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편집자말]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잔인한 곳, 무자비한 곳, 목구멍 풀칠해 버텨내 살아내는 것도 벅차. 세상은 잔인한 곳. 먹고 먹히는 거지같은 세상. 붙잡히면 내빼야만 해. 일단 걸리면 물어뜯길 준비나 해." - 뮤지컬 <웃는 남자> No.02 '세상은 잔인한 곳(It's a Cruel World)' 중에서


잔인한 시대였다. 식민지 개척이 시작되면서 막대한 부가 쏟아지던 영국. 부를 독점한 귀족들은 자신들의 부유함을 과시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희소한 물건을 넘어, 이국적 동‧식물로도 만족하지 못한 그들은 사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기형의 아이들이 전시용으로, 애완용으로 거래되었다. 그러나 선천적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는 아이들의 '공급'은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수요가 있는 곳에 시장이 생기는 법. 이제 전문적으로 기형의 아이들을 만들어 내는 집단이 출연했다. 콤프라치코스. 아이들을 납치해 뼈를 뒤틀고 입을 찢은 뒤 팔아넘기는 자들. 어린 그윈플렌 역시 콤프라치코스에게 붙잡혀 강제로 입이 찢어졌다. 그리고 버려졌다. 숲 속에서 추위에 떨던 그윈플렌은 동사한 한 여인의 품에서 죽어가고 있는 어린 아이를 발견한다.  
 

대형창작뮤지컬 <웃는 남자> 뮤지컬 <웃는 남자>의 공연 사진. 뮤지컬 <웃는 남자>는 빅토르 위고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대형 창작극이다. 어릴 때 콤프라치코스에게 납치당한 그윈플렌은 데아와 함께 우르수스에게 몸을 위탁한다. 무사히 성장한 그윈플렌은 데아와 함께 거리에서 공연을 하며 행복한 꿈을 꾸지만, 갑작스레 자기 신분의 비밀을 알게 되고 궁으로 소환된다. 오는 11월 4일까지.

▲ 우르수스와의 첫 만남 우르수스는 그윈플렌과 데아를 거두면서 세상의 잔혹함에 대해 설파한다. 그는 어떤 전사를 지니고 있던 것일까. 그는 어떤 과거를 관통했던 것일까. 현실의 부조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그 부조리가 잘못됐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가 택한 건 구조적 변혁이 아니라 개인적 생존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 EMK뮤지컬컴퍼니


그윈플렌은 그 여자 아이를 품에 꼭 안은 채 방황하다가 떠돌이 약장수인 우르수스의 마차를 마주한다. 세상의 끔찍한 섭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그렇기에 그 섭리를 지극히 혐오하면서도 가장 충실히 따르는 우르수스. 그러나 입이 찢어진 남자아이와 눈이 먼 여자아이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자기 품으로 거둔다.
 
우르수스의 보살핌 아래에서 장성한 그윈플렌과 데아는 길거리에서 공연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유복한 건 아니었지만, 그윈플렌과 데아는 그래도 함께 노래하고 함께 꿈꿀 수 있었다.
 
이 쇼의 주인공은 찢어진 입 덕분에 '웃는 남자'로 불리는 그윈플렌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이 독특한 광대의 얼굴을 구경거리 삼아 몰려들었다. 앤 여왕의 이복동생 조시아나 공작은 그윈플렌을 보자마자 이 기괴한 외양의 남자에게 매료된다. 그윈플렌의 혈통에 대해 알게 되기 전까지는…
 
관객의 기대를 충족하다
 

대형창작뮤지컬 <웃는 남자> 뮤지컬 <웃는 남자>의 공연 사진. 뮤지컬 <웃는 남자>는 빅토르 위고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대형 창작극이다. 어릴 때 콤프라치코스에게 납치당한 그윈플렌은 데아와 함께 우르수스에게 몸을 위탁한다. 무사히 성장한 그윈플렌은 데아와 함께 거리에서 공연을 하며 행복한 꿈을 꾸지만, 갑작스레 자기 신분의 비밀을 알게 되고 궁으로 소환된다. 오는 11월 4일까지.

▲ 관객 앞에 선 '웃는 남자' 콤프라치코스에게 납치 당해 강제로 입이 찢긴 그윈플렌. 그는 언제나 '웃는 남자'이다. 그가 실제로 웃고 있든, 웃고 있지 않든, 사람들은 그의 찢어진 입술만을 바라본다. 그의 겉이 아니라 내면을 바라봐 준 건 그와 곁에 있던 밑바닥 사람들 뿐이다. ⓒ EMK뮤지컬컴퍼니

 
EMK뮤지컬컴퍼니(아래 EMK)의 신작 <웃는 남자>는 '역작'이라 불릴 정도로 공을 들인 티가 많이 나는 작품이다. EMK는 라이선스 작업을 통해 체득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EMK산(産) 대형 뮤지컬을 성공적으로 올리기 위해 무던히도 애써왔다. <웃는 남자>는 그 우여곡절의 역사에 기념비가 될 만한 성과이다. 2013년부터 5년 동안 175억 원의 제작비를 쏟았다는 <웃는 남자>는 그 돈을 쓴 값을 톡톡히 보여준다.
 
우선 외형적으로 딱히 흠결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체에 가깝다. 모두가 경탄하는 무대가 우선 그 첫째이다. 오필영 무대감독은 자신의 결과물을 자랑스러워 할 자격이 충분하다. 상하좌우뿐만 아니라 전후로도 무대를 적극 활용하면서 대극장 무대의 공간감을 극대화시켰다. 전형적인 프로시니엄 무대에 충실하면서도, 기존까지 관객들이 프로시니엄에 가지고 있던 인식을 깨트린다.
 

