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31 11:18최종 업데이트 21.01.31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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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있었다. 그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 생존과 꿈의 경계에 섰다. 같은 경계선을 무난히 혹은 우여곡절을 거쳐 넘은, 같은 시대에 던져진 다른 많은 이들과 달리 그는 경계선을 넘지 못했다. 세계의 폭력에 의해서든, 피하고 싶었지만 피하지 못한 불운에 의해서든 그의 죽음은 역사의 기록이자 시대의 고발이다. 

해방을 앞두고 이역에서 숨을 거둔 윤동주부터 2020년의 어느 청년에 이르기까지, 지속가능바람 저널리스트들은 청죽통한사(청년의 죽음으로 통찰하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청년의 죽음을 취재했다. 청년의 시각에서 새롭게 작성한 '청년의 죽음'은, 그 죽음의 애도이자 더 나은 세상의 모색이다.[편집자말]
1986년 3월 18일 새벽 3시 30분 27살 청년이 죽었다.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 땅에 정의가 넘치고 사랑이 있어야 하며 평화와 평등이 있어야 한다! 끝까지 투쟁하자!
- <박영진>(이인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12.29)

온몸에 화상을 입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채로 마지막 유지를 전한 청년은 남을 위할 줄 아는, 세상과 더불어 살아간 사람이었다. 단 몇 초라도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마음에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고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불꽃이 되었다. 시를 사랑하고, 노래를 사랑한, 무엇보다 사람을 사랑한 그의 이름은 박영진이다.

가슴에 밝힌 등불

영진은 1961년 충남 부여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영진이 국민학교 1학년 때 가족들은 궁핍한 농촌 생활에서 벗어나려고 서울로 올라와 산동네에서 살았다. 마포구 도화동 언덕배기 방 한 칸에서 온 가족이 살다가 금천구 시흥2동 산동네의 은행나무마을 방 두 칸 집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공사판을 전전하는 막노동꾼이었고 어머니는 여의도에서 노점을 하다 노점을 접은 이후 파출부 일을 했다. 아래로 네 명의 동생을 둔 영진은 5남매의 둘째인 여동생 현수가 학업을 중단하고 봉제 공장에 취직해 벌어오는 돈으로 중학교에 다녔지만, 공납금을 내지 못해 끝내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박영진의 가족(뒷줄부터 박영진과 여동생 현수, 그 앞에 아버지와 막내 남동생 영덕) ⓒ <박영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중학교를 그만둔 뒤 그는 공사판 잡일을 돕고 신문을 팔고 구두를 닦으며 용돈을 벌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실에 친구들과 어울려 방황하며 일곱 차례나 구류를 살았다. 돈이 없어 서럽고 비참한 나날들 속에서 영진은 어떻게 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어떻게 살아야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았다고 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었다.
 
모든 것이 사랑에서 싹트고 거두어진다. 우린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찮은 돌멩이, 풀 한 포기일망정.
-  79년 2월 23일 일기

진실에서 정직하게 출발하자. 지난 세월을 발판삼아 좋은 경험이라고 믿고 더욱더 노력, 분투하는 마음 자세를 갖자. 버려진 들국화처럼, 흩어진 쓰레기처럼 살아온 나에게 더욱더 높은 꿈과 이상이 있다.
- 79년 4월 18일 일기

산동네 언덕길을 올라, 칼바위 위에서 동네를 내려다보며 스물셋의 영진은 공부를 다시 해 삶을 바꾸기로 다짐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인간적인 대접을 받기 위해선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리하여 검정고시를 준비하기로 했다.


본격적인 공부를 위해 시흥야학에 들어간 영진은 공장에 다니는 소년, 소녀, 슈퍼마켓 배달부, 구두수선공 등 가지각색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배움의 의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검정고시 합격을 위해 시작한 공부는 영진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야학의 대학생 교사들은 노동운동, 노동자의 권리 등 영진이 본래 배우고자 한 검정고시 공부 이상의 것을 가르쳤다. 당시의 야학은 민주화 운동의 흐름을 타고 생활야학에서 노동야학으로 변하고 있었다. 시험과 무관한 가르침에 당혹하고 합격을 생각하며 조바심이 난 영진은 야학을 관둬야 할지 고민했다.

