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추운 바람이 우리를 괴롭혀도, 서로를 더 꼭 안아줄 이유일 뿐이야. 우리 함께라면."


비가 쏟아지던 1983년 여름 어느 날의 낡은 여관. 입대를 앞둔 남자는 여자친구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른다. 친구들의 강요에 별 수 없이 한잔 받아 마시고 왔지만, 당분간 헤어져 있어야 할 터이니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지만, 순진하고 서투르기만 한 서인우는 긴장감으로 딸꾹질만 할 뿐이다. 그런 인우에게 태희는 자신의 체온을 느낄 수 있도록 노래를 불러줬다. 추운 바람조차도 서로를 꼭 더 안아줄 이유라고.

 "그럼 만약 빗속에 우산도 없이 걸어가야 한데도, 난 네 품에 더 가까이 안길 테니 걱정하지 않아."

 

우산 속에서 시작된 인연 지난 6월 20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의 프레스콜이 열렸다. '인우' 역에 더블캐스팅된 배우 강필석과 '태희' 역에 더블캐스팅된 배우 김지현이 프레스콜에서 하이라이트 시연에 나섰다. 비가 오던 1983년의 여름 어느 날, 태희는 인우의 우산 속으로 뛰어 들어온다. 그렇게 언제부터 시작됐을지 모르는 두 사람의 운명이 다시 엮이기 시작한다.

▲ 우산 속에서 시작된 인연 지난 6월 20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의 프레스콜이 열렸다. '인우' 역에 더블캐스팅된 배우 강필석과 '태희' 역에 더블캐스팅된 배우 김지현이 프레스콜에서 하이라이트 시연에 나섰다. 비가 오던 1983년의 여름 어느 날, 태희는 인우의 우산 속으로 뛰어 들어온다. 그렇게 언제부터 시작됐을지 모르는 두 사람의 운명이 다시 엮이기 시작한다. ⓒ 서정준


태희의 마음에 인우도 노래로 화답한다. 태희를 처음 만난 날도 비가 왔었다. 자신의 우산 아래로 갑자기 뛰어 들어온 여자. 인우는 그 여자를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다. 그건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었다. 인우에게는 태희가 전부였고, 태희에게는 인우가 전부였다. 그렇게 두 사람의 목소리가 포개진다.

 "너를 사랑해, 난 널 사랑해. 내 목소리가 아닌, 내 가슴이 하는 말. 난 널 위해 숨을 쉬고, 널 위해서 사는 걸. 그게 나의 전부란 걸."


인우는 알 수 없었다. 그 날이 태희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라는 걸. "기다려, 혹시 늦어도"라고 약속했건만, 인우는 그 날 이후로 태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태희를 인우는 잊지 못하고 계속 서성거린다. 마치 우산을 든 채 버스정류장을 헤맸던 그때처럼. 인우가 태희를 다시 찾는 데는 17년의 시간이 걸려야 했다. 첫 눈에 알아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손버릇, 말투, 라이터, 초상화…. 17세 남자 고등학생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안의 영혼은 태희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7년을 뛰어넘어, 연인은 다시 서로를 마주한다.

다섯 번의 눈부신 계절을 돌아

ⓒ 서정준


기다려, 혹시 늦어도... 늦게라도 와줘서 고마워 2013년 재연 이후 5년 만에 귀환한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인우' 역을 맡은 배우 강필석이 지난 6월 29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인근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필석은 초연부터 이번 삼연까지 <번지점프를 하다>의 주인공을 매번 맡으며, 이 작품을 대표하는 배우 중의 한 명이 되었다. 조금 늦었지만 결국 돌아온 이 작품, 이 배우에게 많은 팬이 고마워하고 있다.