대형창작뮤지컬 <웃는 남자> 뮤지컬 <웃는 남자>의 공연 사진. 뮤지컬 <웃는 남자>는 빅토르 위고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대형 창작극이다. 어릴 때 콤프라치코스에게 납치당한 그윈플렌은 데아와 함께 우르수스에게 몸을 위탁한다. 무사히 성장한 그윈플렌은 데아와 함께 거리에서 공연을 하며 행복한 꿈을 꾸지만, 갑작스레 자기 신분의 비밀을 알게 되고 궁으로 소환된다. 오는 11월 4일까지.

▲ 탈출하는 콤프라치코스 원작에서 나오는 개념을 무대 위에서 애써 설명하려다 보면 거추장스러운 부연에 그치고 말 때가 있다. <웃는 남자>는 그 한계를 시각적으로 돌파하고자 한다. 작 중에 끊임없이 '콤프라치코스'의 이름이 거명되고, 캐릭터의 입을 빌어 그 개념이 설명될 때의 느슨함을 상쇄하고자 한다. 무대 활용이 특히나 돋보인다. ⓒ EMK뮤지컬컴퍼니

 
로버트 요한슨의 연출, 프랭크 와일드혼의 작곡, 잭 머피의 작사라는 트라이앵글은 권은아 협력연출의 번역과 김문정 음악감독의 손끝이 더해지며 보다 완벽해졌다. 음악의 힘은 미려한 가사를 통해 보다 폭발적인 힘을 갖게 되었고, 그 힘은 김문정 음악감독의 지휘와 오케스트라에 의해 객석 전체를 전율케 한다.
 
물을 튀기는 빨래터 신을 포함해 작품 전체적으로 안무의 구성도 짜임새가 확고하다. 의상은 매혹적이면서도 세련됐고, 적재적소에 쓰인 영상도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일관성 있게 끌고 간다. 이 작품을 구성하는 외적 요소들 하나하나가 치밀하게 서로 조응한다. 결과적으로 <웃는 남자>는 대극장 뮤지컬을 보러 가는 관객의 시각적‧청각적 기대를 십분 만족시킨다. 최단 기간 10만 관객 돌파에 연장 공연까지 괜히 이뤄진 게 아니다.
 

대형창작뮤지컬 <웃는 남자> 뮤지컬 <웃는 남자>의 공연 사진. 뮤지컬 <웃는 남자>는 빅토르 위고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대형 창작극이다. 어릴 때 콤프라치코스에게 납치당한 그윈플렌은 데아와 함께 우르수스에게 몸을 위탁한다. 무사히 성장한 그윈플렌은 데아와 함께 거리에서 공연을 하며 행복한 꿈을 꾸지만, 갑작스레 자기 신분의 비밀을 알게 되고 궁으로 소환된다. 오는 11월 4일까지.

▲ 그윈플렌과 데아 그윈플렌의 세계는 데아였다. 조시아나로 대변되는 세계에 잠시 흔들렸던 그윈플렌은 다시 데아에게 돌아온다. 어디서 많이 본 구도, 많이 본 플롯이지만 전형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나쁜 건 아니다. 다만, 데아의 캐릭터 묘사는 두고두고 아쉽다. ⓒ EMK뮤지컬컴퍼니


물론, 내적으로 들여다보았을 때 아쉬움은 있다. 특히, 데아와 조시아나로 대비되는 여성 캐릭터 쓰임이 그렇다. 크게 보면 <지킬 앤 하이드>의 엠마와 루시의 대비에서 여전히 채 벗어나지 못한 모양새다. 데아는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주로 그윈플렌을 기다리는 역할로 한정된다. 흰색을 활용하여 순수함을 부각시키고 이미지화하는 여성 캐릭터는 사실 많이 전형적이다.
 
화려한 색감의 조시아나 공작은 본인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나,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지는 못한다. '내 안의 괴물'을 부르며 외양은 아름다우나 내면의 뒤틀림을 인정한 조시아나는 그윈플렌과 정반대의 위치에 놓여있던 인물이다. 오히려 그 인물이 그윈플렌의 의회 연설을 유일하게 귀담아 듣게 된다. 모순적이면서도 풍성한 매력을 더 뿜어낼 수 있었던 조시아나이지만, 안타깝게도 극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 제한적이다.
 

대형창작뮤지컬 <웃는 남자> 뮤지컬 <웃는 남자>의 공연 사진. 뮤지컬 <웃는 남자>는 빅토르 위고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대형 창작극이다. 어릴 때 콤프라치코스에게 납치당한 그윈플렌은 데아와 함께 우르수스에게 몸을 위탁한다. 무사히 성장한 그윈플렌은 데아와 함께 거리에서 공연을 하며 행복한 꿈을 꾸지만, 갑작스레 자기 신분의 비밀을 알게 되고 궁으로 소환된다. 오는 11월 4일까지.

▲ 조시아나 공작의 등장 아름다운 외모이지만 그 안에 괴물을 품은 사람. 조시아나는 그 괴물을 솔직히 인정하고,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풀어내는 인물이다. 조금만 더 발전시키면 훨씬 풍성한 캐릭터가 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조시아나를 위한 넘버가 조금 더 있어도 좋았을 것이다. ⓒ EMK뮤지컬컴퍼니


그래도 여성 원톱극을 표방했음에도 여성 혐오적 캐릭터 설정으로 수준 이하의 완성도를 보였던 <마타하리>보다 훨씬 낫다. 또한, 이는 전체적으로 주연과 조연의 밸런스가 잘 안 맞은 탓도 있다. 앤 여왕이나 더리모어 경처럼 훌륭한 신 스틸러들이 있음에도 역량을 발휘할 기회가 충분치 않다. 바꿔 말하면, 그 적은 기회 속에서 조연 배우들 중 누구 하나를 지칭할 것 없이 모두가 제 역할의 이상을 해낸다.
 
