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14 11:32최종 업데이트 21.03.14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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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있었다. 그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 생존과 꿈의 경계에 섰다. 같은 경계선을 무난히 혹은 우여곡절을 거쳐 넘은, 같은 시대에 던져진 다른 많은 이들과 달리 그는 경계선을 넘지 못했다. 세계의 폭력에 의해서든, 피하고 싶었지만 피하지 못한 불운에 의해서든 그의 죽음은 역사의 기록이자 시대의 고발이다. 

해방을 앞두고 이역에서 숨을 거둔 윤동주부터 2020년의 어느 청년에 이르기까지, 지속가능바람 저널리스트들은 청죽통한사(청년의 죽음으로 통찰하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청년의 죽음을 취재했다. 청년의 시각에서 새롭게 작성한 '청년의 죽음'은, 그 죽음의 애도이자 더 나은 세상의 모색이다.[편집자말]

13일 오전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에서 고 신효순-심미선 15주기 추모행사가 당시 사고 현장에서 열리고 있다. 2017.6.13 ⓒ 이희훈

 
2002년 6월 13일 14살 소녀 신효순·심미선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졌다.

이날 효순과 미선의 사망 사고가 발생한 경기도 양주시(당시 양주군) 광적면 효촌2리 56번 도로는 법원읍과 광적면을 잇는 도로로, 한국군과 미군의 방어작전 훈련에서 이동로로 사용되었고, 평소에도 미 군용차가 자주 오간 곳이다. 산의 급경사 사면을 깎아 만든, 인도가 따로 없는 산골길이었다.


법원읍에서 넘어오는 차량은 마을 앞까지 내리막을 한참 달려야 했다. 마을 앞에서부터는 도로 사정이 바뀌어 오르막길이 시작되는데, 오른쪽 산을 끼고 길이 상당히 휘어져 있었다. 따라서 차량이 내리막길을 내려오던 가속을 그대로 유지한 채 오르막길을 오른다면 반대 차로로 내려오는 차와 커브 길에서 갑자기 마주칠 위험이 상존했다. 1개 차선의 폭이 3.3m에 불과한 왕복 2차선 도로였고, 인도가 따로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에 돌발상황에서 행인이 피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2002년 6월 13일 전국 동시 지방 선거일이라 학교에 가지 않은 효순과 미선은 오전 10시 45분경 '초가집'이라는 식당에 가려고 56번 도로 갓길을 따라 300m가량을 걷고 있었다. 이 갓길을 자주 이용하지는 않았다. 효순과 미선이 2학년으로 재학 중인 광적면 조양중학교에 통학할 때는 마을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초등학생 때도 등교는 버스나 농사짓는 부모님이 태워주는 차를, 하교는 방과 후에 다닌 학원의 버스를 이용했다.

이날은 효순과 미선의 친구 다희의 생일이었고, 마침 다음 날이 효순의 생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친구 다섯 명이 다희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초가집'에서 모이기로 했다. 초가집은 버스나 부모님 차를 타고 가기에는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효순과 미선은 56번 도로 갓길을 따라 초가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같은 시각, 양주 무건리 훈련장에서 전술평가훈련을 수행한 미 제2사단 공병여단 44공병대 소속 7대의 차량이 열을 지어 56번 도로를 따라 덕도 삼거리 부근 집결지로 이동하면서 효순과 미선 쪽으로 접근중이었다. 차량 행렬은 호위 차량 1대, 장갑차량(M113 APC) 1대, 부교 운반용 궤도차량(AVLM) 1대, 공병 궤도차량 3대 순으로 열을 지어 이동하였다.

반대편 도로에서는 미군 M2/M3 브래들리 기갑 전투차량 5대가 정반대로 덕도 삼거리 부근 집결지에서 무건리 훈련장을 향했다. 도로의 양쪽에서 오던 두 차량 행렬은 효순과 미선이 갓길을 걷고 있던 오르막 커브길 근처에서 마주쳤다.

덕도 삼거리로 이동하던 차량 행렬 3번째의 부교 운반용 궤도차량은 마주 오는 브래들리 장갑차 행렬과 충돌하지 않으려고 중앙선을 넘지 않게 주행했다. 폭 3.65m의 부교 운반용 궤도차량이 3.3m의 도로를 주행하며 중앙선을 넘지 않으려면 갓길을 침범할 수밖에 없었고, 미군 차량은 순식간에 효순과 미선을 치고 지나갔다.