▲ 기다려, 혹시 늦어도... 늦게라도 와줘서 고마워 2013년 재연 이후 5년 만에 귀환한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인우' 역을 맡은 배우 강필석이 지난 6월 29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인근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필석은 초연부터 이번 삼연까지 <번지점프를 하다>의 주인공을 매번 맡으며, 이 작품을 대표하는 배우 중의 한 명이 되었다. 조금 늦었지만 결국 돌아온 이 작품, 이 배우에게 많은 팬이 고마워하고 있다. ⓒ 서정준


"작년 여름에, 다시 할 수 도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결정은 가을쯤 난 것 같아요. 너무 좋았어요. 사실 <번지 점프를 하다> 재연 끝났을 때(2013년), 곧 돌아올 줄 알았는데 못 돌아오게 되니까 너무 슬펐거든요. '이대로 없어지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하고…. 하나의 작품이 올라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배우 강필석의 서인우가 돌아온다는 소식은 지난해 겨울 <서편제> 인터뷰 도중에 처음 들었다. 좋은 작품임에도 여러 외부 요인 때문에 다시 관객과 만나지 못하는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도중이었다. <서편제>는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관객 앞에 나선 작품이었고, <번지 점프를 하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도 기대와 설렘으로 눈을 반짝이며 "<번지 점프를 하다> 때문에 여름 스케줄을 비워놓고 기다리고 있다"던 강필석이 기억난다. 그래서 이번에 꼭 다시 만나고 싶었다.

뮤지컬 <번지 점프를 하다>는 동명원작의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를 극화한 작품이다. 2012년 초연 그리고 2013년 재연이 끝났을 때만 해도, 이 작품이 다시 돌아오는 데 5년이란 시간이 필요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17년의 시간을 돌고 돌아 결국 태희가 다시 인우 앞에 나타난 것처럼, <번지 점프를 하다>도 기적 같은 세 번째 시즌으로 관객에게 돌아왔다.

관객으로부터 받는 마음 "제가 너무 이 작품을 사랑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극장에 오신 후에는 후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오시기까지 조금 어려운 결정일 수도 있겠지만, 정말 작품을 본 후에는 모두 몰입해 주시는 게 느껴지거든요. 커튼콜 때에도, 가슴으로 박수를 쳐 주시는 게 무대에서 정말 느껴져요. 그게 신기한 것 같아요. 어떤 순간에 관객 분들이 확 몰입해 주시면, 그게 공연하는 저한테 느껴지거든요."

▲ 관객으로부터 받는 마음 "제가 너무 이 작품을 사랑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극장에 오신 후에는 후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오시기까지 조금 어려운 결정일 수도 있겠지만, 정말 작품을 본 후에는 모두 몰입해 주시는 게 느껴지거든요. 커튼콜 때에도, 가슴으로 박수를 쳐 주시는 게 무대에서 정말 느껴져요. 그게 신기한 것 같아요. 어떤 순간에 관객 분들이 확 몰입해 주시면, 그게 공연하는 저한테 느껴지거든요." ⓒ 서정준


"개발 단계부터 같이 참여를 했던 작품이에요. 처음에 노래가 만들어지고, 구상을 할 때부터 함께한 작품이거든요. 제작하시는 분들도 제 의견을 굉장히 많이 반영을 해 주셨고…. 사실 창작 단계에서 배우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는 경우가 거의 없잖아요. 그런 점에서 <번지 점프를 하다>는 좀 특별한 작품이죠. 공연을 하다 보니 예전의 그런 것들이 다 생각이 나더라고요. 이번 시즌 첫 공연 끝나고 엄청 울었어요. 여러 가지 감정이 많이 느껴지고…. 애정이 있는 작품일 수밖에 없죠.

정말로 정성을 많이 쏟아 부은 작품이에요. 주어지는 역할에 충실히 하는 작품도 있지만, 조금 더 저라는 사람을 집어넣는 작품도 있거든요. 그런 점에서 창작 뮤지컬에 더 마음이 쓰이는 것 같아요. 좋은 창작 뮤지컬들이 잘 자리를 잡아야 다른 새로운 뮤지컬들이 발전하고, 탄탄하게 기반을 잡아갈 수 있거든요. 이런 기회들이 더 있어야 후배 배우들이나 창작진들이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서 <번지 점프를 하다>나 <서편제>처럼 먼저 만들어진 창작 뮤지컬의 중요성이 크다고 생각해요. 이런 작품이 좀 더 생명력을 얻어서, '우리나라도 이렇게 좋은 뮤지컬을 만들 수 있다'고 보여주고 싶어요."