<웃는 남자>의 휴머니즘
 

대형창작뮤지컬 <웃는 남자> 뮤지컬 <웃는 남자>의 공연 사진. 뮤지컬 <웃는 남자>는 빅토르 위고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대형 창작극이다. 어릴 때 콤프라치코스에게 납치당한 그윈플렌은 데아와 함께 우르수스에게 몸을 위탁한다. 무사히 성장한 그윈플렌은 데아와 함께 거리에서 공연을 하며 행복한 꿈을 꾸지만, 갑작스레 자기 신분의 비밀을 알게 되고 궁으로 소환된다. 오는 11월 4일까지.

▲ 낙원에 다다른 그윈플렌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귀족들의 세계로 안내된 그윈플렌. 모든 것이 신기하고 낯설기만 한 그는 자신이 귀족으로서 가지게 될 권력으로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자 시도한다. 그리고 그 시도는 철저하게 실패한다. 세상은 한 개인의 선의만으로 변하지는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 EMK뮤지컬컴퍼니

 

"이제 난 뭐든 할 수 있지, 세상을 구하는 영웅처럼. 버려진 아이들, 가난한 사람들, 잔인한 세상 용서하기를. 하늘이 준 기회, 하늘이 준 오늘 세상 밝히리라." - 뮤지컬 <웃는 남자> No.22 '모두의 세상(I Could Change The World)' 중에서

 
어렸을 때 버려졌던 그윈플렌은 사실 고귀한 혈통이었다는 점이 밝혀진다. 그는 '최고로 높은' 귀족이 됐다. 거대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화려한 옷을 입고, 하얀 가발을 썼다. 그윈플렌은 '모두의 세상(I Could Change The World)'을 부르며,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세상을 보다 평등하게 바꾸려고 한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우르수스에게 보낸 금화는 '배달 사고'로 인해 대부분 전달되지 못했다. 의회에서 부르는 '그 눈을 떠(Open Your Eyes)'의 울림은 여왕과 귀족에게 전혀 닿지 못했다. 그가 천국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사실 진정한 천국이 아니었다.
 
영국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빅토르 위고가 프랑스를 배경으로 쓴 <레미제라블>과 여러 면에서 대조된다. 혁명을 통해 사회적 부조리를 뒤엎으려고 시도하는 <레미제라블>에 비해, <웃는 남자>는 그윈플렌이 부와 신분을 포기하고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현실적으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바꿀 수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구조를 바꾸는 건 개인 혼자서 불가능하다.
 

대형창작뮤지컬 <웃는 남자> 뮤지컬 <웃는 남자>의 공연 사진. 뮤지컬 <웃는 남자>는 빅토르 위고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대형 창작극이다. 어릴 때 콤프라치코스에게 납치당한 그윈플렌은 데아와 함께 우르수스에게 몸을 위탁한다. 무사히 성장한 그윈플렌은 데아와 함께 거리에서 공연을 하며 행복한 꿈을 꾸지만, 갑작스레 자기 신분의 비밀을 알게 되고 궁으로 소환된다. 오는 11월 4일까지.

▲ 눈을 뜨지 않는 이들 멀쩡히 두 눈을 뜨고 있음에도 벽 너머의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귀족들. 시각장애를 지녔지만 상대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데아와 상반된다. 그윈플렌은 자신의 목소리에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그들을 보며, 오히려 자신이 속해야 할 세계가 어디인지 깨닫게 된다. 하지만 돌아갈 세계 역시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 EMK뮤지컬컴퍼니

 

"그 눈을 떠. 지옥 같은 저 밑바닥 인생들. 그들이 견뎌야 할, 치러내야 할 참혹한 대가. 눈 속에서 길을 잃고 뼛속까지 얼어붙어 굶어주길 기다려 본 적 있는가. 빵 한 조각, 석탄 조각 구걸하며 우는 기분 모를 거야. 그 눈을 더. 지옥같은 가난과 고난 속에 저 벽을 무너뜨려." - 뮤지컬 <웃는 남자> No.27 '그 눈을 떠(Open Your Eyes)' 중에서

 
그윈플렌이 아무리 신분이 높아도, 그가 눈물을 흘리며 의회에서 혼자 절규하더라도, 권력의 단맛에 취한 이들이 스스로 그 기득권을 포기할 리 만무하다. <웃는 남자>는 세계를 변혁시키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지만, 그저 한 사람의 대화와 설득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윈플렌의 노래를 향한 관객의 박수가 끝나기가 무섭게 앤 여왕이 그윈플렌을 향해 날리는 조롱과 멸시는, 기실 이 사회의 기득권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의 한 단편이다.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 것이다."
 
<웃는 남자>를 관통하는 메시지이다. 지옥에 있는 이들은 낙원을 동경한다. 하지만 그 낙원을 등지고 기꺼이 지옥으로 발걸음을 돌린 그윈플렌을 통해, <웃는 남자>는 누가 더 '인간적'인지 역설한다. 장애를 지니고 있고, 상처 받고, 소외당하며 버려진 이들이지만 서로 연대하여 희로애락을 나누는 밑바닥 인생들. 이 낮은 자들은 카르텔 안으로 똘똘 뭉쳐 착취에 열을 올리는 높으신 분들과 강렬하게 대비된다. 민중 지향적이었던 빅토르 위고의 휴머니즘이 뮤지컬 <웃는 남자>에도 남아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메시지 탓에 <웃는 남자>를 보고 나오는 뒷맛이 매우 씁쓸해진다.
 
이 거대한 형용모순  
 

대형창작뮤지컬 <웃는 남자> 뮤지컬 <웃는 남자>의 공연 사진. 뮤지컬 <웃는 남자>는 빅토르 위고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대형 창작극이다. 어릴 때 콤프라치코스에게 납치당한 그윈플렌은 데아와 함께 우르수스에게 몸을 위탁한다. 무사히 성장한 그윈플렌은 데아와 함께 거리에서 공연을 하며 행복한 꿈을 꾸지만, 갑작스레 자기 신분의 비밀을 알게 되고 궁으로 소환된다. 오는 11월 4일까지.

