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30 16:02최종 업데이트 20.08.30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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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론>에 "철학자들이 각국의 왕이 되지 않으면, 또는 오늘날 왕이라고 불리고 통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진실로 또는 충실히 철학을 연마하지 않으면" 나라에 불행이 생길 거라는 대목이 있다. 철인 정치, 철학자 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한 언급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꿈꿨던 철인 정치가 한국 역사에서 실현된 적이 있다. 유교 철학자인 성리학자들이 나라를 이끌었던 16세기 후반 이후 약 300년간이 바로 그 시기다.
 
1567년 선조 임금의 즉위와 함께 개막된 사림파(유림파) 시대에, 선비로 불리는 성리학자들은 과거 시험이나 특채를 통해 관직에 취임하거나 저명한 성리학자라는 지위를 활용하는 방법으로 사회와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과거 시험이나 특채가 아닌 후자의 방법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성리학자들은 은둔자의 뉘앙스가 담긴 산림(山林)이란 표현으로 불렸다.
 
사림파가 세상을 지배했다고 해서 이들이 사회 전체를 전일적으로 지배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경제적 상류층이기는 했지만 평균적으로 볼 때 대지주는 아니었다. 어느 시대건 간에 대지주들은 관직이나 별도 지위가 없이도 영향력을 유지했다. 사림파의 지배권은 이들의 권익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제한적으로 행사될 수밖에 없었다.

철인 정치 정착시킨 두 사상가
    

조선시대 선비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의 다산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그런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철학자들이 약 300년간 국정을 주도하는 것은 세계사에서 흔치 않은 일이다. 학자들이다 보니 학술 토론을 좋아해서 훗날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당쟁과 탁상공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오명을 쓰기는 했지만, 철학자들이 경제와 군사를 통제하며 나라를 이끌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 같은 철인 정치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한 두 사상가가 있다. 화담 서경덕(1489~1546)과 퇴계 이황(1501~1570)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이(理)와 기(氣)로 우주 만물을 해석하는 이기론 논쟁을 펼치면서 사림파 시대의 철학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이바지했다.
 
이기론 논쟁은 흔히 이황과 율곡 이이의 대립 구도로 설명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이는 서경덕과 비슷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서경덕과 이황을 절충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래서 명확한 대결 구도를 보인 쪽은 서경덕과 이황이다.
 
황진이·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개경 3대 명물)로 손꼽히는 서경덕은 황진이의 '정신적 연모의 대상'이자 스승으로도 유명했다. 허균이 쓴 <성옹지소록>에 따르면, 살아생전의 서경덕과 함께 술과 거문고를 즐겼던 황진이는 서경덕 사후에도 그의 농막(논밭 근처에 간단하게 지은 집)을 찾아가 술과 거문고를 즐기곤 했다고 한다.

황진이는 관직을 멀리하고 육체적 필요를 통제하며 철학적 탐구에 빠져 살면서, '천하의 황진이'인 자신을 여성이 아닌 친구처럼 대해주는 서경덕을 성인 군자로 존경했다. 이처럼 서경덕은 당대에 가장 유명한 관기(기생)의 우러름을 받으며 철학 연구에 매진했다.
 
이황은 평생 학문에만 전념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우리 시대에 생겨난 관념에 불과하다. 박정희 정권이 1968년 국민교육헌장 반포 뒤에 국민윤리의 상징적 인물을 부각할 목적으로 영남 출신인 이황을 대대적으로 띄우는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이다.
 
박 정권에 이용되기는 했지만, 이황은 한국사 발전에 커다란 공로를 세운 인물이다. 집권세력이자 구세력인 훈구파에 의해 개혁세력인 사림파가 한창 탄압받을 때 청년기를 보낸 이황은, 사림파가 조직을 유지하면서 1567년 집권하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
 
42세 때인 1543년에 성균관 사성(종3품)으로 승진했다가 사표를 쓴 이황은 이때부터 1558년까지 무려 20여 회나 관직을 사퇴하거나 관직을 고사했다. 그는 한 발은 학문에 담그고 한 발은 정치에 담근 상태에서 정계의 문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이는 '개혁파 지도자로서 개혁을 달성할 필요성'과 '훈구파의 탄압으로부터 개혁파를 보호할 필요성'을 적절히 저울질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신중하다고도 할 수 있고 소심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 같은 '치고 빠지기'를 통해 이황과 그 추종자들은 훈구파의 공세를 피해 가며 힘을 서서히 키울 수 있었다. 이 방식은 이황 자신이 학문 연구와 정치 활동을 병행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결국 그는 사림파의 집권을 목도한 지 3년 뒤에 6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백성이 먼저냐, 국가질서가 먼저냐 
 
서경덕은 사림파 집권 21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이황은 집권 3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 다 사림파가 비주류일 때 생존했던 것이다. 이처럼 사림파가 한창 투쟁할 때 철학 연구를 했기 때문에 이들의 철학 사상 역시 건강할 수밖에 없었다. 크게 보면 동지관계이지만, 두 사람은 성리학적 세계관인 이기론 문제에서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서경덕은 '기'를 중시하는 주기론, 이황은 '이'를 중시하는 주리론에 섰다.
 