효순과 미선은 즉사했다. 효순과 미선은 사고 지점 흰색 실선을 중심으로 효순의 발과 미선의 머리가 겹쳐져 일렬로 누운 상태로 사망하였다. 시신은 미군 차량의 궤도바퀴에 머리, 뼈와 살이 갈려 나간 처참한 상태였다. 궤도차량의 운전자는 마크 워커 병장, 선임 탑승자는 페르난도 니노 병장이었다.

둘째 딸 효순과 막내 미선
 

어릴 적에도 단짝이었던 심미선·신효순 ⓒ 자료사진

 
효순과 미선은 효촌2리에서 나고 자랐다. 효촌2리는 전체 가구가 40호 정도인 작은 마을이었다. 효순과 미선이 함께 졸업한 효촌초등학교는 효촌2리에서 조금 떨어진 자그마한 시골 학교로 졸업 당시 동급생이 10명에 불과했다.

효순과 미선은 어려서부터 단짝 친구였다. 효순의 사진 앨범에는 유치원 시절부터 해마다 치른 생일잔치 사진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고 그 옆에는 항상 미선이 있었다.

둘째 딸인 효순은 사망 후 불교에서 '저승 문턱에 다다르는 날'이라는 49재에 어머니의 꿈에 나타났다. 꿈에서 효순은 어머니에게 "걱정하지 마"를 세 번이나 말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이승을 하직하기 전 꿈속에서 효순은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났다. 효순의 아버지는 생일잔치라고 들뜬 모습으로 집을 나서던 효순의 마지막 모습을 잊지 못한다(김지은·권우성, "SOFA도, 부모의 아픔도 그대로" 효촌리에서 다시 만난 '효순, 미선', <오마이뉴스>, 2003.06.08).

미선은 막내딸이었다.
 
"미선이는 천생 여자였어요. 교복 입은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어요. 아직도 아침마다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모습이 눈에 선해."

"막둥이라서 그런지 유난히 날 따랐어요. 내 팔을 베고 눕기도 좋아하고 살 부비기도 잘하고. 사고 있기 전날도 그랬죠. 그게 ... 고것이 떠나려고 마지막으로 내 냄새를 맡은 것 같애..."

- 김지은·권우성, "SOFA도, 부모의 아픔도 그대로" 효촌리에서 다시 만난 '효순, 미선', <오마이뉴스>, 2003.06.08

미선의 어머니가 기억하는 딸의 마지막 모습이다.

"피할 수 없는 사고였다"

두 학생이 사망한 날 미군 측은 바로 유감을 표하고 철저한 조사를 약속했다. 대니얼 자니니 미8군 사령관은 성명을 내고 "우리는 이번 비극적인 사고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라며 "유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조의를 표하며 철저한 조사를 약속한다"라고 말했다.

다음 날인 6월 14일에는 맥도널드 미 제2사단 참모장 등이 분향소를 직접 방문해 문상하고 유가족들에게 각각 위로금 100만 원을 전달하는 등 발 빠르게 사고 수습에 나섰다. 사고일로부터 6일 후인 6월 19일 미 제2사단은 한미합동조사 결과를 공식 발표했다.
 
"대한민국 경찰, 대한민국 범죄수사대 및 미 육군 안전부서와 더불어 우리는 본 사고를 철저히 조사했습니다. 본 조사를 통해 수집된 모든 증거에 근거해 우리는 이번 사고가 고의적이거나 악의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어떤 증거도 찾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본 사건이 비극적인 사고라고 확신합니다."

- 강민진, "2002년 효순미선이 '억울한 죽음' 5가지 기록", <한겨레>, 2017.11.27

미군 측은 사고의 우발성을 강조했다. 차량 구조상 오른쪽 시야에 사각지대가 있어 운전병이 학생들을 발견할 수 없었고, 커브를 돈 뒤 관제병이 약 30m 전방에 있는 학생들을 발견하고 운전병에게 경고하려 했지만 소음과 타 무전 교신 등에 의한 통신 장애로 관제병의 경고가 제때 전달되지 못했다고 사고 원인을 설명했다.

또 당시 차량은 시속 8~16km의 속도로 중앙선을 넘지 않고 계속 직진 운행 중이었으며, 마주 오던 브래들리 장갑차는 사고 차량과 1m 떨어진 지점에서 정차하여 대기했다고 밝혔다.

즉, 고의나 과실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가해 군인으로서도 '피할 수 없는' 원인에 의해 발생한 비극적인 사고라고 설명했다.
 