▲ 데아와 함께 밑바닥으로 돌아와 데아와 재회하지만, 심장이 약했던 데아는 그윈플렌의 곁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데아의 죽음은 이 밑바닥 세계 역시 완전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착취당하는 이들의 삶은 고단하다. 지속 가능하지 않다. 천국의 바탕이 된 지옥, 지옥으로 세워진 천국 그 어느 쪽도 온전하지 않다. 그윈플렌이 행복할 수 있는 세계는 어떻게 건설해야 하는가. ⓒ EMK뮤지컬컴퍼니


연극‧뮤지컬 배우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난한 직업군 중 하나이다. 한국고용정보원이 2016년에 발표한 '2015 한국의 직업정보'에 따르면, 연극‧뮤지컬 배우의 평균 초임연봉은 703만 원, 평균연봉은 980만 원이었다. 3년 전 조사이지만, 2018년의 현실이 2015년과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반면, 어떤 배우는 회당 5000만 원 이상을 받는 게 현실이다. 1년에 980만 원을 버는 배우와 한 회차에 5000만 원을 버는 배우가 공존하는 걸 그저 자본과 시장의 논리로만 이해해도 되는 걸까. 스타마케팅에 의존한 대한민국 공연계에서, 주연 배우와 조연‧앙상블 배우의 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동시에 앙상블에서 조연을 거쳐 주연까지 성장할 기회의 사다리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특정 배우의 회차당 출연료가 갱신되면, 다른 인기 주연급 배우들의 몸값도 덩달아 상승하게 된다. 물론, 그만큼 객석을 채울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계약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그 주연 배우의 몸값을 위해 어딘가에서는 희생이 불가피하다. <웃는 남자>에 출연 중인 한 배우는 최근 자신의 SNS에 부실한 무대 환경과 별반 달라지지 않는 열악한 처우에 대해 토로하기도 했다.
 
배우만이 아니다. <웃는 남자>는 화‧수‧목 평일 티켓값과 금‧토‧일 주말 티켓값이 다르다. 주말 티켓값이 평일보다 1만 원 더 비싸다. 같은 공연의 평일과 주말가에 차등을 둔 국내 첫 사례라는 점에서 <웃는 남자>는 대한민국 뮤지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VIP석 14만 원'이란 관객들의 심리적 상한선이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이 훌륭한 선례를 오디컴퍼니의 <지킬 앤 하이드>도 그대로 따라했다. 주말을 이용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공연을 보는 관객에게 피해가 더 쏠리는 건 덤이다.
 
관객이 지불하는 티켓값이 오르는 만큼 주연뿐만 아니라 그 외 배우들의 처우도 개선되고 있는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연습 기간 동안 아무런 페이를 받지도 못하고, 차기작 캐스팅을 빌미로 출연 단가를 후려치기 당하고, 그나마 정산조차 제대로 못 받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올라가기로 했던 공연이 갑자기 엎어져도 어디 호소할 곳도 없는 게 다수 배우의 현실이다. 앙상블들의 페이는 동결된 지 꽤 오래이다.
 
스태프는 또 어떠한가. 어떤 회사가 갑작스럽게 폐업을 해도 그 회사에서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다른 회사에서 비슷한 일을 또 하지만, 일반 스태프는 퇴직금조차 못 받고 생계를 걱정해야 한다. 2500시간 넘게 무료노동을 해야 했던 충무아트센터 노동자들이 지난 5월부터 파업에 돌입했다. 해결된 것 없이, 노동쟁의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지난 9월 6일, 김천시 문화예술회관에서 무대를 준비하던 조연출이 추락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해당 조연출은 계약서도 쓰지 않고 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어떤 회사는 '또' 페이가 밀리기 시작했다는 뒷말이 들려온다.

이 모든 게 EMK의 혹은 <웃는 남자>의 탓은 아니다. 몇몇 작품에서 높은 몸값을 받는 배우 개인의 문제도 결코 아니다. 그러나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 것이다"라는 <웃는 남자>의 메시지에서 굉장한 형용모순이 느껴진다. <웃는 남자>라는 무대 자체가 부자들의 낙원이라면, 이 낙원은 어떤 사람들의 지옥으로 세운 것일까. 귀족들을 향해 "끝도 없는 욕망 속에, 길들여진 시선 속에, 누군가의 지옥으로 세운 천국"이라고 그윈플렌은 일갈하지만, 정작 그 그윈플렌의 낙원을 위해 희생된 누군가는 없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 것이다"라는 그 문장 자체를 <웃는 남자>는 가장 잘 표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 뮤지컬 산업의 외양적 화려함과 내면적 부실함, 밖으로는 낭만을 팔면서 안으로는 착취로 굴러가는 거대한 모순이 이 작품 하나에 다 집약되어 있는 것일지 모른다.
 
<웃는 남자>를 보며 내가 웃을 수 없었던 이유이다.
 

대형창작뮤지컬 <웃는 남자> 뮤지컬 <웃는 남자>의 공연 사진. 뮤지컬 <웃는 남자>는 빅토르 위고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대형 창작극이다. 어릴 때 콤프라치코스에게 납치당한 그윈플렌은 데아와 함께 우르수스에게 몸을 위탁한다. 무사히 성장한 그윈플렌은 데아와 함께 거리에서 공연을 하며 행복한 꿈을 꾸지만, 갑작스레 자기 신분의 비밀을 알게 되고 궁으로 소환된다. 오는 11월 4일까지.

