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25 13:18최종 업데이트 21.01.25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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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처음으로 승소한 8일 오후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 고 배춘희 할머니를 비롯해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 연합뉴스

 
지난 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고 배춘희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12인에 대해 일본 정부가 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이와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은 18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2015년도에 양국 정부 간에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가 있었다"라며 "한국 정부는 그 합의가 양국 정부 간의 공식적인 합의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라고 발언했다.
 
위 위안부 판결의 효력 확정 전날인 22일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대신은 "항소할 일이 없다"라고 밝혔다. 판결에 승복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소송이 될 수 없는 일이므로 항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22일 자정에 배상 판결이 확정되자 그는 23일 외무대신 담화를 통해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의 준수를 촉구하며 공세에 나섰다.
 
그는 "2015년 12월 일·한 외교장관회담 합의에서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및 불가역적인 해결이 확인되었습니다"라고 한 뒤 "한국 정부도 이 합의가 양국 정부의 공식 합의임을 인정하고 있으며, 국제 사회가 한국의 합의 이행을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언급했다.
 
모테기는 위와 같이 '위안부 합의는 공식 합의'라는 문 대통령의 발언을 상기시키면서 "한국에 대해 국가로서 스스로 책임지고 즉시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하기 위하여 적절한 조치를 강구할 것을 다시 강력히 요구"한다고 발언했다. 배상책임을 져야 할 쪽이 도리어 '적절한 조치'를 강력히 요구하고 나온 것이다.
 
이 같은 적반하장에 대해 우리 외교부는 상당 정도로 수용하는 태도를 취했다. 23일 외교부는 입장문을 통해 "이번 소송 판결과 일본 측 담화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은 다음과 같습니다"라며 이렇게 언급했다.
 
우리 정부는 2015년 위안부 합의가 한·일 양국 정부 간의 공식 합의임을 인정함. 동시에 피해 당사자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정부 간의 합의만으로 진정한 문제 해결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혀 왔음.

이에 따라, 우리 정부는 일본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는 어떤 추가적인 청구도 하지 않을 방침이나, 피해 당사자들의 문제 제기를 막을 권리나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음. 

우리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들과 상의하며 원만한 해결을 위해 끝까지 노력할 것이지만, 일본측 또한 스스로 표명했던 책임통감과 사죄·반성의 정신에 입각하여 피해자들의 명예·존엄 회복과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진정한 노력을 보여야 할 것임. 

아울러,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세계에서 유례없는 전시 여성의 인권 유린이자 보편적 인권 침해의 문제로서, 국제인권규범을 비롯한 국제법을 위반한 것임을 직시해야 할 것임.

우리 정부는 동 판결이 외교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검토하여, 한일 양국간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협력이 계속될 수 있도록 제반 노력을 기울이겠음.
 
문 대통령의 발언에 입각해 외교부가 위안부 합의의 유효성을 위와 같이 확인했다. 2015년 합의에 따라 이번 위안부 판결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내비친 셈이다.
 
2015년 '위안부 합의' 인정한 정부

박근혜 정권 때인 2015년 12월 28일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외무대신이 발표한 '한일 위안부 합의'는 ① 일본이 사죄 및 반성을 표할 것 ② 일본 정부 예산으로 재단을 세워 상처 치유에 나설 것을 조건으로 한국이 이 문제의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에 동의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촛불혁명 뒤에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2017년 12월 27일 자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2015.12.28.) 검토 결과 보고서'를 통해 위안부 합의의 효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이 보고서는 "협의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않은 채 정부 입장을 위주로 합의를 매듭지었다"라는 점 등을 거론하며 "이번의 경우처럼 피해자들이 수용하지 않는 한, 정부 사이에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선언하였더라도 문제는 재연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뒤이어 2018년 1월 9일에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발표를 통해 '2015년 위안부 합의는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라는 원칙을 천명했다. 한·일 위안부 합의가 최종적·불가역적 해법이 될 수 없다고 못 박은 것이다.
 
그랬던 문재인 정부가 올해 들어 종전 태도를 바꾸었다. 신년 기자회견 때 문재인 대통령이 운을 떼고 외교부가 새로운 방침을 공식 발표했다. 국민적 공분의 대상인 2015년 위안부 합의를 존중한다는 발언이 신년 기자회견 때 즉흥적으로 나왔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문재인 정부가 방침 선회를 준비해왔다는 점을 시사하는 일이다.
 
자가당착

문제는 이 같은 방침 선회가 과연 적절한가 하는 점이다. 이런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정부의 새로운 공식 견해가 된 23일 자 외교부 입장문이 자가당착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외교부 입장문은 '위안부 합의가 양국 정부 간의 공식 합의임을 인정한다'라고 하면서 '피해자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 정부 간 합의는 진정한 해법이 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두 말이 모순된다는 점은 그간의 상황 전개로도 충분히 드러난다.
 
2017년 12월 보고서를 통해 정부가 위안부 합의의 효력에 의문을 제기하고 2018년 1월에 강경화 장관이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라고 표명한 근거 중 하나는 '피해자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았다'라는 점이었다.
 
23일 자 외교부 입장문은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한다고 하면서도, 피해자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한·일 위안부 합의의 효력을 공식 인정한다고 선언했다. 한국 정부의 방침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법률문제에서 자주 거론되는 용어 중 하나가 사정 변경 원칙이다. 법률행위의 전제가 됐던 특정 사정이나 상황에 중요한 변동이 생겼을 경우에 계약이나 합의에 변경을 가하는 원칙이다.
 
