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까워질수록 닮아가는 두 사람의 연극 <하이젠버그> 서울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지난 4월 24일에 개막한 연극 <하이젠버그>의 공연 및 콘셉트 이미지. 75세의 알렉스 프리스트와 42세의 죠지 번스의 만남, 성장, 변화 그리고 사랑을 그렸다. 작품의 제목이 <하이젠버그>인 이유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작품에 녹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둘은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한다. 오는 20일까지.

▲ 첫 만남 그리고... 연극 <하이젠버그>는 4면으로 열려있는 무대이다. 일반적인 프로시니움과 달리 무대 위의 객석에서 보다 가까이 배우들을 관찰할 수 있다. 단순히 오픈을 위한 오픈이 아니라, 배우들이 연기하는 인물들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분명 독특한 매력을 지닌 무대이다. ⓒ 리앤홍 인터내셔날


영국 런던의 어느 기차역. 42살의 죠지 번스는 75세의 알렉스(알렉산더) 프리스트를 처음 만났다. 사실은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에게는 아주 특별한, 지금 이 자리에 있을리 없는 사람. 죠지는 충동적으로 그의 뒷목에 입술을 댔다. 그리고 자신이 착각했음을 깨닫고 당황했다. 이 상황에 대한 변명과 미안함을 두서없이 털어놓던 죠지. 하지만 그냥 자신의 착각으로 정리하고 이 자리를 떠나버리기엔, 이 늙은 남자에게 묘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알렉스 프리스트는 매우 당황스러웠다. 생전 본 적도 없는 중년의 여성이 자신에게 다가왔다. 여자가 착각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후에도,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자신의 얘기를 자꾸 털어놓았다. 남편이 어땠고,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고…. 물어보지도 않았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던 정보들이 쏟아지면서 그는 더욱 당황했다. "이상한 레일을 타고 허공을 맴도는 대화"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당신이 여기 있어서 즐거워요"라며 활달하게 끊임없이 말을 토해내는(욕설과 함께) 이 여자를 그냥 끊어버리기엔 묘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지극히 이성적이고, 건조하고, 정제된 삶을 이어온 정육점 주인 알렉스. 매우 감성적이고, 유쾌하고, 충동적인 삶을 살아온 학교 직원 죠지 번스. 노년의 남성(75세)과 중년의 여성(42세)의 만남은 이처럼 정신없었고, 뭐라고 딱 정리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처음엔 끝과 끝처럼 상반된 캐릭터인 줄 알았던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갈수록 그 '무언가'가 동질감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비록, 이 만남의 끝이 어디로 향할지는 알 수 없지만….

인생은 어디로, 어떤 속도로 가고 있는가

가까워질수록 닮아가는 두 사람의 연극 <하이젠버그> 서울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지난 4월 24일에 개막한 연극 <하이젠버그>의 공연 및 콘셉트 이미지. 75세의 알렉스 프리스트와 42세의 죠지 번스의 만남, 성장, 변화 그리고 사랑을 그렸다. 작품의 제목이 <하이젠버그>인 이유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작품에 녹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둘은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한다. 오는 20일까지.

▲ 두 배우 인물의 나이와 배우의 나이가 비슷하게 잘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이 배우들이 소화하는 인물의 매력은, 단순히 그 나이가 비슷함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인물들이 겪은 삶의 굴곡들을 이 배우들도 체화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런 연기가 무대 위로 표출됐다. 늙음을 또 하나의 무기로 장착한 정동환 배우의 연기도, 절정의 단계에 이르른 방진의 배우의 연기도 훌륭하다. 두 배우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신들이 있다. ⓒ 리앤홍 인터내셔날


지난 4월 24일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개막한 연극 <하이젠버그>는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의 극작가인 사이먼 스티븐스의 신작이다. 연극의 제목은 '하이젠베르크'의 이름에서 따왔다. 극 중 그의 이름이나 이론이 주요하게 인용되지는 않는다. 이 작품이 물리학에 관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이먼 스티븐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위치에 대한 정확성을 높이다 보면 운동량의 부정확성이 커지고, 운동량을 정확히 측정하려고 하면 반대로 위치에 대한 부정확성이 커진다.

