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3 08:21최종 업데이트 20.08.03 08:21
  • 본문듣기
 



전범 기업들이 1945년 일제 패망과 함께 한국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들의 손길은 아직도 대한민국 곳곳에 닿아 있다. 백범김구기념관과 안중근의사기념관 등의 보안 업무를 맡은 삼성그룹 에스원에도 대표적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의 손때가 묻어 있다.
 
에스원의 최대 주주는 삼성이 아니라 일본 세콤이다. 세콤의 최대 주주는 일본 매스터 트러스트 신탁은행이고, 매스터 트러스터의 최대 주주는 미쓰비시그룹 계열사인 미쓰비시UFG 신탁은행이다. 전범 기업 미쓰비시가 매스트 트러스터→세콤→에스원의 수직적 구조를 통해 백범김구기념관과 안중근의사기념관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던 셈이다.
 
울릉도에 있는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역시 동일한 구조 하에 미쓰비시의 영향을 받고 있다. 독도를 사수하고자 하는 한민족의 의지가 담긴 기념관에까지 미쓰비시의 손길이 닿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 손때를 '세척'하기 위해 국가보훈처가 행동에 착수했다고 한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계약이 종료되는 10월 이후로는 백범김구기념관·안중근의사기념관을 에스원에 맡기지 않기로 한 것이다. 다만,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의 경우에는 9월에 계약이 종료되지만 대안 업체를 찾을 수 없어 잠정적으로 계속 맡기기로 했다고 한다. 
 
미쓰비시 곳간 불린 결정적 힘, 노예노동
 

나고야 미쓰비시 항공제작소로 끌려간 조선여자근로정신대의 신사참배 ⓒ 임용철

 
한자 삼릉(三菱)으로 표기되는 미쓰비시는 오늘날 해운·항공·자동차·금융·전자·중공업·부동산 등 다양한 업종에 진출해 있다. 메이지유신 2년 뒤인 1870년 설립된 이 재벌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계기는 일본 군국주의의 대외 침략이다. 초기에 해운·탄광·조선·제철업을 했기에 미쓰비시는 일본 제국주의의 협력자가 될 수 있었다.
 
일본 군국주의는 미쓰비시제 전투기와 군함과 무기를 갖고 전쟁을 벌였다. 미쓰비시는 그 덕을 톡톡히 봤다. 미쓰비시의 덩치가 크게 불어난 것은 그 때문이다.
 
1981년에 히사시 하나부치(浜淵久志) 홋카이도정보대학 교수는 <경제학연구> 제31권 제3호에 기고한 '태평양전쟁기의 미쓰비시 재벌 재편 과정 1(太平洋戦争期にあける三菱財閥の再編過程 1)'이란 논문에서 대외침략 기간인 1936~1941년 미쓰비시 계열사들의 자본 증가와 관련해 "고정 자본은 1936년부터 41년까지 1억 7400만 엔에서 6억 2500만 엔으로 3.6배 증가했고, 자회사·관계회사 등의 사외 투자도 1억 5000만 엔에서 2억 2800만 엔으로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그런 성장을 이룬 것이 오로지 전쟁 호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건비 지급을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된 것이 결정적인 힘이 됐다. 한국인 10만 명을 포함한 동아시아인들을 강제로 끌고 와서 노예노동을 시킨 것이 미쓰비시의 곳간을 불린 '치명적인 결정타'가 됐다.
 
해저 탄광이 있던 군함도에서 미쓰비시는 한국인 및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주거·의료 제공은 물론이고 기본 봉급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기획한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에 이런 대목들이 있다.
 
"노무 관리자는 조선인들의 감기를 병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쉬고 싶다고 말하면 몽둥이로 때렸다. 지나가는 갱부들이 한 대씩 때리도록 전봇대에 묶어두기도 했다."
 
"조선인이 수용된 협소한 방은 바람이 통하지도 않고 햇빛이 들지도 않았고 파도가 거칠어지면 바닷물이 스며들어왔다."
 
