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01 07:57최종 업데이트 18.11.01 09:48
현대 서촌의 중심 수성동 계곡

서촌 안쪽에 숨어 있는 듯 자리 잡고 있는 '수성동 계곡'을 찾아가는 길은 마치 도연명(陶淵明)이 쓴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한 어부가 복사꽃을 쫓아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찾아가는 모습과 비슷하다. 서울 한복판의 복잡함을 피하여 광화문에서 통의동, 옥인동을 거쳐 인왕산 쪽을 향해 걷다 보면 길가 좌우로 수많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그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여러 인물들의 발자취가 담긴 유서 깊은 곳들을 지나가게 된다.

그들의 삶의 흔적을 보며 새삼 이곳이 오랜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잠시 지난날의 회상에 빠져 걷다가 산 입구에 다다르면 산이 살며시 입을 벌린 듯한 그윽한 계곡이 나타난다. 도시의 소음과 번잡함을 피해 깊숙이 숨어 보이지 않던 계곡의 골짜기 사이로 산에서 내려오는 물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이곳을 '물소리 들리는 곳'이란 의미의 '수성동(水聲洞)'이라 부른다.
 

인왕산 수성동 계곡 ⓒ 황정수

 
상쾌한 마음에 계곡 앞에 서서 고개를 들어 산꼭대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마침 학생들을 인솔하여 이곳을 안내하는 분이 '수성동은 물소리가 크게 나서 붙여진 이름'이라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물소리가 나지 않아 물소리를 늘 들을 수 있도록 기관에서 연구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전한다.

그러나 이곳은 늘 물소리가 들려서 '수성동'이라 한 것만은 아니다. 이곳은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라 물 나는 곳이 적어 늘 물이 많을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물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조선후기 위항시인으로 서촌에 살았던 존재(存齋) 박윤묵(朴允默, 1771-1849)의 시를 보면 이곳이 왜 '수성동'이라 불렸는지 추정할 수 있다.

인왕산 위에 비가 쏴하고 내리면
인왕산 아래에 물이 콸콸 흐른다네.
이 물이 있는 곳 바로 나의 고향이라
머뭇머뭇 차마 떠나지 못한다네.
내 풍경과 함께 때를 씻고 나서
노래 부르고 돌아보면서 일어나니.
하늘은 홀연 맑게 개고
해는 하마 서산에 걸렸네.


시의 내용을 보면 이곳은 평소 물이 많은 것이 아니라, 비가 오고 난 후에 물이 많이 불어 콸콸 흘렀다는 것이다. 그때쯤이면 가파른 바위산 위에서 물이 쏟아져 내려 큰 소리가 들리니 '수성동'이라 했을 것이다. 모처럼 물이 늘어 좋으니 사람들이 더위를 피하여 들어와 탁족놀이를 하고 간단히 물에 몸을 담그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즐기는 사이에 비가 그치고 나면, 하늘은 맑고 그에 따라 마음도 맑아졌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시에서도 또 나타난다. 김정희는 인근 통의동에 살아 자주 이곳을 찾았다. 또한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를 이끌었던 위항시인 천수경(千壽慶, ?-1818)과도 가까이 지내 이 근처에서 자주 어울렸다. 그의 시 '수성동 우중에 폭포를 구경하다' 중에서 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수성동에서 비를 맞으며 폭포를 보고,
심설(沁雪)의 운을 빌린다.
골짜기에 들어오니 몇 무 안 되고,
나막신 아래로 물소리 우렁차다.


이러한 김정희의 생각을 보더라도 '수성동'의 의미는 '비가 올 때 들리는 큰 물소리'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겸재 정선의 인왕산 사랑

수성동뿐만 아니라 곳곳이 매력적인 인왕산의 명승을 찾아 조선시대의 많은 시인 묵객들이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깊이 이해하고 많은 작품을 남긴 이는 단연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이다. 그는 인왕산 주변에 살며 많은 인왕산 주변의 경치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 전국의 많은 절경을 찾아 화폭에 남긴 부지런한 화가이다.

정선은 많은 관념적인 그림들과 실경산수를 남겼지만, 그를 미술사의 위대한 존재로 만든 것은 역시 '실경산수'이다. 그의 실경은 특히 바위산을 잘 그렸는데 금강산의 봉우리들, '박연폭포'와 같은 폭포 그림, 그리고 인왕산의 전모를 그린 '인왕제색도'와 '장동팔경' 등 대부분 바위가 많이 등장하는 그림들이다. 그가 이렇게 바위산을 잘 묘사하게 된 것은 그가 대표적인 바위산인 인왕산 자락 서촌에 살았기 때문이다.           
                 

