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05 08:14최종 업데이트 21.01.05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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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개성시 룡흥동에서 고려 2대 혜종(912∼945년)의 무덤이 발굴됐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019년 10월 23일 보도했다. ⓒ 연합뉴스

 
어렵사리 정권을 획득한 사람들 중에 섣부르게 관용을 베푸는 이들이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아들인 제2대 혜종 왕무(재위 943~945)도 그랬다.

혜종은 장남이었지만 이 지위만으로 왕위를 잇기에는 불리한 점이 많았다. 상류층의 관점에서 볼 때 어머니인 장화왕후 오씨의 가문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주로 관료나 지식인들이 역사서를 집필했기 때문에 역사책에 나오는 '한미한 가문'이란 표현은 그들의 관점을 기준으로 한다. 일반 백성이 볼 때는 전혀 한미하지 않은데도 사료(역사 기록물)에는 그렇게 기록된 경우가 많다. 장화왕후 오씨의 집안은 일반 백성들이 볼 때는 어땠는지 몰라도 역사서를 집필하는 계층의 눈에는 한미하게 보이는 가문이었다.

왕건은 호족들과 동맹하기 위해 결혼을 많이 했다. 이 때문에 부인이 29명이나 됐다. 여기서 태어난 왕자들은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그래서 출생 순서 외에 왕자들 사이의 우열을 가르는 또 다른 기준은 어머니 가문의 배경이었다.

장화왕후는 전라도 나주의 '한미한' 가문에서 출생했다. <고려사> 장화왕후 오씨 열전에 따르면 그는 궁예 정권 시절에 왕건을 처음 만났다. 왕건이 전라도 해안을 점령한 뒤 그곳 현지에서 오씨를 만났다. 오씨의 집안이 한미했다는 점은 나주 군영 막사에서 오씨와 왕건이 함께 지낼 때 있었던 이야기에서도 드러난다.
 
왕후의 집안이 미천하므로 임신시키지 않으려고 이부자리에 사정해버리자, 왕후가 이를 즉시 자기 몸속에 집어넣고 결국 임신하고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혜종이다.
 
이런 일이 실제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같은 이야기를 퍼트려 망신을 줘도 괜찮을 정도로 오씨의 집안이 힘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 같은 이야기가 그럴싸하게 퍼질 수 있었던 것은 혜종 이마의 주름살 때문이었다. 주름살이 커서 이부자리처럼 보였다고 한다. 이부자리 무늬 같은 그 주름살을 근거로 위의 이야기가 퍼져 나갔다고 장화왕후 오씨 열전은 말한다. 혜종이 나주 외가 때문에 마음고생을 얼마나 많이 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왕의 자리 노리는 막강한 왕자들

그런 혜종의 지위를 위협하는 막강한 왕자들이 있었다. '막강'이라는 것은 외가의 지위를 근거로 한 것이다. 충청·강원권에서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했던 유씨 가문의 피를 물려받은 왕자들이 그들이었다.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아들인 왕요·왕소 형제가 혜종을 위협하는 이복형제들이었다.

유씨 가문은 왕건이 궁예를 몰아낼 때도 핵심 역할을 했다. 이렇듯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외가 덕분에 왕요·왕소의 어깨에는 힘이 들어갔다.

이 때문에 왕건은 장남을 정윤(正胤, 태자)으로 책봉하는 일에 부담감을 느꼈다. 그는 이 일이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장남이라는 이유만으로 왕무를 후계자로 세우기가 힘들었다. 왕건의 힘으로도 유씨를 비롯한 호족들의 반발을 막아내기가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왕건은 정윤 책봉 문제에서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 대신 군부 실력자를 내세우는 방법을 선택했다. 왕건은 궁예의 호위군에서 출발해 자신을 보좌하며 영향력을 구축한 박술희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고려사> 박술희 열전은 이렇게 서술한다.
 
혜종이 7세 된 때에 태조는 그를 세우려고 했으나, 그의 모친 오씨가 미천하여 세우지 못할 수도 있다고 염려해 낡은 상자에 자황포를 넣어 오씨에게 주었다. 오씨가 이를 박술희에게 보이자, 박술희는 태조의 뜻을 알고 혜종을 정윤으로 세우자고 청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태조 왕건 초상화. ⓒ 김종성


왕무가 정윤이 된 것은 9세 때인 921년이다. 왕건은 그가 7세 때 정윤으로 책봉할 생각을 했다. 2년 정도 흘러 왕건의 뜻이 이뤄진 것이다.

그런데 왕건은 박술희에게 대놓고 부탁하지 못했다. 임금인 자신이 입는 자황포가 오씨의 수중에 들어간 사실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박술희에게 간접적으로 전달했다. 박술희를 따로 불러 귀띔해주기도 어려울 정도로 주위의 눈치를 많이 봤기 때문일 수 있다.

결국 군부 실력자 박술희가 나서서 분위기를 조성했고 이에 힘입어 왕무가 정윤에 책봉됐다. 왕무는 이 기회를 활용해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왕건의 통일 전쟁에 참여해 공을 세우는 방법으로 후계자의 정통성을 보충해 나갔다.

<고려사> 혜종세가(혜종 편)는 "태조를 따라 백제를 토벌할 때 용맹을 떨치며 선봉에 서서 공훈이 제1등이 됐다"라고 말한다. 만약 왕무가 유씨 가문의 외손자였다면 후백제군과의 싸움에서 선봉에 설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다. 주위의 만류 때문에 선봉에 서지 못했을 수도 있다. 왕무가 정윤이 된 뒤에도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는 것은 그의 처지가 불리했음을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그가 실력을 발휘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음을 보여준다.

