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11 11:43최종 업데이트 21.02.11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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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돈 서울시장이 제42회 3.1절을 기념, 보신각 종을 타종하고 있다. 1961.3.1 ⓒ 연합뉴스

 
조선 건국 2년 뒤인 1394년 한양 천도가 단행된 이래, 이곳 행정 책임자가 주민 직선으로 뽑힌 것은 그로부터 566년 뒤였다. 이승만 독재가 끝나고 민주주의 열기가 고조되던 1960년 12월 29일, 사상 최초의 시·도지사 직선에서 민주당의 김상돈 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부위원장이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이승만 대통령의 방해로 반민특위가 와해되는 비극을 겪었던 김상돈 서울시장은 이번에는 박정희 쿠데타로 지방자치가 중단되는 아픔을 참아야 했다. 1961년 1월 4일 취임한 그는 박정희가 선글라스를 끼고 육군본부 계단을 밟은 5월 16일부터 서울시청에 '등청'하지 않았다.


그해 5월 20일 자 <조선일보> 기사 '김 시장 20일에 등청'은 쿠데타 이후 보이지 않던 김상돈이 서울시청에 나타나 군부 관계자들과 회동한 뒤 "22일 아침 직원 조회에서 작별인사를 하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보도했다.

다음 날인 21일 군사정권은 윤태일 준장의 서울시장 취임식을 열었고, 9월 1일 제정된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의 제2조 제2항 "도(道)와 서울특별시는 정부의 직할 하에 두고"를 통해 시장·도지사 직선제를 폐지했다.

두 번째 민선 서울시장 

정부수립 12년 만에 당선된 최초의 민선 서울시장이 5개월도 못 채우고 쫓겨난 데서 나타나듯이, 한국 현대사의 지방자치는 반민주 세력의 억압으로 파행의 길을 걸었다. 그랬던 지방자치가 전면적으로 부활한 때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열린 1995년 6월 27일이고, 이때 당선된 사상 두 번째 민선 시장이 '포청천'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조순이다.

군부에 의해 밀려 나간 김상돈과 달리 대선 출마를 위해 2년 만에 스스로 나간 조순은 초대 한나라당 총재를 거쳐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민주국민당(김윤환·김상현 등) 대표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1928년 태어나 올해 93세인 그는 지난 1월 20일 자택을 찾아온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대화를 나누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민주당 후보인 조순의 서울시장 당선은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보다 2년 앞선다. 평화적 정권교체 2년 전에 서울시장 교체가 선행됐다. 그래서 그의 당선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그는 거물급 후보들과 경쟁한 끝에 그런 성과를 얻어냈다. 민주자유당(민자당) 후보인 정원식(1928~2020)은 서울대 교수와 문화교육부 장관, 국무총리를 역임했고, 1991년 12월 13일 연형묵(1931~2005) 북한 총리와 함께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한 일로 선명하게 기억된다. 정치 경험은 없지만, 교육·행정 경험이 탄탄했고 무엇보다 집권당 후보였다.

무소속 후보 박찬종(1939년생)은 신정치개혁당(신정당) 대표최고위원 시절이던 1993년 우유 광고 모델로 출연했을 정도로 깨끗한 정치의 대명사로 통했다. 사법시험·행정고시·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진귀한 이력의 소유자인 그는 총선에서도 다섯 번이나 당선됐다.

박찬종은 신정당 후보로 나선 1992년 대선에서 민자당 김영삼(42.0%), 민주당 김대중(33.8%), 통일국민당 정주영(16.3%)에 이어 6.4%로 4위를 기록했다. 신정당이 실질적인 1인 정당이었음을 감안하면, 사실상 무소속으로 그런 성과를 낸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만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1995년 지방선거에 출마한 그가 신정당 후보냐 무소속이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박찬종이 나왔다는 점이 중요했을 뿐이다.

조순 역시 경제학자, 경제기획원 장관 및 부총리, 한국은행 총재 등의 이력을 갖고 있었지만, 주요 라이벌인 정원식과 박찬종은 결코 만만한 후보들이 아니었다. 이런 속에서도 조순은 꽤 괜찮은 성적을 거두며 35년 만의 민선 서울시장 선거에서 승리했다. 42.4%의 득표율을 기록해 2위 박찬종(33.5%)을 여유 있게 제쳤을 뿐 아니라 3위 정원식(20.7%)을 두 배 이상으로 따돌렸다.

1992년 대선 때 서울시에서 6.4%를 득표한 박찬종이 33.5%를 얻은 것도 대단했지만, 조순이 42.4%를 얻은 것은 더욱더 그러했다. 1987년과 1992년 대선에서 서울시 1위를 기록한 김대중의 득표율은 그에 못 미치는 32.6% 및 37.7%였다.

구여권 도움 얻어 여유 있게 승리
 

조순 서울시장 당선자가 28일 오전 민주당 마포당사를 방문해 이기택 총재를 비롯한 당지도부에 당선 인사를 하고 김원기·권노갑·김태식·이종찬·김상현·정대철 등 당 중진들과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1995.6.28 ⓒ 연합뉴스

 
지난 1월 13일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CBS 라디오에 출연해 지금의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1995년의 3자 구도에 비유하면서, 제1야당 후보인 조순이 승리한 것처럼 국민의힘 후보가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르면, 제1야당 후보인 조순은 국민의힘 후보에 비견되고 박찬종은 안철수에 비견된다는 말이 된다.      