영진은 학생운동 출신 야학 교사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생각에 빠져들었다. 중등 검정고시에 붙어 고검을 준비하고 대학시험까지 붙는다고 하여도 그때까지의 생활비와 대학 학비를 낼 길은 막막했다. 자신의 뒤에 남겨진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 그리고 동생들의 앞날을 생각했고 한 사람의 더 나은 삶의 이면에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절망이 숨어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영진은 야학 교사들이 건네준 책을 읽으며 이런저런 의문을 품었다. 8시간 노동제를 위해 미국 노동자들이 총에 맞아 죽으며 저항한 <미국노동운동비사>를 읽으며 전율하고, 불법 노동행위 앞에서 우리나라 노동법의 유명무실함을 보여주는 <근로자의 벗>을 읽으며 분노했다.

<전태일 평전>을 읽고 깊게 감명받은 그는 자신과 같은 노동자들이,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과 같은 사람들이, 이 나라의 모든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마침내 결심했다.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한 야학 공부는 그를 각성한 노동자의 길로 이끌었다.
 
인간의 창조적 행위인 노동에 대한 자부심의 확인, 노동자로서 자신에 찬 모습을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는 한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 83년 어느 날의 일기

모두가 정당한 대가를 받고 인격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은 노동자 스스로가 깨어나 함께 일어서지 않으면 절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 84년 1월 13일 일기

희망의 불씨

 

박영진 열사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84년 7월 서울 구로구 구로동의 동일제강에 들어간 영진은 본격적으로 노동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온 힘을 다해 동료들에게 노동법을 알리고 노동조합의 필요성에 관해 이야기했다. 당시 동일제강에는 영진 말고도 다른 현장 활동가들이 있었다. 영진은 이들과 함께 친목회를 만들고 다른 노동자들에게 노동법을 교육했다. 노동자들은 휴식 시간이면 삼삼오오 모여 회사의 문제점을 말하며 노동조합이 결성된 이후의 더 나은 삶에 희망을 품게 되었다.

동일제강은 노동자들에게 회식을 시켜준다는 명목으로 월급날 무조건 500원씩 일괄적으로 '밤비'를 걷었다. 당시 동일제강 초임은 10만 원 미만이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밤비 인상이 일방적으로 현장에 전달되었다. 불만을 토로하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영진은 그동안 밤비를 쓴 내역과 회식을 자주 하지 않는데도 왜 밤비를 인상해야 하는지를 반장에게 질문했다.

달라진 작업장 분위기에 회사는 영진을 위험 인물로 찍었고 뒷조사를 통해 사내 노동자 모임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영진을 포함한 열다섯 명의 노동자는 권고사직 형태로 해고당했다.

해고당하지 않은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꾸준히 노동자 모임을 했고, 부당노동행위로 회사를 고발한 해고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했다. 동일제강의 관리자들이 모두 철조망 반 반장의 부친상에 문상에 간 날, 영진은 관리자가 없는 틈을 타 현장에 몰래 들어가 소식지를 나누어 주었다. 발각되어 경비들을 피해 도망가면서 담벼락을 넘는 순간까지도 영진은 모든 노동자가 단결해야만 노동조합을 만들어 권리를 되찾을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노동조합 결성을 위한 영진과 노동운동가들의 노력은 노동조합 입회 원서가 30장 넘게 모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1985년 4월 30일 영진을 포함한 노동조합 결성 준비위원들은 한국노총 건물 6층 사무실을 점거하고, 식순에 따라 노동조합 결성식을 치렀다.

하지만 노동조합 설립신고서를 구로구청에 제출하고 나오며 기쁨에 겨웠던 것도 잠시, 노조 결성은 취하되었다. 두 개의 시·도에 공장이 있을 때는 신고서를 구청이 아닌 노동부에 제출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신고서가 반려된 것이다.

노동조합 결성식에서 선출된 일부 노조 위원들과 해고자들은 법외 노조를 만들고 현장 노동자들에게 조합 가입을 권유하며 민주노조 설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법외 노조는 부당노동행위와 임금 산정 위반 사례를 들고 회사로 들어가 단체교섭에 임할 것을 요구했다. 회사가 노조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며 교섭을 거부하자 법외 노조는 1985년 5월 7일 야근을 끝낸 시점에 파업에 돌입했다.