그런 작품이기에 초연과 재연에 이어 5년 만에 온 세 번째 시즌에서 강필석은 어떤 책임감을 느꼈다. 원래는 재연 때의 서인우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한 것"이었으나, 간신히 다시 관객과 마주할 작품에 그리고 캐릭터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강필석은 <번지 점프를 하다>의 삼연을 넘어선 사연 그 이후까지도 바라고 있다.

"사연도 할 수 있으면 좋겠고, 지금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매번 확고하게 사랑해 주시는 분들이 계셨고, 삼연 올라올 때도 많이들 응원해 주셨어요. 그런 분들이 더 많아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저희의 목표는 이 작품이 확고한 궤도 위에 올라갈 수 있도록 열심히 하는 거예요. 제가 또 참여할 수 있을지는…. (웃음) 그런데 이 작품을 한 번 한 배우들은 다 돌아오고 싶어하더라고요. 되게 마음이 벅차고, 뜨겁고, 두근거리고,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라 다들 특별한 의미가 있죠."

사랑, 그게 나의 전부란 걸

지키지 못한 혹은 지킨 약속 "그 날의 약속은 태희에게 정말 중요한 거였잖아요. 그 전에 ‘늦어도 기다려줘’라고 태희가 말했을 때, ‘기다릴게’라고 인우가 답하는 게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대화인 것 같아요. 결국 인우는 계속 태희를 기다리고, 태희가 늦게라도 인우에게 돌아가잖아요. 그 때 이 장면이 생각나게 되는 거죠. 처음 봤을 때는 ‘도대체 왜 늦었을까’라고 의문이 들 수 있지만, 나중에 곱씹어 보면 이 장면이 되게 슬프게 다가오더라고요."

▲ 지키지 못한 혹은 지킨 약속 "그 날의 약속은 태희에게 정말 중요한 거였잖아요. 그 전에 ‘늦어도 기다려줘’라고 태희가 말했을 때, ‘기다릴게’라고 인우가 답하는 게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대화인 것 같아요. 결국 인우는 계속 태희를 기다리고, 태희가 늦게라도 인우에게 돌아가잖아요. 그 때 이 장면이 생각나게 되는 거죠. 처음 봤을 때는 ‘도대체 왜 늦었을까’라고 의문이 들 수 있지만, 나중에 곱씹어 보면 이 장면이 되게 슬프게 다가오더라고요." ⓒ 서정준


이 작품을 연기하고 노래하는 배우들에게도 잊을 수 없는 필모그래피가 되는 작품. 보고 나면 병을 앓듯이 자꾸만 아프고 그리워하게 되는 작품. <번지 점프를 하다>가 돌아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처럼 이 작품을 찾아 헤맸던 배우와 관객의 간절함이었다. 그 간절함의 근원은, 이 작품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사랑이죠.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었고, 예전에는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잊고 있었던 감정들. 재연 때 아는 형이 보러 와서 정말 엄청 울고 간 적이 있었어요. 평소에는 '저 형이 감정이 있나?'할 정도였던 형인데…. (웃음) 혼자 와서 계속 참다가, 여관 신에서 너무 옛날 생각이 나서 펑펑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극 속의 사랑이나 슬픔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경험이 떠올라서, 예전에 사랑 때문에 바보같이 행동했던 기억이 생각나서….

그래서 더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 같아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감정이기 때문에 더 몰입할 수 있게 되는 거죠. 보기에는 위대하고 큰, 깊은 사랑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은, 바로 우리 주위에서 보여 지는 사랑으로 표현했으면 좋겠다고 연출께서 말씀하셨거든요. 그냥 소소하게, 현실의 사랑으로 연기하면 그게 결국 가장 위대한 사랑이라고요.