이번에 3자 구도가 형성되면 1995년과 유사해지지만, 그것은 외형일 뿐 실질은 그렇지 않다. 조순의 당선은 전혀 다른 메커니즘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제1야당이 구(舊) 여권과 손잡고 현 여권을 압박하는 구도였다. 여권의 분열로 말미암은 이 구도에 힘입어 그는 무소속 박찬종의 대활약에도 관계없이 여유 있게 승리할 수 있었다.

조순 캠프가 손잡은 구여권은 1979년 10·26 사태로 실권한 민주공화당(공화당) 출신들을 중추로 했다. 자유민주연합(자민련)과 김종필이 바로 그들이다.

전두환과 신군부의 민주정의당(민정당) 정권이 1987년 6월항쟁으로 타격을 받자, 그간 억눌려 있던 공화당 출신들은 그해 10월 30일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이들은 1990년 3당 합당 때 민자당에 합류했다가 1995년 2월 탈당하고 3월 30일 자민련을 창당했다. 조순 캠프와 민주당은 이들과 연대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초기에는 신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숙청하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는 등의 전격적 개혁으로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다음 해부터 달라졌다. "집권 2년째인 1994년부터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냈다"라고 <김대중 자서전> 2권은 말한다.

한국통신 노사분규를 두고 '국가 전복의 저의가 있다'(1995.5.19)라고 발언한 데서도 나타나듯이 김영삼은 대중의 목소리에 부응할 만한 의지나 역량이 없었다. 또 세무공무원들의 비리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리더십 한계를 드러냈다. 거기다가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1993.7.26), 서해 훼리호 침몰(1993.10.10), 성수대교 붕괴(1994.10.21) 사고로 민심이 흉흉했다.

그에 더해 야당뿐 아니라 여당 내부에서조차 국정운영에서 소외된다는 느낌이 확산됐다. 김영삼과 그 측근들의 국정 운영 스타일 때문이었다. 민자당 내 신민주공화계를 이끌고 김영삼의 대선 승리를 도운 김종필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김종필 증언록> 제2권은 "나의 정성을 깎아내리고 시종일관 끌어내리려 한 건 YS 민주계(상도동계)의 강경파였다"라면서 "그 선봉에 최형우 의원이 있었는데, 그는 마치 내가 YS의 후계 자리라도 노리는 사람처럼 의심하고 경계했다"라고 토로한다. 이런 불안감은 김종필이 충청·대전을 기반으로 자민련 창당에 나서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로 인해 여당이 갈라지고 상호 반목하는 상태는 민주당과 자민련의 선거 공조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이 공조는 자민련이 충청권과 강원도에 집중하는 한편, 전북·전남·광주·서울에 후보를 내지 않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전라남·북도와 광주의 경우에는 자민련 후보의 출마 여부가 변수가 되지 않지만, 서울의 경우에는 그것이 변수가 되고도 남았다.

1995년 3월 26일 자 <조선일보> 5면에 따르면, 1990년 인구센서스 당시 충청도 출신 서울시민은 14.9%이지만 부모의 고향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는 그 비율이 20%로 올랐다. 서울시장 후보를 안 낸 것만으로도 자민련이 민주당을 도왔다고 해석할 만했다.

또 자민련이 강원도에 당력을 쏟아붓고 이로 인해 이곳에서 자민련의 인기가 상승하는 현상은 서울에 거주하는 강원 출신들의 표심에 영향을 줄 만했다. 자민련과 김종필이 조순을 돕고 있다는 인상이 그런 결과를 낳는 데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지금과는 다른 조건 
 

조순 전 서울시장이 지난 1월 20일 자택을 찾아온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 안철수 페이스북

 
그런 속에서 6·27 지방선거는 민자당에 '패배' 이상의 결과를 부여했다. 15개 시도에서 민자당은 5석(경북·경남·경기·인천·부산), 민주당은 4석(전북·전남·광주·서울), 자민련은 4석(강원·충북·충남·대전), 무소속은 2석(제주·대구)을 획득했다.

집권당이 5석을 얻은 일을 지금의 기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때까지의 시·도지사들은 1960년 김상돈 같은 예외적 사례들을 제외하면 전부 다 정부·여당에 의해 임명됐다. 그런 상태에서 1995년에 집권당 출신 시·도지사가 5명으로 줄어들었으니, 오늘날 같으면 패배로 해석될 수도 있는 일이 그때는 참패로 풀이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조순은 '여권 분열에 힘입어 구여권 출신 야당이 제1야당과 제휴해 집권당에 대응하는 구도'에 힘입어 정원식과 박찬종을 따돌렸다. 덕분에 그는 비운의 서울시장 김상돈에 이어 35년 만에 민선 서울시장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1995년의 조순은 민심 이반이 일어나고 집권당이 분열되는 상태에서 선거를 치렀다. 둘로 갈라진 두 개의 여권은 상호 불신했고, 이는 그중의 구여권이 제1야당과 쉽게 연대하도록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래서 조순은 구여권을 향해 구구한 호소를 할 필요가 없었다. 집권당에 맞서는 야당 공조 분위기가 자연스레 형성돼 있었다는 점 역시 조순이 35년 만의 민선 시장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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