"미쓰비시는 중국인들을 철조망으로 둘러싼 목조 2층 건물에 가둬놓고, 재향군인을 중심으로 편성한 방위대로 하여금 총을 들고 주변을 감시하게 했다. 먹을 것도 제대로 공급하지 않았다. (중략) 일본인 고자토 가쿠시는 일본인 갱부들이 먹다 남은 정어리 대가리와 뼈를 버린 곳에 중국인들이 모여들어 주워 먹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다."
 
한국 경제 곳곳에 묻은 미쓰비시의 손때

이웃나라들에 대한 착취를 발판으로 떼돈을 번 미쓰비시는 8·15 해방 뒤에도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상징되는 박정희의 이른바 '조국 근대화'는 실상은 미쓰비시와 손잡고 한국 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는 작업이었다. 미쓰비시 출신인 야기 다이스케(八木大介)의 진술을 담은 2015년 6월 29일 자 <한국일보> 기사 '미쓰비시, 정경유착 무기로 한국을 해외수출 하청 기지화'에 이런 내용이 있다.
 
미쓰비시상사 출신으로 일본 참의원 국회의원을 역임한 야기 다이스케의 회고에 따르면, 미쓰비시는 최대 장점인 중화학 관련 계열사를 앞세워 한국의 산업을 하청업체 혹은 가공 기지로 육성한다는 전략적 구상을 갖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미쓰비시는 3국간 무역의 수단으로서, 특히 대미 수출의 하청 기지로서 한국을 활용한 것이다. 이는 좋게 말하면 한국이라는 국가와 미쓰비시라는 일개 기업 간의 상호의존관계의 형성이며, 나쁘게 말하면 미쓰비시그룹 산하에 한국의 주요 산업이 수직적으로 계열화되는 황당한 관계가 구축되는 것을 의미했다.
 
미쓰비시의 하청업체로 전락했기 때문에, 한국 경제 곳곳에 미쓰비시의 지문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포스코로 불리는 포항제철에도 그들의 손때가 묻었다. 미쓰비시는 포항제철 건설 과정에서부터 깊이 개입했다. 1970년 10월 16일 자 <매일경제> 기사 '미쓰비시상사(에)서 수주'는 이렇게 보도했다. '첫 공장'이란 표현이 인상적인 기사다.
 
8개 미쓰비시계 회사들은 약 3천 6백만 달러의 열간압연 공장을 포항에 건설해달라는 플랜트 주문을 한국으로부터 받았다고 미쓰비시계의 삼릉상사가 15일 밝혔다. 미쓰비시 간부들은 연간 63만 2천 톤의 철판을 처리할 수 있는 이 공장은 포항종합제철공장의 첫 공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쓰비시중공업 및 미쓰비시 전기회사 등을 포함한 일본 회사들은 열간압연 강판공장과 부수 장비들을 한국에 수출하고 1972년까지 이 공장이 완성되도록 건설 작업을 지원할 것이라고 관리들은 말했다.
 
미쓰비시의 손은 삼성그룹에도 닿았다. 미쓰비시가 인텔사에 맞설 목적으로 삼성전자와 제휴한 것이 그 일례다. 1997년 3월 21일 자 <한겨레> 기사 '삼성전자·미쓰비시·DEC 손잡기로'는 이렇게 보도했다.
 
한국의 삼성전자와 일본의 미쓰비시전기 그리고 미국의 디지털이큅먼트(DEC)가 마이크로 프로세서 유니트(MPU) 시장에서 인텔의 펜티엄칩에 대항하기 위해 제휴할 예정이라고 미쓰비시의 한 간부가 19일 밝혔다.
 
미쓰비시는 한국 자동차에도 손을 댔다. 1997년 6월 2일 자 <매일경제> 기사 '저연비 가솔린용 엔진, 미쓰비시 현대에 공급'은 "미쓰비시(삼릉) 자동차는 31일 현대자동차에 저연비 가솔린 엔진을 공급하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한 뒤 "현대자동차는 미쓰비시에서 GDI(가솔린 직접분사식 엔진)을 공급받아 우선 일부 고급 승용차에 탑재하고 판매 상황을 보아 다른 차종으로 확대할 계획이다"라고 보도했다.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전기에도 미쓰비시의 손길이 닿았다. 한국전력 자회사의 화력발전소 건설에도 그들이 개입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발생한 한국인들과의 마찰에 관해 2011년 12월 1일 자 <연합뉴스> 기사 '일 전범기업 미쓰비시 등 국내 진출 첫 제동'은 이렇게 보도했다.
 
