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31 18:32최종 업데이트 20.06.02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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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과 더불어 집안 말아먹는 취미로 유명한 것이 오디오다. 오디오에 빠지면 자가 주택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월세로 집을 옮기게 된다는 '웃픈' 얘기도 있다.

알다시피 오디오 기기는 크게 나눠 소스 기기, 앰프, 스피커로 구성된다. 소스 기기는 레코드판, CD, MP3 파일 같은 저장 매체에서 음악 정보를 읽어 전기신호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앰프는 이 전기신호를 스피커를 구동할 수 있는 수준으로 증폭한다. 스피커는 전기신호를 소리의 진동으로 바꾼다.

소스 기기, 앰프, 스피커 셋 다 중요하겠으나 그중에서 투자 대비 소리 개선 효과가 가장 큰 기기는 스피커다. 온몸으로 떨어대며 공기의 파동을 직접 생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유자금이 생겨 오디오 성능을 개선하려면 스피커부터 고려하는 게 현명하다.
 
스피커를 바꾸면 오디오 음질이 확 달라지듯이, 와인에서도 '이것'만 개선하면 음주 시간이 한층 즐거워지는 그런 요소가 있다. 게다가 스피커 교체처럼 목돈이 들지도 않는다. 그저 와인 마시는 행동에 살짝 변화를 주는 정도다. 그런 정도로 무슨 큰 변화가 있냐 싶겠지만, 실제 그 효과는 싸구려 사은품 헤드폰을 독일제 젠하이저 헤드폰으로 바꾸는 것에 견줄 만하다. 사소하지만 효과 만점인 와인 마시는 팁 세 가지를 공개한다.
 
하나, 와인 잔은 원심분리기라고 생각해라
 

와인 스월링의 순간 필자가 <정영진 최욱의 매불쇼> 생방송 준비 중 와인을 마시고 있다. ⓒ 팟빵

 
한때 팟캐스트 <정영진 최욱의 매불쇼>에서 고정 게스트로 '임승수의 깡와인 시사 안주' 생방송을 했다. 와인을 마시며 시사 문제를 걸쭉하게 논하는 코미디 방송이다. 미리 반 병쯤 마시고 생방송에 들어가야 분위기가 살기 때문에 일찍 스튜디오에 도착해 앞 코너 진행을 보며 와인을 마시곤 했다. 그 사전 음주 모습을 영상으로 본 한 청취자가 내가 와인 잔을 원심분리기처럼 빙빙 돌린다며 신기해하는 댓글을 남긴 기억이 난다.
 
맞다. '스월링(Swirling)' 얘기다. 와인을 잔에 따랐으면 돌려라. 허리케인을 일으키듯 빙빙 돌려라. 그러면 와인이 산소와 활발하게 접촉해 향기를 한껏 뿜어내고 맛도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다.

필자의 아내는 스월링을 잘하지 않는 편이다. 반면 나는 인간 원심분리기다. 손목 스냅으로 휙휙 돌리면 게임 '디아블로2'의 바바리안이 훨윈드(whirlwind, 회오리)를 하는 손맛이 느껴진다.
 

와인 스월링 ⓒ 고정미

 
그렇게 아내와 내 와인을 비교하면 확실히 다르다. 아내의 와인은 여전히 맛과 향이 닫혀 있는데, 내 와인은 벌써 마시기 좋게 활짝 열려 있다. 과도한 스월링은 와인의 산화를 촉진해 풍미가 급격하게 꺾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는데, 나는 여태껏 그렇게 돌려댔는데도 풍미가 급격하게 꺾인 기억이 없다. 그러니 웬만하면 그냥 돌려라. 솔직히 그동안 거의 안 돌리지 않았는가.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는데, 효과가 좋다고 해서 경망스럽게 돌려대기엔 눈치가 보인다고? 이 사안의 본질은 무엇인가? 와인의 맛과 향을 즐기기 위해 마시는 것이다.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가 아니라면, 좀 경망스러워도 괜찮다. 맛있으면 그만이지. 이제부터 내 손이 원심분리기라고 생각하고 돌리자. 돌지 않는 원심분리기는 죄악이다.
 
둘, 와인은 마시는 향수라고 되뇌어라
 
나는 자주 와인 잔 깊숙이 코를 들이민다. 향기가 너무나 좋기 때문이다. 코끝에 와인이 묻은 적도 있을 정도다. 와인은 마시는 향수다. 향수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후각세포로 미세한 분자들을 대량으로 흘려보내어 뇌 속에 기분 좋다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해야 자기 몫을 수행하는 것이다.

