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8 18:35최종 업데이트 20.12.08 18:35
  • 본문듣기
청년이 있었다. 그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 생존과 꿈의 경계에 섰다. 같은 경계선을 무난히 혹은 우여곡절을 거쳐 넘은, 같은 시대에 던져진 다른 많은 이들과 달리 그는 경계선을 넘지 못했다. 세계의 폭력에 의해서든, 피하고 싶었지만 피하지 못한 불운에 의해서든 그의 죽음은 역사의 기록이자 시대의 고발이다. 

해방을 앞두고 이역에서 숨을 거둔 윤동주부터 2020년의 어느 청년에 이르기까지, 지속가능바람 저널리스트들은 청죽통한사(청년의 죽음으로 통찰하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청년의 죽음을 취재했다. 청년의 시각에서 새롭게 작성한 '청년의 죽음'은, 그 죽음의 애도이자 더 나은 세상의 모색이다.[편집자말]
1955년 베트남 전쟁이 발발했다(베트남전은 통상 1955-1975 20년으로 본다. 전반부는 프랑스, 후반부 미국이 참전한 양상이었다). 1964년 미국의 개입으로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었고 한국군은 그해 동맹군으로 참전한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총 32만 5천여 명의 한국군이 파병되었다.

한국이 베트남 전쟁 특수로 한국 전쟁의 충격을 벗어나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는 그 시기에 파병된 한국군 중 5099명이 사망하고 1만 1232명이 다쳤다. 전쟁의 짙은 그늘은 한국에만 드리우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기에 약 80개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군 피해 상황과 달리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

파월 '병사 만들기'
 

백마부대 환송 국민대회 ⓒ 서울기록원 서울사진아카이브

 
1964년 9월 비전투부대를 시작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1965년 10월에 첫 전투부대를 파병했다. 당시 파병 동의안을 둘러싼 국회 심의 과정에서 김성은 국방부 장관은 파병 인원 확보에 관한 야당의 질문에 전원 자원을 받아서 보낼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체격이 좋은 병사들을 선발한 다음 지원하라는 요식 행위만 갖추는 경우가 많았다. 사단별로 지원자를 할당했다는 증언도 있다. 2004년 3월 27일 방영된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이 '자발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2004년 광주-전남 지역 거주 참전 병사 308명을 조사한 결과 이들 중 자원자의 비율은 25.3%에 불과했다. 나머지 34.4%가 부대에서 강제로 차출되었고 40.3%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압박에 의해서 지원 서류를 작성했다. 수많은 청년이 국가에 의해 등 떠밀려 다른 나라의 전장에 투입된 정황이다.


당시 병사들은 대개가 파월을 죽으러 가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어느 장교는 "차출됐는데 눈물이 왈칵 나더라고. '이제 고국을 떠나면 죽겠구나,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런 참담한 생각이 나더라고"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파월 초기에 병사들의 저항은 탈영으로 이어졌다. 매일 적게는 10여 명이, 많게는 20여 명이 탈영했다.

14일간의 혈투

1972년 2월 14일 오전 10시 부산항 제3부두는 부산 시내 중고생 2000여 명과 파월 장병의 가족들로 붐볐다. 그들은 꽃다발과 태극기 그리고 월남기를 들고 전쟁터로 떠나는 군인들을 배웅했다.

