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3 12:48최종 업데이트 20.11.13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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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표현했고 우리는 그것을 수용해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위대함을 존중해야 한다. 나는 조금 전 클린턴 주지사와 통화했고, 축하를 전했다. 그가 힘든 선거를 치렀는데, 백악관에서의 행운을 빈다."
- 1992년 조지 H. W. 부시 (대통령, 공화당 후보)

"선거 기간 동안 나는 누차 말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나의 라이벌이지 적이 아니다. 그에게 행운을 빈다. 그가 더 나은 미국을 만들도록 지지를 보낼 것을 나는 약속한다."
- 1996년 밥 돌 (상원의원, 공화당 후보)

"조금 전 조지 부시 후보자에게 43번째 대통령이 된 것을 축하했다. 법원은 결정했다. 그들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지만 수용한다. 민주주의를 위해, 그리고 국민 통합을 위해 나의 패배를 인정한다."
- 2000년 앨 고어 (부통령, 민주당 후보)

"나는 오늘 부시 대통령과 로라 부시 여사에게 승리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우리는 국가 분열 위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투표를 통한 국민의 목소리는 중요하다. 선거 결과는 법원의 긴 절차가 아닌 유권자들에 의해 결정돼야 한다."
- 2004년 존 케리 (상원의원, 민주당 후보)

"조금 전 나는 오바마 상원의원에 전화했다. (청중 야유) 진정하시길. 그리고 우리 둘 모두 사랑하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된 데 대해 축하를 전했다. 이 길고 어려운 선거 기간 동안 그가 보여준 참을성과 성공에 대해 나의 존경을 보낸다."
- 2008년 존 매케인 (상원의원, 공화당 후보)

"나는 조금 전 오바마 대통령에게 축하를 전하기 위해 전화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위기에 처했다. 정쟁과 진영 싸움을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 정치 지도자라면 민생을 살펴야 한다."
- 2012년 미트 롬니 (전 주지사, 공화당 후보)

"어제 저녁 나는 도널드 트럼프에 축하를 건넸고 국가를 위해 일해 달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모든 미국인들의 대통령이 되길 희망한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하게 나라가 분열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미국을 믿는다. 여러분도 믿는다면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자."
- 2016년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민주당 후보)

1992년부터 2016년까지 미국 대선에서 패배한 후보들이 선거가 끝난 후 남긴 첫 발언들이다. 상처를 입고 기다리는 지지자들 앞에 선 패장의 육성에는 색깔이 없었다. 슬픈 지지자들을 다독여야 하기 때문에 힘을 잃어서도 안 되고 격앙된 지지자들을 달래야 하기 때문에 목소리를 높여서도 안 된다.

패배 연설의 품위

그렇게 담담한 목소리로 그들은 상대방에 대한 예를 갖추면서 축하를 건넸다. 그리고 통합을 이야기했다. 국가를 이야기했고, 미래를 이야기했다. 그들은 패배했지만 국가지도자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


후보자의 패배 연설 안에는 많은 것들이 함축돼 있다. 그래서 여러 가지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당대의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당면 과제 또한 그 안에 깊이 배어 있다. 2000년 이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미국을 가로지르는 사회적 분열과 갈등의 흔적이 이들 패장들의 연설 안에도 담겨 있다는 점이다.

균열의 조짐에 대해 그들은 한쪽 진영의 장수로서 책임의식과 고민을 이야기하면서 결국 통합을 향한 호소 또한 잊지 않는 모습들을 보인다. 정파의 대표로 나섰지만, 전체 미국의 지도자가 되기 위한 출정이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제도 하의 선거가 축제이고 전쟁이 아닌 이유가 그것이다. 전쟁에서의 승자는 정복하고 접수하지만, 선거에서의 승자는 포용하고 통합한다. 그래서 모든 유권자는 각 정치 진영의 영향력 범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만의 고유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2009년 1월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 당선인을 환영하기 위해 미국 전·현직 대통령들이 백악관에 모였다. 왼쪽부터 조지 HW 부시(41대 대통령), 버락 오바마(44대 대통령), 조지 W 부시(43대 대통령), 빌 클린턴(42대 대통령), 지미 카터(39대 대통령). ⓒ AP=연합뉴스

 
그리고 그렇게 진영 논리를 벗어난 선택을 했을 때, 비로소 유권자는 주권자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민주주의가 포퓰리즘과 구별되는 접점이고 경계선이다. 어떠한 포퓰리즘 사회에도 전체주의와 달리 유권자층은 존재한다. 제도적 의미의 참정권은 보장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퓰리즘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유권자들은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투표를 행사하지 못한다. 주권자로서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포기한 (또는 박탈당한) 유권자들은 진영 속의 거수기로 전락한다.

스윙 스테이트, 세이프 스테이트

198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은 주(state)별로 투표 성향이 획일화되지 않았다. 1980년과 1984년 선거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후보는 각각 지미 카터, 월터 먼데일 민주당 후보를 상대로 일부 주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주를 석권하면서 완승을 거두었다.

그에 앞선 1976년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지미 카터 후보가 공화당의 제럴드 포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는데, 동부지역에서는 거의 포드 후보가, 서부지역에서는 예외 없이 카터 후보가 승리하면서 동서가 나뉘는 투표 양상을 보였다.