관객 분들도 더 공감해 주시는 것 같아요. 누구나 처음부터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능수능란하고 완벽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상처받고, 불구덩이에도 뛰어들고, 물도 좀 먹어보고 하는 사랑에 대해 관객 분들도 알고 계시는 거죠. 인우의 사랑을 보면서 자신의 과거, 미숙했던 사랑도 좀 떠올리게 되고요."


딸꾹질 "저는 실제로 평소에 딸꾹질을 진짜 많이 해요. 심할 땐 3일 동안 멈추지 않는 경우도 있었어요. 온갖 민간요법을 써도 안 멈추더라고요. 이런 경험이 있다 보니까, 그 설정이 캐릭터에 정말 절묘하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 딸꾹질 "저는 실제로 평소에 딸꾹질을 진짜 많이 해요. 심할 땐 3일 동안 멈추지 않는 경우도 있었어요. 온갖 민간요법을 써도 안 멈추더라고요. 이런 경험이 있다 보니까, 그 설정이 캐릭터에 정말 절묘하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 서정준


사랑이라는 감정은 참 사람을 바보처럼 만든다. 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게 되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걸 나도 좋아하게 된다. 그 사람에게 더 잘 보이고자 한껏 치장하거나 자신을 뽐내기도 하지만 그게 뜻대로 잘 되지만은 않는다. 우리 모두가 겪었고, 앞으로도 겪을 그 감정. 쑥스럽고 어색하지만 그래도 마냥 좋은 그 감정. 서인우처럼.

"인우에게 어떤 매력이 있을까? 태희는 인우를 왜 좋아할까? 이런 건 사실 알 수 없는 것 같아요. 모두의 사랑은 다 다르고, 주관적인 것이니까요. 그런데 우리도 되게 좋아하는 사람 앞에 서면 바보가 되잖아요. 머리도 하얘지고, 잘 보이기 위해 바보 같고 어처구니없는 행동도 하고…. 인우도 그랬을 것 같아요.

태희는 그걸 또 알거든요. 바보 같은 행동을 하고 있지만, 그 순수한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에 인우가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거죠. 인우의 그런 모습이 태희에게 보이지 않았을까요? 인우는 어리숙하지만, 로맨틱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현실적이지 않다고 느껴질 만큼.태희가 그런 말도 하잖아요. '애쓰지 말라'고, '나는 네가 그냥 좋은 거야"라고요. 그냥 인우라는 사람 그 자체에게 태희도 끌렸기 때문에 그 사랑에 뛰어든 거겠죠."


많은 관객이 서인우라는 인물에게 감정이입하는 건 그처럼 현실적인 사람이 현실에 발을 붙인 채로 비현실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은 그 감정의 빛을 바라게 만들고, 우리는 바라진 그 감정 앞에서 많은 것을 계산하며 머뭇거리게 되지만, 서인우는 인태희에게 또다시 달려든다.

"그래서 이게 판타지인 것 같아요. (웃음) 그런데 젊은 시절에 한 번쯤은 이런 경험이 있잖아요. 모든 걸 버리면서도, 쫓고 싶은 사랑. 다른 건 아무 것도 없이 사랑만 볼 때가 있잖아요. 이 작품은 그 맹목적인 순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사소한 것 하나하나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워 보이는 그런 사랑. 우리가 아직 현실적이지 않을 때 지닐 수 있는 모든 가치를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닌가. 이 사람과 함께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이런 게 모두가 꿈꾸는 사랑이 아닐까요. 실제로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있겠죠? 분명히 있을 거예요. (웃음) 운명이나 낭만 같은…."

뛰어내려도 끝이 아닌, 번지 점프

돌려준 라이터 "‘잘 간직해 두었다가 나중에 돌려주면 안 될까’라는 이 말이 요즘에는 너무 슬퍼요. 그게 작별의 말이라는 것을 아니까요. 그 대사 때문에 결국 다시 돌려줘야 하지 않았을까요. 약속했으니까요."