김영수 병장(가명)은 부모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배에 몸을 싣고 나서야 눈물을 흘렸다. 일주일의 긴 항해 끝에 베트남에 도착한 영수를 기다린 건 또 다른 일주일의 현지 적응 훈련이었다. 월남의 기후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을 흐르게 했다. 더군다나 심리적 압박감 때문에 속이 좋지 않아 물만 마셔도 속에 있는 것을 모두 게워냈다. 앞으로 의무 복무 기간 1년을 어떻게 버텨야 할지 막막했다. 영수는 기갑연대 수색 중대 3소대에 배정되어 안케패스 600고지의 흔히 '안케패스 대혈전'이라고 불리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4월 11일 새벽 4시경 안케패스의 제1중대 기지에 폭발음이 울리면서 북베트남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13일 오전에는 북베트남군의 포 사격이 있었다. 포가 한 발, 한 발 터질 때마다 영수는 '차라리 어서 죽어버렸으면, 죽어서 끔찍한 공포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갑자기 시작된 포 사격에 부대원들은 북베트남군의 위치도 파악하지 못한 채 우박처럼 쏟아지는 포탄 소리만 듣고 있었다. 초소는 포탄의 파편과 직격탄으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화약 냄새와 쇠가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고 흙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이날 밤에 야간근무를 서던 1소대 아무개 상병은 손바닥에 총을 쏘아 자해했다. 생존 욕구와 전쟁 공포가 결합한 자해였다. 다치면 당장 생사가 갈리는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15일에 미군은 전폭기 41대로 14만 3000파운드의 고성능 폭탄을 쏟아부어 한국군을 지원했다. 영수는 작전 중 총에 맞아 쓰러져 신음하는 전우를 발견했지만 차마 집중 포격을 뚫고 그를 후송할 엄두가 나지 않아 외면했다. 다친 전우를 두고 온 죄책감에 영수는 매일 밤 피로 물든 전우의 얼굴을 꿈속에서 마주했다.

19일에 영수는 비교적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고지에서 전방을 향해 계속해서 유탄(榴彈)을 쏘고 있었다. 소대장의 명령에 따라 엎드려 올라가면서 사격했다. 그러나 잠시 일어선 순간에 북베트남군이 쏜 총에 맞아 비명 한마디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숨졌다.
 

밀림에서 작전 중인 한국군 ⓒ 책 ‘파월한국군 전사 사진집’

 
보름간의 대치 끝에 24일 북베트남군의 항복으로 안케패스 전투는 막을 내렸다. 전투의 희생자는 공식적으로 전사 75명, 전상 222명으로 발표되었지만 이 숫자를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짧은 기간에 많은 인원이 전사하면 문책이 따르기에 전사 날짜를 분산해 전투 기간의 사상자 규모를 축소했다고 병사 대부분은 믿는다.

전쟁에서 명분은 매우 중요하다. 자기 나라를 지키려는 북베트남군과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국가에 의해 아무 이유 없이 떠밀려온 한국군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전쟁에 몰입할 수 있었을까. 베트남에서 전투보다 두려운 것은 정신적 고통이었다. 정글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몰라 항상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진흙 속에 숨겨진 지뢰와 부비트랩을 맨눈으로 발견하기란 불가능해서 앞사람이 지뢰를 밟지 않기를 기도했다. 위장 군복이 흔한 일이었기에 피아식별이 어려울 때가 많았다. 위장 군복을 착용하지 않아도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병사들은 움직이는 모든 것이 자신들을 죽이러 오는 북베트남군 같았다고 술회했다.

오인 사격도 부지기수였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하극상이 자주 일어났으며 실수로 아군에게 수류탄을 던지기도 했다. 긴장감 때문에 헛것을 보기도 했다. 죽기 전까지 영수가 경험한 일이자 영수처럼 이역에서 전사한 청년 5000여 명과 살아남은 30만여 명의 젊은 한국 군인이 거의 공통적으로 겪은 일이다.

또 다른 죽음 앞에서
 

베트남전의 '네이팜 소녀' 베트남 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가장 생생하게 묘사한 것으로 평가되는 '네이팜 소녀'의 사진 ⓒ AP=연합뉴스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중부 거점 도시 다낭에서 남쪽으로 25km 떨어진 퐁니·퐁넛 마을에서 대한민국 해병대 소속 청룡부대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응우옌 티 탄(여)은 당시 8살이었다. 그는 이웃집에서 나는 총소리를 듣고 이모, 사촌동생 그리고 남매들과 함께 방공호로 향했다. 그때 한국군이 집에 들이닥쳤다. 한국군은 수류탄을 높이 들어 흔들면서 방공호에서 나오라고 손짓했다. 위협적인 그들의 태도에 이모는 방공호에서 나가자고 말했다.

