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정민.

배우 박정민.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영화 <동주> 회식 때 박정민은 이준익 감독과 동료 배우들과 함께 간 노래방에서 랩을 했다. <변산>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마침 시나리오 각색 중이던 이준익 감독은 차기작 <그것만이 내 세상>을 위해 피아노 연습 중이던 박정민에게 다짜고짜 "랩 좀 하지? 아니야? 그냥 잊어!"라는 짧은 말을 남겼고 시간이 좀 지나 박정민을 다시 찾았다.

송몽규로 분해 <동주>에서 시를 썼던 박정민은 <변산>에서 랩을 쓰는 학수가 됐다. 고향을 떠난 지 10년, 뮤지션이 되기 위해 6년 째 한 힙합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고달픈 청년이다. 영화 <변산>은 학수가 아버지의 병세를 듣고 고향에 내려가면서 부정하고 싶었던 자신의 과거들과 마주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

시가 됐던 랩, 랩을 쓴 시인

"잊으라 하셔서 진짜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것만이 내 세상> 촬영 막바지에 다음 작품은 뭐지? 생각하다가 감독님 얘기가 생각나서 전화 드렸다. 감독님 영화 얘기 하셨던 것 같은데 래퍼 이야기에요? 물었는데 다음날 바로 사무실로 오라고 하시더라. 그래서 갔더니 시나리오를 주셔서 받아왔다."

단숨에 시나리오를 읽고 난 뒤 박정민이 가진 생각은 단순했다. "웃기고 재밌을 것 같았다"며 그는 "랩보다도 이준익 감독님과 이 영화를 찍으면 재밌겠다는 느낌이 와서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이후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웃어 보였다.

그만큼 지난한 작업이었다.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 서번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피아노 천재로 분하기 위해 6개월 간 하루에 5시간 이상씩 피아노를 배운 그는 이번엔 랩을 읊조리고 가사를 쓰기 위해 촬영 3개월 전부터 매일 연습해야 했다. 고등학생 때 친구 따라 랩 동아리에 잠깐 들어가려 했던 것 외에 힙합과는 직접적인 인연이 없던 그였다. "그때 노래방에서 발라드를 불렀어도 감독님은 절 부르셨을 것 같다"며 박정민은 준비하면서 들었던 생각을 전했다.

 영화 <변산>의 한 장면.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하릴없이 고향에 내려간 학수(박정민)는 보이스피싱 용의자로 지목받기까지 한다.

영화 <변산>의 한 장면.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하릴없이 고향에 내려간 학수(박정민)는 보이스피싱 용의자로 지목받기까지 한다.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피아노와 랩을 섭렵한 것에 마치 아이돌연습생 같다는 말에 웃으며) 이제 피아노 치면서 랩만 하면 되겠다(웃음). 이번 기회가 아니면 해볼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피아노도, 랩도 시간과 마음이 필요하다. 고되지만 재밌게 했다. 랩 연습도 연습이지만 가사 쓰는 데 시간이 아주 많이 걸렸다(박정민은 영화에 등장하는 노래 중 7곡의 랩 가사를 직접 썼다-기자 말).  

한 곡 당 길면 2개월, 짧은 건 2주 정도 걸렸다. 촬영 3개월 전까진 4곡을 만들었고, 얀키 형이 많이 도와주셨다. 근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앞선 4곡은 학수가 고향에 내려가기 전 '내가 다 발라버리겠어. 두고 봐' 이런 느낌이라 큰 부담은 없었는데 이후엔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랩을 하는 게 문제였다. 학수로 이입해야 했던 만큼 고생스러워지더라. 나머지 곡들은 거의 한 달에 한 곡씩 썼던 것 같다."


영화 중간중간에 학수의 랩이 배경음악처럼 깔리기에 감정을 잘 살리는 게 중요했다. "미리 써놓은 가사도 촬영하면서 학수의 감정이 다르게 느껴져서 다 바꾸기도 했다"며 박정민은 "개인적으론 마지막 장면 (학수를 짝사랑했던) 선미에게 마음을 전하는 랩을 할 때 가장 울컥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때 산문과 시를 썼던 몽규가 지금 시대 다시 태어나 랩을 썼다면 꼭 그런 글이 나왔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진정성이 담긴 가사들이었다.

관계에 대한 고민 

힙합과 함께 <변산>은 과거 건달이던 아버지(장항선)와 고향 친구들과의 관계 회복을 이야기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학수가 품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이 영화의 주요 동력이다. 폭력과 노름에 빠져 가정을 파탄 낸 장본인, 무책임한 기성세대를 상징하는 아버지를 학수가 어떻게 대하는지가 관전 포인트인 셈.

"아들이 품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있잖나. 영화에선 그 원망이 극대화 돼 있지만 저 역시 실제로 아버지를 살갑게 대하지 못할 때가 있고 반항하기 십상이었다. 영화에서 그런 갈등을 극복 못하면 학수는 또 다시 도망가게 되니까 조금씩 시도는 한다. 용서할 수 없는 아버지, 과연 그만 잘못한 걸까 난 잘못한 게 없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

사과를 반복해서 하는 아버지를 이해 못하다가 선미(김고은)의 조력으로 그 상황을 정면 돌파 하는데 연기하면서도 용서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성세대에 대한 용서라기 보단 가족이잖나. 그리고 학수와 아버지는 똑같은 인간이다. 학수가 가족 없이 살았다지만 마찬가지로 아버지 역시 고향에서 가족 없이 살았다. 마지막 부분에선 동질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배우 박정민.

