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철학적으로 혹은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편집자말]

[기사 보강 : 10월 15일 오전 10시 35분]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사진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작품으로 자리잡은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이미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원나라 시대의 작가 기군상이 기원전 진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쓴 이야기 <조씨고아>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원작을 매력적으로 각색하여 관객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 간신 도안고 도안고는 영공의 신임을 독차지하기 위해, 정치적 라이벌을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 국립극단

 
도안고는 조순이 싫었다. 그 증오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무관 도안고는 문관 조순이 자신과 같이 영공의 총애를 받는 게 몹시 싫었다. 조순과 그의 일족을 모조리 척살하고 싶었던 그는 암살 계획마저 실패하자 새로운 묘책을 찾는다. 도안고는 끈기를 갖고 준비한 함정을 통해 조순을 모함하는 데 성공하고, 영공은 역적으로 몰린 조순과 그의 일가 구족을 멸한다.
 
조순의 아들 조삭은 왕의 부마였다. 그러나 조삭 역시 이 피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다만 공주는 목숨을 부지하게 됐다. 조삭은 공주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조씨고아라는 이름을 남긴다. 그리고 조씨 일가의 복수를 당부하며 운명을 받아들인다. 공주는 임신한 채로 궁에 유폐되었다.
 
후환이 두려웠던 도안고는 조씨 가문의 마지막 후손인 조씨고아마저 없애려 한다. 공주 역시 그 사실을 안다. 공주는 조씨 가문과 오랫동안 연을 맺어온 시골 의사 정영에게 막 태어난 아이를 부탁한다. 망설이는 정영 앞에서 공주는 아기를 맡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정영이 궁을 빠져나간 뒤 혹시나 자신이 그 사실을 누설할 것을 막기 위해 그리고 정영에게 자신의 목숨 값을 빚으로 얹기 위해.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사진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작품으로 자리잡은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이미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원나라 시대의 작가 기군상이 기원전 진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쓴 이야기 <조씨고아>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원작을 매력적으로 각색하여 관객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 정영, 한궐을 만나다 공주의 부탁으로 조씨고아를 몰래 숨겨 성을 빠져나오던 정영은 한궐 장군으로부터 추궁을 받는다. 진실을 알게 된 한궐은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기 목을 베어 침묵하기로 결심한다. ⓒ 국립극단

 
정영은 궁을 빠져 나온다. 궁을 지키던 장군 한궐은 정영의 탈출을 눈감아주며 스스로 목을 쳐서 입을 막는다. 조씨고아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도안고는 전국의 갓난아이를 끌고와 모두 죽이려 한다. 정영은 자신의 아이를 조씨고아와 바꿔치기한 후, 자신의 아이를 조씨고아라 속이고 도안고에게 바칠 계획을 세운다. 공주와 한궐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자칫 수없이 죽어나갈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정영은 벼슬에서 물러난 공손저구를 찾아가 상의한다. 정영은 자신이 조씨고아를 빼돌린 사실을 도안고에게 고해바치라고 공손저구에게 제안한다. 하지만 공손저구는 자기가 정영 대신 죄를 뒤집어쓰겠다며, 늙은 자신보다 젊은 정영이 살아남은 조씨고아를 키우기 더 적합할 것이라 말한다. 조씨고아는 공손저구가 탈출시킨 것이며, 이를 정영이 도안고에게 밀고하는 그림이 완성된다. 정영의 아내는 미쳤다고, 무슨 짓이냐고 울부짖는다.
 
도안고는 공손저구를 고문한 뒤, 공손저구의 자택에 숨겨져 있던 정영의 아이를 조씨고아라고 믿고 바닥에 세 번 내리쳐 죽인다. 공손저구는 세 번 스스로 머리를 찧어 자결함으로서 선비의 도를 지킨다. 도안고는 정영을 크게 칭찬하고, 조씨고아를 수양아들 삼아 직접 가르치겠다고 나선다.
 
정영의 마음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이다. 정영의 아내는 죽은 아이의 묘 앞에서 역시 목숨을 버린다. 조씨고아 한 명을 살리기 위해 대체 몇 명의 사람이 자신의 피를 바쳤는가. 정영은 울부짖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있는 건 없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도안고의 손에 의해 길러진 '복수의 씨앗'이 열매를 맺을 때가 됐다. 장성한 조씨고아에게, 정영은 조씨고아 출생의 비밀과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준다. 믿지 못하는 조씨고아에게 자신의 팔까지 잘라내며 다그친다. 조씨고아는, 멸족한 가문을 포함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위해 도안고의 목을 칠 것인가.
 