와인은 술 중에서도 매혹적인 향기로 독보적이다. 담배, 가죽, 제비꽃, 삼나무, 흙, 바닐라, 토스트, 낙엽, 흑연 등 고급 와인일수록 다채롭고 풍성한 향기가 난다. 전문가들은 그러한 와인의 향기를 객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엄청난 분량의 어휘를 외우고 향기를 맡으며 반복 학습 할 정도이니, 와인은 가히 향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적으로 규명되어 있다시피 우리가 맛이라고 느끼는 것의 대부분은 후각에서 기인한다. 혀로 느낄 수 있는 맛은 단맛, 짠맛, 신맛, 쓴맛, 감칠맛 정도이며 그 외에 느끼는 다채로운 풍미는 10만여 종의 냄새를 구분할 수 있다는 후각 덕분이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와인을 마시면서 향기를 맡는 데에 시간과 정성을 들이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입으로 부어 넣기 전에 심하다 싶을 정도로 향기를 탐닉해 보자. 그게 와인(사실상 향수)을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다.
 
맥주와 소주에 익숙한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잔 속에 코를 디밀어 폐부 깊숙이 향기를 맡는 와인 음용법은 어색할 수 있다. 하지만 와인을 마시며 향기를 충분히 만끽하지 않는 것은 코를 막고 조 말론 향수를 뿌리는 것과 진배없다. 싼 술도 아닌데 그렇게 마시면 너무 아깝지 않나. 간혹 코에서는 기똥찬데 입에서는 다소 아쉬운 와인도 있다. 나는 그런 와인일수록 본전 생각에 더욱 기를 쓰고 향기를 맡는다. 입에서 아쉬우면 코에서라도 뽕을 뽑아야 하니까.
 
셋, 와인을 급하게 삼키지 말자
 
원샷! 부어라! 마셔라! 마시고 죽자! 한국인이라면 친숙한 문화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술을 입안에 털어 넣자마자 삼키기 급급하다. 그저 혈중 알코올 농도를 높이기 위해 마시는 술은 입안에 오래 머물러 봐야 부담스럽기도 하고.

<정영진 최욱의 매불쇼>에 고정 출연하던 시절 한 청취자가 내 팬이라며 스튜디오로 알코올 도수 96%에 달하는 폴란드 술 '스피리터스'를 보냈다. 생방송 중에 마셔달라는 요청이었다(과연 팬이 맞는가?).

어쨌든 청취자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으니 생방송 중에 스트레이트로 여러 잔 마셨다. 엄청난 도수 때문인지 입술에 닿자마자 술이 증발하는 그 기묘한 느낌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다. 워낙 부담스러운 술이라 입안에 털어 넣자마자 삼켰는데 내장 타는 듯한 작열감이 가슴 부분에서 끊기더라. 보통 알코올 도수 40도 내외의 독주는 식도에서 위장까지 쭈욱 작열감이 나기 마련인데 스피리터스는 다 내려가기도 전에 흡수 및 증발하는 괴이한 느낌이었다.
 

김희애의 와인 병나발 장면 드라마 <부부의 세계> 7화에서 지선우(김희애 분)가 괴로움에 와인 병나발을 시전 중이다. ⓒ JTBC

   
물론 훅 털어넣는 술만의 매력이 있다. 하지만 와인은 그렇게 마시면 곤란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와인의 장점은 다채로운 향이며 그것은 맛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와인을 입안에 머금고 3~5초 가량 입천장까지 구석구석 코팅한다는 느낌으로 굴려보기를 권한다. 의외로 미각을 느끼는 세포는 혀뿐만 아니라 구강 내부에 광범위하게 퍼져있으며 구강과 비강은 연결되어 있다.

전문가들은 와인을 입에 머금은 상태에서 공기를 빨아들이며 마치 가글하듯 입안을 헹군다. 공기를 흡입하면 맛과 향이 한층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문가처럼 마실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이 왜 호로록호로록 소리를 내며 요상하게 마시는지 그 이유 정도는 알면 좋지 않을까. 아무튼 와인을 바로 삼키지 말고 3~5초 정도 머금으며 풍미를 충분히 느껴보자는 것만은 꼭 기억하자.
 
지금까지 설명한 세 방법을 숙지한다면 추가 지출 없이도 와인의 맛과 향을 훨씬 깊고 풍부하게 느낄 수 있다. 다만 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다음과 같은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니 염두에 두기 바란다.
 
언젠가 가족끼리 강화도의 한 음식점에 갔을 때였다. 식당에서 8살 둘째가 물잔을 한참 스월링하더니 이내 마신다.
 
"음~ 열렸네."
 
11살 첫째는 한술 더 뜬다.
 
"난 아직 안 열렸는데도 맛과 향이 좋아."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이라더니, 이 무슨 날벼락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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