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의 최대치, 박민성 뮤지컬 배우 박민성을 지난 3월 20일, 낮 공연이 끝난 후 서울 신도림 디큐브아트센터 로비에서 만났다.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재구성한 작품이다. 배우 박민성은 이 작품에서 남자 주인공 '최대치' 역을 맡았다. 사진은 지난 3월 7일 프레스콜 현장에서 촬영한 것이다.

▲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의 최대치, 박민성뮤지컬 배우 박민성을 지난 3월 20일, 낮 공연이 끝난 후 서울 신도림 디큐브아트센터 로비에서 만났다.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재구성한 작품이다. 배우 박민성은 이 작품에서 남자 주인공 '최대치' 역을 맡았다. 사진은 지난 3월 7일 프레스콜 현장에서 촬영한 것이다.ⓒ 곽우신

 
식민지 조선의 청년 최대치는 일본제국군의 제복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경성제국대학 학생이었다가 학도병으로 끌려온 그는,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힘이 없던,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을 느끼고 있었다. 징용된 그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주변의 조롱과 핍박을 견디며 근근이 버틸 뿐이었다.
 
그러던 최대치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춘향이가 살던 전라도 남원 사람 윤여옥.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온 여옥의 눈은 빛을 잃은 채였다. 들어오기 싫었지만, 더는 맞고 괴롭힘당할 수 없어 억지로 들어온 대치는 전표통에 전표만 넣은 채 의자에 앉았다. 여옥의 손목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대치는 그 자리에서 건빵을 두고 일어선다. 억지로 끌려와 동원된 두 식민지 청년은 그렇게 서로를 의식하며, 의지하기 시작했다.
 
전선은 움직이고, 두 사람이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대치와 여옥은 이곳을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탈출의 순간, 애꿎은 상황이 두 사람을 결국 갈라놓고야 만다. 기약 없는 이별이었지만, 반드시 다시 살아남아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방법으로, 시대의 격랑 속에서 살아남았다. 대치는 자신을 구해준 이의 손에 이끌려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에 합류하고, 여옥 역시 군의관으로 끌려온 장하림과 함께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에 일조한다. 엇갈린 인연, 다른 목표에 닿은 총알…. 한반도는 해방되었으나, 광복은 그렇게 쉽게 오는 게 아니었다. 해방정국이라는 복잡하고 치열한 공간은 여전히 살아남기에 쉽지 않은 곳이었다.
 
찬탁과 반탁으로 갈라지더니, 결국 미국과 소련의 분할통치가 시작되고, 한반도는 국제사회의 이념 대결의 대리전이 벌어지는 장소가 되어 찢어진다. 간신히 어렵게 다시 만난 대치와 여옥은, 새 터전을 잡아 행복하게 살기를 소망하며 제주도로 넘어온다. 그러나 이 섬 역시 분단의 광기로부터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그렇게 격동의 세월을 온전히 받아내야 했던 두 사람은 또다시 이별하고야 만다.
 
원작과는 또 다른 매력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의 최대치, 박민성 뮤지컬 배우 박민성을 지난 3월 20일, 낮 공연이 끝난 후 서울 신도림 디큐브아트센터 로비에서 만났다.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재구성한 작품이다. 배우 박민성은 이 작품에서 남자 주인공 '최대치' 역을 맡았다. 사진은 지난 3월 7일 프레스콜 현장에서 촬영한 것이다.

▲ 남원 사람 윤여옥과 함께"저는 윤여옥이 춘향이 이야기를 하는 게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그냥 하는 얘기로 들리지가 않아요. 춘향이도 주변에서 엄청난 핍박을 받지만, 자신이 품은 걸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잖아요. 윤여옥도 그런 사람이었을 거고요. 그리고 자신을 믿는 춘향을 위해 이몽룡이 나서는 것처럼, '당신 하나만을 마음에 담겠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대치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라고 판단하지 않았을까요."ⓒ 곽우신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 기반해서, 토대로 삼아서 만들어진 뮤지컬인 건 맞지만, 관객들께서 원작을 모른다고 해서 작품 이해도가 떨어지지는 않을 거예요. 역사에 근거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우리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근‧현대사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 관객들께서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다고 봐요.
 