대한민국 연극계의 금자탑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사진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작품으로 자리잡은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이미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원나라 시대의 작가 기군상이 기원전 진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쓴 이야기 <조씨고아>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원작을 매력적으로 각색하여 관객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 공손저구에게 칼을 들이민 도안고 정영의 밀고를 듣고 도안고는 공손저구가 조씨고아를 숨긴 줄 알고 찾아온다. 그러나 정영의 밀고는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고, 실제로 공손저구 자택에 있던건 조씨고아가 아니라 정영의 아이였다. 정영은 자신의 아이를 희생시키고 조씨고아를 구하기로 한다. ⓒ 국립극단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중국 고전 <조씨고아>를 각색한 국립극단의 주요 레퍼토리 작품이다. <조씨고아>는 중국 원나라 시대 작가 기군상이 쓴 잡극으로, 기원전 진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조씨 일가가 겪은 일을 그려냈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대한민국 연극계가 쌓아올린 금자탑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다. 고선웅 연출이 앞으로 이 작품만큼 훌륭한 작품을 또 연출해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국립극단의 뚝심과 배우들의 열연이 빚어내는 아우라는 관객을 압도하고 남는다. 비장미와 비극미로 점철된 이 작품은, 중간중간의 골계미를 잊지 않으며 적당한 숨구멍과 함께 빠르게 관객의 심장을 관통한다. 장면 전환은 더딤이 없고, 무대의 여백은 동양화가 지향하는 여백의 미를 잘 재현했다.
 
무엇보다 극적 재미와 메시지를 고루 갖췄다. 빼어난 작품성을 지녔으면서도 스스로 예술이라 젠체하며 고압적이거나 불친절하게 관객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대중예술로서의 현대 연극이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주저없이 꼽을 수 있다. 흡인력 있게 관객을 무대로 빨아들이는 힘이 압권인데, 그 힘을 만들어내기 위해 무대 위 모든 구성요소가 완벽한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2015년 초연한 해에 동아연극상 대상, 대한민국연극대상 대상, 올해의 연극 베스트3, 올해의 공연 베스트7를 모두 휩쓸었다. 입소문을 탄 이 작품은 올해 삼연에서도 관객과 평단의 호평 속에 매진 행렬을 이어갔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사진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작품으로 자리잡은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이미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원나라 시대의 작가 기군상이 기원전 진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쓴 이야기 <조씨고아>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원작을 매력적으로 각색하여 관객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 사실을 모르는 정영의 아내 정영의 아내는 아무것도 몰랐다. 왜 자신의 집에는 처음 보는 아이가 누워 있고, 자신의 아이는 정영의 약초바구니 안에 들어가 있는지.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정영에게 무슨 짓이냐고 발악한다. 그리고 죄책감과 원망에 몸부림치다가 아이의 묘 앞에서 자살한다. ⓒ 국립극단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구성하는 개별 요소를 하나하나 뜯어보며 상찬하다 보면 끝이 없을 테다. 그러나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대단한 작품이라는 걸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였던 고선웅 연출을 블랙리스트에서 빼준 작품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한 연극 <푸르른 날에> 탓에 고선웅 연출은 당시 정권으로부터 '찍힌' 연출 중 하나였다.
 
2015년 초연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보고 너무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고선웅 연출의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는 탓에 이 작품을 지원할 수 없을 것을 우려하여, 전국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그를 블랙리스트에 제외하도록 청와대와 국정원에 건의했다고 한다. 실제로 고선웅 연출의 이름은 블랙리스트에서 빠졌고,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별탈 없이 공연될 수 있었다. 해당 차관은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으나 몇 달 후 옷을 벗었다고 한다.
 
누가 알았을까.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지어낼 거대한 아이러니가 바로 여기에서 탄생할 줄은.
 
블랙리스트 연출, 블랙리스트 장관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사진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작품으로 자리잡은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이미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원나라 시대의 작가 기군상이 기원전 진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쓴 이야기 <조씨고아>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원작을 매력적으로 각색하여 관객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 이깟 게 뭐라고 조순이 죽었다. 조삭이 죽었고, 공주가 죽었다. 한궐이 죽었고, 공선저구가 죽었다. 자신의 아이가 죽었고, 아내마저 죽었다. 조씨고아를 살리기 위해서. 정영이 결국 구해낸 조씨고아이지만, 정영은 분노와 억울함에 치를 떤다. 그러나 그 역시 차마, 조씨고아를 내치지 못한다. 그리고 이 '복수의 씨앗'을 완성시키기로 한다. ⓒ 국립극단

 
고선웅 연출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올랐었다는 것,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를 본 문체부 차관이 그를 빼달라고 건의한 것, 실제로 그의 이름이 빠진 것. 이 모든 사실은 도종환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16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문체부 내부 문건을 폭로하며 밝혀낸 사실이다.
 
도종환은 블랙리스트의 상징이다. '담쟁이' 시인인 그 자신이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예술인 중 한 명이었으며,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폭로하여 부패한 정권을 몰락케 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이후 촛불 혁명으로 정권이 바뀌고, 도종환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자리에 오른다. 여기에는 문화예술계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이 있었다. 박근혜 정권의 부당한 문화예술계 탄압에 맞선 도종환에게, 당시 문화예술계가 그에게 거는 기대는 매우 컸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바람에 맞추어 공연계를 포함한 문화예술계 적폐가 일소되기를 바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9월 13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자 68명에 대한 이행계획 발표' 보도자료를 냈다. 문체부는 검토대상 68명(수사의뢰 권고 24명, 징계 권고 44명) 중 "수사의뢰 권고자 24명에 포함된 문체부 소속 12명 중 4명을 검찰에 수사의뢰"했다. 이미 시민단체로부터 고발된 인원을 포함하면 문체부 소속 직원 중 검찰에 수사의뢰가 들어간 직원은 모두 5명이다.
 