서경덕은 우주의 기본 단위인 '기'가 우주의 법칙인 '리'보다 먼저라고 생각했다. 삶과 죽음을 논한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에서 "(기)는 끝없는 허공에 가득 차 있다"면서 "그것이 크게 모이면 천지가 되고 작게 모이면 만물이 된다"고 말했다. 그 같은 기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가 형성된다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기'가 '이'보다 먼저라는 그의 이론은 기일원론(氣一元論)으로 불린다.
 
이황은 서경덕을 비판했다. '이'가 있고 나서 '기'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퇴계선생문집> 제25권에 실린 '고요하여 조짐은 없지만 만물은 이미 갖춰져 있음을 논함(論沖漠無朕萬象已具)'에서 "이는 사물이 있기 전에 먼저 '이'가 있음을 말한 것이니, 임금과 신하가 있기 전에 이미 임금과 신하의 '이'가 있었고 아버지와 아들이 있기 전에 이미 아버지와 아들의 '이'가 있은 것과 같다"는 주자의 말을 인용했다.
 
'기가 먼저냐 이가 먼저냐'는 현실적인 정치 문제와도 맞닿았다. 나라로 비유하면 '기'는 백성이고 '이'는 국가질서다. '기'가 먼저라는 입장은 백성이 국가질서보다 먼저라는 이념과 연결된다. '이'가 먼저라는 주장은 국가질서의 우위를 강조하는 입장과 연결된다. 그래서 한국사 시간에 설명되는 것처럼 주기론은 진보, 주리론은 보수와 연결되기 쉬웠다.

해석의 차이가 낳은 결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찍은 ‘이황선생 집터’ 표지. ⓒ 김종성

 
하지만, 해석에 따라서는 진보, 보수가 뒤바뀔 여지도 있었다. '백성이 국가질서보다 앞선다'에서 '백성'을 양반층으로 국한시킬 경우에는 주기론도 보수가 될 수 있었다. 주리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실이나 특권층의 이익이 아닌 사회 전체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국가질서를 구축할 경우에는 주리론도 진보가 될 수 있었다.

서경덕과 이황의 사후에 실제 전개된 상황이 그랬다. 조선 후기에 대체로 진보적 입장을 취한 쪽은 이황의 사상을 따르는 동인당이었다. 동인당의 분파인 북인당이 광해군 시대의 여당이 되어 개혁을 추구한 것, 또 다른 분파인 남인당이 대체로 개혁 노선을 지향한 것이 그 증거다. 정조시대의 개혁가인 채제공·정약용도 남인당이었다. 이들에게는 '이'가 사회 전체를 위한 국가질서였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조선 후기에 보수적 입장을 취한 쪽은 서경덕과 이이의 사상을 따르는 서인당이었다. 이들은 기득권층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했다. 여기서 갈라져 나온 노론당은 조선 후기 보수정치의 대명사가 됐다. 부유층을 겨냥한 증세 정책을 반대하며 효종과 맞섰던 송시열이 노론당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이들에게는 '기'가 백성 전체가 아니라 지주·양반층이었다고 볼 수 있다.

광해군을 실각시킨 인조 쿠데타(인조반정, 1623년) 이후로 주도권을 잡은 쪽은 서인당이다. 서인당에 뒤이어 노론당이 오랫동안 권력을 잡았고, 영조·정조의 탕평정치시대와 순조·헌종·철종 때의 세도정치 시대에도 노론당 후예들이 득세했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이황이 지금처럼 주목을 받기 힘들었다. 동인당의 정치적 리더였기 때문에 성균관 문묘에 위패가 모셔지기는 했지만 지금만한 주목은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서경덕이 사후에 대단한 영광을 누린 것도 아니다. 현실적 이해관계로부터 초연했기 때문에 사후에 그를 추모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일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황진이처럼 그를 열렬히 추모해줄 정치세력이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위대한 학문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문묘에 모셔지지 못했다. 서인당의 지지를 받으며 문묘에 모셔진 쪽은 현실 정치에서 족적을 남긴 율곡 이이다.

그래서 서경덕과 이황 모두 조선시대에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 후 3백 년간 이어질 철인정치의 토대를 구축했다. 훗날의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이들의 시대를 탁상공론의 시대로 폄하했지만, 이들은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철인정치의 기초를 구축했다.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가 동경한 시스템이 조선 땅에 구현되도록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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