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 12:29최종 업데이트 20.09.04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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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확진 후 서울의료원에 입원 후 16일만에 퇴원한 전광훈 목사가 2일 오전 서울 성북구 사랑제일교회 앞에서 변호인단, 8·15집회 비대위 관계자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신약성경 베드로후서는 3장 10절에서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라고 한 뒤 12절에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말한다. 사상가 함석헌이 했던 "해방은 도둑 같이 왔다"는 말의 원형도 이런 구절이다.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도둑 같이 오기를 간절히 사모한' 나라가 있다.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에 당선된 2019년 1월 29일 발언에서 드러난다. 개신교 신문인 <뉴스앤조이>의 같은 날 기사 '전광훈 목사, 한기총 대표회장 당선, 기독교 입국론으로 나라 재설계'는 이렇게 보도했다.
 
"신임 대표회장 전광훈 목사는 '대한민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기독교 국가다. 기독교 입국론에 맞춰 나라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광훈이 간절히 사모하는 나라는 이승만의 기독교 입국론에 따라 재설계된 국가다. 기독교 입국론은 이승만이 29세 때인 1904년에 쓴 <독립정신>에 등장한다. 이 책에서 이승만은 외국과의 통상, 서양학문 연구, 외교 중시, 국가주권 중시, 도덕성 제고, 자유주의 함양 등을 강조하면서 기독교와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나라가 쓰러진 데서 일어나려 하며 썩은 데서 싹이 나고자 할진대, 이 교(敎)로써 근본을 삼지 않고는 세계와 상통하여도 참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오."
 
"우리는 마땅히 이 교로써 만사의 근원을 삼아 각각 나의 몸을 잊어버리고 남을 위하여 일하는 자 되어 나라를 일심으로 받들어 영·미 각국과 동등하게 되게 하며, 이후 천국에 가서 다 같이 만납세다."

 
이승만은 기독교를 근간으로 나라를 일으키자고 말했다. 이 같은 기독교 입국론에 따라 문재인 정권은 물론이고, 존재하지도 않는 '주사파 50만 명'을 척결하고 나라를 '재설계'해야 한다는 게 전광훈의 지론이다.
 
그런데 한번쯤 확인해볼 것이 있다. 전광훈의 말처럼 이승만이 정말로 기독교 정신에 따라 대한민국을 운영했을까? 제정 과정에서 이승만이 깊이 개입한 1948년 헌법의 제12조는 "모든 국민은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며 "국교는 존재하지 아니하며 종교는 정치로부터 분리된다"고 규정했다. 대통령 이승만이 헌법 제12조를 어기면서까지 기독교 입국을 추진했는가를 검증해볼 필요가 있다.

국가적 개신교
 
1945년 당시 개신교 교인은 50만 미만이었다. 그랬던 것이 이승만 집권기인 1950년대 중후반에 150만이 됐다. 이렇게 급성장한 데는 이승만의 역할이 컸다. 이승만과 기독교의 관계는 제1대 총선 다음날인 1948년 5월 31일 제1차 국회 본회의 때 상징적으로 나타났다. 류대영 한동대 교수가 쓴 <한 권으로 읽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사회를 맡게 된 이승만은 제헌국회 성립이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 아니므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면서, 감리교 목사인 이윤영 의원에게 기도를 부탁하며 모두 기립하라고 했다. 모든 의원이 기립하자 이윤영은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는 간단한 기도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받들어' 드렸다. 한민족 역사상 정부의 공식 행사에서 기독교 의식이 행해진 첫 순간이었다."
 
그 뒤 이승만은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지원했다. 1948년 당시 내각의 21개 부·처장 중 9석을 기독교인으로 채웠고, 1948~1960년에 임명한 242명의 장·차관 중 38%를 교인으로 채웠다. 또 모든 방송국을 공보처가 직접 운영하는 국영방송 체제 하에서 개신교 방송국에 대해서만큼은 민영방송을 허가했다.
 
이처럼 이승만이 헌법 제12조와 관계없이 기독교를 지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지원으로 인해 기독교가 입은 피해도 무시할 수 없다. 우선, 기독교는 친일청산을 통해 새롭게 거듭날 기회를 놓쳤다.
 
위의 류대영 책은 "이승만은 미군정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부일 협력자를 처벌하지 않고 활용했다"며 "이것은 이승만과 정치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된 한국 교회에도 영향을 미쳐, 개신교가 적절한 일제잔재 청산을 하지 못한 채 강점기의 교권자들이 그대로 교권을 유지하게 만들었다"라고 한 뒤 이렇게 설명했다.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구성된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1949년 1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 장로교의 정인과·김길창·전필순, 감리교의 양주삼과 정춘수 같은 대표적 교계 부일 협력자들을 체포, 심문했다.
 
그러나 미군정 때부터 이미 한국의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 잡은 부일 협력자들의 방해와 이승만의 공작으로 반민특위는 그해 10월 해체되었다. 체포되었던 개신교 지도자들은 모두 기소유예로 풀려났고, 다시 한국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들은 한국 교회가 이승만을 지지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1945년(70세) 이후의 이승만은 <독립정신>을 쓰던 29세 때의 이승만과 판이했다. 29세 때의 이승만은 '기독교를 통해(A) 서구문명을 받아들이고 나라를 개조하려는 이상(B)'에 불타 있었다. 하지만, 70세 이후의 이승만은 그렇지 않았다. A부분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B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기독교를 통해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모습은 여전했지만 그것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확연히 달랐다.
 