자유선진당 이명수 의원실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지난달 16일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과 히타치와 계약을 한 (주)동서발전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질 것을 요구했다고 1일 밝혔다. (중략) 한국전력의 자회사인 동서발전은 국제입찰을 통해 충남 당진의 당진화력발전소 9·10호기 건설에 필요한 보일러와 터빈, 발전기 등의 기자재 제작소로 일본 전범 기업 2곳을 선정했다.
 
우리 주변에 널린 미쓰비시
 

한국대학생진보연합 소속 대학생 20여명이 9일 오후 1시경 서울 중구 명동역 인근 빌딩에 입주해 있는 일본 ‘미쓰비시 그룹’ 계열사의 사무실을 기습적으로 점거해 “미쓰비시 강제징용 사죄”, “철저히 배상”, “일본 식민지배 사죄”, “경제보복중단”을 요구하며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19.7.9 ⓒ 최윤석

 
서울 한강변의 강변북로를 타고 서강대교에서 서쪽 양화대교 쪽으로 가다 보면, 좀 낡은 듯이 보이는 화력발전소 건물이 보인다. 당인리발전소로도 많이 알려진 서울화력발전소다. 이 발전소의 건설에도 미쓰비시가 참여했다. 운전자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그곳에도 미쓰비시의 흔적이 있다.
 
우리 주변에 널리고 널린 그 흔적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경인선 전철, 서울지하철, 쌍용시멘트공장 등등 대한민국 여기저기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미쓰비시를 비롯한 전범 기업들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을 해줄 의향이 눈곱만큼도 없어 보인다. 손해배상은커녕 체불임금조차 지급하지 않고 있다.
 
미쓰비시 한 곳만 해도, 무상 착취를 당한 한국인 노동자가 10만 명이나 된다. 미쓰비시를 비롯한 전범 기업들은 이런 노예노동을 통해 몸집을 크게 불렸으면서도 사죄와 배상은커녕 임금조차 지급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의 보복이 두려워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아무 두려움도 없이 한국을 드나들며 한국 경제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심지어 백범김구기념관·안중근의사기념관·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에도 그들의 손길이 미치고 있다. 8·15 해방 뒤에 일본이 정말로 물러간 게 맞는지, 우리 주변을 되돌아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어처구니없고 부조리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보훈처 "계약 종료 맞다"

국가보훈처가 국가기념관의 보안을 맡은 에스원과의 계약을 종료하기로 했다는 7월 24일 자 <비즈한국> 보도에 대해 보훈처 관계자는 30일 기자와 한 통화에서 "계약이 종료가 되면 이왕이면 국민 정서에 반하지 않는 보안 업무를 하는 업체와 계약이 이뤄지면 좋겠다고 안내를 드린 것일 뿐"이라며 "보훈처가 보안 업체를 선정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우리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안중근의사기념관 관계자도 "에스원과의 계약을 종료한다고 결정한 적 없으며 보훈처로부터 어떤 내용도 전달받은 바 없다"라며 "계약 연장 여부는 통상적인 절차에 따라 타업체와의 비교를 통해 결정하지 보도에 나온 것과 같은 그런 요소를 고려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해당 보도는 잘못된 것일까? 해당 기사를 쓴 기자는 "보훈처로부터 계약을 종료한다는 서면 답변을 받았다"라고 했다.

이에 대해 보훈처 관계자에게 다시 묻자 그는 "담당 부서가 기관(안중근기념관, 백범기념관)과 협의한 내용을 (<비즈 한국>에) 답변했다"라고 시인했다. 기자가 안중근의사기념관 담당자는 보훈처로부터 어떤 이야기도 들은 적 없다고 한다라고 하자 "아직 실무자선까지 이야기가 된 것은 아닐 것"이라고 답했다. / 이준호 기자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