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17 11:51최종 업데이트 21.01.17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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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개막된 북한의 조선노동당 제8차 당대회는 노동당을 강화하고 군대를 약화시키는 권력기구 개편을 단행하는 한편 미국의 적대정책 폐기와 남한의 합의이행을 촉구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조선노동당 당대회는 북한에서 김일성 리더십이 안정 궤도에 오르는 시점부터 열리기 시작했다. 1946년 8월 28일 개회한 제1차 대회는 김일성이 거물급 라이벌과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한 직후에 개최됐다.  

이 시기의 북한은 소련공산당의 영향을 받았다. 1946년과 이듬해의 북한 상황을 1992년 <아시아문화> 제8호에 실린 서대숙 하와이대 교수의 논문 '소련 군정: 개설'은 이렇게 정리한다.
 
전승국 사이에 합의된 신탁통치 문제가 남북 간의 격렬한 대립과 미·소 간의 심각한 불화를 야기하자, 소련군은 미국 및 남한 측과 타협을 추진하는 한편, 북한에서 독자적으로 민주개혁을 단행하고 북한만을 상대로 임시정권을 만들었다. 1947년 2월에는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 대회를 개최해서 북조선인민회의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북한 통치에 들어갔다.
 
소련이 이북 리더십에 입김을 행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해방 2개월 뒤인 1945년 10월 14일 만 33세의 김일성을 북한 대중 앞에 세운 소련은 62세의 민족주의자 조만식을 끌어들임으로써, 김일성이 앞서는 가운데 김일성과 조만식 양자가 부각되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김일성-조만식 구도는 소련이 참여한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 결과에 조만식이 반대를 표명하면서 끝났다.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조만식이 1946년 1월 5일 연금되면서 이 구도는 단명으로 종결됐다.


그 뒤 김일성은 또 다른 라이벌 구도도 넘어서야 했다. '남로당' 하면 연상되는 박헌영이 그 구도의 한 쪽을 차지했다.

박헌영에게 관심 보인 스탈린 
 

해방 직후 박헌영. ⓒ wiki commons

 
조만식이 연금될 당시 46세였던 박헌영은 충남 예산에서 1900년에 태어났다. 미곡 판매업을 하는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예산군 대흥보통학교, 경성고등보통학교(중학교, 훗날 경기고로 발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영어반에서 공부한 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하이로 건너갔다.

제국주의 일본을 극복하는 방편 중 하나는 제국주의의 적인 공산주의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고국을 떠난 박헌영은 그 길을 택했다. 그는 공산당 활동을 방편으로 삼았다. 또 공산주의 외교에도 참여했다. 22세 때인 1922년,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자대회에 고려공산청년동맹 대표로 참가했다. 이 해에 공산당 조직을 구축할 목적으로 귀국했다가 체포돼 1년 6개월 복역했다.

24세 때 출소한 뒤에는 동아일보 및 조선일보 기자로 잠시 근무하며 조선공산당 창당 등의 활동을 하다가 25세 때인 1925년 11월 종로경찰서에 체포됐다. 이때 받은 극심한 고문이 그에게 정신적 문제를 안겼다.

역사저술가 겸 소설가인 안재성의 <박헌영 평전>은 "변호사들이 감방에 들어가 보니 큰 병을 앓은 사람처럼 초췌해진 박헌영은 인사할 생각도 않고 주저앉아 횡설수설하기만 했다"라고 말한다. 1927년 9월인 이때 그의 상태를 확인한 세 변호사 중 한 명이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할아버지인 김병로다.

박헌영의 건강은 더욱 악화돼, 혼자서 벽을 보며 웃기도 하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다가 발견되기도 하고, 배설물을 손에 묻혀 벽에 바르기도 했다. 결국 그해 11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1년 뒤 그는 국내를 탈출했다. 하지만 러시아와 중국을 무대로 뛰던 중인 1933년에 상하이에서 체포돼 국내로 압송된 뒤 징역 6년을 선고받고 만기 출소했다. 그 뒤 기와공장 노동자 등으로 살며 비밀 활동을 벌이다가 해방 나흘 뒤인 1945년 8월 19일 서울로 가서 공산당 재건에 착수했다.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해방정국에서 주요 지도자로 부각됐다.