미선이·효순이를 친 장갑차와 같은 기종. ⓒ 위키백과 영문판

 
그러나 조사 결과는 애초 미군이 약속한 '합동'으로, '철저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미군은 사건 발생 직후에 한국 경찰을 제외하고 미군 의무관에게만 연락했다. 40분에서 1시간가량 후에 사고 지점을 지나던 차량 운전자의 제보를 받고서야 광적파출소 경찰관이 현장에 도착했다. 이마저도 미군이 가로막아 경찰관은 현장 사진 촬영 및 거리 측정 등의 기초조사만 했을 뿐 사고 운전병에게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이후에도 한국 경찰이 합동 조사에 참여하거나 미진한 점을 추가 수사한 일은 없다.

미군 측 발표에는 사고 원인과 관련하여 추가 조사가 필요해 보이는 부분이 많았다. 미군 측은 차량구조 상 운전병의 시야에 사각지대가 생긴다는 주장의 근거로 사고지점 5m 이내에서 근접 촬영한 사진을 제시했다.

그러나 관제병이 효순과 미선을 발견한 시점은 굽은 길을 돌아선 30m 전방이었다. 근접한 거리에서는 사각지대가 생길 수 있지만, 30m 정도의 상당한 거리가 있을 때는 외부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시야가 확보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미군의 조사 결과만으로는 운전병이 효순과 미선을 발견했는지 아닌지, 그것이 차량 구조 때문인지, 전방주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확정할 수 없었다.

사고 차량의 소음과 타 무전 교신 등에 의한 통신장애로 관제병의 경고가 제때 운전병에게 전달되지 못했다는 설명 역시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전투상황에서 사용되는 장비가 언덕을 오르는 정도의 소음으로 무선 교신을 하지 못했다는 설명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또한 부대 간, 차량 간 무선 교신은 주파수를 달리하고 운전병은 선임 탑승자와 교신하며 그의 지휘에 따를 뿐 다른 차량 간, 부대 간 무전 교신을 담당하지 않았다. 따라서 궤도차 운행 전 탑승자 간 통신장비 이상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거나, 운전병이 규정을 위반하여 헬멧을 벗고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해 보였다.

마주 오던 브래들리 장갑차가 대기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미군 측은 일관되지 못한 태도를 보였다. 6월 14일 현장 조사에서 미 제2사단 측은 브래들리 장갑차가 "사고 발생 이후에 도착했다"라고 했으나, 6월 19일 한미합동조사결과 발표문에서는 브래들리 장갑차가 "교행하지 않고 사고 차량으로부터 1m 떨어진 곳에 멈추었다"라고 기재했다. 같은 날 유족의 질의에는 "교행했다"라고 말하며 계속 말을 바꿨다.

미군 측이 사고 원인에 대하여 명쾌한 설명을 내놓지 않자, 6월 27일 효순과 미선의 아버지 신현수씨와 심수보씨가 궤도차량 운전병과 동승 장교, 소속 부대장 등 미군 6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서울지검 의정부지청에 고소했다.

재판권을 포기하라

효순과 미선이 사망한 2002년 6월 13일은 2002 한일 월드컵 한국 대표팀과 포르투갈 대표팀의 조별 예선 경기를 하루 앞둔 날이자 전국 동시 지방 선거 날이었다. 온 나라가 월드컵의 열기에 사로잡혀 있어서 효순과 미선의 죽음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사건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우연한 사건을 통해서였다. 사고가 발생한 지 13일째인 6월 26일 여러 시민·사회·종교 단체는 '미군 장갑차 여중생 고 신효순·심미선 양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여중생 범대위)'를 결성하고 미 2사단 앞에서 1차 범국민대회를 개최했다. 집회 도중 시위대 일부가 기지 철조망을 절단하였고, 취재를 위해 미군기지 안에 들어간 <민중의 소리> 기자 2명이 미군에 의해 감금·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미군을 향한 국민의 비난 여론은 급속히 확산되었고, 6월 28일 미 제2사단 공보실장이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해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보실장은 해명을 위해 출연한 라디오 방송에서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당시 기자들을 미군이 체포·연행하지 않았고 한국 경찰이 했다며 미군에 대한 비난을 근거 없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효순과 미선의 죽음에 대해서 "조사는 끝났다. 미군 관련자들은 아무 과실이 없고 영내에서 정상적으로 근무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불난 여론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26일 여러 시민·사회·종교 단체는 '미군 장갑차 여중생 고 신효순·심미선 양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여중생 범대위)'를 결성하고 미 2사단 앞에서 1차 범국민대회를 개최했다. 집회 도중 시위대 일부가 기지 철조망을 절단하였고, 취재를 위해 미군기지 안에 들어간 <민중의 소리> 기자 2명이 미군에 의해 감금·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진은 군견까지 동원해 기자를 연행하는 장면. 미군은 이에 대해 "한국 경찰이 영내에서 연행했다"라고 주장했다. ⓒ 오마이뉴스

