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내동에서 태어나 동산중·고등학교를 졸업한 김홍탁(77) 씨는 '케이 팝(K-Pop)'의 모태가 된 우리나라 록밴드의 시조 '키보이스'의 리더였다. 2020년 겨울 김홍탁 유튜브 스튜디오에서 연주를 하는 김홍탁 씨.

인천 내동에서 태어나 동산중·고등학교를 졸업한 김홍탁(77) 씨는 '케이 팝(K-Pop)'의 모태가 된 우리나라 록밴드의 시조 '키보이스'의 리더였다. 2020년 겨울 김홍탁 유튜브 스튜디오에서 연주를 하는 김홍탁 씨. ⓒ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수많은 사람 중에 만난 그 사람~'


1960~1970년대를 풍미한 우리나라 최초의 록 밴드 '키보이스'의 <해변으로 가요>, <바닷가의 추억>은 국민 가요였다. 동네 꼬맹이들까지 이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김홍탁, 윤항기, 차중락, 차도균, 옥성빈. 20대 초반의 혈기방장한 젊은이들은 기타와 베이스, 키보드와 드럼만으로 우주 같은 음악을 뿜어냈다. 

새마을운동과 함께 이제 막 산업화를 시작하던 시절, 단 몇 분만이라도 보릿고개를 잊게 해주는 대중음악에 국민들은 열광했다. 헌칠한 키에 치렁치렁한 머리, 가죽 장화를 신은 외모도 자유를 갈망하는 청춘들을 매혹하기에 충분했다. 5인조 록 그룹 키보이스는 그렇게 지금의 케이팝(K-Pop)을 싹 틔운 뒤 대중음악사 속으로 멀어져 갔다. 반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 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인천 출신 키보이스 리더 김홍탁(77)씨를 찾아갔다. 그는 여전히 퍼스트 기타를 연주하며 음악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었다. 

"요즘 유튜브 방송하느라 바쁘네요. '해피 밴드(HAPPY BAND)', '567 엔엘엘(NLL)'이란 그룹을 결성해 공연도 합니다." 

그는 양평에 무대를 겸한 방송실을 차려놓고 '김홍탁 유튜브' 방송을 하고 있었다. 연주와 공연은 물론이고 인터뷰, 다큐 방송에 이르기까지 김홍탁 유튜브는 음악 콘텐츠가 넘쳐나는 음악 전문 방송으로 자리 잡은 모습이었다.
 

 1966년 오아시스 레코드사에서 발매한 키보이스 히트 앨범. 그들은 당시 비틀스의 음악을 번안해 부르면서 한국의 비틀스로 불렸다.

1966년 오아시스 레코드사에서 발매한 키보이스 히트 앨범. 그들은 당시 비틀스의 음악을 번안해 부르면서 한국의 비틀스로 불렸다. ⓒ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록 밴드 시조, 동산중 2학년 때 신포동 사는 미군 '삼고초려' 기타 배워

우리나라 '록 밴드의 시조' 김홍탁이 태어난 곳은 인천 내동 105번지. 인천내동교회 부근이다. 여섯 살 때까지 내동에서 자란 그는 창영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돼 영종초등학교로 전학을 간다. 

"1학년 때 6·25전쟁이 터졌어요. 영종도가 할아버지 고향이었는데 전란을 피해 가족이 모두 영종도로 들어간 거죠." 

카키빛 바다 위로 떠 있는 크고 작은 섬들, 적막감 속 간간이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바닷새들의 울음. 오감으로 흡수한 영종도의 풍광은 평생 그의 음악적 모태가 된다. 홍탁이 송현동 72번지로 돌아온 건 동산중학교에 입학하면서다. 본격적으로 음악에 눈을 뜬 시기이다. 

"영종도엔 중학교가 없었어요. 인천으로 유학을 온 거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5남매의 장남인 내가 안쓰러우셨는지 기타를 사주셨어요. 미국으로 유학 간 삼촌도 기타를 보내주셨고. 그때부터 기타와 한 몸처럼 붙어살았지."

여섯 개의 줄이 만들어내는 하모니와 각각의 선이 뿜어내는 감미로운 애드리브. 기타의 음색에 깊이 매료된 사춘기 소년 홍탁은 눈만 뜨면 기타부터 잡았고, 밥 먹을 때조차 기타를 안은 채 숟가락을 들었다. 컨트리 록과 포크 록만 배우던 홍탁에게 어느 날 갑자기 낯설지만 강렬한 음악이 나타난다. 로큰롤이었다. 

"로큰롤을 배우고 싶었는데 인천엔 당시 트로트와 클래식 기타 학원만 있었거든.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 우연히 놀러 간 신포동 친구 집에서 멋진 기타 소리가 들려오는 겁니다. 2층에 세 들어 사는 미군이 연주하는 기타 소리였지요."

그 음악이 흑인들이 연주하는 '부기우기(Boogie woogie)' 주법이라는 걸 알게 된 건 나중이었다. 다짜고짜 찾아와 손짓 발짓 하며 기타를 가르쳐달라는 홍탁에게 미군은 "노(No)" 하며 단호하게 거절한다. 어떻게든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홍탁은 삼고초려 끝에 허락을 받았고 마침내 1년 6개월 동안 미군으로부터 개인 교습을 받는다. "그때 배웠던 기타가 고향집 엄마의 집밥처럼 힘이 됐어요." 

