위와 같은 엉터리 논리는 안 되지만 엄밀함을 건너뛴 축약된 추론은 상황에 따라 허용된다. '아픈 사람은 땀을 흘린다' '이 아이는 땀을 흘린다' '고로 이 아이는 아프다' 하는 식이다. 물론 땀을 흘린다고 무조건 아픈 건 아니다. 다만 특별히 몸을 움직이지 않고 수 시간 누워있는데 땀을 흘린다면 뭔가 신체에 문제가 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따라서 임상을 맡은 의사는 과학자 이전에 실천가로서 그 증상을 질병의 징후로 의심할 수도 있다. 위의 송편 논리와 유사하지만 추론의 의도가 다를 수 있는 만큼 허용될 수 있는 수사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열정이 개입된 추론 또는 단순화된 추론을 과학자는 사용해서는 안 되지만 정치가와 실천가는 대중을 감동시키거나 치유하기 위해 쓸 수 있는 합당한 논리로 인정했다. 대중의 열기, 대중의 바람, 대중의 기대를 읽어내는 것은 정치가의 중요한 덕목이 됐다. 그것들을 읽어내서 그들의 요구에 호응하는 논리로 감동을 주는 말솜씨,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테크네 레토리케(techne rhetorike, 수사적 기술)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융합적 학문관은 스승 플라톤과는 다소 다른 방식이었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말의 무서운 힘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경험한 사람이다. 그것도 정당하고 진실한 말의 힘이 아니라 자극적이고 궤변을 늘어놓으며 우매한 대중을 현혹시키는 거짓된 말의 힘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다룬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1787).

 
플라톤에게 진리와 말솜씨의 관계는 운동, 좋은 음식과 화장술의 관계와 같았다.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비결은 꾸준한 운동과 좋은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다. 화려한 화장술은 건강해 보이게 할 수 있지만 실제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말솜씨도 진리처럼 보이게 할 수는 있지만 실제 진리로 이끌어주지는 않는다.

플라톤은 진실을 은폐하고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말재주를 퇴출시키는 일에 전력을 다했고 실제 그의 바람대로 평생의 라이벌 수사가들을 역사의 무대 전면에서 퇴출시켰다.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다시 학문적 정제와 정립을 통한 일부 복권은 됐지만 수사법, 수사학으로 표현되는 말의 재주는 이후 인류의 사상사에서 거의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신수사학'이라는 이름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소중히 생각했던 표현의 권리를 복원시키려는 움직임들이 프랑스, 벨기에 등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표현의 권리를 복원하려는 이들은 민주주의 원리가 살아 움직이고 표현의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일수록 수사학이 부활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플라톤의 무시무시한 학문적 카리스마는 혹여 있을 수 있는 결점에 대한 포용을 용인하지 않았다. 만약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현실을 버려야 했다. 심지어 '실재'는 이 땅 위가 아니라 저 멀리 있는 이데아의 세계에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포퍼가 플라톤을 '열린사회의 적'으로 간주한 것은 그 때문이다. 어찌 완벽한 논리의 말들만 허용하면서 살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좀 더 관용적이었다고 할까? 생각의 차이가 크고, 이견의 골이 깊다면 다소의 열정이 논쟁에 개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발언자와 청중 모두에 해당한다. 약간의 엄밀함이 결여된 추론도 허용 가능할 것이다. 다소 전문 영역의 두 의견이 대립할 때 청중이 그들의 전문성을 따라가지 못해 판단이 어렵다면 그들의 평소 언행과 인격이 판단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에토스의 수사, 파토스의 수사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두 설득의 정당한 방법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라면 고매한 철학자, 박식한 학자, 경험 많은 전문가들에게만 판단의 권리를 줄 수 없다. 그 판단의 결과가 소수 전문가보다 훨씬 많은 다수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내가 무지하다는 이유로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판단의 결정 과정에서 배제될 수는 없다.

같은 이유로 판단의 과정뿐 아니라 설득의 과정, 표현의 과정도 마찬가지다. 논리가 정교한 학자들, 지식이 풍부한 전문가들에게만 표현의 기회가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리다. 언어 권력의 민주화는 판단의 영역뿐 아니라 표현의 영역에도 해당한다. 같은 양질의 발언 기회가 기계적으로 보장될 수 없는 만큼 언어 권력의 약자들도 최소한의 표현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도발적 표현 방식들과 그 장치들을 민주사회에서 보장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명예훼손, 공공의 이익 저해 등 큰 해악이 아니라면 논쟁 당사자들 간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언어 공격을 보장해야 한다. 완벽한 논리, 정제된 감정, 도덕적 덕목의 요구는 자칫 언어를 얼어붙게 만들 수 있다. 언어가 얼어붙으면 침묵과 방조의 사회가 뒤따른다.

교양을 갖추지 못한 말들도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 삶의 질을 결정하는 문제라면 거리낌 없이 표현되어야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다. 민주정치를 건설한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래서 언어의 민주화를 제일 먼저 떠올렸고, 수사적 능력을 자기 계발의 기본으로, 수사가 양성을 국가 경영의 기본으로 삼았다.

오늘날 흔히 '댓글'에 대해 지적되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익명 자유 발언을 보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댓글' 문화가 우려를 낳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원문과 필자를 위협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발언대의 무게가 댓글보다 원문에 훨씬 더 실려 있는 이상 원문과 달리 댓글의 언어 도발은 보호를 받아야 한다.

