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6 19:28최종 업데이트 20.11.16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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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헌법재판관들이 대심판정에 입장해 자리에 앉아 있다. 2020.4.23 ⓒ 연합뉴스

 
헌법재판소에서 근친혼 금지 규정을 놓고 헌법소원 심판이 진행되고 있다. 민법 제809조 제1항의 "8촌 이내의 혈족 사이에서는 혼인하지 못한다"라는 규정과 관련해 '근친혼 범위가 지나치게 광범위해서 과잉금지원칙에 위배된다'며 '6~8촌 이내 혼인 관계에서 태어난 자녀가 특별히 유전적 질환을 갖는 것도 아니다'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반론에 나선 법무부는 '혈족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 의식은 우리 사회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며 '혼인의 자유가 가족공동체 질서를 유지하려는 공익보다 우월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라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 가족 질서에 입각한 공익을 지키려면 민법 제809조 제1항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민법 제809조 제1항은 예전에는 "동성동본인 혈족 사이에서는 혼인하지 못한다"였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1997년에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한다"라는 결정을 내렸고, 이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라 2005년 3월 31일에 "8촌 이내의 혈족 사이에서는 혼인하지 못한다"라는 현행 규정이 등장했다. 이렇게 동성동본 금혼 규정을 대체하면서 등장했던 현행 민법 제809조 제1항 역시 오늘날 도전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근친혼의 대표 주자 신라 왕실

근친혼을 하면 가족 질서가 위태해지고 유전적으로 좋지 않다는 말이 정말이라면 우리 민족은 아주 오래전에 위험해졌을 것이다. 근친혼 금지를 포괄하는 동성혼(同姓婚) 금지가 일반화된 것은 오백 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위와 같은 우려가 사실이라면 우리 민족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2010년에 <민족문화논총> 제46집에 수록된 이창기 영남대 교수의 논문 '성리학의 도입과 한국 가족제도의 변화'는 "동성동본 간의 혼인이 신라 시대나 고려 시대에 많이 행해졌다는 것은 앞에서 밝힌 바이지만 조선 시대 초기까지도 그 빈도가 현저하게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완전히 근절되지는 못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며 이렇게 설명한다.
 
1476년에 간행된 안동 권씨의 족보인 <성화보(成化譜)>에 고려 시대 조상들의 동성동본 혼인 사례를 숨김없이 그대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도 동성동본 혼인에 대한 금기 의식이 아직 확고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성동본 혼인은 조선 초기를 지나면서 거의 사라지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동성동본 금혼이 확고한 사회적 규범으로 정착하게 된다.
 
조선 시대 이전만 해도 근친혼에 대한 시선이 나쁘지 않았다는 점은 왕실이 앞장서서 근친혼을 했다는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다. 사회의 표준을 만들어내는 왕실이 일반 백성들보다 훨씬 더 많이 근친혼을 했기 때문에 '근친혼은 나쁘다'는 판정을 내릴 만한 세력이 등장하기도 힘들었다.
 
그렇게 앞장서서 근친혼을 했던 왕실의 대표주자가 신라 왕실이다.

참고로 박씨·석씨·김씨 세 혈통이 신라 왕위를 이었지만 이 셋은 하나의 왕실에서 살았다. 신라에 3개의 왕실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왕실이 3개면 왕국도 3개여야 한다. 세 혈통이 각각의 왕실을 구성하고 각각의 왕실에서 족내혼(씨족 혹은 부족 등의 내부 혼인)을 했다면 전체 신라 왕실을 단위로 한 근친혼 이야기가 애당초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 혈통이 하나의 왕실 내에서 족내혼을 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신라에서 근친혼이 촉진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화랑세기>는 왕비족의 존재에서 찾는다. <화랑세기> 세종 편에 따르면 제13대 미추왕(김씨)은 후손들에게 "옥모의 인통(姻統 왕비 혈통)이 아니면 왕후로 삼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11대 조분왕과 제12대 첨해왕의 어머니인 옥모 부인의 여자 후손들 중에서 왕후를 고르도록 했으니 배우자 선택의 폭이 더욱 축소될수밖에 없었다
 
신라 왕조는 900년 넘게 유지됐다. 이 기간에 박·석·김은 친인척 관계로 뒤엉켰다. 만약 근친혼이 가족 질서를 파괴하고 유전적 결함을 초래한다면 신라가 900년 넘게 유지된 사실을 제대로 설명하기 힘들 것이다.
 