▲ 분명한 수작, 하지만... 뮤지컬 <웃는 남자>는 초연임에도 흥행에 크게 성공한, 근래 보기 드문 수작이다. 몇몇 단점을 지녔지만, 쇼 비즈니스에 충실한 이 대극장 극은 장점으로 단점을 상쇄하고 남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느껴지는 씁쓸함이 자꾸만 입안에 맴돈다. 예술의전당을 거쳐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로 온 <웃는 남자>는 11월 4일까지 연장 공연에 들어간다. ⓒ EMK뮤지컬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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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33살 나이 차 커플... 그러나 '아재 미화' 로맨스가 아니다

[안 뻔한 티켓북] '불확정성의 원리'로 풀어낸 인생의 묘미, 연극 <하이젠버그>

영국 런던의 어느 기차역. 42살의 죠지 번스는 75세의 알렉스(알렉산더) 프리스트를 처음 만났다. 사실은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에게는 아주 특별한, 지금 이 자리에 있을리 없는 사람. 죠지는 충동적으로 그의 뒷목에 입술을 댔다. 그리고 자신이 착각했음을 깨닫고 당황했다. 이 상황에 대한 변명과 미안함을 두서없이 털어놓던 죠지. 하지만 그냥 자신의 착각으로 정리하고 이 자리를 떠나버리기엔, 이 늙은 남자에게 묘한 무언가가 느껴졌다.알렉스 프리스트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생전 본 적도 없는 중년의 여성이 자신에게 다가왔다. 여자가 착각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후에도,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자신의 얘기를 자꾸 털어놓았다. 남편이 어땠고,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고…. 물어보지도 않았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던 정보들이 쏟아지면서 그는 더욱 당황했다. "이상한 레일을 타고 허공을 맴도는 대화"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당신이 여기 있어서 즐거워요"라며 활달하게 끊임없이 말을 토해내는(욕설과 함께) 이 여자를 그냥 끊어버리기엔 묘한 무언가가 느껴졌다.지극히 이성적이고, 건조하고, 정제된 삶을 이어온 정육점 주인 알렉스. 매우 감성적이고, 유쾌하고, 충동적인 삶을 살아온 학교 직원 죠지 번스. 노년의 남성(75세)과 중년의 여성(42세)의 만남은 이처럼 정신없었고, 뭐라고 딱 정리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처음엔 끝과 끝처럼 상반된 캐릭터인 줄 알았던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갈수록 그 '무언가'가 동질감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비록, 이 만남의 끝이 어디로 향할지는 알 수 없지만….인생은 어디로, 어떤 속도로 가고 있는가 지난 4월 24일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개막한 연극 <하이젠버그>는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의 극작가인 사이먼 스티븐스의 신작이다. 연극의 제목은 '하이젠베르크'의 이름에서 따왔다. 극 중 그의 이름이나 이론이 주요하게 인용되지는 않는다. 이 작품이 물리학에 관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이먼 스티븐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위치에 대한 정확성을 높이다 보면 운동량의 부정확성이 커지고, 운동량을 정확히 측정하려고 하면 반대로 위치에 대한 부정확성이 커진다. <하이젠버그>는 물리학 이론을 인생에 대한 관조로 풀어낸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얼마나 빨리 가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내가 너무 그 삶과 가까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나를 가장 잘 아는 게 나라고들 얘기하지만, 사실은 내가 생각하는 있는 그대로의 나는 실제 나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수 있고, 혹은 내가 나를 오해한 것일 수도 있다. 자아는 내가 관찰한 나만이 아니라 타인이 관찰한 나와 융합되었을 때 비로소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알았을 때에야, 우리는 우리 삶의 방향과 속도를 내가 원하는 만큼 조절할 수 있다.죠지와 알렉스는 모두 자신의 삶을 제대로 관찰할 수 없었던 이들이다. 거짓말과 수많은 자기변명으로 자신을 보호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웠던 죠지. 아무도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지 않는 시대에, 적자뿐인 이곳에서 같이 늙어가며 쇠퇴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알렉스. 그러나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삶을 관찰하고, 간섭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각자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얼마나 빨리 그쪽으로 가고 있는지 알아내게 된다. 언뜻 죠지는 지극히 감성적이고, 알렉스는 지극히 이성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67년간 50단어로 매일 써온 알렉스의 일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형용사가 너무 많았다! '느낀다'는 것을 싫어했던 알렉스는 죠지 덕분에 삶의 감각을 즐길 수 있게 된다. 