한국군은 방공호에서 나오는 가족에게 총을 쐈다. 응우옌 티 탄의 오빠는 대나무 숲으로 도망가다가 엉덩이에 총을 맞아 사망했다. 언니는 뒷방으로 내려가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으며 동생은 입에 총을 맞아 숨을 쉴 때마다 피를 토했다. 그렇게 퐁니·퐁넛 마을 주민 70여 명이 희생됐다.

열흘 후 마찬가지로 다낭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하미 마을에서도 학살이 일어났다. 팜 티호아(여)는 자식들에게 먹일 쌀을 사기 위해 지게를 짊어지고 시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국군이 총구를 들이대며 무력으로 사람들을 한데 모았다. 지휘관이 나타나 장황한 연설을 마치자 별안간 수풀 속에 숨어있던 기관총에서 총알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팜 티호아는 자기 쪽으로 날아오는 수류탄을 보고는 땅에 엎드렸다. 첫 번째 수류탄은 허리를 맞고 튕겨나갔지만, 두 번째 수류탄은 발밑에서 터져 두 발목이 잘려 나갔다. 이날 팜 티호아에게 일어난 비극은 두 발목을 잃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사랑하는 자식들을 잃었다.

청룡부대로 확인된 한국군은 마을에서 아이 울음 소리가 들리는 인가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확인 사살을 위해 집을 불태웠다. 이날 두 발목을 잃은 어머니 팜 티호아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자신에게 닥친 비극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마찬가지로 한국군이 죽인 다섯 살배기 딸과 열 살짜리 아들의 주검을 마주해야 했다.

총소리가 멈춘 이튿날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시신을 찾아 땅을 팠고, 잔해를 주워 담았다. 군인들이 아직 철수하지 않아 누구든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상황에 무덤을 만들 수는 없었다. 도랑에서 흙더미를 파낸 뒤 어렵사리 수습한 시신의 잔해를 그곳에 대충 묻고 향을 피웠다. 그러나 한국군은 흔적을 지우기 위해 불도저로 현장을 깔아뭉갰다. 시체는 훼손되고 햇빛에 말라버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하미 마을에서만 140여 명이 사망했다.

왜 이런 끔찍한 학살이 일어났을까. 청룡부대 1중대 소대장들의 증언에 따르면 1968년 2월 12일 아침 부대는 퐁니·퐁넛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갑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병사 한 명이 총에 맞았다. 북베트남군의 저격으로 의심해 한국군은 마을을 수색했다. 마을을 뒤졌지만 총을 쐈을 만한 젊은 남자를 찾지 못했다. 마을 청년들이 이런 상황을 예상해 한국군이 작전하는 지역에서 미리 피했기 때문이다. 마을에는 노인과 여자, 아이들뿐이었다. 이어 학살이 일어났다.

하미 마을의 학살 역시 분명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한국군이 두려워 도망치는 베트남 민간인들을 보고 '도주'하는 광경에 무조건 사격을 가했을 수 있다. 비전투원을 전투원으로 혼동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같은 부대원이 저격당했다는 사실에 흥분해 이성을 잃은 한국군이 보복 차원에서 만행을 저질렀을 수 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진실은 학살 관련자들의 고백에 의해서만 밝혀질 수 있겠지만 과연 관련자들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죽기 전에 입을 여는 일이 가능할까. 2020년 10월 7일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 2인이 진실을 밝혀달라며 유엔에 진정서를 냈다.

오렌지 색깔 띠 두른 드럼통
 

베트남 전 당시 미군이 뿌린 고엽제로 베트남 자연 생태계가 초토화 되었다. 사진은 전쟁박물관에서 촬영. ⓒ 김성헌

 
황선길은 베트남 파병 기간에 미군으로부터 받았다는 오렌지 색깔의 띠를 두른 드럼통을 보았다. 이 안에는 '고엽제'라고 불리는 화학 물질이 들어있고, 이름 그대로 나뭇잎의 성장을 억제해 고사하는 데 사용한다고 했다. 그밖에 고엽제 사용에 관한 별다른 지시나 주의사항은 없었다.

