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철학적으로 혹은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편집자말]

[기사 보강 : 10월 15일 오전 10시 35분]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사진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작품으로 자리잡은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이미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원나라 시대의 작가 기군상이 기원전 진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쓴 이야기 <조씨고아>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원작을 매력적으로 각색하여 관객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 간신 도안고 도안고는 영공의 신임을 독차지하기 위해, 정치적 라이벌을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 국립극단

 
도안고는 조순이 싫었다. 그 증오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무관 도안고는 문관 조순이 자신과 같이 영공의 총애를 받는 게 몹시 싫었다. 조순과 그의 일족을 모조리 척살하고 싶었던 그는 암살 계획마저 실패하자 새로운 묘책을 찾는다. 도안고는 끈기를 갖고 준비한 함정을 통해 조순을 모함하는 데 성공하고, 영공은 역적으로 몰린 조순과 그의 일가 구족을 멸한다.
 
조순의 아들 조삭은 왕의 부마였다. 그러나 조삭 역시 이 피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다만 공주는 목숨을 부지하게 됐다. 조삭은 공주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조씨고아라는 이름을 남긴다. 그리고 조씨 일가의 복수를 당부하며 운명을 받아들인다. 공주는 임신한 채로 궁에 유폐되었다.
 
후환이 두려웠던 도안고는 조씨 가문의 마지막 후손인 조씨고아마저 없애려 한다. 공주 역시 그 사실을 안다. 공주는 조씨 가문과 오랫동안 연을 맺어온 시골 의사 정영에게 막 태어난 아이를 부탁한다. 망설이는 정영 앞에서 공주는 아기를 맡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정영이 궁을 빠져나간 뒤 혹시나 자신이 그 사실을 누설할 것을 막기 위해 그리고 정영에게 자신의 목숨 값을 빚으로 얹기 위해.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사진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작품으로 자리잡은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이미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원나라 시대의 작가 기군상이 기원전 진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쓴 이야기 <조씨고아>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원작을 매력적으로 각색하여 관객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 정영, 한궐을 만나다 공주의 부탁으로 조씨고아를 몰래 숨겨 성을 빠져나오던 정영은 한궐 장군으로부터 추궁을 받는다. 진실을 알게 된 한궐은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기 목을 베어 침묵하기로 결심한다. ⓒ 국립극단

 
정영은 궁을 빠져 나온다. 궁을 지키던 장군 한궐은 정영의 탈출을 눈감아주며 스스로 목을 쳐서 입을 막는다. 조씨고아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도안고는 전국의 갓난아이를 끌고와 모두 죽이려 한다. 정영은 자신의 아이를 조씨고아와 바꿔치기한 후, 자신의 아이를 조씨고아라 속이고 도안고에게 바칠 계획을 세운다. 공주와 한궐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자칫 수없이 죽어나갈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정영은 벼슬에서 물러난 공손저구를 찾아가 상의한다. 정영은 자신이 조씨고아를 빼돌린 사실을 도안고에게 고해바치라고 공손저구에게 제안한다. 하지만 공손저구는 자기가 정영 대신 죄를 뒤집어쓰겠다며, 늙은 자신보다 젊은 정영이 살아남은 조씨고아를 키우기 더 적합할 것이라 말한다. 조씨고아는 공손저구가 탈출시킨 것이며, 이를 정영이 도안고에게 밀고하는 그림이 완성된다. 정영의 아내는 미쳤다고, 무슨 짓이냐고 울부짖는다.
 
도안고는 공손저구를 고문한 뒤, 공손저구의 자택에 숨겨져 있던 정영의 아이를 조씨고아라고 믿고 바닥에 세 번 내리쳐 죽인다. 공손저구는 세 번 스스로 머리를 찧어 자결함으로서 선비의 도를 지킨다. 도안고는 정영을 크게 칭찬하고, 조씨고아를 수양아들 삼아 직접 가르치겠다고 나선다.
 
정영의 마음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이다. 정영의 아내는 죽은 아이의 묘 앞에서 역시 목숨을 버린다. 조씨고아 한 명을 살리기 위해 대체 몇 명의 사람이 자신의 피를 바쳤는가. 정영은 울부짖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있는 건 없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도안고의 손에 의해 길러진 '복수의 씨앗'이 열매를 맺을 때가 됐다. 장성한 조씨고아에게, 정영은 조씨고아 출생의 비밀과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준다. 믿지 못하는 조씨고아에게 자신의 팔까지 잘라내며 다그친다. 조씨고아는, 멸족한 가문을 포함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위해 도안고의 목을 칠 것인가.
 