박헌영의 조직 기반은 38선 이남에 있었지만, 이 조직은 공산주의 그룹이었기에 미군이 주둔한 남한에서 자유를 갖기 힘들었다. 거기다가 모스크바 3상회의를 계기로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파가 보수파와 연대해 반탁운동을 전개하면서 좌파와의 공조를 거부했기 때문에, 박헌영 같은 인물들은 주변부로 밀려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 박헌영은 38선 이북에서 운신의 폭을 넓혔다. 이때까지 그는 '남'조선공산당의 리더가 아니라 '조선'공산당의 리더였다. 또 아직은 서울이 한반도 전역의 중심이었다. 이는 그가 38선 이북에서 김일성과 경쟁할 수 있도록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가 이북에서도 경쟁력이 있었다는 점은 1995년 국내에 소개된 소련 극비문서에서도 드러난다. 문서에 따르면, 소련은 미·소 공동위원회(미소공위)와 함께 신탁통치를 협의할 남북 전역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경우에 김일성보다 박헌영을 상급에 두는 방안을 검토했다.

위 문서를 보도한 1995년 2월 14일 자 <중앙일보> 기사 '소련 해방 직후 내각제 좌익 임정 구상'은 소련 점령군 스티코프 대장이 "수상에 여운형, 부수상에 박헌영과 김규식, 내무상에 김일성, 산업상에 김무정, 교육상에 김두봉, 선전상 오기섭, 노동상 홍남표, 계획경제위원장 최창익 등을, 나머지 농림상·재정상·교통상·체신상·보건상·상업상 등은 미국이 추천한 인사로 임명한다는 내용의 임시정부 조각안을 미소공위 개최 직전인 46년 3월 7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등에 긴급 보고했다"라고 보도했다.

수상 후보 여운형과 부수상 후보 김규식의 기반은 이남에 있었다. 이북에서 활동이 가능한 인물 중에서는 박헌영이 최상위, 김일성이 그다음에 배치됐다. 소련 점령군이 김일성보다 박헌영이 전국적 위상이 더 높다고 판단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다. 박헌영이 이북 무대에 나설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박헌영은 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김일성 권력의 원천 중 하나인 소련공산당을 노크했다.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서기장을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2010년에 <21세기 정치학회보> 제20집 제1호에 실린 이철순 부산대 교수의 논문 '소련의 북한 정치세력에 대한 정책: 1945-1948'은 "박헌영은 대담하게 김일성과 소련 점령군의 한반도 정책을 비판하는 편지를 1946년 5월 KGB 극동지부에 보냈다"라며 "김일성과 소련 점령군이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배격하고 김일성 빨치산 부대를 중심으로 한반도의 공산혁명을 추진함으로써 많은 잘못이 저질러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라고 말한다.

<박헌영 평전>에 따르면, 스탈린에게 전달된 위 편지에는 '김일성의 무력통일 노선으로는 남한 혁명을 달성할 수 없으며 평화적 방법으로 남한 정국을 이끌어야 한다'라는 요지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라 또 다른 전쟁에 부담을 느끼던 스탈린은 '평화적 방법'에 마음이 동했다. 그는 김일성에게 마음이 가 있으면서도 박헌영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래서 성사된 게 1946년 7월 20일경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박헌영의 회견이다.

당시 김일성의 권력은 항일투쟁 경력과 군사적 기반 그리고 38선 이북에서의 지명도 등에 기초를 뒀지만, 소련의 지원에도 적지 않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회견의 성사는 김일성에게는 불안하고도 불쾌한 일이고 박헌영에게는 희망을 갖게 하는 일이었다. 북한 정권에 영향을 미치는 스탈린이 김일성과 그를 비판하는 박헌영을 한 자리에 부르는 것은 일종의 '면접 심사'였다.