미군은 중구 인근 부대에 근무하며 한국 여성과 동거하는 중이었다. 기타와 함께 쑥쑥 성장한 홍탁은 동산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1961년. 동기, 선배들과 함께 고등학생 밴드 '캑터스(Cactus·선인장)'란 그룹을 조직하며 리드 기타를 맡는다. 프로 뮤지션의 출발이었다.
 

 "내 고향 인천에서 큰 공연을 한 번 하고 싶어요." 양평 스튜디오에서 활짝 웃고있는 김홍탁 씨

"내 고향 인천에서 큰 공연을 한 번 하고 싶어요." 양평 스튜디오에서 활짝 웃고있는 김홍탁 씨 ⓒ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미군 부대에서 일하는 친척에게 밴드를 구한다는 얘길 듣고 오디션을 받았는데 그 자리에서 합격했어요." 당시 인천은 애스컴(ASCOM·주한육군지원사령부)이 있어 부평과 신포동에 크고 작은 미군 클럽들이 성업 중이었다. 이역만리에서 군 생활을 하는 미군들에게 유일한 행복은 클럽에 가서 술을 마시며 음악을 듣는 일이었다. 

'캑터스'는 주말이면 빵모자와 청바지 차림으로 신포동과 부평의 미군 클럽을 오가며 연주를 했다. "어른들이 독일 광부나 간호사로 일하던 시절, 고등학생들이 음악으로 달러를 버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미군들이 먹는 프라이드치킨과 콜라도 맘껏 먹을 수 있었지요." 

신포동과 부평은 이태원과 비슷한 풍경을 하고 있었다고 김홍탁은 회상했다. 미8군 무대를 꿈꾸는 전국의 뮤지션들이 인천으로 모여들었는데 '대한민국 음악 깡패들은 다 인천으로 온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키보이스' 출신 김홍탁 씨의 연주 모습.

'키보이스' 출신 김홍탁 씨의 연주 모습. ⓒ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키보이스' 출신 김홍탁 씨의 연주 모습.

'키보이스' 출신 김홍탁 씨의 연주 모습. ⓒ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끝없는 도전, 미국 유학 후 '서울재즈아카데미' 설립

홍탁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윤항기가 멤버로 있던 서울 '키보이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다. '인천에 기타 정말 잘 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김홍탁을 찾은 것이다. 그렇게 1964년 우리나라 최초의 록 그룹 '키보이스(Key Boys)'가 탄생한다. 

30만여 명의 미군이 주둔하던 시절, 키보이스의 인기는 지금의 방탄소년단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미8군 쇼 무대에 서려면 엄격한 오디션을 봐야 했는데 키보이스는 최상위 등급인 더블에이(Double A)를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다. 첫 히트곡 <정든배>를 필두로 전국의 미군 부대를 누비는 동안 '대한민국의 비틀스'라는 명성까지 얻게 됐다. 

"하루아침에 유명해진다는 얘기가 있지요? 우리가 그랬어요. KBS 방송 출연까지 거절할 정도로 바빴으니까." 당시는 야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키보이스는 유명세 덕분에 '야간통행증'을 발급받는 특혜까지 누린다. 그렇지만 김홍탁의 마음 한편엔 늘 새로운 음악에 대한 갈망이 꿈틀거렸다.

지미 헨드릭스의 하드 록이 그에게 충격파를 던진 1967년 키보이스를 해산한 김홍탁은 '히파이브(He5)'에 합류한다. <초원>, <정 주고 내가 우네>와 같은 히트곡을 낸 히파이브에서 김홍탁은 우리나라에 단 한 대밖에 없던 '깁슨 기타'를 선물받기도 한다. 

1970년 히파이브를 해체한 그는 다시 6인조 '히식스(He6)'를 결성해 자신의 자작곡 중심으로 활동하다 1972년 돌연 미국행을 결심한다. 역시 음악을 향한 끝없는 욕망 때문이었다. "록 음악의 본고장에서 공부하고 싶었어요."
 

 '키보이스' 출신 김홍탁 씨의 연주 모습.

'키보이스' 출신 김홍탁 씨의 연주 모습. ⓒ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낮엔 사업을, 밤엔 '이스트웨스트'란 밴드의 리더로 살아가는 삶을 꾸려나간다. 15년 뒤, 그동안 쌓은 음악적 역량으로 대한민국 대중음악을 한 단계 높여야 할 시기가 찾아왔다. 1987년 귀국한 김홍탁은 꼼꼼한 준비 끝에 1996년 우리나라 최초의 실용음악 고등교육기관인 '서울재즈아카데미'를 세운다. 

서울예대조차 클래식과만 있었던 시절,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우리나라 실용음악 교육을 정착시키는 대가로 건강이 악화됐다. 서울재즈아카데미가 자리 잡은 2009년, 퇴직과 함께 건강을 위해 양평으로 이사해 지금까지 살아왔다. 

음악에 관한 한 그는 여전히 목마르다. 그런 그의 소원이라면 고향 인천에서 멋진 공연을 한번 여는 것이다. "돌아보니 고향을 위해 제가 한 일이 없어요. 빚을 갚는 마음으로 인천에서 후배들과 함께 좋은 공연 한번 하고 싶습니다."

인터뷰 말미, 연주를 한 곡 청했다. 청바지를 입은 백전노장의 뮤지션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무대로 올라갔다. 퍼스트 기타를 연주하는 그의 열 손가락이 전자 기타 위에서 춤을 추었다. 기타리스트의 등 뒤 'HAPPY BAND / 567 NLL'이란 글씨가 선명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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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인천시에서 발행하는 종합 매거진 <굿모닝인천> 2021년 1월호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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