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5 08:32최종 업데이트 20.12.15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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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있었다. 그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 생존과 꿈의 경계에 섰다. 같은 경계선을 무난히 혹은 우여곡절을 거쳐 넘은, 같은 시대에 던져진 다른 많은 이들과 달리 그는 경계선을 넘지 못했다. 세계의 폭력에 의해서든, 피하고 싶었지만 피하지 못한 불운에 의해서든 그의 죽음은 역사의 기록이자 시대의 고발이다. 

해방을 앞두고 이역에서 숨을 거둔 윤동주부터 2020년의 어느 청년에 이르기까지, 지속가능바람 저널리스트들은 청죽통한사(청년의 죽음으로 통찰하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청년의 죽음을 취재했다. 청년의 시각에서 새롭게 작성한 '청년의 죽음'은, 그 죽음의 애도이자 더 나은 세상의 모색이다.[편집자말]
1972년 3월 10일 청년이 죽었다.

초병 살해 죄. 청년 임성빈이 죽은 이유였다. 성빈은 실미도에서 북파공작원으로 훈련받았던 청년이다. 그는 실미도를 지키던 병사들을 죽인 죄로 군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실미도엔 왜 가게 되었고 또 왜 병사들을 죽이고 탈출하려고 했던 것일까. 행상을 하던 22살 젊은 청년은 왜 북파공작원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이에 앞서 1968년 1월 21일엔 북한 특수부대가 서울에 잠입해 청와대 습격을 기도한 1·21 사태로 알려진 사건이 일어났다. 31명 중 29명은 사살되고 1명은 도주하였으며 1명이 생포됐는데 그가 김신조이다. 기관단총, 권총,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북한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코앞까지 진출한 사건은 남한 사회를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북한은 왜 이런 무모한 도발을 시도했을까. 특수부대원들이 정말 박정희를 제거할 수 있다고 믿었을까. 전쟁을 불사할 생각이었을까. 1960년대 후반 북한 공작원들의 대남 침투가 급격하게 늘어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 대남정책의 변화를 살펴보아야 한다.

박정희 쿠데타로 한반도 정세 급변

원래 북한의 대남정책은 군사보다 경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북한은 각자의 체제를 인정하는 연방제를 먼저 제의했으며, 연방제를 통해 남북 간의 적대감과 대립감을 해소하려고 했다. 이러한 북한의 대남정책은 '접근'으로 표상되는데, 경제적, 이념적으로 우수한 북한 체제를 남한이 많이 접하게 되면 남한 곳곳에서 지역 혁명이 발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북한의 연방제 제의는 남한 대학생들을 열광케 했으며 통일 담론을 더욱 활발하게 했을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1961년 남한에서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며 한반도 정세가 급변한다. 반공을 최우선으로 한 정권에 더는 '접근'이 불가능했다. 이에 따라 북한 정부 내에서 평화통일보다 민족해방 전쟁론 등과 같은 '혁명'에 초점이 맞춰진 논의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일방적인 정치적 확산, 물리적 강요에 의해 조국통일을 실현하자는 발상이었다.

대남 정책에 가장 큰 변화를 준 요인은 베트남 전쟁이었다. 1965년 한국군 전투병의 월남 파병이 시작되자 북한은 박정희 정권이 미국의 지시로 타국의 민족해방운동을 방해한다고 비난했다. 1965년 5월 20일 북한 최고 인민회의는 남한의 월남 파병 행위를 북한에 대한 침략 행위로 간주한다고 선언했다.
 

김신조 인터뷰 사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999. 12.19 방영 ⓒ mbc

 
북한은 중국 혁명과 베트콩의 전략을 모티브로 하여 남파 공작원 및 간첩 육성에 몰두했다. 훈련소를 만들어 집단 교육 4개월, 개인 교육 2개월 등을 거친 공작원들을 남파했다. 베트남에 파병한 남한 내부에서 군사적 긴장을 높임으로써 미국과 남한에 두 개의 전선이 형성되는 효과를 노렸다. 북한의 이러한 의도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1·21 사태였다.

남한 정부는 북한의 이러한 대남 정책에 대응하여 북파공작원 육성을 준비했다. 박정희는 1·21 사태 직후인 1월 26일 전국 군, 검찰, 경찰, 중앙정보부, 여당 등의 수뇌부가 참석한 비상회의를 열었다. 박정희는 독자적 대북 응징 보복 계획을 수립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렇게 해서 1968년 4월 평양을 공격하기 위한 실미도 부대가 탄생하게 된다.

