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9 13:55최종 업데이트 20.11.24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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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질타를 받을 만한 일들로 끊임없이 시선을 끌고 있다. 치매 때문에 법정 출석이 어렵다더니 골프장에 나타나 시원하게 샷을 날리고, 5·18의 한이 서린 광주에 가서 "이거 왜 이래?"라며 인상을 쓰고, 12·12 쿠데타 40주년을 기념해 서울 강남 식당에서 1인당 20만 원 상당의 코스 요리를 시켜 먹으며 자축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번에는 지방세 고액 체납 건으로 또다시 언론에 거론됐다. 지난 18일 서울시가 홈페이지에 공개한 '지방세 고액·상습 체납자 명단'에 따르면, 2014년 7월 31일이 납기인 지방소득세 등 4건의 체납액이 9억 7400만 원이라고 한다.
 

서울시가 공개한 전두환 체납 실태. ⓒ 서울특별시

  
전두환은 작년 11월 20일에 주민세 체납 건으로도 언론에 보도됐다. 그날 서울시 홈페이지에 따르면, 2014년 8월이 납기인 주민세 6170원을 2019년 11월이 되도록 납부하지 않았다. 재임 전과 재임 중의 범죄뿐 아니라 재임 후의 가지가지 일로도 끊임없이 국민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라도 가급적 언론에 보도되지 말아야 한다. 죽은 듯이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도 공개적으로 골프 치고, 신경질 내고, 12·12 자축연을 여는 것도 모자라 세금마저 제때 내지 않아 체납자 명단에 올라 있다. 죽은 듯이 살 의향이 별로 없는 것이다.

리영희 "죽는시늉이라도 해야지"

전두환이 제1공수특전단장이 된 1971년에 합동통신 기자로 있다가 '64인 지식인 선언'으로 강제해직된 리영희(1929~2010). 그 뒤 한양대 교수가 된 그는 구속·석방·복직·해임을 되풀이하다가 도쿄대·하이델베르크대·버클리대 교수를 거쳐 1988년 9월 20일 <한겨레> 이사 겸 논설고문에 취임했다. 전두환이 퇴임한 지 7개월 만에 언론인으로 복귀한 것이다.

전두환 처벌을 향한 국민적 압력이 그해 3월부터 거세졌다. 전두환 동생 전경환이 구속되고(3.31), 국회 5공 청문회(제5공화국 비리 및 5·18 규명)가 열리고(11.2), 형 전기환과 사촌동생 전우환이 체포되고(11.12), 동서 홍순두가 구속(11.13)된 데 이어 전두환·이순자가 백담사로 도피(11.23)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복직 언론인 리영희가 기대한 게 있었다. 그해 12월 4일 자 <한겨레> 칼럼 '죽는시늉이라도 해야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왕년의 폭군이 몽둥이 맞은 개처럼 백담사로 도피하는 광경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저 뒤를 따라 많은 생명이 죽겠구나! 끔찍한 장면들이 전개되겠지.' 전두환이 난세의 영웅이었던 시절에 목숨을 바쳐 모신다고 앞을 다툰 혁명 상황의 영웅들이 이제 앞을 다투어 자결을 할 게 아닌가? 그 장면을 예상했던 것이다.
 
자신들이 모시던 대통령이 산중에서 은거 생활을 하게 됐으니 전두환의 충신들이 극단적인 방법으로라도 분노와 충절을 표하지 않을까 하고 리영희가 생각했던 듯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무리 기다려도 순절했다는 소식이 없다. (중략) 죽기가 싫으면 죽는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전두환 부하들이 죽는시늉도 하지 않은 것은 누가 봐도 분노할 만했다. 리영희뿐 아니라 한국인 대다수가 다 그랬다. 
 

백담사에서 전두환 내외 ⓒ 자료사진

 
그런데 전두환 부하들의 뻔뻔함은 상당 부분 전두환에게서 기인했다고 말할 수 있다. 리더인 전두환이 벌벌 떠는 모습을 보이며 죽는시늉이라도 했다면, 장세동 전 안기부장을 비롯한 측근들도 비슷한 흉내를 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리더가 죽는시늉은커녕 건재를 과시했으니 부하들도 굳이 죽는시늉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1988년 중반을 뜨겁게 달궜던 그 소문이 정말 실현됐다면 우리 국민들은 훨씬 더 뻔뻔한 전두환을 보면서 속을 끓이게 됐을 것이다. 그 소문이 현실화했다면, 한국인들은 전두환이 골프 치고 인상 쓰고 자축하는 장면을 국내 언론이 아닌 외신 보도를 통해 접해야 했을 것이다.