그보다 더 앞선 1968년과 1972년 선거에서는 닉슨 후보가 역시 전국적으로 고른 지지를 얻으며 당선이 됐다. 하지만 1964년 선거에서는 반대로 민주당의 린든 존슨 후보가 남부 6개 주를 제외하고 전국을 석권하면서 압승을 거뒀다. 그 이전의 선거 양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후보자에 따라, 정책에 따라, 시대적 요구에 따라 선택을 달리 했던 미국 유권자들의 투표 양상은 1990년대 들어서면서 달라진다. 주로 동서 해안 도시 지역에서는 민주당에 몰표를, 내륙 농촌 지역에서는 공화당을 향한 몰표 현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정책적 변화가 커지기 시작한 것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대부분의 주에서 특정 정당을 향한 '묻지마 투표' 양상이 굳어지면서 '소수의 경합주'(스윙 스테이트, Swing States : 늘 같은 정당을 지지하지 않고 선거마다 승리 정당이 달라지는 주)들이 사실상 미국 대선을 결정하는 기형적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전에도 경합주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90년대 들어 더욱 이들의 중요성이 커진 것이다. 그 반대인 안전주(세이프 스테이트, Safe States)에서는 특정 정당이 말 그대로 안전하게 몰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유권자들의 심리적 참정권은 그만큼 제한된다.

물론 특정 지역의 몰표 현상이 미국만의 것은 아니다. 한국을 포함 대부분의 국가에서 존재한다. 하지만 국가마다 이유는 다르고, 미국의 경우 선거인단 승자독식 제도 때문에 세이프 스테이트의 많은 유권자들은 특히 참정권에 대한 박탈감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저학력 백인 남성 계층

미국의 지역별 투표 편향이 굳어질 즈음, 또 하나 미국 선거의 특이점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바로 '저학력 백인 남성'이라는 계층이 선거의 중요한 변수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 ① 지역별 투표 편향과 ② 저학력 백인이라는 새로운 계층의 탄생. 2020년 대선에서 120년 이래 최고의 투표율을 보일 만큼 참여 열기가 뜨거웠고, 민주당 지지자들 역시 역대 최고의 결집을 보였음에도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가까스로 신승을 한 것은 바로 이러한 두 요인 때문이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은 13일 시점까지도 여전히 패배 시인을 거부하고 있다.)
 

백인 남성이 트럼프 지지 펼침막을 들고 서있다. ⓒ 최현정

 
전통적 미디어의 영향력이 퇴조하고 <폭스뉴스(Fox News)>와 같은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 그리고 유튜브 등 개인 방송이 폭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정제되지 않은 표현들과 정확하지 않은 정보들, 때로는 가짜 정보들이 특히 이들의 귀와 눈을 사로잡게 된다. 지금까지의 미디어에서 접한 내용들과 다른,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보들을 이들은 비로소 찾은 것이다.

전통적 의미의 무산계급(proletariat)과 달리 이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문화적 박탈감에 따른 증오의 대상을 생물학적 근거에서 찾는다. 미국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백인으로서 자신들의 마땅한 권리를 다른 인종들에게 빼앗기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 인종에 기댄 권리야말로 절대 빼앗길 수 없는 권리다.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지 못하는 것들을 주어진 동물성에서 보장받기 때문에.

이들은 기존의 정당, 미디어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들이 느끼는 공허한 빈자리를 새로운 미디어와 새로운 정치세력이 파고 든 것. 정치인 트럼프를 넘어 트럼피즘(Trumpism)이라는 괴물은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졌다.

트럼피즘 - 괴물의 탄생

소수의 스윙 스테이트가 미국 정치의 향방을 결정하듯, 소수의 저학력 백인 남성 계층은 이제 미국의 특수한 선거 지형 위에서 중요한 정치 변수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한번 집권을 경험한 이들은 권력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 패배를 해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와 충돌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미 이들은 뉴미디어에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가치를 찾았다.

이들은 선거를 축제가 아닌 전쟁으로 여긴다. 승자가 되어 통합을 원하기보다 쟁취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를 원한다. 게임의 규칙보다 승리가 중요하다.
 
"합법적인 투표만 계산하면 내가 이긴다. 불법 투표까지 계산하면 민주당이 결과를 가로챌 수 있다. … 법적 소송이 많아질 것이다. 아마 최고법원에서야 끝날 것이다. 나는 우편투표가 재앙이 될 것임을 몇 달 전부터 얘기해왔다."
- 2020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공화당 후보)
   

재향군인의 날 맞아 국립묘지 참배하는 트럼프 부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1일(현지시간) 재향군인의 날을 맞아 부인 멜라니아 여사와 함께 버지니아주 알링턴의 국립묘지에 있는 무명용사묘에 도착하고 있다. ⓒ 알링턴 AP=연합뉴스

 
패배 인정을 거부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뒤에는 승복을 거부하는 그들이 있다. 선거가 끝났지만 미국 정치권의 고민이 깊어진다. 그 고민의 몫이 반드시 민주당만의 것은 아니다. 민주당의 고민은 전략적 고민일 것이다. 올해 대선처럼 총 역량을 모아도 이처럼 힘들다면 앞으로 어떤 전략을, 또는 어떤 노선을 취해야 할까?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공화당의 고민이 더 근본적일 듯하다. 과연 공화당의 기본 가치는 새롭게 등장한 트럼피스트(Trumpist , 트럼프주의자)들의 가치를 포용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한두 번의 선거 승패를 떠나 먼 미래를 위해 과감한 단절을 할 것인가? 보수 재건을 위한 공화당의 고민은 이제부터다. 그리고 그 고민은 미국만의 것은 아닌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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