병사들 사이에서 고엽제를 뿌리면 모기에 물리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덥고 습한 날씨에 모기까지 못살게 구는 터라 미군이 고엽제 살포를 중지한 1971년까지 한국군 파월 병사들은 비행기를 쫓아다니면서 살포되는 고엽제를 맞았다. 그것도 모자라서 나뭇잎에 허옇게 묻은 가루를 손에 묻혀 약을 바르듯 팔과 다리에 발랐다. 제초 작업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고엽제 가루를 철모에 담아서 맨손으로 뿌리기도 했다.

선길은 여러 정글에서 8개월여 전투에 참가하다 1973년 2월 부대 철수와 함께 귀국했다. 귀국 후 군에 남아 부사관으로 근무한 선길은 78년에 처음 나타난 사지의 근육 경련이 심해지자 85년 13년여의 군 생활을 마감하고 고향인 전남 영광군 군남면 월홍리로 내려가 퇴직금과 저축 등 2000만 원으로 한우와 돼지 등을 키웠다. 그러나 전역한 후에도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87년 봄엔 몸의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리다가 쓰러질 정도로 병세가 악화했다.

미국에서 고엽제 후유증을 겪는 일부 환자들이 미국 정부와 고엽제 제조 회사를 대상으로 대규모 소송을 제기했고 의회에서는 청문회가 열렸다는 이야기를 선길은 얼핏 들었다. 고엽제 후유증? 그때까지도 선길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1984년 <중앙일보>가 고엽제 문제를 다음과 같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65년부터 70년 사이 월남을 방문한 사람은 목이 달아난 장승처럼 잎 하나 없이 서 있는 야자수의 처절한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그것은 베트콩의 잠복처를 없애기 위해 미국 공군기들이 뿌린 고엽제의 결과였다. 미군은 이 기간 중에 무려 1천2백만 갤런의 '오린지제'라는 이름의 이 고엽제를 월남의 작전 지역 촌락과 도로 주위에 뿌렸다. 그러다가 70년 4월 17일 미국 정부는 갑자기 오린지제의 살포를 중지했다. 이 고엽제 속에든 디옥신이란 독물에 접한 동물이 기형 새끼를 낳았음이 실험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후속 기사는 없었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중앙일보>에 압력을 가했다. 기자를 해고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고 다른 언론사들이 고엽제 보도를 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통제했다.

그는 89년 8월 전남대병원을 찾아가 조직검사를 했으나 정확한 진단이 나오지 않자 가축과 전답을 모두 팔아 서울 구로동 고려대 부속 구로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아무런 차도 없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소뇌 변성'이란 병명만 확인했을 뿐이다.

선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10만 원짜리 지하 셋방 그리고 절망뿐이었다. 누군가는 베트남에서 윤리적으로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고약한 성병에 걸린 것이라며 선길을 비난했다. 1992년 7월 11일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월남전 참전 병사 중 조현병 증세나 전상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사람은 그때까지 18명이었으나 고엽제 후유증을 비관해 자살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2020년 9월 기준 베트남 전쟁의 고엽제로 인한 질병을 겪고 있는 이는 13만 8747명이다. 또한 161명의 2세 환자가 있다.

미군은 베트남 전쟁 기간에 북베트남군이 숨거나 무기 수송로로 이용하는 정글을 제거하고 시계를 확보하기 위해, 또 북베트남이 경작하는 농작물을 제거하기 위해 고엽제를 이용했다. 1960년부터 1971년까지 베트남 국토의 15%에 해당하는 60만 에이커의 광범위한 지역에 2000만 갤런의 고엽제를 살포했다. 그중 80%의 해당하는 1600만 갤런의 고엽제가 한국군 작전지역에 무차별 살포되었다.

보훈처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자살한 사람들을 외면했다. 죽음의 1차 원인이 자살인 이상 그 인과 관계를 확장하여 고엽제 후유증을 직접적인 원인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반면 법원은 "고엽제 후유증이 망인으로 하여금 자살을 결심하게 한 직접적이고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고 그밖에 다른 자살의 동기를 찾아볼 수 없다면 사망 원인은 고엽제 후유증으로 봄이 상당하다"라며 보훈처의 조처가 위법하다고 2014년 9월 30일 판결했다.