프레스콜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 작품으로 전작의 아성을 더 뛰어넘는 게 목표가 아니에요. 그분들과는 다르게, 그 작품과는 다른 것들을 많이 보여드리려고 했어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극장에 오시면 어마어마한 역사의 에너지, 그 시대를 살았던 민중의 에너지를 충분히 느끼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도 노래하면서 '대치가 이렇게 살았겠구나'하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는 동명 원작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각색한 작품이다. 숨 가쁘게 요동쳤던 이 땅의 근‧현대사를 장대하게 풀어낸 원작과 달리,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는 제한된 시간과 공간 위에 압축적으로 묘사한다. 무대 위에 다시 객석과 무대를 얹은 구조는 150분의 러닝 타임 동안 관객이 온전히 극에 집중할 수 있게끔 한다. 현실적인 어려움을 미니멀리즘과 상징을 활용해 돌파하려고 한 노력이 돋보인다.
 
작품 속에서 분절된 신과 신은, 마치 역사의 타임라인에서 주요한 사건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관객에게 상기시키는 것 같다. 사건과 사건 사이에 흘러간 시간 동안 주인공들이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상세하게 풀어내지는 않지만, 대신 그 빈 곳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게끔 나름의 장치들을 배치한다. 무엇보다 이 서사와 감정을 풀어내는 배우의 힘이 크다. 그렇기에 원작과 같은 이야기를 원작과 다르게 소화하며 원작을 아는 이와 모르는 이 모두 공감할 수 있게끔 완성도를 올렸다.
 
최대치 역을 맡은 배우 박민성 역시 그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주어진 상황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고민하고 선택했음에도, 결국은 비극으로밖에 치달을 수 없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관객분들이 보시기에, 최대치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대치만 봐달라는 건 아니에요. 다만, 대치가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는지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대치가 그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했을 때는, 정말 그게 가장 최선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선택들이었거든요.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그 당시 그분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어요.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사람의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작품이거든요.
 
최대치, 윤여옥, 장하림이 모두 그 당시 민중을 대변하는 인물이에요. 인간 박민성은 정치도 잘 모르고, 좌와 우도 잘 몰라요. 저도 그저 먹고사는 게 중요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소시민이에요. 저도 일개 소시민이지만, 세 사람의 기구한 운명을 보면서 느끼는 게 있어요. 한국인이라면 기본적으로 느낄 수 있는 정서이기 때문에, 많은 관객분이 같이 보고 울어주시는 거라고 생각해요. 대단한 메시지를 담아서 계몽하겠다는 작품은 아니지만, 저 같은 소시민 관객분들도 충분히 오셔서 감동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평범한 두 사람의 특별한 사랑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의 최대치, 박민성 뮤지컬 배우 박민성을 지난 3월 20일, 낮 공연이 끝난 후 서울 신도림 디큐브아트센터 로비에서 만났다.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재구성한 작품이다. 배우 박민성은 이 작품에서 남자 주인공 '최대치' 역을 맡았다. 사진은 지난 3월 7일 프레스콜 현장에서 촬영한 것이다.

▲ 내어준 건빵"건빵은 그 당시에 대치가 구할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먹을 걸 안 먹고 주는 거잖아요. 먹을 게 많은 시기도 아니고, 그걸 차곡차곡 내가 안 먹고 모았다가 '너 먹고 항상 기운차리라'는 것이죠. 몸 잘 챙기고, 어떻게든 버텨서 연명해서 살아만 있자고, 그래서 그때 줄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준 게 아닐까요."ⓒ 곽우신

 
최대치도 윤여옥도 특출난 인물은 아니다. 대단한 재능이 있거나, 큰 야망이나 목표가 있는 게 아니다. 그 시대, 그렇게 살아가던 여러 사람 중 하나였을 뿐이다. 최대치처럼 억지로 군에 징집된 이도, 윤여옥처럼 억지로 위안부로 끌려온 이도 부지기수였을 텐데, 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특별할 것 없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상황' 때문이라고 박민성은 표현했다.
 
"최대치든 윤여옥이든, 그냥 그 당시의 많은 사람 중 한 명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최대치도 되게 핍박받고, 조선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본군에게 엄청난 폭력과 무시를 견디면서 있는 거잖아요. 윤여옥이라는 이 여자가 안타깝고, 애처로웠겠죠. 두 사람이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정말 '살아만 있으라'라고, '다시 만날 수 있는 그 날까지 어떻게든 살아남자'라는 말이 여옥에게 동아줄 같은 말이었던 것 같아요.
 
처음에 전표통을 열 때는 그 안이 비어있었어요. 그런데 제 앞에. 그 앞에, 또 그 앞에 그리고 내가 나간 다음에 얼마나 많은 병사가 와서 전표를 넣고 유린했을까. 그분들을 짓밟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전표통을 딱 여는데 눈물이 났어요. 프리뷰 공연을 하고 나서 전표통을 채워달라고 부탁했어요.
 