"뭔가를 아주 가까이에서 관찰하면 말이에요. 그게 어디로 가고 있는지 혹은 얼마나 빨리 그쪽으로 가고 있는지 알아내는 건 불가능해요."

<하이젠버그>는 물리학 이론을 인생에 대한 관조로 풀어낸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얼마나 빨리 가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내가 너무 그 삶과 가까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나를 가장 잘 아는 게 나라고들 얘기하지만, 사실은 내가 생각하는 있는 그대로의 나는 실제 나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수 있고, 혹은 내가 나를 오해한 것일 수도 있다. 자아는 내가 관찰한 나만이 아니라 타인이 관찰한 나와 융합되었을 때 비로소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알았을 때에야, 우리는 우리 삶의 방향과 속도를 내가 원하는 만큼 조절할 수 있다.

죠지와 알렉스는 모두 자신의 삶을 제대로 관찰할 수 없었던 이들이다. 거짓말과 수많은 자기변명으로 자신을 보호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웠던 죠지. 아무도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지 않는 시대에, 적자뿐인 이곳에서 같이 늙어가며 쇠퇴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알렉스. 그러나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삶을 관찰하고, 간섭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각자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얼마나 빨리 그쪽으로 가고 있는지 알아내게 된다.

가까워질수록 닮아가는 두 사람의 연극 <하이젠버그> 서울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지난 4월 24일에 개막한 연극 <하이젠버그>의 공연 및 콘셉트 이미지. 75세의 알렉스 프리스트와 42세의 죠지 번스의 만남, 성장, 변화 그리고 사랑을 그렸다. 작품의 제목이 <하이젠버그>인 이유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작품에 녹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둘은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한다. 오는 20일까지.

▲ 서로 안의 서로 상반된 캐릭터가 서로의 장점으로 서로의 단점을 끌어안는 이야기였다면, 분명 그런 이야기도 매력적이지만, <하이젠버그>의 매력은 반감됐을 것이다. 흔히들 '남자는 이성적', '여자는 감성적'이라는 사회적 편견과 비슷한 캐릭터들인 것 같지만, 오히려 그들 안에 또다른 종류의 성격을 발견하게 된다. 알렉스의 말대로, '성격'이란 분류는 의미가 없다는 걸 극이 스스로 증명한다. ⓒ 리앤홍 인터내셔날


언뜻 죠지는 지극히 감성적이고, 알렉스는 지극히 이성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67년간 50단어로 매일 써온 알렉스의 일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형용사가 너무 많았다! '느낀다'는 것을 싫어했던 알렉스는 죠지 덕분에 삶의 감각을 즐길 수 있게 된다. 반면 죠지는 알렉스가 선사한 고요에 매료됐다. 원래 일방적으로 말하는 건 죠지였고, 듣는 건 알렉스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죠지는 알렉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알렉스 덕분에 "음표와 음표 사이 그 공간에" 존재하는 음악을 알게 된다.

"듣는다는 건 따라가야 해요. 그리고 그 다음엔 어떻게 될지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럼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오. 음악이란 음표에 존재하지 않아. 음표와 음표 사이 그 공간에 음악이 존재하는 거요."

외로웠던 두 사람, 불완전했던 두 사람은 서로에 의해 이전과는 다른, 하지만 오히려 본래의 자신에 더 가까운 사람이 된다. 죠지는 생각보다 과학적이고 계획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고, 알렉스는 생각보다 감성적이고 충동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들은 서로를 물들이며, 서로의 안에 감춰진 각자의 면모를 끄집어낸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보다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두 사람의 관계

가까워질수록 닮아가는 두 사람의 연극 <하이젠버그> 서울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지난 4월 24일에 개막한 연극 <하이젠버그>의 공연 및 콘셉트 이미지. 75세의 알렉스 프리스트와 42세의 죠지 번스의 만남, 성장, 변화 그리고 사랑을 그렸다. 작품의 제목이 <하이젠버그>인 이유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작품에 녹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둘은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한다. 오는 20일까지.