이어 "징계 권고를 받은 문체부 직원 44명 중 과장급 이상 22명은 감사원의 감사 결과에 따른 기처분(주의 4명), 퇴직(5명), 징계시효 경과 등의 사유(13명)로 징계처분 대상이 아니었다"라며 "기처분자와 퇴직자를 제외한 13명 중에서 블랙리스트와 관련하여 감사원으로부터 처분을 받지 않은 과장급 이상 10명에 대해 문체부는 '주의' 처분"을 내렸다고 덧붙였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사진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작품으로 자리잡은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이미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원나라 시대의 작가 기군상이 기원전 진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쓴 이야기 <조씨고아>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원작을 매력적으로 각색하여 관객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 아이의 무덤 정영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있다. 무엇을 희생시켰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먼저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죽은 아이의 무덤 앞에서, 복수가 완성되기를 그리고 자신도 세상을 떠날 수 있을 때를 기다리며 각오를 다진다. ⓒ 국립극단

 
또한 "중하위직 실무자 22명(과장 이상의 보직이 없는 사무관급 이하)은 상급자의 지시에 따라야 했던 점을 고려하여 징계 처분은 하지 않되 관련 업무에서 배제"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결과적으로 진상조사위의 권고 이후 문체부가 실제로 행한 징계는 일부 대상자에 한한 '주의'가 전부였다.
 
문화예술인들의 기대는 실망이 되었고, 실망을 넘어 분노로 번지고 있다. 문화예술인들이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회 앞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청사 앞에서, 역 앞에서 피켓을 들고 소리 높여 도종환 장관을 질타하고 나섰다. 이들은 블랙리스트 관련 문화체육관광부의 행정 조치 "'징계 0' 셀프면책 선언"이라면서 "블랙리스트 관련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들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문체부는 추가 보도자료를 통해 "이미 처분을 받았거나 퇴직·징계 시효가 지났다", "주의 조치도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다"라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지난 10일 국정감사에 출석한 도종환 장관에게 최경환 민주평화당 의원은 "문체부가 '블랙리스트 그만두자', '조직의 피로감이 많이 쌓였다'라며 적절히 타협하고 있다고 본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적폐청산이 다 끝난 것 같다"라며 "시민단체나 문화예술계의 상당한 반발이 있는데,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시계를 (문체부가) 멈춰버렸다"라고 도 장관을 질타했다. 도종환 장관은 "아직 (블랙리스트) 백서도 발간되지 않았고 다 끝나지 않았다"라며 "지금도 전직 장관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라고 해명했다. 최 의원은 "재판이 문제가 아니라 정부의 의지가 문제"라고 꼬집었다.
 
필요한 복수조차 하지 않는다면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사진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작품으로 자리잡은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이미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원나라 시대의 작가 기군상이 기원전 진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쓴 이야기 <조씨고아>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원작을 매력적으로 각색하여 관객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 조씨고아에게 설명하는 정영 장성한 조씨고아에게 정영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처음에는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인 줄 알고 의분에 휩싸였던 조씨고아는, 이 그림 속 살아남은 아이가 자신임을 차마 인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곧, 격정을 감추지 못하고 복수를 다짐한다. ⓒ 국립극단

 
근대국가의 전제 중 하나는 사적 복수의 금지이다. 국가는 형법을 통해 유일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정당한 주체이다. 사회는 성문화된 법에 따라 공적 복수를 통해서 조율된다. 재사회화도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적절한 형벌을 통해 국민의 법 감정을 해소하는 일 역시 국가의 의무 중 하나이다. 형벌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공적 복수 제도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무너지고, 공적 복수를 믿지 못하게 된 이들은 사적 복수에 천착하게 된다. 공권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사회 전체가 혼란스러워진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에서 '복수의 씨앗'은 조씨고아 개인을 가리킨다. 진실을 알게 된 늙은 영공이 도안고의 구족을 모두 멸하기로 하면서, 또 다른 '복수의 씨앗' 탄생할지 모름을 암시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증오와 복수의 연쇄에 대한 경고를 지닌 작품이다. 그러나 동시에, 반드시 있어야 할 기본적인 복수, 정당하고 필요한 복수를 역설하기도 한다. 도안고는 주지의 사실 없이 처벌을 받아야 한다. 조씨고아는 자신의 칼로 도안고의 목을 베지 않는다. 그를 제압하여 묶은 뒤 공적 심판을 받도록 한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사진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작품으로 자리잡은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이미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원나라 시대의 작가 기군상이 기원전 진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쓴 이야기 <조씨고아>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원작을 매력적으로 각색하여 관객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 복수를 결심하는 조씨고아 도안고를 의붓 아버지로 믿고 따랐던 조씨고아. 그러나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는 도안고를 향한 복수를 자신이 완성하고자 나선다. 만약 정영이 자신의 팔을 잘라보이며 결기를 보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조씨고아가 끝까지 도안고에게 복수하지 않으려고 했다면 어땠을까. 그 이야기에서 관객이 감동을 받을 수 있었을까. ⓒ 국립극단

 
만약 조씨고아가 도안고를 그냥 용서했다면 어땠을까?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나를 단절시키고 도안고에게 아무런 조처가 취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를 위대한 인류애나 포용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조순을 포함한 조씨일가의 억울함, 그 과정에서 희생해야 했던 무수한 목숨은 누가 어떻게 보상할 수 있을까? 작품에서 정영은 도안고가 죽은 뒤 성취감과 허무함, 회한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운다. 만약 도안고가 처벌받지 않았다면, 자신의 아내와 자식, 본인의 팔까지 버려갔던 정영의 마음은 누가 위로할 수 있는가.
 