반면 죠지는 알렉스가 선사한 고요에 매료됐다. 원래 일방적으로 말하는 건 죠지였고, 듣는 건 알렉스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죠지는 알렉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알렉스 덕분에 "음표와 음표 사이 그 공간에" 존재하는 음악을 알게 된다.외로웠던 두 사람, 불완전했던 두 사람은 서로에 의해 이전과는 다른, 하지만 오히려 본래의 자신에 더 가까운 사람이 된다. 죠지는 생각보다 과학적이고 계획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고, 알렉스는 생각보다 감성적이고 충동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들은 서로를 물들이며, 서로의 안에 감춰진 각자의 면모를 끄집어낸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보다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두 사람의 관계 작품 속 시공간을 특정할 만한 별다른 무대장치도 없고, 신과 신 사이의 구멍은 이따금 관객을 혼란스럽게 한다. 후반부에 밀려들 감정의 파고를 만들기 위해 전반부에 감정을 쌓아가고 있는 과정들은 자칫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런 가운데 온전히 두 배우의 대사와 감정 표현에 집중하고 봐야 하는 이 작품이 과연 대부분의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대중적 작품인지는 모르겠다. 특히 33살의 나이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의 관계가 처음부터 마냥 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나이 많은 남자와 상대적으로 젊은 여자의 로맨스가 차고 넘친다. 그리고 대체로 그런 로맨스에서 여자는 남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구원받는 존재이거나, 혹은 나이가 많은 남자도 의외로 매력적이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쓰인다. 그 과정에서 여성의 불행이나 장애, 그를 향한 폭력이 과하게 전시되기도 한다. 종류가 무엇이든, 결국 귀결되는 건 하나였다. 남자를 위해 존재하는 도구적 여성 캐릭터. 혹시 이 연극도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된다.<하이젠버그>가 그런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죠지와 알렉스는 동등한 관계이다. 비록 알렉스가 죠지에게 1만5000파운드를 주지만, 알렉스에게는 평생을 모은 돈이었고, 그게 알렉스의 경제적 권력을 드러내기 위한 건 결코 아니었다. 알렉스는 나이가 많이 들었고, 죠지는 그런 알렉스의 살결이 "유럽 같아요"라면서 오래돼서 좋다고 하지만 그건 남자의 늙음을 상대적으로 미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대사는 아니다. 그건 오랜 세월을 견디고 살아낸 그의 삶을 존중하는 의미에 가깝다비록 33살의 나이 차가 있지만, 죠지도 알렉스도 모두 세상의 풍파를 겪으며 자기 인생을 살아온, 경험치가 꽤 쌓인 인물이다. 그들은 같이 술을 마시고, 섹스를 하고, 함께 많은 감정을 공유하지만 그건 일방적인 구원도, 착취도 아니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상처와 각자의 장애를 지닌 인물이었다. 누가 누구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동질감 덕분에 평등한 관계를 구축해나가며, 이 작품은 그 동질감 위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더 빛을 발한다. <하이젠버그>의 이 빛은, 노란 색깔의 텅스텐 전구처럼 혹은 카페의 창문 밖으로 옅게 깔린 노을 빛깔처럼 따뜻하다. 그건 이 작품이 기본적으로 인간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위로하기 위해 쓰인 텍스트이기 때문이리라.그들이 탱고를 추는 이유 아들을 찾기 위해 미국까지 온 죠지. 죠지를 위해 기꺼이 함께 날아온 알렉스.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던 죠지는 알렉스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깨닫는다."물론, 기꺼이 그렇게 해줄 거야"라는 알렉스의 대답. 죠지는 알렉스에게 데이트가 아니라 연애를 제안한다. 하지만 앞으로 몇 번의 생일이 남았을지 모르는 알렉스에게, 죠지와의 만남은 두렵기만 하다. 자신이 죽은 듯이 잠을 잘 때, 잠시 자신이 죽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슬퍼서 눈물을 흘린 죠지이니까. 알렉스에게도 죠지는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떠났을 때에 죠지가 자기 때문에 그토록 슬퍼하는 걸 견딜 수 없다.중년과 노년이 되어서야 인생의 중요한 걸 알게된 두 사람. 서로 사랑하면서도 앞으로의 관계가 또 어떻게 변할지 몰라서 두렵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간절히 필요한 두 사람. 두 사람은 마지막에 키스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한 번의 섹스를 하는 것도 아니고, 탱고를 춘다. "전문 댄서"하고만 춤을 춘다며, 죠지가 가르쳐달라는 걸 알렉스가 거절했었는데, 언제인지도 모르게 죠지는 알렉스와 탱고를 추려고 이 춤을 배워왔다.즉흥의 춤. 우리 인생처럼, 다음의 발걸음에 주저앉거나 넘어질지 아니면 또 한 번의 멋진 스텝이 될지는 그 한걸음을 내딛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이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삶이 어느 방향으로 어떤 속도로 갈지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무엇을 선택하든, 그들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관찰하고 있으니까.