정선의 집 풍경 '인곡유거' ⓒ 간송미술관

 
정선은 지금의 경복고등학교 자리인 청운동에서 태어나 화가로서 성공한 후에 옥류동 입구 옥인동으로 이사를 가서 살았다. 그가 비 개인 인왕산의 모습을 조감하여 '인왕제색도'를 그릴 수 있었던 것도 이곳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옥인동에 '인곡정사(仁谷精舍)'라는 집을 짓고 살았는데, 늘 인왕산 주변과 골짜기를 소요하였다.

마침 그의 이웃에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이 있었고, 또 근처에 평생 지음(知音)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이 있었다. 그래서 더욱 이곳에 대한 애정이 강했을 것이다. 그렇게 얻은 화가의 시선으로 많은 주변 풍경을 얻을 수 있었다. 청풍계, 백운동, 수성동 등 계곡의 풍경과 그곳에 있었던 아름다운 건물과 누각들은 모두 작품의 주요한 소재가 되었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과 '수성동'

겸재 정선의 미술 작품 중 평소 삶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역시 자신이 살던 인왕산, 백악산 주변을 그린 것들이다. 단 폭의 작품으로는 '인왕제색도'가 손꼽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작품이 '장동팔경' 첩들이다. 이첩은 지금의 옥인동, 효자동 주변 인왕산과 백악산 주변의 명승 여덟 곳을 그린 것이다.

'장동(壯洞)'은 본래 장의동(壯義洞)인데, 안동 김씨들이 많이 살아 장의동을 장동이라 줄여 '안동 김씨'를 '장동 김씨'라 부른 데서 기인한 것이다. 장동 김씨의 후원을 받았던 정선은 여러 종의 '장동팔경' 첩을 남기는데, 내용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두 첩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고,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다른 한 종이 있다. '수성동' 계곡을 소재로 그린 것은 간송미술관 소장 두 첩 중의 한 첩에 들어 있다.
                      

정선 <수성동> ⓒ 간송미술관


장동팔경 속의 '수성동'은 수성동 계곡의 풍경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부감하여 그린 것이다. 전면 가까운 곳의 입구와 골짜기는 급히 시선을 내려다보고 그렸고, 원경은 바위산은 평원의 시선으로 처리하였다. 두 가지 시선의 교차 효과로 그림 속의 사물의 모습이나 시선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드는 역동적인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눈에 띄는 표현 방식은 바위들을 덩어리 같이 뭉텅뭉텅하게 표현한 것이다.

굵은 선과 번짐을 이용하여 대략 그린 듯하지만 골짜기의 세세한 굴곡이 잘 표현되어 있다. 자칫 멍청하게 그려 무덤덤하기 쉬운 바위산의 모습에 생명을 불어넣어 기운생동을 느끼게 하는 화가 정선만의 특성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작품에서 특히 인상적인 묘사는 곡선을 주로 사용한 것인데, 사물도 길도 모두 곡선을 사용하였다. 처음 올라올 때의 길을 이어 앞으로 펼쳐질 오르막길을 S자 형식으로 처리하여 계속 둥그런 길이 이어져 그림 속에 자연스런 율동감을 만들어낸다. 매우 감각적이면서도 생생한 솜씨이다.
                       

정선 <수성동>의 일부분 확대 ⓒ 간송미술관


그림 속에는 네 명의 사람이 등장한다. 산행에 나서는 주인공은 갓을 쓴 세 사람이고, 어린 인물은 세 사람의 시중을 들 시동이다. 서 있는 품새로 보아 왼쪽 길을 걸어 올라와 막 기린교를 지난 모습이다. 선두에 서 있는 이가 지팡이를 들고 있는 품새가 이곳의 지형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혹시 근처에 친한 세 선후배가 살았으니 정선이 이병연과 조영석을 끌고 함께 나들이 나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맨 앞 사람이 정선이다.

옥인아파트와 수성동의 재생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이 아름다운 수성동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도 여전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봄이 되면 꽃놀이 장소가 되고, 여름이면 발을 담그러 이곳을 찾았다. 그렇게 늘 인왕산과 수성동은 그렇게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1970년경 새로이 도시 발전의 기틀을 잡겠다는 정부의 의지와 함께 수성동은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자연이라는 것은 사라지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이 수성동은 귀신같이 세상에서 사라지며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람들 뇌리 속에서 잊혀 버렸다. 놀라운 일이었다.