기독교인들에게 권력을 주고 그들을 친일청산으로부터 비호해준 이승만은 그 대가를 단단히 받아냈다. 그런데 이승만이 받은 대가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종교인들을 종교 영역에서 끌어내 정치적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2009년에 <동방학지> 제145권에 실린 안종철 인하대 연구교수의 논문 '문명개화에서 반공으로: 이승만과 개신교의 관계의 변화, 1912~1950'은 해방 뒤에 달라진 이승만의 태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해방 이후 그에게서 개신교의 의미는 이전과는 연속되면서도 다른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즉 구한말 문명개화의 핵심 기제로서의 기독교라든가 식민지 시기 그가 미국에서 목도한 정교분리를 기축으로 하는 미국식 개신교와는 다른 의미였다."
 
해방 뒤에 이승만이 기독교에 기대했던 것이 있다. 그 자신의 필요를 위해 기독교가 변모해주는 것이었다. 그가 기대한 기독교의 모습을 위 논문은 이렇게 요약한다.
 
"그것은 반공적이면서 국가의 특혜를 받는 '국가적 개신교'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승만은 한반도 전체에 걸쳐 하나의 정부를 세우자는 민족적 열망을 탄압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미국 기독교의 지원을 받았다.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미국 감리교 총회는 단독정부 수립이 불가피해지고 1948년 5월 10일 선거를 통해 남한에 국회의원과 정부가 수립될 것이 확실해진 즈음에 조선 독립을 지지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안에 대한 미 교단 차원에서의 지지 성명이었다."

교회는 이승만의 도구였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유엔사령관이 만나는 모습 ⓒ 국가기록원

 
이승만은 북한을 적대시하고 반공을 표방하며 정권 기반을 굳히는 데도 기독교를 활용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한 군중집회에 교인들을 동원하곤 했다. 위 논문의 또 다른 대목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개신교인들은 북한에 대한 적대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인적 자원이었다. 1949년 6월 23일에 개최된 개신교계의 서울운동장 집회는 건국(정부수립) 후 북한에 대해 가졌던 이승만과 개신교인들의 입장을 압축해서 잘 보여준다. (중략) 이 집회의 주된 목적은 동년 6월말로 예정된 미군 철수를 막고 미국의 한국에 대한 지원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한국전쟁 휴전을 반대하고 전쟁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도 기독교를 활용했다. '전쟁을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기독교를 '전쟁을 멈추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기독교로 타락시켰던 것이다. 위의 류대영 책은 "한국 교회는 휴전 반대와 관련하여 이승만의 최대 우군이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한국 교회는 한국기독교연합회를 중심으로 이승만을 지지하기로 하고 휴전반대 궐기대회와 기도회를 개최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섰다. 여기에는 미국에서 활동하던 근본주의적인 선교사들과 한국기독교연합회를 주도하는 서북 지역 교역자들의 극단적 반공주의가 크게 영향을 끼쳤다."
 
전광훈은 이승만이 기독교 이념으로 국가를 개조했다며 '기독교 입국'을 찬미한다. 하지만 실제로 나타난 현실은 이승만이 반공 이념으로 나라를 개조하는 '반공 입국'뿐이다. 기독교가 이승만의 반공 입국에 도구로 활용됐던 것이다. 기독교가 하나님의 도구가 아니라 이승만의 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이승만과 제휴한 대가로 한국 기독교는 친일청산을 통해 거듭날 기회를 상실했고, 종교적 순수성을 상당부분 잃고 반공이념의 정치적 도구로 전락했다. 이에 더해 한국 기독교가 받은 또 다른 악영향이 있다.
 
그것은 국민적 지탄을 받는 3·15 부정선거로부터 기독교가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는 점이다. 2007년 5월 14일 자 <뉴스앤조이>에 실린 김권정 숭실대 기독교학 대학원 강사의 기고문 '한국교회 정치참여 변절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치명적 사건으로 통하는 3·15부정선거에서도 기독교의 역할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고, 이승만 대통령 후보와 이기붕 부통령 후보가 모두 기독교인으로 '전국교회 150만 신도께 드리는 말씀'으로 기독교인들의 지지를 공개적으로 호소하였던 것이다.
 
3·15부정선거로 전국 시위가 일어나자, 이기붕은 '총은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자신의 잘못에 대한 반성보다 폭력적 진압을 오히려 독려하기도 하였다. 끝없는 한국 교회의 변태적인 정치참여는 순수한 정치참여의 정신을 왜곡한 채 각종 부정부패와 연루되어 교회가 비판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이승만은 한국 기독교가 역사에 죄를 짓도록 유도했다. 기독교를 통해 대한민국을 좋은 나라로 만든 게 아니라 기독교를 악용해 대한민국을 망치는 결과를 낳았다. 이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대중의 이미지가 상당 부분 악화됐다. <독립정신>에서 "이후 천국에 가서 다 같이 만납세다"라고 말했던 이승만은 기독교에 대해 그 같은 죄악을 저지른 뒤 천국이 아닌 하와이로 달아났다.
 
그런데도 전광훈과 그의 동지들은 이승만 이념으로 대한민국을 개조해야 한다면서 코로나 사태 와중에도 나라를 어수선하게 만들고 있다. 이승만이 만들고자 했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었다. 그는 반공을 빌미로 냉전을 조장하고 친일청산을 저지하는 국가를 만들었다. 전광훈이 도둑 같이 와주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나라 역시 그런 나라라고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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