처음부터 국민은 도구였다

정부는 공안 네트워크를 활용해 각지에서 공작원을 물색했다. 교도소 또한 주요한 공작원 모집처였는데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수감자에게 형 면제를 내걸면 그들이 모집에 쉽게 응하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형수는 원래 형 집행 후 가족에게 시신을 인도해야 하므로 그들을 북파공작원으로 차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법무부의 방침에 따라 민간인으로 탐색 대상을 확대한다.

공군 2325부대 특수공작대가 중앙정보부에 제출한 <특수공작 기본공작계획서>에 "실제 귀환은 극난의 사실"이라고 적시되어 있을 만큼 북파공작 후 살아서든 죽어서든 돌아올 확률은 희박했다. 따라서 전과 기록이 있거나 가족이 찾지 않는 청년을 중심으로 물색 범위를 넓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 31명이 선발되었다. 청와대를 급습한 김신조 일당과 같은 숫자의 인원이었다. 요리사, 서커스 단원, 소매치기 등 이들의 경력은 다양했고 조직생활을 경험한 소위 '깡패'도 많았다. 그중 성빈은 당수('가라테'를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이름)에 특기가 있었고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하다 실미도에 들어온 사례였다. 실미도에 들어온 청년들은 통념처럼 죄수가 아닌 민간인이었다. 이들은 왜 실미도에 자원한 것일까.

<특수공작 기본공작계획서>에 그 이유를 짐작게 하는 내용이 있다. 계획서는 이들의 대우 조건으로 현역 사병 계급 부여, 교육 수료 후 하사관 또는 장교 임관, 상당액의 특수수당 지급 등을 제시했고 중앙정보부가 승인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적 대우조건은 준수되지 않았고, 감언이설로 모집이 이루어졌음이 나중에 재판 과정에서 밝혀졌다. 재판기록에 따르면 성빈은 6개월의 훈련을 받고 북에 갔다 오면 충분한 보수와 미군부대 취업 등을 약속받았다고 증언했다. 또한 교육지가 섬이 아니라 서울이라고 들었으며 훈련 기간 중 휴가도 약속받았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약속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부대는 가장 중요한 복무조건이라 할 "실제 귀환은 극난의 사실"과 같은 공작의 위험성을 고의로 숨겼다. 장교 임관이나 미군부대 취업 등은 애초에 이행 가능성이 희박했다. 결국 국가가 애초에 실현이 불가능한 대우조건을 내걸어 청년들을 현혹해 돌아올 수 없는 지옥으로 몰아넣었다고 봐야 한다. 북한에 가서 공작을 마치고 생환하기란 "극난의 사실"이기에 모집과정에서 어쩌면 아무 말이나 무책임하게 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최악의 환경에서 훈련 

실미도 부대의 목표는 김신조 일당이 소속된 북한 124군을 능가하는 기량을 갖추는 것이었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했고 성과가 향상되지 않으면 가혹하게 체벌했다.

6개월의 훈련 결과 이들은 6km를 26분에 완주할 수 있게 되었다. 산악 훈련, 게릴라 전술, 장애물 돌파, 총검술 등 훈련을 거치며 이들은 침투 작전에 필요한 완벽한 전투병기로 길러졌다. 부대원들은 산악에서 시간당 10km 이상을 주파했고 명중률 98% 이상의 사격 능력을 보유하였다. 또 낙하산과 기구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돼 서울 오류동에서 경북 포항시까지 기구를 9회 정도 사용해 이동하는 야간 침투 훈련을 수행했다.
 

밧줄타기, 찌르기 등의 훈련모습과 자신이 직접 만든 부대마크 앞에 앉은 김순웅 실미도 부대장(세번째). 기간병들이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네번째). ⓒ 실미도전우회 제공

 
훈련 성과는 좋았지만 반대로 훈련 환경은 최악이었다. 재판기록에 따르면 실미도 부대원은 일반 병사와 달리 TV가 있고 담배 등이 무상으로 제공되는 좋은 환경에서 훈련받을 수 있다고 약속받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일반 병사보다 더 혹독한 환경에 던져졌다. B조 소대장 김씨는 훈련성적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부대원을 끌고 가 물속에 10여 분간 집어넣고 밟았다. 숨이 붙어있자 백사장에 얼굴만 나오게 묻은 채 저녁부터 아침까지 그대로 두었다.