 
여론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미군 당국은 비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나섰다. 7월 3일 자체 조사 결과 미군 병사들의 과실이 인정됐다며 마크 워커 병장과 페르난도 니노 병장 등 미군 2명을 과실치사죄로 미군 군사법원에 기소했다. 가해 군인 두 명에 대한 한국 검찰 조사에도 협조하겠다고 했다. 7월 4일에는 라포트 주한 미군 사령관이 "미 육군이 이 비극적인 사고에 전적인 책임이 있음을 인정한다"라는 내용의 사과를 했다.

그러나 워커 병장과 니노 병장은 한국 검찰 조사에 협조적이지 않았다. 두 가해 군인은 7월 8일 예정된 검찰 조사에 신변 위협과 언론의 초상권 침해를 이유로 출석하지 않았다. 미8군 사령부는 "미군의 신변안전이 보장되는 미군 영내에서 언제든지 조사를 받겠다"라는 의사를 한국 검찰에 전달했다. 이에 의정부지청이 담당 검사를 직접 미 제2사단으로 보내 두 가해 군인의 영내 출석을 요청했으나 미군 측은 니노 병장과 워커 병장의 출석 여부에 관한 답변을 주지 않았다.

두 가해 군인의 신병 인도가 어려웠던 것은 주한미군지위협정에 따라 공무 수행 중 일어난 범죄에 대해선 미국이 1차 재판권을 가지기 때문이었다. 유족과 시민단체들은 그간 사건을 축소·은폐하려는 미군 당국의 태도로 보아 미군 측에 재판권을 맡겨서는 제대로 된 조사와 처벌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시위대를 중심으로 미군의 재판권 포기와 주한미군지위협정의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미군에 재판권 포기를 요청하는 시한을 하루 앞둔 7월 10일 법무부는 한미 주한미군지위협정 체결 이래 최초로 미군 측에 재판권 포기 요청서를 보냈다. 그리고 워커 병장과 니노 병장은 효순과 미선의 49재 추모제를 앞두고 검찰에 출두하여 조사를 받았다. 이때 이들은 조사석에만 앉았을 뿐 CID(미군범죄수사대)에서 이미 진술했다는 이유로 사고 경위에 관한 진술을 거부했다.

8월 5일에 의정부지청은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사고의 주된 원인은 운전병과 관제병 사이의 통신에 장애가 있었고, 부수적으로 관제병이 여중생들을 뒤늦게 발견해 발생한 사고"라고 밝혔다. 기본적으로 미군 측 발표와 동일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인 8월 7일 법무부의 재판권 포기 요청을 미군 당국이 공식 거부했다. "의정부 검찰의 조사 결과도 기본적으로 우리 측의 조사 결과와 일치하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라고 운을 뗀 뒤 "동 사고가 공무 중에 일어난 사고이고, 이제껏 미국이 제1차적 재판권을 포기한 전례가 없다"라는 이유를 들었다.

외교통상부와 국방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즉시 보도자료를 내고 향후 대책을 발표했다. 9월 21일 미군은 사고 현장 인근에 추모비를 세우고, 유족들에게 각각 1억 9500만 원의 배상금을 지급했다. 미군 장병들은 성금 2만 2000달러를 유족들에게 전달했다. 사건은 자연스레 정리되는 듯했다. 언론의 관심도 줄어들고, 국민 여론도 수그러드는 것 같았다.

불평등한 한미관계의 상징 'SOFA'

6·25 전쟁 이후 한국 정부는 북한의 군사 위협을 방어하기 위하여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미군은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이후에도 계속 남한지역에 주둔하게 되었다. 더불어 한국에 주둔하게 된 미군의 법적 지위에 관한 양국의 합의가 필요했다.

미국의 부정적 태도와 협상 거부로 13년 만인 1966년 81차에 걸친 교섭 끝에 비로소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이 체결될 수 있었다. SOFA는 본 협정문 외에 합의의사록, 합의양해사항, 형사 재판권에 관한 한국 외무장관과 주한미국대사 간의 교환서한의 세 가지 부속 문서로 구성되었다.