대한민국 연극계의 금자탑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사진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작품으로 자리잡은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이미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원나라 시대의 작가 기군상이 기원전 진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쓴 이야기 <조씨고아>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원작을 매력적으로 각색하여 관객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 공손저구에게 칼을 들이민 도안고 정영의 밀고를 듣고 도안고는 공손저구가 조씨고아를 숨긴 줄 알고 찾아온다. 그러나 정영의 밀고는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고, 실제로 공손저구 자택에 있던건 조씨고아가 아니라 정영의 아이였다. 정영은 자신의 아이를 희생시키고 조씨고아를 구하기로 한다. ⓒ 국립극단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중국 고전 <조씨고아>를 각색한 국립극단의 주요 레퍼토리 작품이다. <조씨고아>는 중국 원나라 시대 작가 기군상이 쓴 잡극으로, 기원전 진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조씨 일가가 겪은 일을 그려냈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대한민국 연극계가 쌓아올린 금자탑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다. 고선웅 연출이 앞으로 이 작품만큼 훌륭한 작품을 또 연출해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국립극단의 뚝심과 배우들의 열연이 빚어내는 아우라는 관객을 압도하고 남는다. 비장미와 비극미로 점철된 이 작품은, 중간중간의 골계미를 잊지 않으며 적당한 숨구멍과 함께 빠르게 관객의 심장을 관통한다. 장면 전환은 더딤이 없고, 무대의 여백은 동양화가 지향하는 여백의 미를 잘 재현했다.
 
무엇보다 극적 재미와 메시지를 고루 갖췄다. 빼어난 작품성을 지녔으면서도 스스로 예술이라 젠체하며 고압적이거나 불친절하게 관객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대중예술로서의 현대 연극이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주저없이 꼽을 수 있다. 흡인력 있게 관객을 무대로 빨아들이는 힘이 압권인데, 그 힘을 만들어내기 위해 무대 위 모든 구성요소가 완벽한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2015년 초연한 해에 동아연극상 대상, 대한민국연극대상 대상, 올해의 연극 베스트3, 올해의 공연 베스트7를 모두 휩쓸었다. 입소문을 탄 이 작품은 올해 삼연에서도 관객과 평단의 호평 속에 매진 행렬을 이어갔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사진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작품으로 자리잡은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이미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원나라 시대의 작가 기군상이 기원전 진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쓴 이야기 <조씨고아>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원작을 매력적으로 각색하여 관객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 사실을 모르는 정영의 아내 정영의 아내는 아무것도 몰랐다. 왜 자신의 집에는 처음 보는 아이가 누워 있고, 자신의 아이는 정영의 약초바구니 안에 들어가 있는지.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정영에게 무슨 짓이냐고 발악한다. 그리고 죄책감과 원망에 몸부림치다가 아이의 묘 앞에서 자살한다. ⓒ 국립극단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구성하는 개별 요소를 하나하나 뜯어보며 상찬하다 보면 끝이 없을 테다. 그러나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대단한 작품이라는 걸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였던 고선웅 연출을 블랙리스트에서 빼준 작품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한 연극 <푸르른 날에> 탓에 고선웅 연출은 당시 정권으로부터 '찍힌' 연출 중 하나였다.
 
2015년 초연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보고 너무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고선웅 연출의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는 탓에 이 작품을 지원할 수 없을 것을 우려하여, 전국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그를 블랙리스트에 제외하도록 청와대와 국정원에 건의했다고 한다. 실제로 고선웅 연출의 이름은 블랙리스트에서 빠졌고,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별탈 없이 공연될 수 있었다. 해당 차관은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으나 몇 달 후 옷을 벗었다고 한다.
 
누가 알았을까.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지어낼 거대한 아이러니가 바로 여기에서 탄생할 줄은.
 
블랙리스트 연출, 블랙리스트 장관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사진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작품으로 자리잡은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이미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원나라 시대의 작가 기군상이 기원전 진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쓴 이야기 <조씨고아>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원작을 매력적으로 각색하여 관객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 이깟 게 뭐라고 조순이 죽었다. 조삭이 죽었고, 공주가 죽었다. 한궐이 죽었고, 공선저구가 죽었다. 자신의 아이가 죽었고, 아내마저 죽었다. 조씨고아를 살리기 위해서. 정영이 결국 구해낸 조씨고아이지만, 정영은 분노와 억울함에 치를 떤다. 그러나 그 역시 차마, 조씨고아를 내치지 못한다. 그리고 이 '복수의 씨앗'을 완성시키기로 한다. ⓒ 국립극단

 
고선웅 연출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올랐었다는 것,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를 본 문체부 차관이 그를 빼달라고 건의한 것, 실제로 그의 이름이 빠진 것. 이 모든 사실은 도종환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16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문체부 내부 문건을 폭로하며 밝혀낸 사실이다.
 