도종환을 장관으로 만들어준 연극, 장관은 본 적이 있을까

[안 뻔한 티켓북] 연출을 블랙리스트에서 빼준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기사 보강 : 10월 15일 오전 10시 35분] 도안고는 조순이 싫었다. 그 증오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무관 도안고는 문관 조순이 자신과 같이 영공의 총애를 받는 게 몹시 싫었다. 조순과 그의 일족을 모조리 척살하고 싶었던 그는 암살 계획마저 실패하자 새로운 묘책을 찾는다. 도안고는 끈기를 갖고 준비한 함정을 통해 조순을 모함하는 데 성공하고, 영공은 역적으로 몰린 조순과 그의 일가 구족을 멸한다. 조순의 아들 조삭은 왕의 부마였다. 그러나 조삭 역시 이 피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다만 공주는 목숨을 부지하게 됐다. 조삭은 공주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조씨고아라는 이름을 남긴다. 그리고 조씨 일가의 복수를 당부하며 운명을 받아들인다. 공주는 임신한 채로 궁에 유폐되었다. 후환이 두려웠던 도안고는 조씨 가문의 마지막 후손인 조씨고아마저 없애려 한다. 공주 역시 그 사실을 안다. 공주는 조씨 가문과 오랫동안 연을 맺어온 시골 의사 정영에게 막 태어난 아이를 부탁한다. 망설이는 정영 앞에서 공주는 아기를 맡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정영이 궁을 빠져나간 뒤 혹시나 자신이 그 사실을 누설할 것을 막기 위해 그리고 정영에게 자신의 목숨 값을 빚으로 얹기 위해. 정영은 궁을 빠져 나온다. 궁을 지키던 장군 한궐은 정영의 탈출을 눈감아주며 스스로 목을 쳐서 입을 막는다. 조씨고아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도안고는 전국의 갓난아이를 끌고와 모두 죽이려 한다. 정영은 자신의 아이를 조씨고아와 바꿔치기한 후, 자신의 아이를 조씨고아라 속이고 도안고에게 바칠 계획을 세운다. 공주와 한궐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자칫 수없이 죽어나갈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정영은 벼슬에서 물러난 공손저구를 찾아가 상의한다. 정영은 자신이 조씨고아를 빼돌린 사실을 도안고에게 고해바치라고 공손저구에게 제안한다. 하지만 공손저구는 자기가 정영 대신 죄를 뒤집어쓰겠다며, 늙은 자신보다 젊은 정영이 살아남은 조씨고아를 키우기 더 적합할 것이라 말한다. 조씨고아는 공손저구가 탈출시킨 것이며, 이를 정영이 도안고에게 밀고하는 그림이 완성된다. 정영의 아내는 미쳤다고, 무슨 짓이냐고 울부짖는다. 도안고는 공손저구를 고문한 뒤, 공손저구의 자택에 숨겨져 있던 정영의 아이를 조씨고아라고 믿고 바닥에 세 번 내리쳐 죽인다. 공손저구는 세 번 스스로 머리를 찧어 자결함으로서 선비의 도를 지킨다. 도안고는 정영을 크게 칭찬하고, 조씨고아를 수양아들 삼아 직접 가르치겠다고 나선다. 정영의 마음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이다. 정영의 아내는 죽은 아이의 묘 앞에서 역시 목숨을 버린다. 조씨고아 한 명을 살리기 위해 대체 몇 명의 사람이 자신의 피를 바쳤는가. 정영은 울부짖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있는 건 없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도안고의 손에 의해 길러진 '복수의 씨앗'이 열매를 맺을 때가 됐다. 장성한 조씨고아에게, 정영은 조씨고아 출생의 비밀과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준다. 믿지 못하는 조씨고아에게 자신의 팔까지 잘라내며 다그친다. 조씨고아는, 멸족한 가문을 포함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위해 도안고의 목을 칠 것인가. 대한민국 연극계의 금자탑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중국 고전 <조씨고아>를 각색한 국립극단의 주요 레퍼토리 작품이다. <조씨고아>는 중국 원나라 시대 작가 기군상이 쓴 잡극으로, 기원전 진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조씨 일가가 겪은 일을 그려냈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대한민국 연극계가 쌓아올린 금자탑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다. 고선웅 연출이 앞으로 이 작품만큼 훌륭한 작품을 또 연출해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국립극단의 뚝심과 배우들의 열연이 빚어내는 아우라는 관객을 압도하고 남는다. 비장미와 비극미로 점철된 이 작품은, 중간중간의 골계미를 잊지 않으며 적당한 숨구멍과 함께 빠르게 관객의 심장을 관통한다. 장면 전환은 더딤이 없고, 무대의 여백은 동양화가 지향하는 여백의 미를 잘 재현했다. 무엇보다 극적 재미와 메시지를 고루 갖췄다. 빼어난 작품성을 지녔으면서도 스스로 예술이라 젠체하며 고압적이거나 불친절하게 관객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대중예술로서의 현대 연극이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주저없이 꼽을 수 있다. 흡인력 있게 관객을 무대로 빨아들이는 힘이 압권인데, 그 힘을 만들어내기 위해 무대 위 모든 구성요소가 완벽한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2015년 초연한 해에 동아연극상 대상, 대한민국연극대상 대상, 올해의 연극 베스트3, 올해의 공연 베스트7를 모두 휩쓸었다. 입소문을 탄 이 작품은 올해 삼연에서도 관객과 평단의 호평 속에 매진 행렬을 이어갔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구성하는 개별 요소를 하나하나 뜯어보며 상찬하다 보면 끝이 없을 테다. 그러나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대단한 작품이라는 걸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였던 고선웅 연출을 블랙리스트에서 빼준 작품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한 연극 <푸르른 날에> 탓에 고선웅 연출은 당시 정권으로부터 '찍힌' 연출 중 하나였다. 2015년 초연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보고 너무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고선웅 연출의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는 탓에 이 작품을 지원할 수 없을 것을 우려하여, 전국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그를 블랙리스트에 제외하도록 청와대와 국정원에 건의했다고 한다. 실제로 고선웅 연출의 이름은 블랙리스트에서 빠졌고,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별탈 없이 공연될 수 있었다. 해당 차관은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으나 몇 달 후 옷을 벗었다고 한다. 누가 알았을까.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지어낼 거대한 아이러니가 바로 여기에서 탄생할 줄은. 블랙리스트 연출, 블랙리스트 장관 고선웅 연출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올랐었다는 것,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를 본 문체부 차관이 그를 빼달라고 건의한 것, 실제로 그의 이름이 빠진 것. 이 모든 사실은 도종환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16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문체부 내부 문건을 폭로하며 밝혀낸 사실이다. 도종환은 블랙리스트의 상징이다. '담쟁이' 시인인 그 자신이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예술인 중 한 명이었으며,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폭로하여 부패한 정권을 몰락케 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이후 촛불 혁명으로 정권이 바뀌고, 도종환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자리에 오른다. 여기에는 문화예술계의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이 있었다. 