주한미군지위협정은 본협정문의 내용만 보면 일본과 독일과 비교해 불평등하다고 할 수 없지만, 합의의사록이나 양해사항 등의 부속 문서에는 독소조항들이 산재해 있다. 효순·미선 사건에서 특히나 문제가 되었던 조항은 형사 재판 관할권과 관련한 조항이다. 주한미군지위협정 제22조는 재판권을 규정하고 있다. 재판권은 전속적  재판 관할권과 경합적 재판 관할권으로 구분된다. 먼저 전속적 관할권에 대한 규정은 다음과 같다.

협정문 제22조 제2항의 (나)목을 보면 '대한민국의 법령에 따라서는 처벌할 수 있으나 미국의 법령에 의해서는 처벌할 수 없는 범죄에 대해서 대한민국이 전속적 관할권을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우리나라의 법에 규정된 범죄에 대해서만 대한민국이 전속적 재판 관할권을 가진다는 의미다. 부속 문서 전반을 살펴보면, 우리나라가 전속적 재판 관할권을 가질 때에도 미군 당국에 양보하거나 미군의 재판 관할권에 의해 대한민국의 재판 관할권이 제한되고 있다.
 

17일 오후 의정부역광장에서 열린 '고 심미선, 신효순 진상규명을 위한 청소년 행동의 날' 집회에 교복을 입은 채 참석한 고등학생들. 2002.7.17 ⓒ 오마이뉴스 권우성

 
다음으로 대부분의 사건이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경합적 재판 관할권에 대한 규정이다. 협정문은 미군 상호 간에 일어난 범죄와 미군의 공무집행 중 일어난 범죄는 미군 당국이 재판권을 가지고, 그 밖의 경우는 대한민국이 재판권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무상 범죄에 미군이 재판관할권을 가지는 것은 군무가 가지는 은밀성과 독자성을 고려하면 충분히 수용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공무증명서의 발급 권한이 미군의 장성급 장교에게만 있으며, 우리 법원은 공무 판단에 관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공무증명서 발급에 대한민국 당국이 관여할 수 없다면 최소한 그 유효성 여부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공무 판단에 대해서 대한민국은 미국의 결론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미군의 공무 판단에 대해 대한민국이 반증이나 이의를 제기해도 미군과 협의해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면 궁극적으로 해당 공무집행증명서의 공무증명이 확정되기 때문이다. 효순·미선 사건도 공무상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을 근거로 하여 미군이 재판권을 행사했다.

협정문 제3항 (나)목은 '미군의 미군에 대한 범죄와 공무집행 중의 범죄 외에는 대한민국이 재판권을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합의의사록에는 '합중국 군 당국의 요청이 있으면 대한민국 당국이 재판권을 행사함이 특히 중요하다고 결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대한민국의 재판 관할권 포기'가 명시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재판권 행사는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인 셈이다.

죽은 자는 있는데 죽인 자는 없다

한국 법무부의 재판권 포기 요청을 미군 당국이 공식 거부하면서 두 가해 군인에 대한 재판은 미군에서 담당하였다. 11월 18일에서 22일까지 동두천 캠프 케이시 내 군사 법정에서 운전병 마크 워커와 관제병 페르난도 니노에 대한 미 군사재판이 진행됐다. 20일과 22일 차례로 페르난도 니노와 마크 워커에게 무죄 평결이 내려졌다. 예상한 결과였다. 법정은 재판장에서부터 배심원에 이르기까지 모두 현역 미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죄 평결이 발표되자 피고인석에 앉아있던 니노 병장은 웃는 얼굴로 부인과 포옹하고 변호인단과 악수를 하며 기뻐했다. 워커 병장은 무죄 평결이 발표된 직후 "아주 행복하다. 나의 능력 범위를 벗어난 사고였다"라는 말을 남겼다. 두 미군은 무죄 평결을 받은 지 5일 만인 11월 27일 짤막한 사죄 성명을 발표하고 유유히 한국을 떠났다. 1심 판결에 대해 원고 측이 항소할 수 없도록 하는 미 군사법정의 규정에 따라 페르난도 니노와 마크 워커에게 더는 죄를 물을 수 없었다.