가혹행위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자유는 하나도 주어지지 않았다. 6개월의 훈련 기간에 휴가와 외박은 허용되지 않았는데, 문제는 약속된 훈련 기간이 끝난 뒤에도 외박과 외출, 심지어 편지까지 허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감옥에 수감된 것과 다름없는 생활이 3년이나 계속됐다.

실미도를 지키는 기간병은 부대원이 화장실을 갈 때조차 총을 들고 따라와 감시했다. 그들은 구보 중 어느 부대원의 달리기가 늦으면 그의 발 뒤꿈치를 조준 사격하였다. 가혹행위가 일상이고 항상 감시받아야 하며 사소한 이유에도 죽을 수 있는 곳. 그곳이 실미도였다.

부대원들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탈영 사건이 발생했다. 탈영병들은 곧 잡혔고, 부대원들은 동료인 탈영병을 집단으로 구타할 것을 명령받았다. 때리다 기절하면 다시 물을 부어 깨운 다음 다시 때리는 등 구타를 반복했고, 그렇게 탈영병 2명이 사망했다. 1970년 늦가을엔 3명이 탈영해 젊은 여성 2명을 감금하고 성폭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 탈영병 3명은 검거 과정에서 사망했다.

코너에 몰린 박정희

국가는 왜 죄 없는 청년들을 3년 4개월이나 '실미도'란 최악의 환경에 구금하고 방치했을까. 결과적으로 부대 창설 이후 북파 가능성이 줄어들면서 부대 해체 및 부대원 처리에 관한 책임을 공군과 중앙정보부가 서로 떠밀며 회피했기 때문이다. 처음과 달리 실미도 부대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관심은 급격하게 떨어졌고 따라서 이 부대의 처리를 두고 곤혹스러운 처지가 되자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리처드 닉슨 행정부는 대 소련·중국 관계를 미국이 주도적으로 개선함으로써 세계의 안정과 자본주의 진영의 안보를 확보하고 미국의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전환은 베트남 전쟁을 명예롭게 종결하고, 군비경쟁을 지양하여 미군의 해외 주둔 비용을 절감할 기회였다. 1969년 7월 괌을 방문 중이던 닉슨 대통령은 아시아 지역에서 일어나는 분쟁에 무력 개입하지 않겠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한다.

독트린 발표 한 달 뒤 닉슨은 박정희를 샌프란시스코로 초대한다. 한·미정상회담은 주한미군의 철수 및 한국군 감축 유도에 관한 미국의 계획 전달 그리고 이에 대한 박정희의 이해를 구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다.

반공을 정권 유지의 핵심으로 삼은 박정희 정권은 닉슨의 제안을 수용할 수 없었고, 박정희는 닉슨에게 닉슨 독트린의 범위에서 한국을 제외해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닉슨은 박정희의 요청을 받아들이면서도 언제든지 검토 가능한 대상이라고 여지를 남긴다.

3선 개헌을 통해 1971년 다시 대통령이 되고자 한 박정희는 미군 철수를 막기 위해 최대한 미국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닉슨은 벼랑 끝의 박정희에게 남북한 긴장 완화에 남측 정부가 먼저 손을 내밀 것을 요구했다.

정권 연장을 위해 미군 철수만은 포기할 수 없었던 박정희는 닉슨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한미 정상회담 1년 후인 1970년 8월 15일 남한 정부는 평화통일기본구상(8·15 선언)을 북한에 제의했다. 또한 소련과 중국이 적대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공산국가와 수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도저히 이렇게 살 수 없다

이러한 배경에서 실미도 부대는 박정희 정권의 관심사에서 밀려났다. 3년 4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고 그들은 도저히 이렇게 살 수 없다고 결심했다. 성빈은 재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울 중앙청에 가서 국무총리를 만나 4년간 고생한 내용과 국가에 배신당한 사실을 직접 호소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전원 자폭할 결심을 했다."

1971년 8월 23일 6시 30분 실미도에 최초의 총성이 울렸다. 이것을 신호로 부대원들은 기간병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당시 기간요원들이 실탄을 장전한 소총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들을 죽이지 않고 탈출할 방법은 없었다고 실미도 부대원들은 판단했다.

같은 날 11시 30분 배를 타고 이동해 인천 송도 부근에 하선한 부대원들은 오후 1시경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매복 중이던 육군과 총격전이 발생했고 이때 여러 민간인과 군인이 사망했으며 버스 운전사 역시 총상을 입었다.

