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5 18:39최종 업데이트 20.10.05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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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의 최대 라이벌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김대중 말고도 라이벌이 더 있었다. 27세 때인 1954년 제3대 총선에 당선된 때부터 38년 뒤인 1992년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그는 경쟁자들과의 대결을 수도 없이 거쳤다.
 
마지막 대선이 된 1992년 대통령 선거 전에도 김영삼은 한동안 라이벌의 집중 견제를 받았다. 김영삼은 똑똑한 인상을 풍기는 조카뻘 라이벌의 견제로 청와대 입성을 향한 마지막 고비에서 진땀을 빼야 했다. 김영삼에게 호된 경험을 안겨준 이 경쟁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쪽 사촌동생인 박철언 전 의원이다.
 
6공화국의 황태자

김영삼이 통영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2년 경북 성주에서 출생한 박철언은 5·16 쿠데타가 일어난 해이자 김영삼이 2선 의원이 된 이듬해인 1961년에 경북고를 졸업하고 다음 해에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
 
25세 때인 1967년 고등고시 사법과(사법시험)에 합격한 박철언은 김영삼의 정치적 성장과 민주화 투쟁이 두드러지던 1970년대에 검사로 일했다. 그에게 인생 전환점이 된 것은 1979년 10·26 사태(박정희 피살)에서 시작해 1980년 5·18 광주항쟁과 전두환 대통령 취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박철언은 광주항쟁 직후인 1980년 5월 31일 설치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라는 일종의 비상정부에 합류했다. 법사위원으로 이곳에서 파견 근무를 하면서 전두환과 육사 11기 이하를 중심으로 구축된 신군부 정권의 법률통이 된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김영삼이 2년간 가택연금을 당하고 23일간 단식투쟁을 벌이며 저항운동의 구심점으로 활약한 1980년대 전반에 박철언은 제5공화국 정권에서 실력을 발휘하며 기반을 굳혀 나갔다. 5공 헌법의 기초 작업에 참여하고 대통령 정무비서관 및 국가안전기획부장(안기부장) 특별보좌관 등을 지내며 대북 비밀 활동에도 개입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정권 2인자 노태우의 킹메이커로도 활약한 박철언은 1987년 6월항쟁 직후에 노태우의 대선 승리에 기여하고, 46세 때인 이듬해에는 13대 총선을 통해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변신했다. '6공 황태자'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만약 노태우 정권이 몇 년 일찍 출범했다면, 박철언은 이 정권에서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해 '포스트 노태우'에 좀 더 가까이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지분 확보를 제약하는 요인이 있었다.
 
불안한 노 정권, 황태자도 불안

6월 항쟁 직후의 양김 분열(김대중·김영삼 분열) 덕분에 12월 대선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노태우 정권은 근본적으로 불안정했다. 항쟁의 결과로 직선제 개헌을 성사시킨 민중과 개혁 진영이 사회 혁신을 위한 다음 투쟁에 돌입했을 뿐 아니라 박철언이 국회 입성에 성공한 그 총선에서 민주정의당(민정당)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해 사상 최초로 여소야대 국회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4·19 혁명을 잠재운 5·16 쿠데타 같은 것이 6월 항쟁 뒤에는 없었다. 이로 인해 노태우 정권은 권력 유지에 불안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6공 황태자가 됐으므로 박철언이 '포스트 노태우' 지위를 편안히 지키기는 힘들었다.
 
독자적으로는 살아남을 자신감이 없었던 노태우 정권은 적대 세력인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껄끄러운 선배 세력인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을 끌어들여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을 성사시켰다. 일단은 살아남아보자는 몸부림이었다.
 
김영삼 입장에서는 3당 합당이 정치적 열세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였다. 호남 대 비호남의 대립 구도가 심화되던 당시의 정치 현실에서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1988년 총선 때 59석을 차지함으로써 김대중의 평화민주당(70석)에 밀려 3위 정당이 되었다. 김영삼 입장에서는 3당 합당이 김대중을 넘어서는 동시에 비호남 세력의 맹주가 될 수 있는 기회였다.
 