윤여옥이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는 것도, 자해한 흔적이거든요. 아마 아무 생각이 안 들었을 거예요. 그런 여옥에게 진심 어린 눈을 하고 바라봐주는 사람이 생긴 거죠. 계속 반복되는 시간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자기 먹을 것을 갖다주며 쉬라고 하고, 자기가 있을 때만이라도 쉬라고 하는 그게 어쩌면 목숨과도 같지 않았을까요. 둘은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두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운명이, 그 상황이 그렇게 만든 거겠죠. 특수한 상황에서 만난 감정과 인연은 특별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랑을 느꼈고, 그렇게 시작이 됐겠죠."

 
그러나 그 사랑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둘이 다시 만났을 때,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풍경 역시,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념에 따라 나뉜 독립운동 진영은, 양쪽에서 모두 신망을 받는 윤홍철을 포섭하려다가 실패한다. 윤여옥의 아버지인 윤홍철은, 갈라설 수밖에 없었던 민족의 운명을 상징하듯 쓰러진다. 최대치의 총은 윤홍철을 겨냥한 게 아니었으나, 그 총알은 윤홍철의 가슴에 맞는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의 최대치, 박민성 뮤지컬 배우 박민성을 지난 3월 20일, 낮 공연이 끝난 후 서울 신도림 디큐브아트센터 로비에서 만났다.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재구성한 작품이다. 배우 박민성은 이 작품에서 남자 주인공 '최대치' 역을 맡았다. 사진은 지난 3월 7일 프레스콜 현장에서 촬영한 것이다.

▲ 작품에서 아쉬운 점"제가 잘하고 있는지 확신이 안 들 때가 있어요. 예를 들면, 듣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음악인데 그 선율에 맞춰서 부르기는 힘들거든요. 어떻게든 이걸 관객들게 전달해드리려고 연습을 많이 했는데, 배우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부분들이 남죠."ⓒ 곽우신

 
시간은 다시 흘러, 민족은 해방을 맞았다. 일제가 무너지고, 이념을 둘러싼 좌우 진영 대립은 격해지고 있었다. 최대치는 윤홍철의 죽음 이후에도 진영을 바꾸지는 않았다. 다만 여옥을 찾기 위해 다시 남으로 내려온다. 대치의 관점에서, 친일파였던 이들이 여전히 물리력을 손에 쥔 채 휘두르고, 자본가에 의해 노동자가 착취당하는 남쪽은 행복하게 살 만한 세상은 아니었다.
 
"작 중에 나오는 대사처럼, 최대치는 철저하게 공산주의 이념을 신봉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다만 일본군에서 탈출했을 때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공산주의자가 된 거죠. 북한에 따로 정부가 생긴 이후에도 북조선에 필요한 건 정치일꾼이라고 하면서 남쪽으로 가겠다고 하잖아요. 최대치는 정치나 이념을 잘 모르니, 북에 남아서 할 수 있는 게 딱히 없다고 보는 거죠.
 
독립을 위해 싸웠던 것처럼, '또 양반 밑에서 개돼지처럼 살다가 그걸 물려줄 거냐'라면서 실질적으로 그 누구도 우리를 무시하지 못하는 세상이 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믿은 거죠. 그래서 살기 좋은 세상 만들기 위해 그리고 처자식 찾으러 남으로 가는 거죠. 그러면서, 북에서 간부급으로서 어느 정도 권력을 가졌고, 이 힘으로 최소한 윤여옥과 아이 정도는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밑천이라고 생각해 쥐고 있는 거고요.
 
대치에게 사상은 크게 의미가 없어요. 내 아이와 내 여자를 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내 모든 것을 걸 뿐인 거죠. 대치가 파업을 선동하는 것도 공산주의 혁명을 하자는 게 아니라, 해방됐는데도 친일파들이 미국 뒤에 숨어서 일본놈들보다도 악질적으로 하고 있으니 분노를 하는 것이고요. 제주도를 간 것도 이념적으로 혹은 사상적으로 혁명을 하려는 게 아니잖아요. 대치의 머릿속에 있는 건 여옥과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것 하나뿐인 것 같아요."