9월 17일에 서울 올림픽이 개막된 1988년에 우리 국민들이 올림픽 소식 다음으로 촉각을 곤두세운 것 중 하나는 전두환의 망명 가능성이었다. 그 부부가 해외로 달아날 거라는 소문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해외 망명을 이미 시도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망명을 시도했다가 노태우 정권과 물리적 충돌을 빚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1988년 7월 29일 자 <한겨레> 기사 '전씨 부부 망명설 진위 밝혀져야'에 이런 보도가 실렸다.
 
대학가의 대자보, 해외 간행물 복사판 등을 통해 번지고 있는 이 유언비어에 대해 대부분의 언론이나 정부에서 침묵으로 일관, 사회적 궁금증을 더해주고 있다. 특히 언론사에는 그 진위를 확인하려는 문의 전화가 매일 그치지 않고 걸려오는데, 일부 시민은 언론이 왜 침묵하고 있느냐고 항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의 망명 기도가 강제로 저지됐다는 것을 골자로 하면서 부분적으로 약간의 차이를 나타내는 이들 유언비어는 '비행장 부근에서 발생했다', '총격전이 벌어져 사상자가 생겼다'는 내용이 공통적으로 담겨 있다.
 
이 뉴스가 사실이라면 전두환 망명으로 곤경에 처할 것을 예상한 노태우 정권이 무장 병력을 보내 저지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의구심을 키우는 뉴스는 외신에서도 나왔다. 그해 11월 12일 자 <한겨레> 기사 '국회에 전두환씨 재산조사 특위를'에 따르면 호주에서는 "(전두환이) 오스트레일리아에 수백만 달러를 투자했다"는 보도가 나왔고, <워싱턴 포스트>에서는 "미국이 전씨의 망명을 받아주면 반미감정이 일 것"이라는 경고성 기사가 나왔다.

망명지로는 미국이 유력시됐다. 그가 미국 유학 경험이 있고 친미 노선을 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의 망명을 가로막는 듯한 보도들이 나왔다. 전두환이 망명하면 그해 11월 8일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조지 부시 대통령 당선인이 곤경에 처할 것이라는 보도가 국방부 기관지인 <성조지>에 실렸다. 이런 보도까지 나온 것은 미국이 전두환 망명을 원치 않는다는 신호로 해석됐다.

전두환은 대다수 국민들이 손가락질하는 대한민국 땅에서도 죽는시늉은커녕 도리어 뻔뻔하게 살고 있다. 만약 1988년에 망명이 현실화됐다면 그는 한국 국민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이국땅에서 훨씬 더 뻔뻔하게 건재를 과시했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그의 뻔뻔한 최근 동정을 보여주는 외신 보도들이 이따금 한국을 흔들어놨을 수도 있다.

이명박·박근혜 사면? 전두환을 보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부인 이순자 씨와 함께 27일 오전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리는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을 나와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2020.4.27 ⓒ 연합뉴스

 
그가 그렇게 뻔뻔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정도는 개인적 기질 때문이기도 하고 동조 세력이 여전히 녹록지 않은 기득권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크게 두 가지 경험이 그의 자신감을 키워줬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박근혜와 달리 전두환은 전국적인 시민혁명에 굴복하고도 1987년 12월 대선에 승리해 정권을 지켜냈다. 6월항쟁 직후의 야당 정치권 분열이 그에게 승리를 헌납하는 최대 원인이 됐다.

그는 1995년 12월 3일 경남 합천에서 잠옷 바람으로 체포되고 대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았지만 1997년 12월 22일 사면·복권으로 풀려났다. 현대사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뤘지만, 아직은 보수층을 의식해야 했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결정적 원인 중 하나였다. 이 두 가지 사건이 전두환을 더욱 뻔뻔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지금 수감돼 있는 이명박·박근혜에 대한 태도를 정하는 데 참고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두 사람을 조기에 사면해야 한다는 논의에 굴복해 이들을 섣불리 풀어준다면, 우리 국민들은 '뻔뻔한 전두환'에 이어 '뻔뻔한 이명박·박근혜'까지 경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국민들은 이명박·박근혜 역시 죽는시늉은커녕 당당하게 놀러 다니고, 자축하고, 지방세 체납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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