1990년 3월 10일 민자당 최고위원이 된 김영삼이 국회 구 민주당 총재실에서 박철언 정무장관의 예방을 받고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렇게 성사된 3당 합당은 그때까지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김영삼과 박철언이 민주자유당 안에서 공동운명체가 되도록 만들었다. 동시에, 두 사람을 라이벌 관계로 엮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적 경륜에서는 김영삼이 월등히 앞섰지만, 박철언이 황태자로 불릴 만한 입지를 갖고 있었기에 이런 구도가 성립할 수 있었다. 이 구도 속에서 황태자 박철언은 자기 위상의 상당 부분을 김영삼과 공유한 채 김영삼을 극복해야 할 과제를 안게 됐다.
 
그런데 이 경쟁은 엄밀히 말하면 김영삼 대 민정계의 경쟁 또는 민주계와 민정계의 경쟁이었다. 박철언은 노태우 대통령과 민정계의 이해관계에 입각해 김영삼과 경쟁했다. 김영삼과 경쟁하는 박철언은 '개인 박철언'이라기보다는 '민정계 대리인' 혹은 '노태우 대리인' 박철언이었다.
 
민정계가 김영삼과 한 배를 탄 것은 민중혁명을 차단하고 보수정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김영삼을 적절히 활용해 위기를 극복하자는 정도의 생각이 있었을 뿐이다. 2005년에 <한국학 연구> 제22권에 실린 정태환 고려대 교수의 논문 '김영삼 정권의 등장 배경과 주요 정치세력의 역학'에 이런 대목이 있다.
 
노태우와 민정당은 기득권을 어떤 방식으로 보전하느냐가 중요했기 때문에, 정통 야당 지도자인 김영삼을 끌어들여 간판 스타로 활용해 민정당 세력을 안존시키고, YS에 대한 사실상 무력화를 시도하여 실질적 기득권을 차기 정권에도 그대로 유지하자는 계획이었다.
 
4·19 혁명, 6월항쟁, 촛불혁명의 공통점은 기존의 보수집권당이 대선 후보급 지도자를 상실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세 사건 뒤에 보수진영이 내각제 개헌을 선호하거나 추진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시민혁명의 직격탄을 맞은 정당이 직선제 대통령 후보를 내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김영삼을 막아라

6월항쟁 이후의 민정당은 그런 인물난에 시달렸다. 이 인물난은 끝내 해결되지 않았다. 민자당을 계승한 역대 정당들에서 대통령 후보들이 배출되기는 했지만, 여기서 배출된 유력 주자들 가운데 민정계는 없었다. 김영삼·이회창·이명박·박근혜는 신군부 출신의 민정계와 다른 길을 걸은 사람들이었다. 노태우를 끝으로 유력한 민정계 대권 주자들이 단종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철언은 김영삼이 대권 후보를 꿈꾸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맡았다. 그가 시도한 방법 중 하나는 김영삼의 '돈줄' 죄기였다. 이 점은 1991년 7월 27일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호남 출신이지만 노태우 친위 세력인 최영철 정치특보가 그날 재벌기업 관계자들에게 했던 발언은 박철언의 의중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강준만 교수의 <김영삼 이데올로기>는 그날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민자당 내부 투쟁은 사실상 돈줄 싸움이었다. 그 유명한 7·27 파동도 그런 돈줄 싸움과 무관하지 않다. 91년 7월 27일 당시 대통령 특보 최영철은 전경련 산하의 대기업 경영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특강을 통해 '김영삼 대표는 민자당의 차기 대권후보가 되기 어렵다'고 거의 단정하다시피 했다. 당시 언론은 이 발언이 정치자금 공급원인 재벌들에게 김영삼에 대한 지원을 자제하라는 통보를 한 것과 다름없다는 해석을 내렸다.
 
김영삼과 박철언의 경쟁은 이 외에도 다양한 양상을 띠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박철언이 배후에서 선공을 날리면 김영삼이 받아친 뒤 역공을 가하는 식이었다. 이 양상은 3당 합당 얼마 뒤부터 나타났다.
 
1990년 10월 25일, 합당 당시에 내각제 합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언론에 공개됐다. 이 상황이 굳어지면 김영삼의 대통령 꿈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배후에 박철언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 상황에 맞서 김영삼은 사태를 한층 더 악화시키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김영삼은 내각제 포기를 요구하고 당무 포기를 선언했다. 또 탈당을 할 듯이 하는 방법으로 노태우와 민정계 그리고 박철언을 압박했다. 이런 반격은 상대방을 당혹게 했다. 민정계가 도리어 상황 정리를 시도해야 할 정도였다. 1990년 11월 1일 자 <경향신문> 1면 톱기사 '민주계 탈당도 불사'는 이렇게 보도했다.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의 내각제 포기 요구로 분당 위기를 맞고 있는 민자당은 당내 민정·공화계 측이 수습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민주계 측에서 내각제 포기 선언이 수용되지 않을 경우 탈당 불사론까지 제기하고 있어 수습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내분 상태가 장기화할 전망이다.
 