도종환 장관은, 블랙리스트라는 피바람에서 살아남아 장관 자리에 오른 또 한 명의 조씨고아이다. 그런데 최근 도종환 장관 그리고 그의 문체부가 보여주는 행태는 조씨고아가 도안고를 향한 복수를 포기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이다. 함께 피 흘리며 문화로, 예술로 투쟁했던 문화예술인들의 가슴이 무너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자 68명에 대한 이행계획 발표'가 있은 후 진상조사위 전직 민간위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그를 비판했고, 문화예술인들이 다시 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도종환 장관을 2년 전 국정감사 스타로 만들어줬던 게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였고, 그 블랙리스트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촌극이었는지를 잘 보여준 게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둘러싼 일화이다. 그 블랙리스트 덕분에 장관이 되었다고 무방한 도종환은, 과연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봤을까. 봤다면 무엇을 느꼈을까. 도안고의 구족을 멸하라고 문화예술인들이 거리로 나온 게 아니다. 최소한 도안고는, 도안고의 수족이 되어 그 범죄에 가담했던 이들은 처벌받아야 하지 않느냐고 외치는 거다. 그들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주의'만으로 해소될 일이었으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테다.
 
도종환 장관은 14일 오후, 블랙리스트 사태 진상조사에 참여했던 민간위원들과 4시간 넘게 비공개 만남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민간위원들은 ▲ 이행계획 전면 재검토 ▲ 이를 위해 민간이 참여한 재검토위원회(가칭) 구성 ▲ 대국민 토론회 개최 등 3가지 사안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혹시 도 장관께서 문화예술인들이 왜 자신을 비난하는지 납득이 잘 안 되신다면, 대전과 경상남도 진주에서 지방공연이 예정되어 있으니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한 번 감상하기를 추천한다. 질타를 하는 입장에서 질타를 받는 입장으로 2년 만에 바뀐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보다 왜 그들이 자신을 질타하는지를 들어주기를 바란다. 비통하게 눈물 흘리며 죽어간 등장인물들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다면 말이다.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사진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작품으로 자리잡은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이미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원나라 시대의 작가 기군상이 기원전 진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쓴 이야기 <조씨고아>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원작을 매력적으로 각색하여 관객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다.