박근혜 정권의 부당한 문화예술계 탄압에 맞선 도종환에게, 당시 문화예술계가 그에게 거는 기대는 매우 컸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바람에 맞추어 공연계를 포함한 문화예술계 적폐가 일소되기를 바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9월 13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자 68명에 대한 이행계획 발표' 보도자료를 냈다. 문체부는 검토대상 68명(수사의뢰 권고 24명, 징계 권고 44명) 중 "수사의뢰 권고자 24명에 포함된 문체부 소속 12명 중 4명을 검찰에 수사의뢰"했다. 이미 시민단체로부터 고발된 인원을 포함하면 문체부 소속 직원 중 검찰에 수사의뢰가 들어간 직원은 모두 5명이다. 이어 "징계 권고를 받은 문체부 직원 44명 중 과장급 이상 22명은 감사원의 감사 결과에 따른 기처분(주의 4명), 퇴직(5명), 징계시효 경과 등의 사유(13명)로 징계처분 대상이 아니었다"라며 "기처분자와 퇴직자를 제외한 13명 중에서 블랙리스트와 관련하여 감사원으로부터 처분을 받지 않은 과장급 이상 10명에 대해 문체부는 '주의' 처분"을 내렸다고 덧붙였다. 또한 "중하위직 실무자 22명(과장 이상의 보직이 없는 사무관급 이하)은 상급자의 지시에 따라야 했던 점을 고려하여 징계 처분은 하지 않되 관련 업무에서 배제"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결과적으로 진상조사위의 권고 이후 문체부가 실제로 행한 징계는 일부 대상자에 한한 '주의'가 전부였다. 문화예술인들의 기대는 실망이 되었고, 실망을 넘어 분노로 번지고 있다. 문화예술인들이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회 앞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청사 앞에서, 역 앞에서 피켓을 들고 소리 높여 도종환 장관을 질타하고 나섰다. 이들은 블랙리스트 관련 문화체육관광부의 행정 조치 "'징계 0' 셀프면책 선언"이라면서 "블랙리스트 관련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들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문체부는 추가 보도자료를 통해 "이미 처분을 받았거나 퇴직·징계 시효가 지났다", "주의 조치도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다"라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지난 10일 국정감사에 출석한 도종환 장관에게 최경환 민주평화당 의원은 "문체부가 '블랙리스트 그만두자', '조직의 피로감이 많이 쌓였다'라며 적절히 타협하고 있다고 본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적폐청산이 다 끝난 것 같다"라며 "시민단체나 문화예술계의 상당한 반발이 있는데,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시계를 (문체부가) 멈춰버렸다"라고 도 장관을 질타했다. 도종환 장관은 "아직 (블랙리스트) 백서도 발간되지 않았고 다 끝나지 않았다"라며 "지금도 전직 장관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라고 해명했다. 최 의원은 "재판이 문제가 아니라 정부의 의지가 문제"라고 꼬집었다. 필요한 복수조차 하지 않는다면 근대국가의 전제 중 하나는 사적 복수의 금지이다. 국가는 형법을 통해 유일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정당한 주체이다. 사회는 성문화된 법에 따라 공적 복수를 통해서 조율된다. 재사회화도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적절한 형벌을 통해 국민의 법 감정을 해소하는 일 역시 국가의 의무 중 하나이다. 형벌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공적 복수 제도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무너지고, 공적 복수를 믿지 못하게 된 이들은 사적 복수에 천착하게 된다. 공권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사회 전체가 혼란스러워진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에서 '복수의 씨앗'은 조씨고아 개인을 가리킨다. 진실을 알게 된 늙은 영공이 도안고의 구족을 모두 멸하기로 하면서, 또 다른 '복수의 씨앗' 탄생할지 모름을 암시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은 증오와 복수의 연쇄에 대한 경고를 지닌 작품이다. 그러나 동시에, 반드시 있어야 할 기본적인 복수, 정당하고 필요한 복수를 역설하기도 한다. 도안고는 주지의 사실 없이 처벌을 받아야 한다. 조씨고아는 자신의 칼로 도안고의 목을 베지 않는다. 그를 제압하여 묶은 뒤 공적 심판을 받도록 한다. 만약 조씨고아가 도안고를 그냥 용서했다면 어땠을까?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나를 단절시키고 도안고에게 아무런 조처가 취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를 위대한 인류애나 포용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조순을 포함한 조씨일가의 억울함, 그 과정에서 희생해야 했던 무수한 목숨은 누가 어떻게 보상할 수 있을까? 작품에서 정영은 도안고가 죽은 뒤 성취감과 허무함, 회한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운다. 만약 도안고가 처벌받지 않았다면, 자신의 아내와 자식, 본인의 팔까지 버려갔던 정영의 마음은 누가 위로할 수 있는가. 도종환 장관은, 블랙리스트라는 피바람에서 살아남아 장관 자리에 오른 또 한 명의 조씨고아이다. 그런데 최근 도종환 장관 그리고 그의 문체부가 보여주는 행태는 조씨고아가 도안고를 향한 복수를 포기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이다. 함께 피 흘리며 문화로, 예술로 투쟁했던 문화예술인들의 가슴이 무너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자 68명에 대한 이행계획 발표'가 있은 후 진상조사위 전직 민간위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그를 비판했고, 문화예술인들이 다시 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도종환 장관을 2년 전 국정감사 스타로 만들어줬던 게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였고, 그 블랙리스트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촌극이었는지를 잘 보여준 게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둘러싼 일화이다. 그 블랙리스트 덕분에 장관이 되었다고 무방한 도종환은, 과연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봤을까. 봤다면 무엇을 느꼈을까. 도안고의 구족을 멸하라고 문화예술인들이 거리로 나온 게 아니다. 최소한 도안고는, 도안고의 수족이 되어 그 범죄에 가담했던 이들은 처벌받아야 하지 않느냐고 외치는 거다. 그들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주의'만으로 해소될 일이었으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테다. 도종환 장관은 14일 오후, 블랙리스트 사태 진상조사에 참여했던 민간위원들과 4시간 넘게 비공개 만남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민간위원들은 ▲ 이행계획 전면 재검토 ▲ 이를 위해 민간이 참여한 재검토위원회(가칭) 구성 ▲ 대국민 토론회 개최 등 3가지 사안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혹시 도 장관께서 문화예술인들이 왜 자신을 비난하는지 납득이 잘 안 되신다면, 대전과 경상남도 진주에서 지방공연이 예정되어 있으니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한 번 감상하기를 추천한다. 질타를 하는 입장에서 질타를 받는 입장으로 2년 만에 바뀐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보다 왜 그들이 자신을 질타하는지를 들어주기를 바란다. 비통하게 눈물 흘리며 죽어간 등장인물들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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