전쟁 후 폐허 속에서 겨우 일어선 한국은 새로이 재건하자는 구호 속에 한국 전역이 파헤쳐지고 많은 변화가 생겼다. 국민들은 지도자의 지휘 아래 새벽종이 울리고 새 아침이 밝으면 모두 일어나 새 나라를 건설하였다. 그렇게 도시를 새롭게 가꾸기 위해 시도된 계획 중의 하나가 시민(시범)아파트 건설이었다.

1960년대 이후 당시 서울은 인구수가 급증하면서 곳곳에 무허가 판잣집이 넘쳐나게 되었다. 특히 산등성이에 많이 생겼다. 당시 '불도저'라는 별명의 김현옥 서울시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판잣집을 철거하면서 시민아파트를 곳곳에 짓기 시작한다. 그중의 한 곳이 '옥인동 시범아파트'였다.

옥인시범아파트는 1971년 수성동 계곡 바로 옆, 인왕산 자락을 타고 9개동이 지어졌다. 무지막지하게 산 위에 계곡 위에 꾸역꾸역 건물을 지어 채워 넣었다. 커다란 건물 사이로 수성동은 묻혀버리고 계곡과 산은 아파트에 가려 버렸다. 더 이상 세상에서는 '수성동'이란 이상향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아파트가 만든 새로운 풍경은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계곡의 풍광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괴물 같은 덩어리였다.

그렇게 전설 속에 묻혀버리고 만 수성동 계곡은 40년이 지난 2011년이 되어서야 지난날의 잘못을 깨닫고 아름다운 자연 유산을 되살리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다시 세상에 등장한다. 많은 논란 끝에 괴물 같은 아파트가 철거되고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다행히 예전의 모습이 크게 손상되지 않은 채로 복구가 되어 계곡이 살아났지만, 오랜 세월 시민들과 함께 하지 못해 잊혀버린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자연과 인간이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건설과 철거 과정 중 재미있는 에피소드

동네 원로들은 옥인아파트를 지을 때의 상황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한다. 그들은 아파트 건설이 이곳 사람들을 위한 재생 사업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곳 옥인동 지역 뒤쪽에는 창의문이 있는 곳까지 산중턱을 따라 수없이 많은 무허가 판잣집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966년 린든 비 존슨(Lyndon B. Johnson, 1908-1973)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청와대에서 바라다 보이는 인왕산 중턱이 눈에 거슬렸다고 한다.

그래서 존슨이 돌아간 후 당시의 상황을 창피하게 생각한 대통령이 지시를 내려 산중턱의 판잣집을 모두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옥인아파트가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항간의 떠도는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 믿을 수는 없지만, 민심을 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귀담아 들을 만하다.
             

현재의 기린교 ⓒ 황정수

 
또 하나의 이야기는 문화의 보존과 관련된 것이다. 옥인아파트를 철거하며 가장 화제가 되었던 것은 정선의 그림 '수성동'에 나오는 돌다리 '기린교'의 존재 여부였다. 그런데 조사 과정에서부터 기린교로 추정되는 조선시대 돌다리가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결국 발굴하듯 조심스레 모두 철거하고 보니, 조선시대 다리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듯 무자비한 아파트 건설과 철거 공사 중에 이 작은 다리가 살아있었다는 것은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복원이 끝나고 단장이 된 지금 이 기린교는 수성동의 가장 중요한 상징물이 되었다. 이제 두 개의 커다란 돌로 이루어진 간단하고 소박한 다리의 존재는 이 감동적인 장소의 역사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옥인시범아파트 흔적 ⓒ 황정수


마지막으로 거주하던 주민들의 상실감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많은 난산 끝에 철거가 결정되고 본격적인 철거가 진행되자 주민들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 처음에는 전부 철거되는 것에 합의를 했지만 거의 철거되고 7동 한 동이 남아 있게 되자, 많은 주민들이 상실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서촌 일대 주민들은 아파트의 일부를 보존해 기억을 이어가기를 종로구청에 제안했다.

비록 옥인아파트가 마구잡이 개발시대의 산물이긴 했지만, 누군가에게는 고향이었고 소중한 집이었으니 기억의 일부라도 남기자는 회한의 뜻이었다. 이들의 뜻이 받아들여져 7동의 일부 벽체가 남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아파트가 철거된 후 흔적을 남긴 첫 사례이다. 이러한 과정은 통독된 독일의 브란덴부르그 장벽의 일부를 남긴 것과 유사한 느낌을 받는다. 역사적 유물은 오래된 것이든 가까운 것이든 인간의 삶의 흔적이란 면에선 큰 차이가 없다는 중요한 사실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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