 
하림과 함께 있는 여옥을 보고, 대치는 자신이 잘못 찾아온 줄 알았다. 너무 늦은 것이고, 놓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감옥에 붙잡혀 피흘리는 대치를 여옥은 다시 찾아온다. 너무 오래, 너무 멀리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은, 두 사람만의 신세계를 찾아 함께 떠난다. 그러나 그렇게 떠난 곳도 현대사의 아픔과 무관한 곳이 아니었다.
 
다시 이별하기까지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의 최대치, 박민성 뮤지컬 배우 박민성을 지난 3월 20일, 낮 공연이 끝난 후 서울 신도림 디큐브아트센터 로비에서 만났다.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재구성한 작품이다. 배우 박민성은 이 작품에서 남자 주인공 '최대치' 역을 맡았다. 사진은 지난 3월 7일 프레스콜 현장에서 촬영한 것이다.

▲ 최대치가 총을 든 이유"최대치가 공산주의자로서 독립운동을 하고 이후에도 사회운동을 한 건 맞아요. 정치적으로 민족주의냐 사회주의냐 정도의 차이는 분명히 있었겠죠. 하지만 그게 대단히 이념적으로 뭐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대치가 봤을 때 분명 문제가 있으니까. 세상이 바뀌지 않았으니까. 내가 내 여자와 함께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건 이 방법밖에 없다고 믿지 않았을까요."ⓒ 곽우신

 
"처음에 제주도로 가자고 했던 건, 대치의 잘못 아닌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어디로든 싸움이 없는 곳으로 가자고 했던 것이고, 조금만 더 하면 그런 세상이 올 것 같았을 테니까요. 사실은 이 땅덩어리의 어디를 가든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었겠죠."
 

잠시나마 행복했던 제주도였지만, '그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아이가 죽었고, 경찰은 사과하지 않았고, 분노한 민중에게 경찰이 택한 건 무력진압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많은 이가 호응했다. 서북청년단이 내려왔다. 피가 피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족과 이웃이 서로를 죽고 죽였다. 4‧3사건의 격랑 속에서, 최대치는 다시 총을 든다. 다시 다른 자리에서, 다른 풍경으로 마주하게 된 세 사람. 대치는 하림에게 배 두 척을 부탁한다.
 
"대치가 하림을 만나서 여옥의 소식을 전하면서, 일부러 성질을 긁거든요. 처음에는 그 대사가 정말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런데 솔직히 대치도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거든요. 하림이 대치에게 '윤여옥, 그 여자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넌 모른다'라고 할 때, 대치가 정말 몰랐을까요? 물론 100% 다 알 수는 없지만요.
 
대치가 하림을 약간 떠보는 것도 있어요. 사실은 짧게 스쳐 지나갔으니까, 극 중에서 대치는 하림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모르잖아요. 그런데 하림의 대답 한마디를 듣고 결정하는 거죠. 대치 입장에서는 그게 최선이에요. 그럴 수밖에 없는 시기였고, 그 사람한테 밖에 할 수 없는 부탁이었죠. 두 사람을 태울 배는, 대치와 여옥이 아니라 여옥과 우리 아이 대훈이를 태울 배죠. 사실 여옥을 부탁한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나 그 배를 타는 건 여옥이 아니었다. 협상은 실패로 끝나고, 대훈은 죽었다. 다시 총과 총이 맞물릴 때, 대치는 여옥에게 같이 떠나자고 한다. 처음 제주도로 올 때와는 정반대의 상황. 남고자 했던 이는 떠나자고 하고, 떠나려고 했던 이는 남겠다고 한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대치는 다시 여옥과 이별하고 만다. 하지만 이건 처음 헤어졌을 때처럼 상황이 만들어낸 이별이 아니다. 대치의 선택이었다.
 
"사실은 대치가 여옥을 놓아주는 거죠. 급작스럽게 가지 않으려고 되게 노력을 많이 하는 장면이에요. 하림이 있으니 여옥이 죽지는 않을 것 같고, 이 여자와 함께 있어도 나는 이 여자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없으니까요. 내 옆에서 여옥은 항상 이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으니 결국 놓아주는…. 사실 총성에 쫓겨서 가는 것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요. 그 찰나의 순간에 그걸 표현하는 게 어려워서 얼마만큼 전달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여옥을 연기하는 배우에게도 사실 제가 어떤 마음으로 연기하는지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도망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렇게 보일지언정 속내는 그게 아니라는 걸 말이죠."
 