영진은 일련의 투쟁을 지켜보며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스스로 정치적 주체가 되어야 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1985년 8월 25일 서울지역 노동자 150여 명이 모여 최초의 노동자대중정치조직인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이 탄생한다. 서노련이 다소 급진적이라 생각한 영진은 서노련과 별개로 조직된 '구로지역 선진노동자회'에 가입하여 노동운동을 이어 나갈 것을 다짐했다.

동일제강의 싸움 이후 그는 새로운 사업장을 모색하다 1985년 9월 18일 당시 악덕 기업으로 소문나있던 신흥정밀에 입사했다. 비록 법외노조이지만 동일제강에서 어느 정도 노조결성에 성공했다고 판단해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한 영진은 신흥정밀로 옮겨 새로운 투쟁을 준비했다.

불씨는 횃불이 되어
 

1986년 생전의 박영진(왼쪽) ⓒ <박영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영진이 1985년 9월 18일에 입사한 서울 구로구의 신흥정밀은 볼펜을 만드는 곳으로 노동자 450여 명이 일했다. 일당으로 만 18세 미만 노동자는 2880원, 군대를 제대한 남자 노동자는 3080~3480원을 받았다. 노동자들은 매달 10만 원이 안 되는 임금을 손에 쥐었다. 생리수당, 특근수당, 잔업수당 등 일당 외 어떤 수당도 지급하지 않았을뿐더러 회사는 8시간 기본 근로시간을 마음대로 9시간으로 변경해 1시간의 노동을 부당하게 갈취하고 있었다.

영진은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와 함께 신흥정밀 동료들에게 노동법과 노동자 의식을 가르치려 노력했다. 1986년 새해가 되자 영진은 그동안 만나온 다른 부서의 활동가들과 함께 '공장소위원회'라는 모임을 구성하고 라인별 소그룹 결성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영진이 일하던 5계를 제외한 다른 라인의 조직 작업은 부진했다. 당시 신흥정밀 활동가들은 공동투쟁 방향을 두고 격론을 벌였다. 노동운동의 방법론과 속도에 있어 서노련에 속한 이들과 영진의 견해가 달랐다. 내실 있게 하며 가자는 영진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기는 했지만 공동투쟁의 날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다시 한번 갈등을 빚었다.

영진은 공동투쟁을 서두르는 서노련 소속 노동자들의 의견에 반대했다. 싸움을 서두르면 곧바로 조직이 드러나 와해할 것으로 판단한 그는 더 많은 노동자가 뜻을 함께할 때까지 싸움을 늦추자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다수결을 통해 공동투쟁의 날이 1986년 3월 17일로 정해지자 영진은 승복하고 동료들을 다독이며 싸움에 최선을 다하기로 한 뒤 투쟁을 준비했다. 이날 임금인상을 위한 파업투쟁을 계기로 노동조합을 결성한다는 계획이었다.

1986년 3월 5일부터 신흥정밀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위험수당 지급, 부당노동행위 중지를 내걸고 잔업 및 특근 거부에 돌입했다. 10~14일에는 일터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알리는 현장 소식지를 영진이 직접 써 작업장 곳곳에 배포하고 전봇대 같은 곳에도 부착했다.

마침내 1986년 3월 17일 아침. 청년 노동자들은 파업농성을 위한 모든 준비를 끝냈다. 아침과 점심을 라면으로 대충 때운 그들은 동료 노동자의 지하 셋방에서 소식지와 가방을 챙겨 신흥정밀로 향했다.

생을 집어삼킨 불꽃이 일던 날

점심 시간에 맞추어 도착한 작업장의 식당은 다른 부서 사람들은 없고 2계 노동자들만이 자리해 평소와 다르게 조용했다. 당황한 영진이 식사 중인 노동자에 물으니 민방위 훈련 때문에 부서별로 자리를 나누어 식사하고 있다고 했다. 모두가 모인 장소에서 노동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파업을 결의할 당초 계획이 흐트러지자 영진은 싸움을 중지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밥을 먹고 있던 관리자들이 쫓아와 "빨갱이 놈들, 회사에서 나가라"라고 몸을 밀치며 싸움이 벌어졌고, 영진을 비롯한 활동가들은 상황을 파악할 겨를 없이 농성에 돌입했다.

이들은 관리자들을 밖으로 밀쳐내고 식탁과 의자로 식당 문을 막은 뒤 노동자들에게 '우리의 주장'이라는 유인물을 나누어주었다. 영진은 식탁으로 올라가 소리쳤다. "8시간 노동제를 보장하라!" 식당 안의 다른 노동자들은 망설였지만 이내 소식지의 임금인상 글귀에 눈을 맞추고 활동가들의 구호를 따라 외쳤다.

