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25 08:12최종 업데이트 20.08.25 08:12
  • 본문듣기
친일파 하면 이완용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그가 가장 열렬히 활동했던 것은 아니다. 한술 더 뜬 두 인물이 있었다. 송병준과 이용구가 바로 그들이다.
 
이완용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과 1910년 국권 침탈이라는 굵직한 사건들을 주도한 일로 친일파의 대명사로 기억된다. 반면, 송병준·이용구는 대중을 상대로 여론을 조성하면서 일제 강점에 필요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들은 친일 조직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그래서 이들의 '공로'가 결코 이완용에게 뒤지지 않지만, 역사는 '친일 1등' 이완용만을 기억한다. 

[송병준] 경제적 이익 챙기며 친일파가 되다
 

송병준 ⓒ 위키커먼스

 
송병준은 철종 때인 1858년 함경도 장진군에서 태어났다. 은진 송씨인 송시열의 후예로 알려져 있지만, 족보가 조작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구한말 정치평론가인 황현의 <매천야록>은 출세를 위해 족보를 조작한 함경도인들을 거론하면서 "송병준도 은진 송씨에 붙어 송시열의 후예 행세를 했는데, 여러 송씨들이 도리어 따라 붙었다"고 말한다.
 
송병준은 송씨뿐 아니라 민씨 가문과도 인연이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처가이자 고종의 처가인 여흥 민씨도 그에게 도움이 됐다. 훗날 을사늑약에 분개해 순국하는 민영환(1861~1905)의 집에서 식객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소년 시절 민영환과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그 뒤 탄탄대로를 달렸다. 13세 때인 1871년 무과에 급제해 관료의 길에 들어선 송병준은 1872년에 훈련원 판관(종5품), 1874년에 지금의 합동참모본부 직원과 유사한 오위도총부 도사(종5품), 1875년에 검사와 비슷한 사헌부 감찰(정6품) 등에 임명됐다.
 
그가 일본과 가까워지게 된 계기가 있었다. 일본의 강압으로 시장개방을 하게 된 1876년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 체결이 그것이다. 이때 상황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조선에 오는 일본 특명전권대사 구로다 기요타카 일행을 환영하는 반접(伴接) 수행원을 맡았고, 이후 일본의 대표적 실업가 오쿠라 기하치로와 함께 부산에 본인 명의로 상관(商館)을 개설했다.
 
일본 사신단을 접대한 일을 계기로 일본 기업의 조선 진출을 돕게 된 송병준은 1882년 임오군란 때 가재도구가 불탄 데 이어 1884년 갑신정변 때도 가옥과 재산을 잃게 되자 일본인의 주선으로 일본에 건너가 살게 됐다.
 
1886년 귀국해 관직에 복귀한 그는 동학혁명 및 청일전쟁 뒤인 1895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각지를 유람하며 사람도 사귀고 학생들도 가르쳤다. 그러다가 1904년 러일전쟁 발발 뒤에 일본군 통역이 되어 귀국한 뒤로 본격적인 친일의 길을 걷게 됐다. 이때 그는 군납 상인으로도 활동하면서 경제적 이익을 챙겼다. 1876년에도 그렇고 이때도 그렇고, 그에게 친일은 돈이 되는 일이었다.
 
영국과 더불어 세계 최강을 이룬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일본이 승세를 타는 것을 목격한 송병준은 일본 세력을 배경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그 뒤 유신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가 일진회로 개칭했고, 일본의 전쟁 수행을 도우면서 친일 세력의 저변 확대에 주력했다. 

[이용구] 반체제 운동하다가 친일파로
 

이용구. ⓒ 위키커먼스

 
송병준이 북도 출신인 데 비해 이용구는 남도 출신이었다. 송병준보다 10년 뒤인 1868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했다. 이때는 흥선대원군의 권력이 한창일 때였다.
 
송병준이 제도권 관료로 성장한 데 반해, 이용구는 정반대 길을 걸었다. 22세 때인 1890년에 그는 반체제 종교단체인 동학에 입교했다.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라는 반일·반서양 구호를 내건 1893년 동학 보은집회에도 참석했다. 고종 임금이 비상대책회의를 열고 청나라에 대한 파병 요청을 언급했을 정도로 이 집회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용구는 그 집회에 모인 2만여 명 중의 하나였다.
 
그는 1894년 동학전쟁 때는 충청도 청주에서 동학군에 가담했다. 그는 반봉건·반외세를 외치는 동학군의 열혈 전사였다. 경기도 이천에서는 농민 수천 명과 함께 관아를 습격했고, 공주에서는 전투 중에 총알이 다리를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다. 동학군이 일본군에 의해 진압된 뒤에도 그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각지로 도피 생활을 하면서도 포교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그러다가 1898년 경기도 이천에서 체포됐다.
 
