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 09:35최종 업데이트 20.12.09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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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 공동취재사진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관점 정립을 추구하는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당내 반발에 직면해 있는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박근혜와 그의 아버지 박정희에 대한 적지 않은 미련이 보수 진영 내에 남아 있다. 그런데 보수 진영의 정신적 구심적인 박정희의 내면적 특성들을 살펴보면, 그가 그런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 일인지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박정희의 내면적 특성

박정희의 취약한 내면적 특성은 1948년 11월 11일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연루 혐의로 체포돼 서울 남산 헌병대 영창에 수감됐다가 29일 만인 12월 10일 석방되는 과정에서도 세상 사람들에게 노출됐다. 그가 석방되기까지의 과정을 정치학자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은 이렇게 정리한다.
 
"박정희는 비교적 수사 초기에 구제 대상으로 떠올랐던 것 같다. 김정렬의 구명운동에 의해 채병덕 국방부 참모총장이 움직였고, 수사팀장인 김창룡이 여기에 동조하여 구명 방법을 생각해냈다고 한다.

숙군 수사를 총괄했던 육본 정보국 특무과장 김안일이 박정희를 심문해본 후 안심해도 좋다고 판단하고, 의사결정의 키를 쥐고 있던 정보국장 백선엽이 결심함으로써 그의 구제는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김창룡이 구명 사유서를 겸한 신원보증서를 적고 여기에 김안일과 백선엽이 도장을 찍어 신원보증을 함으로써 그는 12월 10일 불과 한 달 만에 구속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구명운동의 핵심 인물들은 채병덕·백선엽·김창룡·김안일이다. 박정희보다 두 살 많은 채병덕(1915~1950)은 일본 육사 출신이고 백선엽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이고 김창룡은 일본 헌병대 출신이었다.


"최소한 과거 만주군이나 일본군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보았을 때 박정희는 자신들과 비슷한 배경을 가졌을 뿐 아니라 훌륭하고 유능한 군인이었기 때문에 그처럼 파격적인 구명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박정희 평전>은 말한다.

특히 열성을 보인 쪽은 친일 진영 내에서도 만주 인맥이었다. 친일문제 전문가인 정운현의 <실록 군인 박정희>는 "여기엔 만주 인맥이 큰 힘이 됐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만주군관학교 교의(敎醫)를 지냈고, 박정희가 첫 부임한 춘천 8연대 시절 연대장을 지낸 원용덕이 백선엽 국장을 움직였다. 백선엽이 평양사범 졸업 후 의무복무 도중 군관학교에 입학해 말썽이 됐을 때 원용덕이 나서서 도움을 줬는데, 이 일을 두고 백선엽은 늘 고마워했다."

친일 경력 및 만주 인맥에 더해 남로당원 리스트 제출도 석방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동시에,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요소도 있었다. 그것은 박정희가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일본 육사 졸업 뒤의 박정희. ⓒ 위키백과

 
만약 박정희가 열혈 공산당원으로 비쳐졌다면 친일 학맥이나 군맥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에게서 레닌이나 스탈린의 모습이 보였다면 그를 위한 신원보증서에 선뜻 서명하는 일이 힘들었을 수도 있다.

박정희 구명에 나선 사람들은 친일청산을 저지하고 반공국가를 세우려는 열의로 가득 차 있었다. 박정희가 확신에 찬 남로당원이었다면, 육본 정보국 특무과장 김안일이 박정희를 심문한 뒤 '안심해도 좋겠다'는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 백선엽이 '박정희는 진정한 공산주의자로 볼 수 없는 사람'이라며 남로당 경력을 대수롭지 않게 치부해버리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구명운동을 펼친 백선엽·김안일 등의 입에서뿐만 아니라 남로당원 시절의 박정희 자신한테서도 공산주의자와 배치되는 모습들이 곧잘 드러났다는 점이다.

박정희가 남로당원이 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인물은 박정희의 셋째 형이자 김종필의 장인인 박상희(1905~1946)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고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 간부로도 일한 박상희는 선산경찰서 유치장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가담해 1945년 8월 16일 건준 구미지부를 세운 박상희는 여운형 노선을 전파하면서 구미 지역을 실질적으로 장악해 나갔다. 그의 활약상은 당시 구미에서 이승만보다 여운형이 더 유명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증명된다.

조갑제 <조선일보> 출판국 부국장이 1997년부터 연재한 박정희 전기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제121화에 따르면, 박상희(41세)는 1946년 5월 귀향해 백수로 사는 박정희(29세)에게도 자기 생각을 주입시켰다.
 
"박상희는 여운형 노선을 옹호하면서 이승만을 비난하는데, 박정희는 좀처럼 그 주장에 수긍하려 들지 않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이승만 박사도 해외에서 평생 독립운동을 해오신 훌륭한 분이십니다'라고 정색을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셋째형을 존경하면서도 그 말에 토를 달던 박정희는 셋째형이 1946년 10월 대구항쟁(대구폭동) 때 경찰 토벌대의 총에 목숨을 잃은 뒤에 공산주의로 급격히 경도됐다. 당시에는 공산주의가 유행을 타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선택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는 점도 작용했지만, 무엇보다도 셋째형이 공산주의 활동 중에 죽었다는 사실이 결정적 동기로 작용했다. 위의 제126화는 이렇게 말한다.
 