식당 밖으로 쫓겨난 관리자들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대충 만들어놓은 바리케이드를 뚫기 위해 각목으로 식당 문 유리창을 깨부수고 몸으로 밀고 들어와 노동자들을 향해 돌을 던지고 소화기를 쏘았다. 아비규환이었다.

영진은 돌을 피해 뒤로 물러나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마음에서 난로에 있던 석유통을 꺼내 온몸에 들이부었다. 매캐한 석유 냄새가 식당 안을 가득 채웠다. "모두 옥상으로 올라가!" 영진은 소리쳤다. 이미 식당의 바리케이드는 무너졌고 관리자들이 식당 안으로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영진은 네 명의 노동자와 함께 작업장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곧장 형사와 현장을 둘러싸고 있던 전투경찰, 신흥정밀의 관리자들이 뒤쫓아 올라왔다.

"다가오지 마. 다가오면 분신하겠다!"

영진이 형사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소리쳤다. 그의 뒤에서 다른 두 노동자는 옥상 난간에 바짝 붙으며 다가오면 투신하겠다고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일당 1080원을 인상하라! 노동 삼권 보장하라!"

영진은 또 다른 노동자에게 라이터와 성명서를 건네받았다.

"노동자의 정당한 요구를 더이상 탄압하지 말고 즉각 물러가라! 열 셀 때까지 물러가지 않으면 분신하겠다!"

현장의 노동자들이 절규했다. 여성 노동자들이 "오빠! 그러지 말아요!"라고 소리 지르며 울고 있었다. 다른 공장의 노동자들은 멀리서 불안한 얼굴로 옥상의 대치를 바라보며 발을 굴렀다. 영진은 옥상 난간으로 올라가 하나부터 경고의 숫자를 셌다.

"열!"

하늘을 한 번 올려다 본 영진의 손이 허공을 긋자 성명서에 붙었던 불길이 화르륵 소리를 내며 영진의 몸으로 따라붙었다. 시뻘건 불길이 봄 햇살을 붉게 물들이며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노동운동 탄압하지 말라!"

불길에 휩싸여 몇 마디 더 소리치던 영진은 휘청이다 쓰러졌다. 넋이 나가 바라보기만 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혼란을 틈타 경찰이 일제히 달려들어 난간에 매달린 노동자들의 사지를 잡아채어 끌어내리고 현장의 노동자들을 작업실로 내쫓았다. 신흥정밀 옥상에 남은 것은 살이 타는 냄새와 영진의 몸에서 피어올라 하늘로 사라지는 희뿌연 연기뿐이었다.
 

운명하기 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박영진 열사 ⓒ <박영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같은 날 오후 신흥정밀의 상무와 관리과장이 산동네에 있는 영진의 집을 찾아왔다. 그들은 회사에서 작은 일이 있었다며 영진의 아버지에게 10만 원이 든 봉투를 건넸다. "회사에서 아이들끼리 쌈박질을 했다. 영진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 아니며 상처가 큰 것도 아니다. 치료비는 회사에서 다 지불하겠다"라고 둘러댄 그들은 병원에 들른다고 이야기 하고 영진의 아버지를 데리고 나가 밤새 술집에서 술을 먹였다.

늦은 저녁 손님을 배웅하고 잠들 준비를 하던 영진의 어머니를 아들의 후배라는 청년이 찾아왔다. "빨리 병원에 가셔야 한다"라는 청년과 함께 그는 병원으로 향했다. 전투경찰이 에워싼 강남성심병원에 도착해 중환자실에 들어간 그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변한 아들을 마주했다. 비명 같은 울음 소리를 내지르던 어머니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가슴을 쥐어뜯으며 아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불렀다. 1986년 3월 18일 오전 3시 30분. 영진은 27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잿더미 속에서

영진이 한 줌의 재가 된 이후 곳곳에서 그의 뜻을 잇는 움직임이 터져 나왔다. 신흥정밀 해고자를 포함한 노동자 13명이 18일 오후 6시 15분경 구로공단 입구 오거리 철탑 옆의 미용실을 점거하고 "영진이를 살려내라! 노동운동 탄압 말라!"고 울부짖으며 농성을 벌였다. 대림동 앞에서는 100여 명의 대학생이 기습 시위를 벌이며 노동운동을 탄압하지 말라고 외쳤고, 구로역에서도 노동자와 학생들이 철도를 점거하고 "영진을 살려내라"고 소리쳤다.