배우 박정민.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학수가 고향을 등한시 했음에도 학수 어머니의 산소를 매년 벌초해 온 세 친구, 구복(최정헌)과 상렬(배제기), 석기(임성재)도 주목해야 한다. 영화에선 이들의 이야기가 깊게 나오지 않지만 학수의 정서를 설명하고 보완하는 중요한 캐릭터들이다. 실제로 배제기는 영화 <파수꾼> 이후 박정민과 친하게 지내는 동료이고, 최정헌 역시 <동주>로, 임성재는 <순정>에서 인연을 맺었다. 세 배우 모두 이미 인연이 있는 이들이었던 것.

"10년 간 엄마의 산소를 벌초해줬다는 건 정말 친하다는 것이지. 학수가 퉁명스럽게 대해도 받아주고 그러는 걸 보면 학수에겐 정말 소중한 존재들이다. 특히 성재는 <순정> 때에서도 친구 사이로 등장했는데 석기 역을 (감독님이) 찾는다고 할 때 불현듯 생각이 나서 수소문해서 찾아냈었다. 저를 빼곤 세 배우가 지금 서울 잠실에 같이 모여 살고 있다.

제가 촬영 일정에 바쁠 때 그들끼리는 자주 봤다더라. <변산> 촬영장에서 그들이 '정민이를 돋보이게 하는 캐릭터니까 너무 튀지 말자'고 하는 얘길 들었다. 그러지 말자고 했다. '마음은 참 고맙지만 그러면 나도 죽고 너희도 죽을 수 있다. 그냥 준비한 걸 다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연기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 달라서 배우들끼리는 연기 얘긴 잘 안 하는데 우리끼린 그 일화가 있었다."


재미있는 삶 

<동주> 직전까지 박정민은 연기에 대해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모든 걸 관두고 다른 일을 진지하게 찾아볼까 생각하던 시기였다. 무명이 길고, 대체로 좋은 연기력을 보이지만 그만큼 일이 잘 안 들어오던 때 그는 성장통을 겪었다. 지금은? "현장이 재밌는 곳임을 깨닫게 됐다"며 그는 "최근 작업을 하면서 영화를 만든다는 행위가 예전과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고 답했다.

"동료들과 함께 무대인사 하고 홍보하는 과정도 재밌다. 마치 친구들과 MT를 가듯이 다니거든. 오히려 <변산> 홍보 과정이 다 끝나면 좀 쓸쓸할 것 같다." 

<변산> 이후에도 그는 꾸준히 관객을 만난다. 장재현 감독의 <사바하>, <파수꾼>을 찍은 윤성현 감독의 <사냥의 시간>에 각각 출연해 모든 촬영을 마쳤다. 최근엔 <타짜3> 출연을 확정지으며 새 작업을 위해 몸을 만드는 등 담금질 중이다. 재밌게 일을 즐기는 만큼 한층 더 다양한 그리고 편해진 그의 모습을 기대해보자.

 배우 박정민.

배우 박정민.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남은 이야기, "책을 쓴다는 것은..."

올해 초 박정민은 자신의 에세이집을 냈다. 기존의 매체에 기고하던 글을 모은 책이다. 이미 <파수꾼> 때 제작 일기를 블로그에 올려 마니아들 사이에서 화재가 될 정도 글 솜씨가 남다른 그다. 배우 외에 혹은 배우 일을 하면서 이런 글을 계속 쓸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솔직한 답변이 돌아왔다.

"음.. 남들에게 보여주는 글은 당분간 안 쓰려고 한다. 어찌 됐든 전 주업이 작가가 아니잖나. 배우이고 업종으로 구분하면 연예인이라는 업종에 있다. 연예인이니 어떤 일에 대해 가능성이 다른 분들보다는 좀 더 열려 있는 게 사실이잖나. 책 한 권을 위해, 음악 한 곡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하시는 분들에겐 좀 불친절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괜히 연예인이라는 걸 빌어서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줄까봐 고민이기도 하다.

올해 책을 내는 것도 고민이 많았다. 다만 그간 기고했던 글을 모으는 성격이라 꾸준히 봐주셨던 분들에 대한 선물이라는 생각으로 출판하게 됐다. 와, 표지 하나 나오는 것에도 엄청 공이 들어가더라. 이렇게 어렵게 나오는 건데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내고 싶진 않다. 제게도 좋지 않을 것 같고... 정말 제가 하고 싶은 애기가 있고, 쓰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당분간은 진짜 안 쓰려고 한다. 이번에 곡 작업도 4분짜리 한 곡에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담겼다. 누군가의 결과물에 대해 쉽게 판단하거나 말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다."



박정민 변산 김고은 장항선 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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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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