왕이 자초한 위기

그런 과정을 거쳐 왕무는 32세 때인 943년에 왕건에 이어 제2대 주상이 됐고 훗날의 역사는 그를 혜종으로 부르게 됐다. 하지만 왕이 된 뒤에도 혜종의 앞길은 여전히 험난했다. 유씨를 비롯한 반대파 호족들의 기세가 여전히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를 위험하게 만든 것은 정적들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불철저한 태도 역시 그를 위험하게 했다.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에게 그는 지나친 관용을 베풀었다. 이것이 그의 처지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혜종 집권 3년 차인 945년 군부 실력자 박술희와 달리 호족 세력을 기반으로 왕권을 떠받치던 왕규가 왕요·왕소의 모반 계획을 혜종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혜종은 이를 무고로 간주하고 왕요·왕소를 오히려 더 후대했다. 왕요·왕소의 움직임을 확인조차 않은 채 이들을 감쌌던 것이다.

<고려사> 혜종세가는 역사의 승자인 왕요·왕소의 편에 서서 이 사실을 후세에 알려준다. "대광 왕규가 왕의 아우 요와 소를 참소하였으나 왕은 그것이 무고임을 알고 더욱더 그들을 은혜롭게 대우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왕규의 보고는 근거가 없지 않았다. 이를 증명하는 사실들이 있다. 얼마 뒤 혜종이 갑자기 죽자 왕요·왕소는 혜종의 태자가 있는데도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를 차지했다. 태자가 된 이상 나이를 따질 필요가 없는데도 나이가 적다는 이유를 댄 것이다.

그래서 혜종의 뒤를 이은 것은 혜종의 태자가 아니라 이복형제 왕요였다. 왕요는 사후에 정종이란 묘호(사당 명칭)를 받았다. 그로부터 4년 뒤 왕요도 26세 나이로 병사하고 왕소가 왕위를 차지했다. 왕소는 죽은 뒤 광종으로 불렸다. 결국 왕소가 최후의 승자가 된 셈이다.

왕규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점은 혜종이 죽은 뒤 왕요·왕소의 공격으로 혜종의 지지 기반이 몰락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박술희는 유배를 갔다가 죽었고, 왕규는 정종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혜종 정권의 양대 축이 일소되어 버렸다.

그에 더해 왕규 편에 섰던 3백여 명도 처형을 당했다. 이들은 왕규의 인적 기반인 동시에 혜종의 지지 기반이었다. 혜종이 죽은 뒤 혜종의 태자에게 왕권이 가지 못했을 뿐 아니라 혜종의 지지 기반까지 순식간에 와해했다. '왕요·왕소가 왕위를 노리고 있다'라는 왕규의 말을 혜종이 귀담아 들어야 했음을 웅변하는 사실들이다.

왕규의 보고를 들은 혜종은 왕요·왕소의 움직임을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에 왕규는 실망했고 이는 왕규가 쿠데타로 나아가는 원인이 됐다. 이로 인해 박술희와 왕규가 갈라서고 혜종 정권은 내분에 휩싸였다. 이 같은 자중지란 속에 혜종이 945년 3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왕요·왕소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엄정해야 할 때와 너그러워야 할 때

당시의 관점에서 볼 때 왕요·왕소보다는 혜종의 혈통에서 왕위가 계승되는 것이 정의에 부합했다. 정통성은 왕요·왕소가 아닌 혜종에게 있었다. 또 강력한 기득권 세력을 대변하는 왕요·왕소보다는 '한미한' 가문을 대변하는 혜종의 혈통에서 왕권이 계승되는 게 훨씬 더 건전했다. 물론 왕소(광종)가 훗날 호족세력을 제압하는 개혁을 하기는 했지만 왕요·왕소보다는 혜종 쪽이 훨씬 건강한 세력이었다.

그렇지만 혜종은 부적절하게 대처했고 이것이 화를 키웠다. 이전부터 자신을 위협했던 세력이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는데도 확인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후대했다. 이런 태도는 지지자들의 불신감을 키웠고 이는 혜종 정권이 자중지란을 일으키며 왕요·왕소와의 경쟁에서 패배하는 원인이 됐다.

혜종은 엄정하게 해야 할 때와 너그럽게 해야 할 때를 명확히 분간하지 못했다. 엄정한 태도를 취하고 사실관계를 확인해야 할 때에 그는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관자> 팔관(八觀) 편에 "법을 설치하고 명령을 내려 대중에게 적용하고 시행할 때, 위엄과 관용이 백성에게 시행되는지 그렇지 않은지 관찰하면 그 나라가 흥할지 폐할지 알 수 있다"라는 대목이 있다. 엄정해야 할 때 관용을 베풀거나 관용을 베풀어야 할 때 가혹하게 하면 나라가 폐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자> 법법(法法) 편은 사면과 용서도 함부로 하지 말라고 권한다. 법의 권위를 살리고 백성들의 준법을 담보하기 위해서다. 특정 세력에 대한 섣부른 관용이 민심이반을 자초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혜종은 원칙에 충실하지 못하고 왕권을 위협하는 기득권 세력에 지나친 너그러움을 보였다. 이는 그의 혈통에서 왕위가 계승되기를 희망했던 태조 왕건, 그를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부담을 무릅썼던 박술희를 비롯한 지지자들의 고생을 헛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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