재판 결과를 계기로 SOFA의 불평등함이 다시금 도마 위에 올랐고, 그동안 사건에 무관심하던 이들까지 항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파문은 일파만파로 커졌다. 항의가 잇따르자 11월 27일 주한 미국대사는 기자회견에서 부시 대통령의 간접적인 사과를 전했다.
 

14일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여중생 추모 촛불시위가 열린 광화문. 2002.12.14 ⓒ 오마이뉴스 남소연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이 28일 오전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미군 궤도장갑차에 의해 사망한 효순·미선양의 부모를 만나 위로하고 있다. 2002.12.28 ⓒ 주간사진공동취재단

 
한 누리꾼의 제안으로 11월 30일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 촛불시위가 시작되었다. 날이 갈수록 그 수가 늘어나 12월 7일에는 약 5만여 명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해방 이후 한번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던 미 대사관 앞이 뚫린 것이다. 12월 14일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범국민대회에서도 항의의 물결은 이어졌다. 이날 1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SOFA 개정과 부시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했다.

반미 여론이 전국민적으로 확산되자 12월 11일 한국과 미국의 외교·안보 당국자가 긴급하게 회동했으나 SOFA를 개정하지 못했고 조문 해석에 관하여 논의하는 것에 그쳤다. 12월 13일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유감을 표시하며 사과의 뜻을 전했다. 이것으로 끝이었다. 

14살이란 꽃다운 나이에 외국군의 거대한 장갑차에 깔려 목숨을 잃은 효순과 미선의 죽음은 불평등한 한미관계에 국민이 눈을 뜨고, 촛불을 들어 SOFA 개정을 외치게 했다. 그러나 효순과 미선의 죽음은 당시 대선 정국을 달군 이후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효순·미선이 세상을 떠난 뒤 달라진 것은 그들이 숨진 2차선 지방도로의 폭이 75cm 확장된 것과 붉은색 타일이 깔린 폭 1.5m짜리 인도가 생긴 것뿐이었다. 
 
10대 소녀 두 명이 희생된 지 거의 20년이 돼 가지만 주한미군 범죄에 대한 처벌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이 땅에서 주한미군의 '매우 특별한 지위'는 전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 곽명섭, 'SOFA' 굴레를 벗어 던져야 국법이 산다, <부산일보>, 2020.7.16
 

13일 오전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에서 고 신효순-심미선 15주기 추모행사를 앞두고 신효순 양 아버지 신현수씨가 추모비 앞에 서 있다. 2017.6.13 ⓒ 이희훈

 


- 최예지: 고려대학교 철학과 3학년 재학.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보다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이것저것 열심히 도전하는 중이다.
- 안치용: 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 공부가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죽통한사'를 함께 진행한다.
- 신다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졸업. 살아있는 모든 것에 애정이 있지만 요즘은 특히 식물에 빠져 몬스테라 키우기에 열심이다. 글로써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 싶어 하는 기자 지망생이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1. 논문

박성민,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제22조 형사재판권의 형사법적 문제와 개선방안」, 『형사정책연구』, 한국형사정책연구원, 2011, 191-217
이소희, 「여중생 장갑차 살인사건 2백일 보고서 : '월드컵 광장'이 '효순이, 미선이 광장'으로」, 『민족 21』, 2003, 82-84

2. 신문

강민진, "2002년 효순미선이 '억울한 죽음' 5가지 기록", <한겨레>, 2017.11.27.
권숙희, "살아있었으면 서른살 미선이...SOFA 개정 밑거름되길", <연합뉴스>, 2017.06.12
송평인, "생일파티길 두 여중생 궤도차량에 참변 전말", <동아일보>, 2002.07.18
이성섭, "주한미군 '여중생 압사' 재판 공정했다", <한국경제>, 2002.11.26
이재덕, '미군 장갑차 사건' 일지···14살에 숨진 효순·미선이, 15년 지나도 못푼 원한, <경향신문>, 2017.06.13
임경구, "누구도 쇠사슬에 묶이거나 끌려가지 않았다", <프레시안>, 2002.06.28
진명선, "생일 친구집 300m 남기고... 소녀들은 스러졌다", <한겨레>, 2012.06.11
전홍기혜, "여중생 압사, 미군 잘못 하나도 없다",  美법정 관제병 무죄판결, 운전병도 무죄 가능성 높아 <프레시안>, 2002.11.20
자유경제원, "효순이와 미선이 누가 두 소녀의 죽음을 이용했나", 2016.03.02.

3. 기타

외교부, "알기쉬운 SOFA 해설", 북미3과, 2002.11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주한미군지위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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