그냥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시대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의 최대치, 박민성 뮤지컬 배우 박민성을 지난 3월 20일, 낮 공연이 끝난 후 서울 신도림 디큐브아트센터 로비에서 만났다.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재구성한 작품이다. 배우 박민성은 이 작품에서 남자 주인공 '최대치' 역을 맡았다. 사진은 지난 3월 7일 프레스콜 현장에서 촬영한 것이다.

▲ 제주도를 떠난 후"제주도를 떠나서 '빨치산'이 된 것도, 어떤 복수심이라든가 혁명이라든가 그런 건 아니었을 것 같아요. 아주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것 자체가 큰 동력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삶의 목표가 없어졌으니까요. 여옥과도 헤어지고, 그냥 죽지 못해서 사는 거죠. 그리고 살아왔던 대로 그저 흘러가는 대로 와보니 그 자리에 있던 게 아닐까요."ⓒ 곽우신

 
그렇게 다시 이별한 두 사람. 대치는 '빨치산'이 되어 지리산에서 투쟁을 시작한다. 이들을 향한 진압군의 포위망은 점점 좁혀져 온다. 제주도에 남겠다고 했던 여옥은, 이끌리듯 대치를 찾아 설산으로 향한다. 자신을 찾아 여기까지 온 걸 알면서도, 만나면 위험할 걸 알기에 대치는 여옥을 멀리한다. 그런 대치를 끝끝내 만나고자 산을 헤매던 여옥은, 오인 사격으로 인해 사망하고 만다. 여옥의 시신을 안고 울부짖던 대치는 자신의 삶도 그 자리에서 끝내려 한다.
 
"대치의 삶의 목표는 여옥이었어요. 학도병일 때, 마음을 열어줬을 때부터 이미 대치는 삶의 전부가 여옥이었을 것 같아요. 삶의 목표가 없던 대치에게 여옥이 그 목표가 되어준 거죠. 살아만 있으면 거기가 어디든 찾아간다고 할 만큼,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데 그 삶을 이어갈 끈이 없으니까요. 대치가 그 당시 신을 믿지는 않았겠지만, 하늘에 대고 정말 이게 뭐냐며 원망을 많이 했을 것 같아요. 그 총을 꺼낼 때까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더라고요."
 
남은 사람인 하림의 눈에 보이는 건, 언젠가 있었던 장면인지 아니면 앞으로 있기를 바라는 장면인지 알 수 없는 최대치와 윤여옥의 행복한 순간이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는 사람들이다. 그저 행복하게 살고 싶었고, 열심히 살면 그 순간이 오리라 믿었던 사람들. 그들이 마주하고 죽어간 현실과 달리, 하림의 눈에 어른거리는 건 모두가 행복한 새 세상이었다. 아직 우리가 끝내 닿지 못했던, 지금도 닿지 못한.
 
"세 사람이 겪었던 아픔, 더 나아가 우리나라가 겪었던 아픔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 사회가 잘 기억했으면 해요. 사회적으로 그런 문제가 요즘 대두되고 있잖아요. 할머니들은 한 분 한 분 돌아가시고, 자꾸 역사는 왜곡되고…. 그런 것들을 좀 제대로, 다시금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엄청나게 큰 감동을 바라는 건 아니에요. 역사를 제대로 바로잡자거나, 일본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내자는 거창한 얘기도 할 수 있지만, 그냥 잊히면 안 되는 역사인 거잖아요.
 
그 시대 국민들은 그렇게 사는 게 맞는 거였어요. 대치가 그랬듯이, 어떤 지식이 있어서 좌익이니 우익이니 한 게 아니잖아요. 그냥 먹고 살기 위해서였고, 그 시대는 다 그랬던 거죠.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걸, 지금 잣대로 막 재단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것만이라도 기억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요."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의 최대치, 박민성 뮤지컬 배우 박민성을 지난 3월 20일, 낮 공연이 끝난 후 서울 신도림 디큐브아트센터 로비에서 만났다.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재구성한 작품이다. 배우 박민성은 이 작품에서 남자 주인공 '최대치' 역을 맡았다. 사진은 지난 3월 7일 프레스콜 현장에서 촬영한 것이다.

▲ 마지막에 보이는 장면"마지막에 하림의 뒤로 펼쳐지는 장면은, 하림의 눈에만 보이는 그 장면은 '저 위에서는 다들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을까' 혹은 '이런 시대가 아니었다면, 아마 저렇게들 살지 않았을까'와 같은 것들이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에게 이념이나 정치가 뭐가 있었겠어요."ⓒ 곽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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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음악이 주는 기쁨과 쓸쓸함. 그 모든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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