▲ 정영의 마지막 복수를 완성한 정영. 그리고 그의 눈에 보이는 사람들. 그들은 정영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이때 정영의 가슴을 지배하고 있는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덩어리였을까. 그 응어리는 누가 풀어줄 수 있는 것이었나. ⓒ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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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뮤지컬 '웃는 남자' 뒤에서 벌어진 일...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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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시대였다. 식민지 개척이 시작되면서 막대한 부가 쏟아지던 영국. 부를 독점한 귀족들은 자신들의 부유함을 과시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희소한 물건을 넘어, 이국적 동‧식물로도 만족하지 못한 그들은 사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기형의 아이들이 전시용으로, 애완용으로 거래되었다. 그러나 선천적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는 아이들의 '공급'은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수요가 있는 곳에 시장이 생기는 법. 이제 전문적으로 기형의 아이들을 만들어 내는 집단이 출연했다. 콤프라치코스. 아이들을 납치해 뼈를 뒤틀고 입을 찢은 뒤 팔아넘기는 자들. 어린 그윈플렌 역시 콤프라치코스에게 붙잡혀 강제로 입이 찢어졌다. 그리고 버려졌다. 숲 속에서 추위에 떨던 그윈플렌은 동사한 한 여인의 품에서 죽어가고 있는 어린 아이를 발견한다. 그윈플렌은 그 여자 아이를 품에 꼭 안은 채 방황하다가 떠돌이 약장수인 우르수스의 마차를 마주한다. 세상의 끔찍한 섭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그렇기에 그 섭리를 지극히 혐오하면서도 가장 충실히 따르는 우르수스. 그러나 입이 찢어진 남자아이와 눈이 먼 여자아이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자기 품으로 거둔다. 우르수스의 보살핌 아래에서 장성한 그윈플렌과 데아는 길거리에서 공연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유복한 건 아니었지만, 그윈플렌과 데아는 그래도 함께 노래하고 함께 꿈꿀 수 있었다. 이 쇼의 주인공은 찢어진 입 덕분에 '웃는 남자'로 불리는 그윈플렌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이 독특한 광대의 얼굴을 구경거리 삼아 몰려들었다. 앤 여왕의 이복동생 조시아나 공작은 그윈플렌을 보자마자 이 기괴한 외양의 남자에게 매료된다. 그윈플렌의 혈통에 대해 알게 되기 전까지는… 관객의 기대를 충족하다 EMK뮤지컬컴퍼니(아래 EMK)의 신작 <웃는 남자>는 '역작'이라 불릴 정도로 공을 들인 티가 많이 나는 작품이다. EMK는 라이선스 작업을 통해 체득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EMK산(産) 대형 뮤지컬을 성공적으로 올리기 위해 무던히도 애써왔다. <웃는 남자>는 그 우여곡절의 역사에 기념비가 될 만한 성과이다. 2013년부터 5년 동안 175억 원의 제작비를 쏟았다는 <웃는 남자>는 그 돈을 쓴 값을 톡톡히 보여준다. 우선 외형적으로 딱히 흠결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체에 가깝다. 모두가 경탄하는 무대가 우선 그 첫째이다. 오필영 무대감독은 자신의 결과물을 자랑스러워 할 자격이 충분하다. 상하좌우뿐만 아니라 전후로도 무대를 적극 활용하면서 대극장 무대의 공간감을 극대화시켰다. 전형적인 프로시니엄 무대에 충실하면서도, 기존까지 관객들이 프로시니엄에 가지고 있던 인식을 깨트린다. 로버트 요한슨의 연출, 프랭크 와일드혼의 작곡, 잭 머피의 작사라는 트라이앵글은 권은아 협력연출의 번역과 김문정 음악감독의 손끝이 더해지며 보다 완벽해졌다. 음악의 힘은 미려한 가사를 통해 보다 폭발적인 힘을 갖게 되었고, 그 힘은 김문정 음악감독의 지휘와 오케스트라에 의해 객석 전체를 전율케 한다. 물을 튀기는 빨래터 신을 포함해 작품 전체적으로 안무의 구성도 짜임새가 확고하다. 의상은 매혹적이면서도 세련됐고, 적재적소에 쓰인 영상도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일관성 있게 끌고 간다. 이 작품을 구성하는 외적 요소들 하나하나가 치밀하게 서로 조응한다. 결과적으로 <웃는 남자>는 대극장 뮤지컬을 보러 가는 관객의 시각적‧청각적 기대를 십분 만족시킨다. 최단 기간 10만 관객 돌파에 연장 공연까지 괜히 이뤄진 게 아니다. 물론, 내적으로 들여다보았을 때 아쉬움은 있다. 특히, 데아와 조시아나로 대비되는 여성 캐릭터 쓰임이 그렇다. 크게 보면 <지킬 앤 하이드>의 엠마와 루시의 대비에서 여전히 채 벗어나지 못한 모양새다. 데아는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주로 그윈플렌을 기다리는 역할로 한정된다. 흰색을 활용하여 순수함을 부각시키고 이미지화하는 여성 캐릭터는 사실 많이 전형적이다. 화려한 색감의 조시아나 공작은 본인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나,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지는 못한다. '내 안의 괴물'을 부르며 외양은 아름다우나 내면의 뒤틀림을 인정한 조시아나는 그윈플렌과 정반대의 위치에 놓여있던 인물이다. 오히려 그 인물이 그윈플렌의 의회 연설을 유일하게 귀담아 듣게 된다. 모순적이면서도 풍성한 매력을 더 뿜어낼 수 있었던 조시아나이지만, 안타깝게도 극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 제한적이다. 그래도 여성 원톱극을 표방했음에도 여성 혐오적 캐릭터 설정으로 수준 이하의 완성도를 보였던 <마타하리>보다 훨씬 낫다. 또한, 이는 전체적으로 주연과 조연의 밸런스가 잘 안 맞은 탓도 있다. 앤 여왕이나 더리모어 경처럼 훌륭한 신 스틸러들이 있음에도 역량을 발휘할 기회가 충분치 않다. 바꿔 말하면, 그 적은 기회 속에서 조연 배우들 중 누구 하나를 지칭할 것 없이 모두가 제 역할의 이상을 해낸다. <웃는 남자>의 휴머니즘 어렸을 때 버려졌던 그윈플렌은 사실 고귀한 혈통이었다는 점이 밝혀진다. 그는 '최고로 높은' 귀족이 됐다. 거대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화려한 옷을 입고, 하얀 가발을 썼다. 그윈플렌은 '모두의 세상(I Could Change The World)'을 부르며,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세상을 보다 평등하게 바꾸려고 한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우르수스에게 보낸 금화는 '배달 사고'로 인해 대부분 전달되지 못했다. 