그렇지만 이 자리는 박헌영에게 유리한 전기를 제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김일성에 대한 모스크바의 신뢰만 강화했다. 김일성·박헌영의 브리핑이 끝난 직후의 상황에 관해 위 논문은 "듣고만 있던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소련군정의 협력을 받아 북한의 소비에트화 정책을 조기 실현시키도록 투쟁하라'라고 지시했고, 박헌영에게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분투하는 그대의 혁명 투쟁을 높이 평가한다'라고 격려했다"라고 설명한다.

논문에 실린 소련군 레베데프 장군의 증언에 따르면, 스탈린이 김일성을 재신임한 것은 그가 소련군에 소속한 경력이 있다는 점, 소련의 명령을 잘 이행했다는 점, 항일영웅으로서 38선 이북에서 지명도가 높다는 점, 학식과 이론은 약하지만 소질과 신념이 강하다는 점 등 때문이었다.

한편, 박헌영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그가 이론적으로는 풍부했지만 스탈린이 싫어하는 국제 공산주의 조직인 코민테른에 관여한 경력이 있고, 3차례나 투옥됐기 때문에 일본과 모종의 연관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38선 이북에서는 김일성보다 덜 알려졌다는 점 등 때문이었다.

통일 되면 박헌영, 분단 상태라면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기 내각상(제1열 좌측부터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정준택, 부수상 겸 산업상 김책, 부수상 홍명희, 수상 김일성,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민족보위상 최용건, 문화선전상 허정숙, 제2열 보건상 리영남, 국가검열상 김원봉, 교육상 백남운, 교통상 주녕하, 상업상 장시후, 재정상 최창익, 내무상 박일후, 제3열 농업상 박문규, 무임소상 리극로, 도시행정상 리용, 체신상 김정주, 사법상 리승엽, 로동상 최성택) ⓒ NARA / 박도

 
소련은 신탁통치에 대비해 한국임시정부가 세워질 경우에 박헌영을 김일성보다 상급에 두는 방안을 검토했다. 그러면서도 북한 정권 내에서는 김일성을 상급에 두겠다는 의지를 위 회견을 통해 표출했다. <박헌영 평전>은 "남북이 통일될 경우는 박헌영이 보다 지도적인 위치에 놓이지만, 분단된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확고한 직위를 유지한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무방했다"라고 평한다.

박헌영은 '면접 심사'의 기회를 얻었지만 스탈린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김일성의 권력이 오로지 소련의 지원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일은 김일성의 입지를 도리어 강화했다. 그로부터 1개월 뒤 제1차 당대회가 열렸고 북한의 당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강해져 갔다.

그렇지만 박헌영은 이북 활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려운 여건에서 분투하는' 중에도 그는 그 비중을 더욱 높였다. 회견 2개월 뒤인 1946년 9월 29일 그는 비밀 월북을 단행했다. 2개월 뒤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이 남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됐고 그는 부위원장으로서 '박헌영 편지'를 통해 이남의 남로당 활동을 이끌었다.

이남 조직을 기반으로 이북에서 활동하는 '분투'를 거듭하던 그는 1948년 수립된 북한 정부에서 부수상 겸 외상이 됐고 1950년에는 인민군 중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하지만 전쟁 중에 위상이 공고해진 김일성에게 밀려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 3일 체포되고 간첩 및 반역 등의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김일성을 모스크바까지 가서 재심사를 받도록 한 박헌영은 그렇게 몰락했다.

사망 시점은 불투명하다. <박헌영 평전>은 김일성의 특명을 받은 방학세 내무상이 1956년 7월 19일 밤중에 그를 지프차에 태워 평양 외곽 야산으로 끌고 간 뒤 권총으로 직접 사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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