익명의 개인과 프로보커터의 차이

도발적 언어를 허용하는 '이유'가 분명해졌다면 허용 '범위'도 분명해진 셈이다. 이미 언어 권력을 누리고 있는 사람, 즉 발언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는 거대 미디어, 수많은 청중을 보유하고 있는 언어 권력자들, 소위 인플루언서(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일인 미디어 운영자)들에게까지 도발적 언어가 허용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이미 엄청난 힘을 가진 권력자나 국가가 허용 범위를 넘어 무력을 휘두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힘이 없는 민중이 돌을 든다면 저항이지만 왕과 황제가 돌을 들면 살인마가 된다. 마찬가지로 힘이 없는 익명의 필자가 언어 도발을 한다면 저항, 몸부림으로 읽히겠지만 인플루언서의 언어 도발은 폭력이고 집단을 향한 가해가 된다. 이것이 도발적 언어를 쓰는 익명의 개인과 프로보커터(provocateur, 도발자)의 차이다.

'프로보커터'는 같은 철자의 프랑스어 단어를 영어권에서 차용해 사용한 말이다. '프로보까뙤르'는 '도발자'의 의미로 예술 등 다른 분야에서 자주 사용됐다. 주류 예술계에 도전하는 비주류의 몸부림을 표현하는 용어였다. 달리는 주목 받을 방법이 없으니 도발적 수단을 사용하는 예술가들을 지칭했다.

그러던 것이 최근 정치 분야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가 한몫 하는 것 같다. 전통 미디어의 주목을 받기 어려운 정치적 비주류 세력이 온라인사회망을 통해 도발적 언사를 시작하면서 생긴 표현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회망을 통한 정보 전달의 영향력이 전통 미디어의 그것에 버금가거나 심지어 넘어서고, 이들 도발자들의 영향력 역시 비주류의 영역을 넘어서 버렸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는 비주류 시절부터 사회망을 통해 도발적인 정치 견해를 표해 많은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정치적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심지어 대통령이 되어서까지 그의 '새벽 트위터질'은 멈추지 않았고 언론과 대중은 그의 트위터에 주목했다. 심지어 참모들도 늘 트위터를 통해 대통령의 의중을 확인해야 했다.
 

2021년 1월 6일 트위터는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 계정을 12시간 동안 정지했다. 트위터는 "워싱턴DC에서 벌어진 전례없는 폭력 사태의 결과로, 우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 세 개를 삭제해달라고 요구했다. 해당 트윗이 삭제된 뒤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 계정은 12시간 동안 잠기게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 트럼프 대통령 트위터

 
대통령이 국민들과 사회망을 통해 직접 소통하는 것이 나쁠 이유는 전혀 없다. 문제는 그의 정제되지 않은 도발적 언어들이 여과 없이 전 세계인의 눈으로 향한다는 점이다. 그가 폭풍 트윗을 날리는 동안 미국의 국격과 신뢰도는 점점 멍들었다.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법적 존재 트럼프의 정체성과 자연인 트럼프의 정체성이 온통 혼동, 혼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그런 일들이 4년 내내 발생했다.

사회망에서 영향력 있는 자연인(인플루언서)의 신뢰성에 관한 문제는 이처럼 잠재적인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급격한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짧은 시간에 엄청난 영향력을 얻더라도 자신의 신뢰성을 그만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가 많다. 이렇게 탁월한 열정적 감성(파토스)으로 상당한 대중적 영향력은 얻었으나 그에 걸맞은 신뢰(에토스)가 뒤따르지 못하는 부조화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사람들, 이들이 프로보커터들이다.

인플루언서가 인플루엔자가 된 한국

이러한 문제점은 클릭 장사가 언론을 잠식하고 있는 한국 언론계에서 특히 많이 나타난다. 언론 소비자들의 다수는 시사정보를 얻기 위해 포털 사이트로 모인다. 좋아도 클릭하고 욕하면서도 클릭하는 심리를 포털사이트들은 철저히 이용하고, 포털에 완전히 종속돼버린 이러한 환경 속에서 언론들은 화면에 노출되는 몇 자 제목을 최대한 자극적으로 뽑아낸다.
 

언론 소비자들의 다수는 시사 정보를 얻기 위해 포털 사이트로 모인다. ⓒ 이준호

  
그때 가장 좋은 그들의 파트너는 프로보커터들이다. 대중들에게 익히 알려진 이름을 통해 정보를 노출하면 일정한 클릭 수는 보장된다. 그 정보가 언론사의 논조와 맞고 안 맞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여부도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출처에 대한 책임은 프로보커터의 몫이기 때문이다. 언론사는 따옴표만 붙이면 그만이다.

분명 도발적 언어는 소수자,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건만 이제 도발은 강자들의 횡포의 도구로 전락했다. 그렇게 한국의 포털, 언론, 프로보커터들은 공생관계를 맺게 된다. 우리는 지금 인플루언서가 인플루엔자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쯤 되면 '테스형'(소크라테스)까지는 안 불러도 그의 제자 '라톤이형'(플라톤)을 다시 불러야 할까? 그토록 말의 바이러스 유발자들을 축출하려 애쓴 그가 새삼 이해가 가기 시작한다.

아! 라톤이형 세상이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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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프리미엄 임상훈의 글로벌리포트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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