▲ 돌려준 라이터 "‘잘 간직해 두었다가 나중에 돌려주면 안 될까’라는 이 말이 요즘에는 너무 슬퍼요. 그게 작별의 말이라는 것을 아니까요. 그 대사 때문에 결국 다시 돌려줘야 하지 않았을까요. 약속했으니까요." ⓒ 서정준


그렇게 운명적으로 시작했고, 17년을 떨어져 있었고, 어렵게 서로를 다시 알아본다. 17살 남고생 임현빈이 인태희의 영혼을 지닌 이라는 걸 깨닫게 되기까지 그리고 그걸 서로 인정하기까지 현실의 벽은 지속적으로 그 두 사람을 짓누른다. 그 난관 끝에서야 다시 찾은 서로인데, 그들은 '번지 점프'를 하러 간다. 그리고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남겨둔 채, 그들은 줄 없는 번지 점프를 한다.

"사실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잘 안 돼요. 둘이 그런 엄청난 역경을 거쳐서 다시 만났는데, 왜 가서 줄도 없이 번지 점프를 할까? 처음에 영화를 봤을 때는 정말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번지 점프를 하다'라는 제목이, 뉴질랜드에 가고 싶다는 태희의 소원을 말 그대로 들어 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줄 없이 뛰어내리잖아요. 그런데 서서히 이해가 되더라고요. 둘이 결국 이 세상의 사랑이 아닌, 그걸 뛰어넘는 사랑을 했다고 생각해요.

결국, 우리의 영혼에 대한 이야기인 거죠. 그래서 있을 수 없는 '환생'이라는 장치도 극 속에 가져온 거고, 이렇게 이 세상에서의 삶은 끝내더라도 앞으로도 계속 만나게 될 것을 아는, '인연'이라는 큰 주제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지금 뛰어내려도 다시 만날 거고, 또 뛰어내려도 또 만나게 될 거라는. 너도 나를 알아보고 나도 너를 알아보게 될 거라는.

계속해서 이어질 거라고 생각해요. 그들은 그 인연 안으로 뛰어든 거죠. 계속 돌고 도는 이야기이고, 다른 상황에서 어떤 모습으로 만나더라도 서로를 첫 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번지 점프는 뛰어내려도 끝이 아니잖아요. 다시 돌아오잖아요. 각 인물의 개인적인 감정으로 설명하라면 힘들 수 있겠지만…. 결국 큰 그림에서 '인연'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결국 서로는 서로에게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해피엔딩이 아닐까요."


혹자는 그토록 지고지순한 운명적 사랑이 고작 성별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로 끝을 맺느냐며 의문을 보내기도 한다. 성소수자들의 66.8%가 1년에 1번 이상 자살을 생각하는 사회(2014년 통계청)에서 지나치게 단편적이고 도식화된 사고이다. 여전히 그들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이 존재하고, 소수자를 향한 혐오가 일상화되고, 그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법은 여전히 반발에 부딪혀 도입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심지어 극의 배경은 지금보다 소수자 혐오가 일반화되고 일상화된 18년 전이다.

그들의 선택은 자신의 범성애적 취향 혹은 동성애로 오인 받는 자신에 대한 혐오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어떤 외피를 쓰고 있든, 그들은 그저 사랑할 뿐인데 그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대로부터 탈출한 것이다. 혐오의 주체는 시대였고, 혐오의 대상은 온갖 금기에 걸쳐 있는 그들의 사랑이었다.

뜨거운 혁명가에서 따뜻한 선생님으로 "파샤와 라라의 결혼식날, 인우와 태희의 여관. 둘의 느낌이 비슷하잖아요. <닥터 지바고>의 파샤랑 <번지 점프를 하다> 인우에게는 다 비슷한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결과가 너무 극단적으로 달라서 안타까워요. 사실 둘 다 순수한 사람이거든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할 줄 모르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었죠."