도종환은 블랙리스트의 상징이다. '담쟁이' 시인인 그 자신이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예술인 중 한 명이었으며,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폭로하여 부패한 정권을 몰락케 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이후 촛불 혁명으로 정권이 바뀌고, 도종환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자리에 오른다. 여기에는 문화예술계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이 있었다. 박근혜 정권의 부당한 문화예술계 탄압에 맞선 도종환에게, 당시 문화예술계가 그에게 거는 기대는 매우 컸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바람에 맞추어 공연계를 포함한 문화예술계 적폐가 일소되기를 바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9월 13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자 68명에 대한 이행계획 발표' 보도자료를 냈다. 문체부는 검토대상 68명(수사의뢰 권고 24명, 징계 권고 44명) 중 "수사의뢰 권고자 24명에 포함된 문체부 소속 12명 중 4명을 검찰에 수사의뢰"했다. 이미 시민단체로부터 고발된 인원을 포함하면 문체부 소속 직원 중 검찰에 수사의뢰가 들어간 직원은 모두 5명이다.
 
이어 "징계 권고를 받은 문체부 직원 44명 중 과장급 이상 22명은 감사원의 감사 결과에 따른 기처분(주의 4명), 퇴직(5명), 징계시효 경과 등의 사유(13명)로 징계처분 대상이 아니었다"라며 "기처분자와 퇴직자를 제외한 13명 중에서 블랙리스트와 관련하여 감사원으로부터 처분을 받지 않은 과장급 이상 10명에 대해 문체부는 '주의' 처분"을 내렸다고 덧붙였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사진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작품으로 자리잡은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이미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원나라 시대의 작가 기군상이 기원전 진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쓴 이야기 <조씨고아>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원작을 매력적으로 각색하여 관객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 아이의 무덤 정영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있다. 무엇을 희생시켰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먼저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죽은 아이의 무덤 앞에서, 복수가 완성되기를 그리고 자신도 세상을 떠날 수 있을 때를 기다리며 각오를 다진다. ⓒ 국립극단

 
또한 "중하위직 실무자 22명(과장 이상의 보직이 없는 사무관급 이하)은 상급자의 지시에 따라야 했던 점을 고려하여 징계 처분은 하지 않되 관련 업무에서 배제"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결과적으로 진상조사위의 권고 이후 문체부가 실제로 행한 징계는 일부 대상자에 한한 '주의'가 전부였다.
 
문화예술인들의 기대는 실망이 되었고, 실망을 넘어 분노로 번지고 있다. 문화예술인들이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회 앞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청사 앞에서, 역 앞에서 피켓을 들고 소리 높여 도종환 장관을 질타하고 나섰다. 이들은 블랙리스트 관련 문화체육관광부의 행정 조치 "'징계 0' 셀프면책 선언"이라면서 "블랙리스트 관련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들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문체부는 추가 보도자료를 통해 "이미 처분을 받았거나 퇴직·징계 시효가 지났다", "주의 조치도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다"라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지난 10일 국정감사에 출석한 도종환 장관에게 최경환 민주평화당 의원은 "문체부가 '블랙리스트 그만두자', '조직의 피로감이 많이 쌓였다'라며 적절히 타협하고 있다고 본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적폐청산이 다 끝난 것 같다"라며 "시민단체나 문화예술계의 상당한 반발이 있는데,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시계를 (문체부가) 멈춰버렸다"라고 도 장관을 질타했다. 도종환 장관은 "아직 (블랙리스트) 백서도 발간되지 않았고 다 끝나지 않았다"라며 "지금도 전직 장관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라고 해명했다. 최 의원은 "재판이 문제가 아니라 정부의 의지가 문제"라고 꼬집었다.
 
필요한 복수조차 하지 않는다면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사진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작품으로 자리잡은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이미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원나라 시대의 작가 기군상이 기원전 진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쓴 이야기 <조씨고아>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원작을 매력적으로 각색하여 관객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 조씨고아에게 설명하는 정영 장성한 조씨고아에게 정영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처음에는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인 줄 알고 의분에 휩싸였던 조씨고아는, 이 그림 속 살아남은 아이가 자신임을 차마 인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곧, 격정을 감추지 못하고 복수를 다짐한다. ⓒ 국립극단

