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 주인공으로 선정된 정일성 촬영감독이 4일 오전 부산 해운대구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 문화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60년이 넘도록 영화인의 길을 걸어온 원동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 주인공으로 선정된 정일성 촬영감독이 4일 오전 부산 해운대구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 문화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60년이 넘도록 영화인의 길을 걸어온 원동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유성호

 
촬영감독 정일성. 그 이름만으로도 한국 영화사의 몇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다. 1957년 조긍하 감독의 <가거라 슬픔이여>로 데뷔한 이후 그는 130편이 넘는 영화에 함께 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관용어에 대한 그의 답은 명쾌하다.

"영화의 격조는 감독이 아닌 촬영 감독이 만든다."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는 한국영화 회고전의 주인공으로 정일성 촬영감독을 택했다. 배우나 감독이 아닌 촬영감독을 회고전에 초청한 건 분명 이례적이다. 4일 부산 해운대 센텀 신세계백화점 문화홀에서 진행된 간담회에서 그는 이를 인지하고 있듯 "제가 아는 일본 평론가가 쓴 글을 보니 일본에서도 촬영감독 회고전을 한 적이 없다. 축하를 보낸다고 하더라"며 "개인적으로도 영광이고 앞으로 좋은 촬영감독이 더 나왔으면 한다"는 말로 운을 뗐다.

1929년 일제 강점기, 일본 출생 이후 주한미군사령부 공병장교·일본어 통역장교 등을 거쳤고, 해방 후 한국으로 건너와 처음 카메라를 들게 됐다. 그전까진 영화를 좋아하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랬던 그가 김기영 감독 <하녀>와 <화녀>, 유현목 감독의 <사람의 아들>, 이만희 감독의 <만추> 그리고 임권택 감독의 다수 작품에서 촬영을 책임져 왔다. 시대적으로 저항의 상징이었으며 작품적으로도 인정받은 거장의 화면은 모두 그의 눈과 손에서 나온 것이다. 대종상영화제에서 일곱 차례 상을 받으며 역대 최다 수상자 기록도 갖고 있다. 

자신이 주인공이 된 회고전이자 기자 간담회였지만 정일성 촬영감독은 "부산과 경북, 강원도 등지에서 태풍 피해를 많이 입었는데 이렇게 행사를 진행할 수 있게 된 건 축복"이라며 "영화도 중요하지만 태풍 피해로 고통받는 분들이 건강하게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철저한 원칙과 자기반성

 

▲ 정일성 촬영감독 “한국독립영화 끝까지 희망 품길”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 주인공으로 선정된 정일성 촬영감독이 4일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60년이 넘도록 영화인의 길을 걸어온 원동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유성호

 
해방과 한국전쟁, 민주화항쟁 등 격변의 한국사를 온몸으로 관통해서였을까. 간담회 질문에 답하던 그는 상당 부분을 자신의 원동력, 그리고 한국영화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데 할애했다. 

"핍박받던 일제 시대에도 <아리랑> 같은 명작 탄생했다. 전체주의 때 영화를 통해 항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정신 무장을 하게끔 하는 원동력이지 않았을까. 해방 이후부터 6.25 전쟁 때까지 영화계는 처참했다. 나라 자체의 삶이 어려웠잖나. 영화가 사치 문화로 여겨져서 필름 수입도 안 됐고, 러시아 조명과 미군 필름을 구해다 쓰곤 했다. 1950, 1960년대 한국영화 화면에 스크래치가 보이는 건 그런 이유다. 

지금 영화인들은 좋은 기자재를 통해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다면 영화적 질이 더 나아져야 한다. 그런 영화들이 몇몇 보이지만 우리가 겪었던 걸 교훈 삼아 더욱 좋은 영화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무리한 요구를 좀 하고 싶다. 제가 영화를 138편 정도 찍었다. 그중 40~50편은 굉장히 부끄러운 영화다. 지금 보면 다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은 것들이지. 하지만 내가 부끄럽다고 생각했던 영화가 날 교과서처럼 지배하고 있다. 실패한 영화가 내게 좋은 교과서 같다." 


이어 정 촬영감독은 봉준호 감독 등 후배 영화인들의 성과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아날로그 작업 방식에 대한 후배 영화인들의 공부를 부탁했다. "디지털 작업을 하더라도 필름 과정을 알지 못하면 좋은 디지털 작업을 할 수 없다"며 그는 "완성된 결과물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독창적인 디지털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전 원칙주의자였다. 리얼리즘, 모더니즘의 사조가 있는데 그보다 더 상위의 가치는 영화의 격조라 생각했다. 격조는 영화감독이 아닌 촬영감독이 만드는 것이다. 그간 촬영감독의 역할은 뭘지 계속 생각해왔고 제 머릿속에 숙제로 남아 있다. 일본에 친구들이 많은데 그중 한국영화를 자기나라 영화보다 훨씬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 일본영화엔 없는 힘이 한국영화에선 느껴진다더라. 