의회에서 부르는 '그 눈을 떠(Open Your Eyes)'의 울림은 여왕과 귀족에게 전혀 닿지 못했다. 그가 천국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사실 진정한 천국이 아니었다. 영국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빅토르 위고가 프랑스를 배경으로 쓴 <레미제라블>과 여러 면에서 대조된다. 혁명을 통해 사회적 부조리를 뒤엎으려고 시도하는 <레미제라블>에 비해, <웃는 남자>는 그윈플렌이 부와 신분을 포기하고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현실적으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바꿀 수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구조를 바꾸는 건 개인 혼자서 불가능하다. 그윈플렌이 아무리 신분이 높아도, 그가 눈물을 흘리며 의회에서 혼자 절규하더라도, 권력의 단맛에 취한 이들이 스스로 그 기득권을 포기할 리 만무하다. <웃는 남자>는 세계를 변혁시키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지만, 그저 한 사람의 대화와 설득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윈플렌의 노래를 향한 관객의 박수가 끝나기가 무섭게 앤 여왕이 그윈플렌을 향해 날리는 조롱과 멸시는, 기실 이 사회의 기득권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의 한 단편이다. <웃는 남자>를 관통하는 메시지이다. 지옥에 있는 이들은 낙원을 동경한다. 하지만 그 낙원을 등지고 기꺼이 지옥으로 발걸음을 돌린 그윈플렌을 통해, <웃는 남자>는 누가 더 '인간적'인지 역설한다. 장애를 지니고 있고, 상처 받고, 소외당하며 버려진 이들이지만 서로 연대하여 희로애락을 나누는 밑바닥 인생들. 이 낮은 자들은 카르텔 안으로 똘똘 뭉쳐 착취에 열을 올리는 높으신 분들과 강렬하게 대비된다. 민중 지향적이었던 빅토르 위고의 휴머니즘이 뮤지컬 <웃는 남자>에도 남아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메시지 탓에 <웃는 남자>를 보고 나오는 뒷맛이 매우 씁쓸해진다. 이 거대한 형용모순 연극‧뮤지컬 배우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난한 직업군 중 하나이다. 한국고용정보원이 2016년에 발표한 '2015 한국의 직업정보'에 따르면, 연극‧뮤지컬 배우의 평균 초임연봉은 703만 원, 평균연봉은 980만 원이었다. 3년 전 조사이지만, 2018년의 현실이 2015년과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반면, 어떤 배우는 회당 5000만 원 이상을 받는 게 현실이다. 1년에 980만 원을 버는 배우와 한 회차에 5000만 원을 버는 배우가 공존하는 걸 그저 자본과 시장의 논리로만 이해해도 되는 걸까. 스타마케팅에 의존한 대한민국 공연계에서, 주연 배우와 조연‧앙상블 배우의 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동시에 앙상블에서 조연을 거쳐 주연까지 성장할 기회의 사다리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특정 배우의 회차당 출연료가 갱신되면, 다른 인기 주연급 배우들의 몸값도 덩달아 상승하게 된다. 물론, 그만큼 객석을 채울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계약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그 주연 배우의 몸값을 위해 어딘가에서는 희생이 불가피하다. <웃는 남자>에 출연 중인 한 배우는 최근 자신의 SNS에 부실한 무대 환경과 별반 달라지지 않는 열악한 처우에 대해 토로하기도 했다. 배우만이 아니다. <웃는 남자>는 화‧수‧목 평일 티켓값과 금‧토‧일 주말 티켓값이 다르다. 주말 티켓값이 평일보다 1만 원 더 비싸다. 같은 공연의 평일과 주말가에 차등을 둔 국내 첫 사례라는 점에서 <웃는 남자>는 대한민국 뮤지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VIP석 14만 원'이란 관객들의 심리적 상한선이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이 훌륭한 선례를 오디컴퍼니의 <지킬 앤 하이드>도 그대로 따라했다. 주말을 이용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공연을 보는 관객에게 피해가 더 쏠리는 건 덤이다. 관객이 지불하는 티켓값이 오르는 만큼 주연뿐만 아니라 그 외 배우들의 처우도 개선되고 있는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연습 기간 동안 아무런 페이를 받지도 못하고, 차기작 캐스팅을 빌미로 출연 단가를 후려치기 당하고, 그나마 정산조차 제대로 못 받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올라가기로 했던 공연이 갑자기 엎어져도 어디 호소할 곳도 없는 게 다수 배우의 현실이다. 앙상블들의 페이는 동결된 지 꽤 오래이다. 스태프는 또 어떠한가. 어떤 회사가 갑작스럽게 폐업을 해도 그 회사에서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다른 회사에서 비슷한 일을 또 하지만, 일반 스태프는 퇴직금조차 못 받고 생계를 걱정해야 한다. 2500시간 넘게 무료노동을 해야 했던 충무아트센터 노동자들이 지난 5월부터 파업에 돌입했다. 해결된 것 없이, 노동쟁의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지난 9월 6일, 김천시 문화예술회관에서 무대를 준비하던 조연출이 추락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해당 조연출은 계약서도 쓰지 않고 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어떤 회사는 '또' 페이가 밀리기 시작했다는 뒷말이 들려온다. 이 모든 게 EMK의 혹은 <웃는 남자>의 탓은 아니다. 몇몇 작품에서 높은 몸값을 받는 배우 개인의 문제도 결코 아니다. 그러나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 것이다"라는 <웃는 남자>의 메시지에서 굉장한 형용모순이 느껴진다. <웃는 남자>라는 무대 자체가 부자들의 낙원이라면, 이 낙원은 어떤 사람들의 지옥으로 세운 것일까. 귀족들을 향해 "끝도 없는 욕망 속에, 길들여진 시선 속에, 누군가의 지옥으로 세운 천국"이라고 그윈플렌은 일갈하지만, 정작 그 그윈플렌의 낙원을 위해 희생된 누군가는 없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 것이다"라는 그 문장 자체를 <웃는 남자>는 가장 잘 표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 뮤지컬 산업의 외양적 화려함과 내면적 부실함, 밖으로는 낭만을 팔면서 안으로는 착취로 굴러가는 거대한 모순이 이 작품 하나에 다 집약되어 있는 것일지 모른다. <웃는 남자>를 보며 내가 웃을 수 없었던 이유이다.