부대원들은 타이어가 파열된 버스에서 버리고 다른 버스를 탈취해 다시 서울로 향했다. 그러던 중 서울 영등포 세무서 앞에서 버스 운전사가 도망쳤고 부대원 장정길이 운전대를 잡고 서울 대방동 3거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대기 중인 경찰과 총격전이 일어났다. 이때 운전을 담당한 장정길이 총탄을 피하느라 고개를 숙이고 운전하는 바람에 버스가 위태롭게 주행하다가 결국 유한양행 앞 가로수를 들이받고 버스가 멈춰 선다. 이때 부대원 대부분이 사망했다.
 

수류탄 폭파 후 병원으로 이송되는 실미도 부대원. ⓒ mbc

 
남은 부대원들은 수류탄 안전핀을 뽑아 자폭을 시도했다. 살아남은 부대원은 모두 4명으로 이들은 (기이하게도) 군사법원으로 넘겨져 전원 사형을 선고받았다. 민간인 6명, 경찰 2명, 군인 18명이 이날 사건으로 사망했다.

실미도 부대원은 이날 탈출 과정에서 20명(실미도 2명, 인천 조개고개 3명, 버스 자폭 15명)이 숨졌다. 탈출에 앞서 탈영병을 포함하여 훈련 중 7명이 사망했고, 자폭에서 살아남아 생포된 4명은 사형되었으니 실미도 부대원 31명 전원이 <특수공작 기본공작계획서> 표현대로 '귀환'하지 못했다. 다만 그들은 북한이 아니라 실미도에서 귀환하지 못했다.

묻혀버린 진실 

1971년 8월 23일 오후 3시 10분 김재명 대간첩대책본부장은 이들을 공비라고 발표했다. 3시간 후 정래혁 국방부 장관은 특수범들의 난동 사건으로 정정 발표하면서 실미도 부대원들이 특수 격리된 사형수와 같은 중형 범죄자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 명백한 허위사실이었다. 실미도에 있던 관련 자료는 소각됐다.

살아남은 4명의 부대원은 군사재판에서 자신들의 억울함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반면 군 수사기관은 의도적으로 사건을 축소‧은폐하려고 했다. 재판관할권 자체가 논란거리였다. 부대원들은 법적으로 군인이 아닌 민간인 신분이었고 군사재판에서도 민간인 취급을 받았다. 군법회의법(1987년 군사법원법으로 명칭 변경) 제2조 제3항에 따라 초병 살해 죄는 군사법원의 관할이지만, 민간인이 민간인을 살해한 행위는 민간법원 및 수사기관으로 이첩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한 구속 사실과 변호인 선임이 가능함을 가족들에게 전혀 알리지 않았으며 국선 변호인이 선정되었다.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그해 12월 6일 사형이 선고되었다. 2심에서는 변론이 생략되었고 항소는 기각되었다. 이어 부대원들은 상고를 포기했고 12월 30일 사형이 확정되었다. 1972년 3월 7일 사형집행명령이 내려지고 3월 10일에 살아남은 4명의 부대원은 사형당했다.

이들의 사형집행은 가족들에게 통보되지 않았고 형 집행 후 시신 역시 인도되지 않았다. 그들의 시신은 불법 매장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구체적인 매장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실미도 부대의 진상 파악은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법 제정에 따라 국방부가 자체적으로 구성한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의 조사가 전부다. 실미도 조사 보고서는 결론에서 관련자들의 증언 거부 등의 사유로 진상규명에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2020년 5월 과거사정리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31명의 부대원이 알리고 싶었던 진실이 밝혀질 수 있을까.



- 강우정: 고려대학교 철학과 3학년 재학. 농구하며 땀 흘리는 것을 좋아한다. 법과 철학의 관점에서 지속가능한 공동체에 대해 많은 학문적 관심을 갖고 있다.

- 안치용: 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 공부에 힘쓴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죽통한사를 함께 진행한다.

-박수연: 이화여자대학교 컴퓨터공학과 2학년 재학. 호기심과 열정으로 삶을 꾸려나간다.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가 균형을 이루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1. 이명례,<1968年 1.21事態 背景에 關한 硏究 : 1960年代 北韓의 南韓政勢認識과 南朝鮮革命戰略을 中心으로>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 ,1993

2.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종합 보고서> 제 2권

3. 장준갑, <닉슨 행정부의 아시아 데탕트와 한미관계>, <역사와 경계> 70, 부산경남사학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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