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6 17:07최종 업데이트 20.01.06 18:36
 

The-K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가 함께하는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상해-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 김선희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헌법의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하여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한다. 더욱이 몇 해 전 1945년 8월 15일을 광복절이 아니라 건국절(建國節)로 기념해야 한다는 이른바 건국절 논란의 이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무관심한 것이 현실이다. 임시정부를 향해 떠나는 이번 역사 탐방이 내게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 이유이다.

한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 임시정부와 그 주역들의 흔적을 더듬어 보는 이번 탐방은 부끄러운 나의 무지를 확인하는 시간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상해, 항주, 남경 모두 내가 적어도 세 차례 이상 방문한 곳들이었고 방문시마다 나는 임시정부의 흔적들을 직·간접적으로 보고 들었다. 그러나 그 흔적들에 내재한 독립운동가들의 피맺힌 한과 희생을 나는 직시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탐방 기간 내내 지울 수 없었다.

상해 임시정부 요원들의 경제적 어려움과 간난(艱難)을 들으며,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희생해야 했던 그들의 삶에 일면 경외감과 함께 해방공간에서 점차적으로 배제되어 간 과정이 연상되어 마음이 무거웠다. 특히나 남경(南京)의 이제항(利濟巷) 위안소를 방문했을 때는 남경을 세 차례 방문했음에도 이런 아픈 역사의 현장을 지나쳐왔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인간의 집단적 광기와 야만성에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상해 임시정부청사에 걸려 있던 사진 속 폭탄을 들고 활짝 웃고 있는 이봉창 열사는 당시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1980년 광주항쟁 시기 도청에 끝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 중에 실제로 진압군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도청에 끝까지 남아 민주주의가 유린되는 현장을 증언했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 역시 그들의 의거로 일본을 패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의 광복은 더욱 초라했을 것이고 단지 외세에 의해 주어진 선물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임시정부로 대표되는 우리 민족의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의 해방은 초라하지만은 않았다. 이봉창 의사의 웃는 사진에 내심 나를 대입해 보며 나는 그에게 부채 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약소국가의 저항에 보다 정확한 인식과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를 보았다.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에 대한 탄압으로 가흥(嘉興)으로 피신해야 했던 김구 선생은 중국인 항일운동가 저보성(褚輔成)과 뱃사공 주애보(朱愛寶)의 도움으로 일제의 검거를 피할 수 있었다. 자신들과 아무런 인연이 없는 망국의 독립운동가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중국인들의 삶에서 나는 한 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조선의 독립혁명가들이 중국 혁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야만 한다"고 말했던 주은래(周恩來)의 말처럼 우리의 젊은 혁명가들이 중국 혁명을 위해 흘린 피 역시 적지 않았다는 사실도 기억되어야 하리라.

임시정부는 일본의 검거와 중일전쟁 등으로 상해에서 항주로 다시 진강, 장사, 광주, 유주, 기강, 중경으로 이동해야만 했던 고난과 유랑의 시간을 거친다. 3박 4일의 시간 동안 이 광활한 지역을 모두 돌아볼 수는 없었지만 상해, 가흥, 항주의 임시정부 유적지는 비교적 깔끔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가슴 아팠던 것

대한민국에도 임시정부 기념관이 없는 상황에서 중국 최대 도시의 하나인 상해와 항주에 임시정부 유적지가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나는 중국인들의 역사와 기록을 중시하는 문화의 일단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적지 않은 감사함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개발 논리와 경제적 관점에서 철거, 훼손되어 가는 수많은 국내 유적지들이 더욱 아프게 느껴진 3박 4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픔으로 다가온 것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3기생들이 훈련받았던 천녕사(天寧寺) 터를 방문했을 때였다. 1932년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金元鳳)이 중국 장개석(蔣介石)의 지원으로 독립운동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난징에 설립한 이 학교는 지금은 흔적도 없이 그 터만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허름한 도교 사원이며 간부학교와는 무관하다.

저항시인 이육사, 중국 인민해방군 행진곡을 작곡한 정율성 등이 이 학교를 졸업한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들은 이 곳에서 공부하며 어떤 세상을 꿈꾸었고 김원봉은 어떤 조국을 꿈꾸며 학생들을 지도했을까? 이 곳이 나에게 아프게 다가온 것은 흔적 없이 사라진 건물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 학교와 관계된 많은 사람이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원봉은 월북 독립운동가로, 정율성은 공산주의 음악가로 우리의 기억에서 그리고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지워졌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은 물론 그 가족까지 희생해가며, 젊음을 바치고 생명까지 희생해가며 투쟁했다. 지금 나의 풍요로움과 자유는 많은 부분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 과연 그들은 어떤 세상을 꿈꾸며 험난한 길을 묵묵히 걸어갔을까?

나는 이번 탐방에서 김구와 함께 김원봉, 김두봉 등 이른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을 곳곳에서 마주했다. 민족주의 계열로 분류되는 임시정부의 여정 곳곳에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마주한 것이다. 이는 그들이 조국독립이라는 가치를 위해 서로 수시로 협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구나 안창호가 민족주의 계열이라고 해서 북한에서 기억되지 않는 것이 비극이듯이, 김원봉이나 김두봉, 그 외에도 님 웨일즈가 저술한 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산(1905~1938, 본명 장지락)과 같이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 계열이라고 해서 남한의 기록들에서 삭제된다면 그 역시 아픔이다. 김원봉이나 김두봉에 대한 평가는 독자의 몫이다. 하지만, 그들이 전개했던 의열투쟁이나 무장투쟁의 역사적 사실(史實)은 사실 그 자체로서 기억될 가치가 있다.

조국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싸웠던 과거의 독립운동을 현재의 이념과 관점에서 둘로 쪼개고 그 한편을 기억 속에서 지워나가는 역사 인식은 바람직스럽지 않다. 과거 그들은 때때로 반목했고 경쟁했다.

하지만 조국독립이라는 대전제에서만큼은 목표를 공유한 동지였다. 그들 모두는 조국독립을 위해 자신의 젊음과 가족과 생명까지도 희생한 사람들이었기에 민족구성원 모두에게 기억될 가치가 있는 분들이다. 그들에 대한 평가는 각자의 몫이지만, 그들의 활동이나 생애에 대한 기억마저 지우고자 하는 것은 남북을 막론하고 편협한 역사의식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업적은 업적대로 과오는 과오대로 역사와 마주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서로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독립운동가 대다수는 조국분단을 원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 점에서 현재의 분단은 극복과 해소의 대상일뿐이고 진정한 독립은 통일로 완성될 것이다. 지리적 분단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역사적, 철학적 분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번 탐방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나의 무지를 다시금 확인했다. 좋은 기회를 주신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다만,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역사탐방이 그리고 앞으로의 탐방이 독립운동사의 나머지 반쪽까지를 아우르는 기획으로 확대되어가기를 진심으로 고대한다.

김구의 피신처였던 해염(海鹽) 재청별장(載靑別莊)에 그의 아들 김신이 써 놓은 음수사원(飮水思源, 물을 마실 때는 그 근원을 생각하라)이라는 글귀가 자꾸만 내 머릿속을 맴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김동욱님은 임시정부 100주년 6차 역사탐방기 참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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