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고문을 당한 이용구는 극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역사학자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는 "감옥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을 적에 동학교도 수십 명이 감옥을 습격해서 그를 구출해냈다"고 설명한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탈옥한 그는 1901년에 제3대 동학 교주인 손병희와 함께 일본 망명을 떠났다가 1903년 귀국했다. 이때부터 친일파 행보가 시작됐다. 조선왕조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데다가 일본에서 유행한 사상이 그의 인식에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에서는 일본이 동아시아의 중심이 되어 서양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사조가 유행하고 있었다.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합리화하는 주의·주장이 힘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위 책은 "이용구는 일본에서 민권파로 일컬어지는 타루이(樽井藤吉)의 대동합방론에 빠지기 시작했다"면서 "그 내용은 '동양의 쇠운을 만회하고 흥아(興亞)의 대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동아(東亞)의 여러 나라가 일본을 맹주로 하여 대동아연맹을 결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일본 중심의 세계관에 경도된 그는 동학교도들을 중심으로 진보회를 조직한 뒤, 일본 군부의 요청에 따라 송병준의 일진회와 통합했다. 협력자인 동시에 경쟁자가 될 두 친일파가 일진회라는 하나의 우산 밑에 모이게 된 것이다.
 
이완용은 묵직한 펀치, 송병준·이용구는 잽잽

송병준과 이용구의 친일은 이완용의 친일과 달랐다. 이완용이 고종 및 이토 히로부미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대한제국 황제의 심리를 압박해가며 을사늑약과 국권 침탈을 성사시킨 반면, 송병준·이용구는 대중 조직을 발판으로 친일 여론을 조성하는 데 앞장섰다.
 
이완용은 안 그런 척 하면서 묵직한 친일 펀치를 날리는 스타일이었고, 송병준·이용구는 노골적인 친일 성향을 드러내며 '잽'을 많이 날리는 스타일이었다. 송병준·이용구는 대중집회를 열어 친일 여론을 확산시키거나 일진회원들을 일본군 물자 수송이나 철도 건설에 동원했다. 결국에는 이완용에게 '친일파의 대명사' 자리를 내주게 되지만, 송병준·이용구는 같은 일진회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친일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고자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이 경쟁의 시소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전후로 송병준 쪽으로 기울었다.
 
일진회는 1904년 겨울부터 외교권 이양을 외치며 을사늑약에 필요한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이에 반감을 느낀 동학교도들이 일진회를 대거 탈퇴했다. 이는 동학을 발판으로 하는 이용구의 입지를 축소시키는 동시에, 일본 군부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송병준이 주도권을 잡는 결과로 이어졌다.
 
을사늑약 뒤에 송병준이 농상공부대신으로 발탁된 것은 그의 승승장구를 반영한다. 송병준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 사건으로 고종황제가 사면초가에 빠졌을 때도 황제권 양위 논의를 주도해 고종을 곤란케 만들었다. 이를 통해 내부대신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송병준은 이용구보다 훨씬 앞서나가게 됐다.
 
잘 나가던 송병준은 기독교도들의 친미 성향을 공격했다가 미국의 항의를 받고 1909년에 각료직을 잃었다. 이용구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송병준이 주춤하는 사이에 그는 을사늑약으로 보호국이 된 조선을 일본제국의 일원으로 만들기 위한 합방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으로 인해 국제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이용구의 대중운동은 한국 상황을 더욱 더 위태롭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이용구가 부각되자, 이완용은 견제구를 날렸다. 시기상조론을 내세우며 제동을 걸었다. 송병준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 역시 합방론을 내걸었다. 이용구와 똑같은 내용을 내세울 수 없으므로, 그는 좀더 센 것을 준비했다. 이용구가 한국과 일본을 하나의 연방으로 묶는 방안을 제안한 데 반해, 송병준은 하나의 나라로 통합할 것을 촉구했다.
 
송병준·이용구가 이완용과 뒤엉켜 벌이는 친일 경쟁은 한국 여론을 들끓게 했다. 김윤희 경원대 연구교수가 쓴 <이완용 평전>은 "언론들은 이완용과 송병준, 이용구가 나라 파는 경쟁을 하고 있다면서 이완용 내각에 대한 퇴진을 요구했다"고 말한다. 언론의 지탄을 받을 정도로 볼썽사나운 경쟁을 벌였던 것이다.
 
송병준과 이용구의 친일 대결은 송병준의 승리로 끝났다. 1910년 국권침탈 방식이 송병준의 주장과 가까웠을 뿐 아니라, 일본 정부 역시 송병준에게 더 호의적이었다. 송병준은 자작과 백작 작위도 받고 홋카이도 땅도 선물로 받았다. 1925년에 그가 사망하자 나루히토 일왕(천황)의 증조부인 다이쇼 일왕이 포도주 13병을 하사했고, 야스쿠니신사에서도 추도식이 열렸다. 이에 비해 이용구는 훈장을 받는 것에 그쳤다. 일본 정부가 볼 때는 송병준의 공로가 더 컸던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친일의 왕관'을 이완용에게 양보해야 했다. 이완용은 을사늑약 때 고종을 압박한 데 이어 국권침탈 때 순종을 압박함으로써 일본의 한국 강점을 성사시켰다. 송병준과 이용구는 끊임없이 잽을 날렸지만, 이완용의 묵직한 펀치를 당해내지 못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