대한민국 뮤지컬의 역사, 이 작품 이후로 바뀔 것이다

[안 뻔한 티켓북] 여성이 노래하는 여성의 욕망과 해방,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희극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뮤지컬로 만든 <베르나르다 알바>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한 마을에서 어느 가족이 겪는 일을 묘사한 작품이다. 베르나르다 알바와 그의 다섯 딸들, 치매에 걸린 베르나르다 알바의 어머니, 그 집의 하녀들이 주요 등장 인물들이다. 남편 안토니오가 죽고 시작된 8년상, 자신의 집에서 군림하는 베르나르다 알바는 강력한 규칙으로 딸들을 통제하고, 딸들은 각자의 욕망을 적당히 표출하고 적당히 숨기며 서로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 일반적인 프로시니엄에서 벗어난 무대는 관객이 앉은 면마다 다른 경험을 하게끔 구성되어 있다. 열정적인 음악은 붉은색 조명과 어우러져 관객을 충분히 1930년대 초 스페인으로 인도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이전부터 있어왔지만 근 몇 년 동안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는 여성배우, 여성인물, 여성서사에 관한 담론의 정점을 찍는 작품이다. 등장인물은 대부분 여성이며, 남성 단역이 필요할 땐 중절모를 쓴 배우가 대신한다. 단 한 명의 남배우도 나오지 않는 이 작품은, 여성에게 여성의 이야기를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는 점에서 의의가 대단히 크다.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특별한 묘사나 연결 없이도, 그저 목소리를 낼 기회를 주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레 여성의 주체성과 여성을 향한 폭력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하지만 대본의 힘, 메시지가 품는 함의 등을 제쳐두고라도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는 경배해 마땅한 작품이다. <베르나르다 알바>의 매혹적인 포인트는 셀 수 없이 많지만, 이영미 배우가 "옛날옛적 스페인"하면서 노래를 시작하는 프롤로그에서부터 이미 게임은 끝났다. 열 명의 여배우가 그냥 아무말없이 귤만 까먹어도 재미있을 텐데, 심지어 무대 위에 등장해 손가락을 튕기고, 발을 구르고, 노래하고, 춤을 춘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정영주, 정인지, 백은혜, 김환희, 전성민, 오소연, 황석정, 이영미, 김국희, 김히어라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훌륭하게 배우로서의 길을 걸어온 이들이다. 그러나 <베르나르다 알바>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이들이 뛰어난 배우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뛰어난 배우들이었는지 새삼 깨닫기 때문이다. 이 배우가 이런 정극 연기를 할 수 있었는지, 이 배우가 저음을 이렇게 잘 썼는지, 이 배우의 몸을 쓰는 연기가 이런 수준이었는지….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을 터뜨려버릴 정도로 끼와 매력을 분출하는 배우들에게 대체 어떤 관형사가 찬사로서 어울린단 말인가. 입을 벌린 채 경탄하다가 중간에 일어서서 박수치고픈 내적 욕망을 자제할 뿐이다. 전회차 전석 매진, 커튼콜에서 쏟아지는 기립박수, 관객과 평단의 찬사는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지금껏 휴화산처럼 잠자고 있던 배우들의 재능이 <베르나르다 알바>라는 작품을 만나 활화산처럼 폭발한다. 지금까지 이들에게 부족했던 건 그저 기회였을 뿐임을 재차 알게 된다. 그들이 소화할 서사가, 표현해낼 캐릭터가, 배우로서의 재능을 발산할 무대가 부족했던 것일 뿐임을. 대한민국 공연계에 이렇게 위대한 배우들이 많았음을. 욕망을 억압하는 폭군 '폭군'으로 불리는 베르나르다 알바는 자신의 집에서 가부장적 권력을 휘두르는 가해자이다. 그는 자신의 딸들을 집 안에서 나가지 못하게 막고, 상복인 검은 옷만 입게 한다. 넷째 딸 마르티리오에게 청혼하려고 했던 남자를 '집안의 수준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막내 아델라가 외부의 남자 페페에게 품은 감정을 알고 있지만, 장녀 앙구스티아스를 페페와 결혼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베르나르다 알바가 권력을 쥘 수 있는 건, 죽은 그의 남편 안토니오가 갖고 있던 권력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에게 딸이 아니라 아들이 있었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또한 그가 권력을 행사하는 건 어디까지나 '8년상'이라는 가부장적 관습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여성을 억압하는 데만 쓰이고, 해방하는 데 쓸 수 없는 권력. 문의 안쪽으로만 작용하고 바깥으로는 뻗어나갈 수 없는 이 권력은 실상 베르나르다 알바의 권력이 아니다. 베르나르다 알바는 가부장제의 대리인일 따름이다. 그렇기에 베르나르다 알바 역시 가부장제의 가해자임과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하다. 