남북 분단 이후로 전 계속 긴장하며 살았다. 그게 한국영화의 힘이 아닐까 싶다. 전쟁 후 일본영화는 훨씬 정교해졌지만 영화들이 대부분 비슷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 같은 느낌이랄까. 한국영화는 좀 거칠더라도 사람이 사는 집 같다. 완성도만 높이면 일본영화를 능가할 것이라 (친구들이) 말했는데 그 예언이 실현되고 있다. 우린 분단국가기에 이념의 아픔을 겪었고, 가족이 해체되곤 했다. 또 서로 대립하면서 성장하기도 했다. 저 역시 한국사회 일원으로서 영화를 해오지 않았나 싶다."


대기업에 항거할 독립영화 나와야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 주인공으로 선정된 정일성 촬영감독이 4일 오전 부산 해운대구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 문화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 주인공으로 선정된 정일성 촬영감독이 4일 오전 부산 해운대구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 문화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유성호

 
표현의 자유를 강조한 그에게 현재 한국독립영화와 과거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대해 물었다. "어두웠던 시대에 영화의 제목을 지을 수 있는 자유도 없었다"고 그가 운을 뗐다. 

"임권택 감독의 <알래스카의 늑대>라는 작품이 함경도를 지칭한다며 차라리 <진도의 개>라고 바꾸라고도 했다. 이 정도로 (검열이) 심했다. 그 외 10년 이상 저질 영화들이 나오면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분노했다. 근데 분노하면 뭐하나. 결국 영화로 저항할 수밖에 없지. 개인적으로도 신기할 정도로 파격적인 작품을 제가 하기도 했다. 김기영 감독 <화녀>는 색채의 저항이었다. <만다라> 같은 영화는 어두운 시대에 더 어두운 영화로 저항한 것이다. 유현목, 김수용 감독 등도 마찬가지였다. 저항의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가 억압당할 때 터키나 이탈리아에서 <자전거 도둑> 같은 좋은 영화들이 꽤 나왔다. 

1970년대까지 한국영화를 지배했던 영화사의 역할을 지금 대기업이 하고 있다. 흥행될 만한 건 엄청나게 물량을 쏟아붓는데 독립영화와 저예산 영화들은 전혀 육성하지 못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 가문 등은 좋은 작가를 발굴하고 사람에게 투자했다. 처참했던 시기에 사람을 키워 부흥을 이끈 게 메디치 가문이었지. 독립영화 작가들에게 투자할 수 있는 기업들이 나와서 대형 영화에 대적할만한 영화를 만들 수 있게 하면 좋겠다. 그리고 원래 독립영화 작가들은 각오를 좀 해야 한다. 큰 극장, 큰 기업에 대항하자는 정신으로 무장해야지."


정일성 감독 역시 한국영화의 힘은 곧 다양성임을 잘 알고 있었다. "글로벌 시대가 되면서 영화의 국적이 없어진 것 같다"며 그는 "이 땅에 살면서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을 어떻게 감동적으로 찍을 수 있을지를 숙제처럼 항상 생각해왔다"고 고백했다. 

"어떤 이들은 내가 찍은 걸 보고 참 아름답다며 장소가 어딘지 묻는다. 전 한번도 아름답게 찍으려 노력한 적이 없다. 오히려 어떤 빛을 이용해 어떤 각도로 잡아 역사의 아픔을 보일 수 있는지에 집중해왔다. 영화가 흥행하면 물론 좋은 일이지만 미국 영화의 아류 같은 건 찍고 싶지 않다. 그래서 아마 제게 작품 의뢰가 더이상 오지 않을 것 같다(웃음). 보수를 안 받더라도 저예산이더라도 기꺼이 제가 찍어주고 싶은 영화가 언젠가 있을 것이라는 꿈을 갖고 산다. 요즘 영화를 폄훼하는 의미로 말하는 게 아닌 제 솔직한 생각이다.

제가 지금까지 서른여덟 명의 감독과 작업했다. 한 감독과 많게는 20여 편, 적게는 단 1편으로 끝난 관계도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절 있게 한 것의 3분의 1은 감독들 덕이 아닌가 싶다. 또다른 3분의 1은 제가 떠돌이 생활 때도 집을 지켜준 아내에게 있고, 나머지 3분의 1은 나의 능력 같다. 언젠가 내가 참여한 영화를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해보지만 그게 내 맘대로 정리될 건 아닌 것 같고. 오히려 날 잘 모르는 젊은 감독과 함께 영화를 하면 좋겠다. 길이 없는 들판에 새로운 길을 만들고 싶다."


그런 맥락에서 정일성 촬영감독은 가장 오랜 시간, 많은 작품을 함께 한 임권택 감독에 대해 "제가 직장암으로 누웠을 때 일으켜 세워 준 은인이기에 생명의 빚을 갚아야 한다"면서도 "최선을 다해 작업하겠지만 서로가 젊은 촬영감독, 젊은 영화감독과 일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속생각을 밝혔다. 여전히 왕상한 창작욕, 영화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말일 것이다.

"한국영화 미래는 밝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독립영화 제작의 미래는 그리 밝진 않다. 대자본은 작은 영화에 별로 관심이 없을 것이다. 이미 계산상으로 그렇게 나와있다. 그럼에도 독립영화가 희망을 끝까지 품고 계속 나오길 바란다. 대자본에 항거할 힘이 있는 영화가 계속 나오리란 희망을 품고 있다."

정일성 부산국제영화제 임권택 한국영화 독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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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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