전쟁의 끝 그리고 남겨진 것
 

월남전 전몰 장병 합동 위령제 ⓒ 영화 <기억의 전쟁> 스틸컷

 
베트남 전쟁에 동원된 한국군 청년도, 한국군에 의해 죽은 베트남 청년도 결국 피해자이다. 누군가는 분명 그 죽음에 책임이 있을 텐데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전쟁으로 누가 이득을 보았을까. 베트남 전쟁 특수로 성장한 한진 같은 재벌과 국가였다. 청년의 핏값으로 일군 재산이 형제 싸움, 남매 싸움 등 대를 이은 분쟁을 거치며 후손에게 승계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이 베트남 전쟁을 통해 경제 개발을 위한 대규모 자금을 유치한 것은 한국 현대사의 수치스러운 장면 중 하나다. 한국군의 2차 파병 이후에 베트남 전쟁의 전황이 미국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박 정권은 청년의 목숨을 담보로 거래에 나섰다. 물론 그 전에 경제적 동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치적 명분을 앞세웠던 것과 달리 한국 정부는 군대를 더 보내는 대신 상응하는 경제적 혜택을 달라고 미국에 노골적으로 거래를 제안한다.

이에 따라 1966년 3월 체결된 브라운 각서에 의하면 한국은 5만 명을 상한선으로 하여 베트남에 군사를 파견한다고 약속했다. 그 대가로 미국은 한국에 국군의 현대화 계획을 위한 장비를 제공하고, 한국 기업으로 하여금 베트남 전쟁에 쓰이는 군수물자의 일부를 납품하게 했으며, 한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과 수출을 지원하고 한국 경제개발을 위한 차관을 제공했다.

제국주의 전쟁에 자국 병사를 용병으로 보내 돈벌이를 하고, 청년의 죽음으로 유입된 자본이 재벌의 성장에 기여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박정희 정권은 분명 매우 부도덕하고 추악한 짓을 저질렀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전쟁으로 피해를 본 청년들은 이역 땅에서 명분 없는 전쟁에 참여해 적대할 이유가 없는 베트남군을 살상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도 죽거나 다쳤으며 귀국 후에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었다. 더구나 책임의 화살을 온전히 자신에게 돌려야 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병사들은 투철한 애국심, 이데올로기적 사명감, 영웅주의 따위의 이유를 두고 싸우지 않았다. 병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생존'이었다.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라는 폭력적인 편 가르기 아래에서 죽여야 했고 죽어야 했다.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인을 파병했다.



- 황경서: 고려대학교 철학과 3학년 재학.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좋아하며 눈물과 정이 많다.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중이다.
- 안치용:· 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이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죽통한사를 함께 진행한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1) 김자영, 「베트남 전쟁 소설에 나타난 성과 섹슈얼리티 연구」, 2020
2) 신종태, 「월남전 참전 고엽제 환자와 보훈정책 발전방향」, 『군사발전연구』, 제7권 2호, 2013, 147-163
3) 최용호, 『통계로 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7
4) 박태균, 『베트남 전쟁: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한겨레출판, 2015
5) “고엽제 후유증 派越장병 신병비관 목매자살”, <동아일보>, 1992.08.01. 연합뉴스
6) 장두성, “월남전 고엽제 후유증 심각”, <중앙일보>, 1984.05.14.
7) 지요하, “나는 고엽제 피해자...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오마이뉴스>, 2011.05.23.
8) 최영기, “[최영기 변호사의 알쓸신軍] 고엽제후유증 환자의 자살, 국가유공자에 해당할까” <스포츠경향>, 2020.06.22.
9) 황석영, 『무기의 그늘 상』, 창비, 2006,
10) 이길보라 (감독/제작), <기억의 전쟁>[영화], 서울: 영화사 고래, 2020
11)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http://kaova.or.kr/document/main/main.php
12) 박태균, “돈이 고립된 장병들의 목숨보다 더 중요했나”, <한겨레>, 2014.10.31.
13) 윤충로, 『베트남 전쟁의 한국 사회사』, 푸른역사, 2015.
14) 김영두, 『안케패스 대혈전』, 북코리아, 2018.
15) 고경태, 『1968년 2월 12일 : 베트남 퐁니·퐁넛 학살 그리고 세계』, 한겨레출판, 2015.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