안토니아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앙구스티아스를, 혈연관계 아닌 하녀들을 겁탈할 때 베르나르다 알바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베르나르다 알바는 자신의 집 문을 지키는 문지기일 뿐이다. 가부장제라는 주인의 허락 없이는 그 문을 열 수 없는 문지기. 그러나 폭력의 근간이 무엇이든, 그 폭력을 휘두르는 주체가 베르나르다 알바이기 때문에 구성원들의 원망은 그에게 쏠린다. 이 억압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베르나르다 알바의 모친인 마리아 호세파처럼 미치면 된다. 모두가 검은 옷을 입은 공간에서 그녀만이 유일하게 흰 옷을 입고 있다. 비록 그의 육체는 집 안에 갇혀있지만, 정신만은 베르나르다 알바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롭다. 혹은 앙구스티아스가 원한 것처럼 결혼해서 떠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는 곧 다른 가부장적 질서에 편입되는 것이다. 한 감옥에서 탈출해 다른 감옥으로 가는 것뿐. 남자는 뭐든지 할 수 있고, 여자는 뭘 해도 죄가 되는 세상에 선택지는 이것뿐이다. 아버지 없는 아이를 몰래 버리고 죽이려 했던 여자에게 이 마을 사람들은 돌을 던지지만, 그 아이를 잉태시키고 버린 남자에게는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았던 것처럼. 그러나 아무리 검은 옷으로 덮으려고 해도, 이들의 치마속자락에 숨겨진 붉은 욕망마저 가릴 수는 없다. 이 욕망은 성적인 쾌락임과 동시에 자유를 향한 갈망이기도 하다. 몸을 향한 억압과 영혼을 향한 억압 모두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은 본능이다. 어떤 체계나 구조로도 완전히 불식시킬 수 없다. 앙구스티아스는 페페와의 결혼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낮잠만 자는 막달레나는 언니의 행복을 빌어주면서도, 시기와 체념을 동시에 간직한 복합적인 캐릭터이다. 부끄러움 많은 아멜리아는 순박하지만, 부끄럽다고 하면서도 성과 육체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장애를 지닌 마르티리오는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좌절하고, 자신이 가질 수 없는 페페를 사모하며,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걸 가지려 하는 아델라를 질투한다. 그리고 막내 아델라. 가장 어리고,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반항적인 영혼. 베르나르다 알바가 이 질서정연한 억압을 유지하기 위해 총을 꺼내 들고, 페페가 죽은 것처럼 이야기해도 아델라의 욕망을 완전히 좌절시킬 수 없었다. 아델라는 다시 이 질서에 편입되느니, 영원히 반기를 드는 또 하나의 방법을 택한다. 죽음. 페페를 기다리며 육체적 욕망을 갈망했던 아델라는 검은 옷을 벗어 던져버리고 흰 옷차림인 채로 죽었다. 균열은 시작됐다 우리가 사는 무대 밖 세상은 강고한 압제와 무수한 억압이 반복되는 세계이다. 성폭력의 가해자였던 어떤 배우는 저예산 독립영화 쪽으로 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한다. 화장실에서 몰래 핸드폰으로 불법 동영상을 촬영한 배우는 올해도 연극 무대에 올랐다. 여전히 법정에서 '상호합의'에 의했던 것이라며 성폭력을 부정하는 권력자도 있다. 미투운동으로 촉발된 흐름은 이 세계를 다 부술 것처럼 진동했지만, 오랫동안 남성들이 구축해온 지배구조는 강고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백래시(Backlash)를, 반동을, 퇴보를 목격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으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되돌아갈 수도 없다. 베르나르다 알바의 가족들이 아델라의 죽음을 목격하는 순간, 무대의 배경으로 서 있던 거대한 벽이 열린다.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던 문이 열린다. 절규하는 가족들에게, 베르나르다 알바는 침묵을 강요한다. 그러나 이미 한 번 열린 문은, 다시 닫히더라도, 결국에는 열릴 수밖에 없다. 한 번 시작된 균열은 끝내 그 벽을 부수고야 만다. 욕망의 바다로, 해방의 바다로 물결은 흐른다. 베르나르다 알바가 마지막 순간까지 그 통제의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건, 역설적으로 이 통제가 영원할 수 없음을 베르나르다 알바 스스로가 제일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할 테다. 억압의 반복을 예고하는 게 아니라 억압의 종말을 예고하는 조종이다. 저항의 목소리를 덮치는 이 헤게모니가 너무 거대하고 무섭지만, 검은 옷으로 가릴 수 없던 붉은 욕망처럼, 죽음을 통해 절대 꺾이지 않을 반기를 든 아델라처럼, 이 시작된 흐름 전체는 아무도 거스를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이고, 이건 본능이니까. 그렇기에, 대한민국 공연계는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베르나르다 알바>는 땜질 정도로는 메꿀 수 없는 균열의 상징이다. 대한민국 공연이 이미 터닝 포인트를 지나,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선언하는 출사표이다. 이제 대한민국 뮤지컬의 역사는 <베르나르다 알바> 이후로 새롭게 쓰여야 할 것이다. 아니, 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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