김영삼은 박철언이 만든 상황을 한층 더 꼬이게 하고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결국 노태우와 박철언은 내각제 개헌을 포기하는 것에 더해 대표 권한 강화라는 덤까지 얹어주는 방법으로 김영삼을 달래야 했다. 김영삼이 당을 깨고 나가면 노태우 정권은 3당 합당 이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노태우와 박철언에겐 악몽 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YS, 양김 퇴진론에 맞서 DJ와 제휴
 

노태우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노재봉 신임 총리서리 등 신임 각료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1990.12.27 ⓒ 연합뉴스

 
이것으로 박철언의 견제가 끝난 것은 아니다. 1987년 대선 이후로도 나왔지만 3당 합당 이후에도 김영삼을 괴롭히는 게 있었다. 세대교체론과 양김 퇴진론이었다. 대통령 직선제에 강한 인물들을 한꺼번에 퇴장시키려는 의도를 담은 시도였다. 이에 대해 김영삼은 김대중과 손잡고 양김의 위상을 오히려 부각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는 김영삼 자신을 살리는 한편, 1997년 김대중의 대선 승리에도 어느 정도 기여했다.
 
4·19나 촛불혁명 때와 달리 6월항쟁 때는 정권이 교체되지 않았다. 그래서 대중과 개혁세력의 도전이 계속됐고, 이에 맞선 보수정권은 3당 합당에 힘입어 1990년 말부터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이런 가운데 등장한 게 노재봉 내각이다.
 
이 시기 공안정국은 노동계·재야·학생운동권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박철언과 민정계는 이를 정계개편 수단으로도 활용했다. 정치권 사정의 명분으로도 활용했기 때문에 공안정국이 내각제 개헌을 위한 포석이 아닌가 하는 시선도 있었다.
 
김영삼은 이번에도 김대중과 제휴했다. 양김 퇴진론처럼 공안정국 역시 김대중과 김영삼의 이해관계가 겹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영삼은 김종필과도 손을 잡았다. 김영삼은 김대중·김종필과 합세해 노재봉 총리의 퇴진을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1991년 4월 강경대 열사 사건이 일어나고 노재봉 내각은 5월에 무너지고 만다. 박철언의 시도가 이번에도 실패한 것이다.
 
박철언이 김영삼을 주저앉힐 기회가 1992년에 한 번 더 있었다. 이 해 3월 24일의 14대 총선에서 김영삼이 이끄는 민자당은 전체 299석 중에서 과반수에 1석 모자라는 149석을 얻었다. 민자당에 참여한 3개 정당이 1988년 총선에서 얻은 의석은 민정당 125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을 합해 총 219석이었다.
 
219석이 149석으로 줄어들었으니 김영삼 인책론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했다. 김영삼은 이번에는 '뻔뻔 모드'로 상황을 돌파했다.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대선 국면을 앞당기며 판을 바꾸는 방법으로 인책론을 피해 갔다.
 
6공 황태자로 정권을 주도하던 박철언의 공략이 이처럼 번번이 막히고 도리어 역공에 직면한 것은 김영삼의 풍부한 경륜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시기가 근본적으로 민정계에 불리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김영삼의 민주계 뒤에 숨어 대중의 공세를 막아내야 했던 박철언과 민정계는 김영삼을 견제하고 압박할 수는 있어도 그와 완전히 결별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자신들이 선공을 가해놓고도 번번이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서야 했다.
 
대선 고지를 앞둔 김영삼을 집요하게 괴롭힌 박철언은 김영삼 정권 출범 뒤에 정치적 내리막길을 걸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민자당을 탈당하고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에 합류한 그는 1993년에 슬롯머신 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하고 감옥에 들어갔다. 그랬다가 1996년 총선에서 되살아나고, 1997년 대선 때 김대중을 지지했다. 2000년 총선 낙선 뒤 정계를 은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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