▲ 뜨거운 혁명가에서 따뜻한 선생님으로 "파샤와 라라의 결혼식날, 인우와 태희의 여관. 둘의 느낌이 비슷하잖아요. <닥터 지바고>의 파샤랑 <번지 점프를 하다> 인우에게는 다 비슷한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결과가 너무 극단적으로 달라서 안타까워요. 사실 둘 다 순수한 사람이거든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할 줄 모르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었죠." ⓒ 서정준


<번지 점프를 하다>는 분명 여러 낡은 요소를 지닌 작품이다. 하지만 많은 혐오 표현을 덜어내고, 보다 동시대와 호흡하기 위해 숙고를 거듭하고 보완되어 올라온 작품이기도 하다. 추억으로만 존재할 때 가장 아름다운 것도 있을 수 있지만, 끊임없이 회자되고 부딪히고 비판받으면서도 제 역할과 기능을 할 때 더 아름다운 것도 있다. <번지 점프를 하다>는 명백히 후자에 속한다고 자신한다. 사랑의 형태가 어떻든, 사랑은 그 사랑만으로도 아름답다는, 서로 남자로 태어나든, 여자로 태어나든, 그저 만나서 사랑하면 그 뿐이라는 보편 진리가 여전히 보편화되지 못한 세상이기에 더더욱.

"이 작품은 따뜻한 작품이에요. 극 중에 안 좋은 상황들도 많긴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해 조금 더 따뜻하게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마지막 대사인 '사랑할 수밖에 없어서 당신을 사랑합니다'가 처음에는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우리가 지금 그래야 하는 게 아닐까요. 주변 사람들과의 평범하고 소소한 사랑 모두를 중요하게 여겨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미 그렇게 봐주시고 있기 때문에 큰 감동을 얻어 가시는 것 같아요. 지금 우리가 다들 바쁘고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지만, 한 번쯤 극장에 와 주시면 아름다운 시 한 편을 보고 가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실 거예요. 그만큼 젖어들 수 있는 작품이거든요.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고 극장을 나가셨으면 좋겠어요. 그건 사실 '전부'니까요. '나도 어렸을 때 이런 사랑을 했었지', '나에게도 이런 운명 같은 경험이 있었지' 이런 생각? 그래서 공연을 보고 나서 묵직한 무언가를 얻어가는 분들이 많으신 것 같아요. 저희는 익숙함 때문에 실제 삶에서는 이런 감정들을 간과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잖아요. 사랑이 와도 알아채지 못하고. 그런데 이렇게 무뎌지기 시작하면, 정말 저희에게 남는 게 없어요. 사랑하고 아끼는 것들이 없다면, 그런 것들에 대해 안타깝고, 걱정하고, 화가 나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프겠어요. <번지 점프를 하다>는 이런 것들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 정말 교훈적인 작품이에요. (웃음)"


다른 누구가 아닌 배우 강필석이 설득해가는 '사랑'이기에, 그가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기에, 그가 우수에 찬 눈으로 표현하는 사랑을 보고 들을 수 있기에 다행이다.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의 포스터 지난 6월 12일 개막하여 오는 26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관객을 맞는 뮤지컬 <번지 점프를 하다>. 어떤 부분에서는 다소 낡았고, 어떤 부분에서는 다소 투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깊이 있는 연기, 관객의 감정을 건드리는 음악이 결합한 좋은 작품이다. 국내에는 아직까지 '레퍼토리'라고 할 만큼 오래도록 사랑 받는 창작 뮤지컬이 손에 꼽는다. <번지 점프를 하다>는 그 가능성과 의의를 모두 갖춘 작품이다.

▲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의 포스터 지난 6월 12일 개막하여 오는 26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관객을 맞는 뮤지컬 <번지 점프를 하다>. 어떤 부분에서는 다소 낡았고, 어떤 부분에서는 다소 투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깊이 있는 연기, 관객의 감정을 건드리는 음악이 결합한 좋은 작품이다. 국내에는 아직까지 '레퍼토리'라고 할 만큼 오래도록 사랑 받는 창작 뮤지컬이 손에 꼽는다. <번지 점프를 하다>는 그 가능성과 의의를 모두 갖춘 작품이다. ⓒ 세종문화회관



강필석 요정인우 번지점프를하다 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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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공연문화, 연극/뮤지컬 전문 기자. 취재/사진/영상 전 부문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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