 
근대국가의 전제 중 하나는 사적 복수의 금지이다. 국가는 형법을 통해 유일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정당한 주체이다. 사회는 성문화된 법에 따라 공적 복수를 통해서 조율된다. 재사회화도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적절한 형벌을 통해 국민의 법 감정을 해소하는 일 역시 국가의 의무 중 하나이다. 형벌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공적 복수 제도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무너지고, 공적 복수를 믿지 못하게 된 이들은 사적 복수에 천착하게 된다. 공권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사회 전체가 혼란스러워진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에서 '복수의 씨앗'은 조씨고아 개인을 가리킨다. 진실을 알게 된 늙은 영공이 도안고의 구족을 모두 멸하기로 하면서, 또 다른 '복수의 씨앗' 탄생할지 모름을 암시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증오와 복수의 연쇄에 대한 경고를 지닌 작품이다. 그러나 동시에, 반드시 있어야 할 기본적인 복수, 정당하고 필요한 복수를 역설하기도 한다. 도안고는 주지의 사실 없이 처벌을 받아야 한다. 조씨고아는 자신의 칼로 도안고의 목을 베지 않는다. 그를 제압하여 묶은 뒤 공적 심판을 받도록 한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사진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작품으로 자리잡은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이미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원나라 시대의 작가 기군상이 기원전 진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쓴 이야기 <조씨고아>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원작을 매력적으로 각색하여 관객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 복수를 결심하는 조씨고아 도안고를 의붓 아버지로 믿고 따랐던 조씨고아. 그러나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는 도안고를 향한 복수를 자신이 완성하고자 나선다. 만약 정영이 자신의 팔을 잘라보이며 결기를 보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조씨고아가 끝까지 도안고에게 복수하지 않으려고 했다면 어땠을까. 그 이야기에서 관객이 감동을 받을 수 있었을까. ⓒ 국립극단

 
만약 조씨고아가 도안고를 그냥 용서했다면 어땠을까?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나를 단절시키고 도안고에게 아무런 조처가 취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를 위대한 인류애나 포용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조순을 포함한 조씨일가의 억울함, 그 과정에서 희생해야 했던 무수한 목숨은 누가 어떻게 보상할 수 있을까? 작품에서 정영은 도안고가 죽은 뒤 성취감과 허무함, 회한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운다. 만약 도안고가 처벌받지 않았다면, 자신의 아내와 자식, 본인의 팔까지 버려갔던 정영의 마음은 누가 위로할 수 있는가.
 
도종환 장관은, 블랙리스트라는 피바람에서 살아남아 장관 자리에 오른 또 한 명의 조씨고아이다. 그런데 최근 도종환 장관 그리고 그의 문체부가 보여주는 행태는 조씨고아가 도안고를 향한 복수를 포기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이다. 함께 피 흘리며 문화로, 예술로 투쟁했던 문화예술인들의 가슴이 무너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자 68명에 대한 이행계획 발표'가 있은 후 진상조사위 전직 민간위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그를 비판했고, 문화예술인들이 다시 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도종환 장관을 2년 전 국정감사 스타로 만들어줬던 게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였고, 그 블랙리스트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촌극이었는지를 잘 보여준 게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둘러싼 일화이다. 그 블랙리스트 덕분에 장관이 되었다고 무방한 도종환은, 과연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봤을까. 봤다면 무엇을 느꼈을까. 도안고의 구족을 멸하라고 문화예술인들이 거리로 나온 게 아니다. 최소한 도안고는, 도안고의 수족이 되어 그 범죄에 가담했던 이들은 처벌받아야 하지 않느냐고 외치는 거다. 그들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주의'만으로 해소될 일이었으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테다.
 
도종환 장관은 14일 오후, 블랙리스트 사태 진상조사에 참여했던 민간위원들과 4시간 넘게 비공개 만남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민간위원들은 ▲ 이행계획 전면 재검토 ▲ 이를 위해 민간이 참여한 재검토위원회(가칭) 구성 ▲ 대국민 토론회 개최 등 3가지 사안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혹시 도 장관께서 문화예술인들이 왜 자신을 비난하는지 납득이 잘 안 되신다면, 대전과 경상남도 진주에서 지방공연이 예정되어 있으니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한 번 감상하기를 추천한다. 질타를 하는 입장에서 질타를 받는 입장으로 2년 만에 바뀐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보다 왜 그들이 자신을 질타하는지를 들어주기를 바란다. 비통하게 눈물 흘리며 죽어간 등장인물들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다면 말이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사진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작품으로 자리잡은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이미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원나라 시대의 작가 기군상이 기원전 진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쓴 이야기 <조씨고아>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원작을 매력적으로 각색하여 관객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 정영의 마지막 복수를 완성한 정영. 그리고 그의 눈에 보이는 사람들. 그들은 정영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이때 정영의 가슴을 지배하고 있는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덩어리였을까. 그 응어리는 누가 풀어줄 수 있는 것이었나. ⓒ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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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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