"박정희가 마음속으로 어렵게도 고맙게도 생각하면서 존경했던 박상희의 비극적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때까지 박정희는 사상 문제에 있어서는 방관자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여운형의 중도좌파 노선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하면서도 공산당식 행태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형의 죽음은 그러한 박정희를 왼쪽으로 확 밀어버리는 역할을 했다. 박정희는 형의 죽음을 가져온 우익 경찰과 그 배후인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품게 되었다."

박상희 사망 당시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제2기생으로 입학한 직후였다. 형의 사망 뒤 자신에게 접근한 남로당에 포섭된 그는 군대 내에서 당원을 모집하는 비밀 활동을 벌였다.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및 일본 육사 동기생이자 박정희의 한국 육사 재학 시절에 사관학교 행정부장이었던 이한림(박 정권 때 장관 역임) 역시 박정희의 포섭 대상 리스트에 들어 있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다 해도 박정희의 포섭 작전은 위험했다. 그것은 모험을 감수하는 공산주의 활동이었다. 공산주의의 인기나 박상희로 인한 복수심이 크게 작용하기는 했지만, 현역 군인의 그 같은 활동은 용기나 대담성 없이는 힘든 일이었다.
 

박정희. ⓒ 위키백과

 
공산주의자 맞나?

그런데 이 시기의 박정희한테서는 '이 사람, 공산주의자 맞나?' 하는 의구심을 일으킬 만한 면모들도 관찰됐다. 1948년 12월 석방 당시 백선엽·김안일 등이 '진짜 공산당원 같지는 않다'는 느낌을 품은 것과 맥을 같이하는 장면들이 남로당 시기의 박정희에게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런 장면 중 하나는 1948년 초부터 함께 생활한 이현란의 증언에 들어 있다. 육군 대위 시절의 박정희가 첫째 부인을 둔 상태에서 서울 용산관사에서 함께 생활한 이현란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며 원산에서 홀로 월남해 이화여대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공산당이 싫어 38선을 넘은 그는 남쪽에서 만난 군인마저 남로당원이라는 사실에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박정희의 열렬한 구애에 마음이 움직여 함께 살게 됐는데, 알고 보니 이 남자도 공산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현란의 눈에는 공산주의자로 믿기지 않는 또 다른 모습들도 포착됐다. 훗날 나온 그의 증언이 위의 제139화에 이렇게 실려 있다.
 
"미스터 박은 방에 누워 책으로 얼굴을 덮고 연설을 하곤 했습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독재자이긴 하지만 영웅은 영웅이라고 하더군요. 나긴 난 사람이라고. 미스터 박은 그 사람은 국방장관 자격은 있다고 생각했어요."

히틀러를 총통 감이 아닌 국방장관 감으로 낮춰서 보긴 했지만, 박정희는 머릿속에 히틀러를 떠올리면서 방바닥에 누워 연설을 하곤 했다. 남로당원이 제2차 세계대전 때 공산 진영의 적이었던 히틀러를 동경했던 것이다.

유사한 장면은 이한림의 눈에도 포착됐다. "나를 세뇌시키려고 한다면 앞으로 안 만나겠다"고 선언한 이한림을 데리고 박정희는 서울 남산으로 올라갔다. 위 제126화에 따르면, 남산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중앙청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자 박정희가 불쑥 입을 열었다.
'한림이, 이곳에 포를 설치하고 저 경무대 쪽을 포격하면 나폴레옹이 소요 진압사령관으로서 파리를 제압했던 것과 같이 경무대 장악은 문제없겠지?'
'정희야, 그런 농담 하지 마. 너는 농담이 지나칠 때가 있어.'
이한림은 박정희의 농담 같은 진담을 막았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식민지 코르시카섬 출신으로 프랑스 최고지도자가 되고(A) 프랑스 혁명을 파괴하려는 보수파를 군사적으로 진압한 뒤 황제가 됐다(B). 신성로마제국과 러시아제국만이 황제 혹은 차르 칭호를 쓰고 나머지 유럽 국가들은 제후국의 형식을 띠던 시절에 프랑스를 황제국으로 격상시킨 것은 프랑스 민족주의에 부합하는 측면도 있었다(C).

나폴레옹을 동경하는 박정희의 마음속에서 A·B·C 중 어느 쪽이 더 우세했는지는 확단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나폴레옹을 존경하는 모습이 공산주의자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로당으로 활동한 1946년 하반기부터 1948년 하반기까지의 박정희에게서는 이처럼 상호 모순되는 면모들이 함께 드러났다. 복수심을 품은 채 위험을 무릅쓰고 남로당 활동을 벌이는 모습, 방바닥에 누워 히틀러를 생각하면서 연설 연습을 하는 모습, 미군사령관 하지가 사는 경무대를 바라보며 나폴레옹 식의 포격과 점령전을 꿈꾸는 모습 등을 노출했다. 이런 모습들이 그에게서 노출됐기에, 백선엽과 김안일 등이 '진짜는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처럼 내면적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한 박정희가 오늘날에까지 보수세력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국민의힘의 내홍도 여기에 기인하는 측면이 있다. 
 

국민의힘 김종인 비대위원장과 주호영 원내대표가 26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41주기 추도식에서 묵념을 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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