정부가 2018년 1월에 위안부 합의를 부정한 근거 중 하나는 피해자 의사의 미반영이었다. 만약 그 후로 피해자 의사가 반영된 새로운 한·일 합의가 도출됐거나 일본의 태도가 전향적으로 바뀌었다면, 사정 변경 원칙을 근거로 위안부 합의의 효력을 재검토할 여지가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변화가 생기기는커녕 일본이 더욱더 뻔뻔하게 나오고 있다. 한일 위안부 합의의 효력을 부정했던 일을 재검토해야 할 사정이 생기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과 외교부가 종전 방침을 철회했으니, 명분과 원칙이 결여된 후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2018년 1월에 정부가 표명한 원칙은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문 대통령과 외교부의 일방적 후퇴는 그 같은 국민의 성원을 거스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문 대통령과 외교부의 태도 변화가 일본 정부에 힌트를 줄 수 있다는 점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신년 기자회견 때 문 대통령은 위안부 합의에 대한 생각을 밝히면서 대법원 강제노역 판결과 관련된 강제 집행 문제를 언급했다. 그는 "그런 부분들이 강제집행의 방식으로 현금화된다든지 판결이 실현되는 방식은 한·일 양국 간의 관계에 있어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발언했다.
 
강제노역 문제에 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위안부 문제를 언급하다가 나온 발언이었다. 그래서 이 발언은 일본제철의 강제노역 판결 거부로 인한 한국 내 자산 압류 조치와 유사한 것이 위안부 판결과 관련해서는 나오지 않기를 희망하는 메시지로 읽힐 여지도 있다.
 
강제집행 방식이 아니고는 피해 배상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 대통령이 강제집행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피력했다. 일본으로서는 위안부 판결이 강제집행 상황으로 발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본 정부가 사과하거나 배상할 가능성은 더욱더 낮아질 수밖에 없게 된다.
 

문재인 대한민국 대통령(왼쪽)과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오른쪽). ⓒ 오마이뉴스


법원 판결 강제집행 없을 거라는 신호
 
외교부 입장문에도 문 대통령 발언과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 있다. 입장문은 한편으로는 일본의 "책임 통감"을 촉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우리 정부는 일본에 대해 어떤 추가적인 청구도 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선언했다.
 
책임을 통감하지 않는 일본에 대해 책임 통감을 촉구하는 것은 실효성이 낮다. 또 '통감'이란 표현이 강렬한 어감을 주기는 하지만, '책임 통감'은 어디까지나 '책임 이행'보다 낮은 단계라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가 책임 이행을 촉구하지 않고 책임 통감을 촉구하는 것으로 그친 것은 일본에 대한 정당한 대응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또 다른 점은, 책임 통감을 촉구하는 대목에 앞서 '피해자를 위해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겠다'라고 확언했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강제집행 방식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피력했고 외교부가 피해자들에 대한 외교적 보호가 없을 거라고 이처럼 선언했기 때문에, 피해자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와 싸워 배상을 받아내려면 매우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 한다. 대통령과 외교부의 언명은 '할머니들이 알아서 싸워보시라'며 등을 떠미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는 일본 정부를 향한 묵시적 힌트가 될 수도 있다. 피해자들이 정부의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며 위안부 배상 판결이 강제집행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힌트 말이다. '그냥 가만히 계셔도 된다'라는 메시지를 스가 요시히데 총리에게 전달하는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 때인 2011년 8월 30일에 헌법재판소는 '대한민국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는 것은 헌법 위반'이라고 결정했다(2006헌마788 결정). 국가가 위안부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로 헌법재판소가 제시한 이유가 인상적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못다 한 국가의 국민 보호 의무를 대한민국정부가 이제라도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헌법은 전문에서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의 계승을 천명하고 있는 바, 비록 우리 헌법이 제정되기 전의 일이라 할지라도 국가가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여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의무를 수행하지 못한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어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말살된 상태에서 장기간 비극적인 삶을 영위하였던 피해자들의 훼손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회복시켜야 할 의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지금의 정부가 국민에 대하여 부담하는 가장 근본적인 보호의무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행정부가 사법부의 구체적 재판에 간여하면 삼권분립 원칙에 위배되지만, 외국의 불법행위로 인해 피해를 받은 국민이 사법부 판결로도 구제를 받지 못할 경우에는 행정부가 나서는 게 당연하다. 이것은 삼권분립 원칙을 운운할 사안이 아니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승소한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일본에 전했다. 일본 정부가 피해자들을 정당하게 대우하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도 않은 상황에서, 대한민국정부가 대한민국 국민을 끝까지 보호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띄운 것이다.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하면 된다'라고 일본에 귀띔해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의 방침 선회는 한일관계 복원과 한미일 삼각동맹 강화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일 관계나 한미일 삼각동맹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외국 때문에 피해를 본 우리 국민을 지키는 가장 근본적인 보호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다.
 
외교 동맹의 일차적 목표는 우리 국민의 이익과 관련돼야 한다. 외국 때문에 피해를 본 자국민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면서 외국과의 동맹을 우선시한다면, 문재인 정부는 무엇 때문에 외교를 하는가라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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