왕실에서 족외혼을 금지했기 때문에 신라 왕족들한테는 근친혼이 당연한 일이었다. 김유신의 어머니인 만명 부인과 아버지인 김서현의 결혼이 왕실의 반대에 봉착한 것은 그것이 중매 결혼이 아닌 연애 결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만명은 왕족이고 김서현은 왕실 밖의 귀족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명과 김서현이 현재의 충북 진천인 만노군으로 도망가 신혼살림을 차린 것은 이런 결혼이 금기시됐기 때문이다. 신라 왕실의 입장에서는 이런 결혼이 이상하고 불법적인 결혼이었던 것이다.
 

ⓒ sxc

 
오늘날 민법 제809조 제1항의 위헌성을 주장하는 쪽은 '근친혼 금지 규정이 배우자 선택의 자유를 제약한다'라고 말한다. 배우자 선택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점에서는 근친혼을 금지하는 것이나 근친혼을 강제하는 것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 만명 부인과 김서현의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왕실 근친혼을 강제하는 풍습 역시 배우자 선택의 자유를 제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신라 왕실이 이런 풍습을 유지한 가장 강력한 이유는 왕실 권력의 보호에 있었다. 왕실이 외부 가문과 혼인을 하면 토지 같은 재산이 감소하는 것은 물론이고 권력을 공유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다. 고대에는 왕뿐 아니라 왕비도 신성한 존재로 인식됐기 때문에 왕비의 일가친척이 권력과 명예를 갖게 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을 길이 없었다.
 
왕실과 혼인한 외척 가문들이 왕실 이상의 권력을 보유할 수도 있다는 점은 19세기 전반기의 세도정치 시대에도 잘 증명됐다. 이 시기에 경주 김씨, 안동 김씨, 풍양 조씨는 왕실과의 혼인을 바탕으로 세도 가문의 권세를 누렸다. 외척과 권력을 나눠야 하는 이 같은 상황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라 왕실의 근친혼은 정치적 효용성을 갖는 것이었다.
 
고려에 근친혼 폐지 요구한 몽골 황제

신라보다는 덜했지만 고려 왕실 역시 근친혼을 당연시했다. 신라가 멸망하기 전에 고려가 건국됐으므로 신라의 풍습이 고려에 전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태조 왕건의 손녀인 천추태후가 사촌오빠인 경종 임금과 혼인한 것도 그런 풍습 때문이었다.
 
고려 왕실의 근친혼이 신라보다 덜 철저했던 것은 태조 왕건이 호족들의 힘을 많이 빌려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왕건이 호족들과 결혼동맹을 맺느라 부인을 29명이나 둔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고려 왕실은 신라 수준의 근친혼을 밀어붙일 힘이 없었다. 호족들과의 결혼동맹을 무시해도 되는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도 나타나는 것은 근친혼 제도가 정치 권력 문제와 관련돼 있다는 점이다.
 
몽골(원나라) 간섭기에 몽골 황실이 고려를 상대로 왕실 근친혼의 폐지를 촉구한 것도 그런 이유와 관련이 있었다. <고려사> 충선왕 세가(충선왕 편)에 따르면 몽골 황제인 쿠빌라이칸(세조)은 '문자를 알고 공자의 도를 아는 고려에서는 동성 불혼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펴면서 왕실 근친혼의 폐지를 촉구했다. 몽골은 공자의 도를 거론했지만 진짜 의도는 다른 데 있었다. 신명호 부경대 교수의 <조선왕비실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고려왕이 원나라의 부마가 되자 왕실의 족내혼은 큰 걸림돌이 되었다. 원나라 공주가 제1왕비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원나라 세조 황제는 고려 왕실에 족내혼을 폐지하라 요구했다. 이처럼 동성 불혼은 고려왕에게 시집오는 원나라 공주들을 위해 시행되었다.
 
신라 왕실과 고려 왕실이 근친혼을 한 것이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듯이 몽골이 근친혼 폐지를 요구한 것도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조선 시대에 동성혼 및 근친혼 금지가 정착된 것도 엄밀히 말하면 동일한 이유 때문이었다. 남성 중심, 부계 중심의 질서를 구축해 정치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성리학자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옛날 사회에 등장한 근친혼 논의는 정치적 이유에 더 많이 기인했다. 원래의 근친혼 자체는 사악한 제도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은 우리가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오늘의 근친혼 문제를 토의할 수 있도록 해주는 토대로도 기능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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