21일부터 수십 명의 노동자가 전태일 열사 기념관에서 영진의 유지를 이어받아 여러 날에 걸친 싸움을 전개했다. 23일 오후 3시에 서노련이 주최한 박영진의 장례식을 치르려고 60여 명의 노동자가 전태일 열사 기념관에 모였지만 경찰이 기념관 밖의 노동자들에게 최루탄을 퍼부었다. 신흥정밀 안에서 한 노동자가 조회 시간에 "박영진의 죽음은 우리 모두의 죽음이다"라고 외치다 경찰에 끌려갔다.

1986년 4월 28일 전태일이 잠들어 있는 마석 모란공원에서 영진의 장례식이 준비되고 있었다. 하지만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로부터 묘지를 내주지 말라는 협박을 받은 묘소관리소장은 묘지를 쓸 자리를 내줄 수 없다고 통보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은 화장한 영진의 유골을 전태일과 합장하겠다며 관리소와 싸웠다. 결국 관리소는 전태일 묘로 이어지는 사람이 다니는 길을 떼어 묏자리를 내어놓았다. 길가에서는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모란공원에 있는 박영진의 묘 ⓒ 지속가능바람

 
박정희 정권은 분신한 전태일의 유해가 서울 도심에 묻히길 원치 않았다. 보안당국은 전태일의 묘지를 서울과 먼 곳에 조성하길 종용했고 유가족은 모란공원을 묘소로 골랐다. 흙과 바위가 가득했던 모란공원은 전태일을 시작으로 민주화 열사들의  혼이 잠든 곳이 되었다. 전태일을 가장 존경했던 영진 또한 한 줌 재가 되어 모란공원에 묻혔다.
 
만인을 위한 꿈을 하늘 아닌 땅에서 이루고자 한 청춘들 누웠나니
스스로 몸을 바쳐 더욱 푸르고 이슬처럼 살리라던 맹세는 더욱 가슴 저미누나
의로운 것이야말로 진실임을 싸우는 것이야말로 양심임을
이 비 앞에 서면 새삼 알리라
어두운 세상 밝히고자 제 자신 바쳐 해방의 등불 되었으니
꽃 넋들은 늘 산 자의 벗이오 볕뉘라
지나는 이 있어 스스로 빛을 발한 이 불멸의 영혼들에게서 불씨를 구할지어니
- 민족민주 열사·희생자 묘역 추모비


- 박수연: 이화여자대학교 컴퓨터공학과 2학년 재학. 호기심과 열정으로 삶을 꾸려나간다.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가 균형을 이루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안치용: 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 공부가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죽통한사'를 함께 진행한다.
- 노수빈: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재학. 영화와 소설을 좋아하며 무엇이든 읽고 보고 쓰는 것에 열심이다. 요즘은 늦은 밤 홀로 걷는 것에 빠져있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단행본
이인휘, 『박영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12.29.

기사
「焚身(분신)자살 근로자 朴永鎭(박영진)씨 장례식」, 동아일보, 1986.04.28.
「民統聯(민통련)·근로자등 百(백)여명 가두시위」, 동아일보, 1986.03.24.
「32명 연행조사 九老工團(구로공단)앞 세곳 百(백)20명시위·농성」, 동아일보, 1986.03.20.
「2개大学生(대학생) 1백여명 九老工団(구로공단)서 가두시위」, 동아일보, 1986.04.06.
「全泰壹館(전태일관)서 농성 근로자69명 연행」, 조선일보, 1986.03.26.
「“민주열사 묘역 초라해 눈물 나”」, 한겨레, 2012.10.03.

기타
「박영진 열사의 생애와 투쟁사」, (사)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연구소
http://dli.nodong.net/RUN/mgr/yolsa_mgr.php?act=view&seqno=2
「박영진열사여, 그대 이 어둠속의 한줄기 강렬한 햇살이여!」, (사)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연구소 http://dli.nodong.net/RUN/mgr/yolsa_mgr.php?act=view&seqno=2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https://www.minjuroad.or.kr/location/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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