▲ 죠지와 알렉스의 관계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사랑이 단순히 '성애적' 혹은 '연애적' 관계에 국한되는 건 결코 아니다. 그들은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애인이면서, 동시에 서로의 아픔을 보듬는 친구이자, 알 수 없는 내일로 함께 발을 내딛는 동반자이다. 그들의 사랑은 사랑보다 큰 사랑이다. ⓒ 리앤홍 인터내셔날


작품 속 시공간을 특정할 만한 별다른 무대장치도 없고, 신과 신 사이의 구멍은 이따금 관객을 혼란스럽게 한다. 후반부에 밀려들 감정의 파고를 만들기 위해 전반부에 감정을 쌓아가고 있는 과정들은 자칫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런 가운데 온전히 두 배우의 대사와 감정 표현에 집중하고 봐야 하는 이 작품이 과연 대부분의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대중적 작품인지는 모르겠다.

특히 33살의 나이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의 관계가 처음부터 마냥 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나이 많은 남자와 상대적으로 젊은 여자의 로맨스가 차고 넘친다. 그리고 대체로 그런 로맨스에서 여자는 남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구원받는 존재이거나, 혹은 나이가 많은 남자도 의외로 매력적이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쓰인다. 그 과정에서 여성의 불행이나 장애, 그를 향한 폭력이 과하게 전시되기도 한다. 종류가 무엇이든, 결국 귀결되는 건 하나였다. 남자를 위해 존재하는 도구적 여성 캐릭터. 혹시 이 연극도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된다.

<하이젠버그>가 그런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죠지와 알렉스는 동등한 관계이다. 비록 알렉스가 죠지에게 1만5000파운드를 주지만, 알렉스에게는 평생을 모은 돈이었고, 그게 알렉스의 경제적 권력을 드러내기 위한 건 결코 아니었다. 알렉스는 나이가 많이 들었고, 죠지는 그런 알렉스의 살결이 "유럽 같아요"라면서 오래돼서 좋다고 하지만 그건 남자의 늙음을 상대적으로 미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대사는 아니다. 그건 오랜 세월을 견디고 살아낸 그의 삶을 존중하는 의미에 가깝다

비록 33살의 나이 차가 있지만, 죠지도 알렉스도 모두 세상의 풍파를 겪으며 자기 인생을 살아온, 경험치가 꽤 쌓인 인물이다. 그들은 같이 술을 마시고, 섹스를 하고, 함께 많은 감정을 공유하지만 그건 일방적인 구원도, 착취도 아니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상처와 각자의 장애를 지닌 인물이었다. 누가 누구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동질감 덕분에 평등한 관계를 구축해나가며, 이 작품은 그 동질감 위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더 빛을 발한다. <하이젠버그>의 이 빛은, 노란 색깔의 텅스텐 전구처럼 혹은 카페의 창문 밖으로 옅게 깔린 노을 빛깔처럼 따뜻하다. 그건 이 작품이 기본적으로 인간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위로하기 위해 쓰인 텍스트이기 때문이리라.

그들이 탱고를 추는 이유

가까워질수록 닮아가는 두 사람의 연극 <하이젠버그> 서울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지난 4월 24일에 개막한 연극 <하이젠버그>의 공연 및 콘셉트 이미지. 75세의 알렉스 프리스트와 42세의 죠지 번스의 만남, 성장, 변화 그리고 사랑을 그렸다. 작품의 제목이 <하이젠버그>인 이유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작품에 녹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둘은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한다. 오는 20일까지.

▲ 두 사람의 탱고 죠지와 알렉스는 그들의 관계에 어떤 결론을 내리는 대신 탱고를 춘다. 그들에게 있어서 어차피 내일은 예측 불가능한, '불확정성'의 영역일 뿐이다. 다만, 그래서 불안한 게 아니라, 그렇기에 이 삶이 더 아름답고 가치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들은 지금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다. ⓒ 리앤홍 인터내셔날


아들을 찾기 위해 미국까지 온 죠지. 죠지를 위해 기꺼이 함께 날아온 알렉스.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던 죠지는 알렉스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깨닫는다.

"내가 한 주만 더 있어달라고 부탁하면 당신은 기꺼이 그렇게 할 거야. 그렇죠? 내가 다른 곳에 같이 가자고 하거나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자고 해도 당신은 기꺼애 해줄거야. 그렇지? 기꺼이. 그렇지?"

"물론, 기꺼이 그렇게 해줄 거야"라는 알렉스의 대답. 죠지는 알렉스에게 데이트가 아니라 연애를 제안한다. 하지만 앞으로 몇 번의 생일이 남았을지 모르는 알렉스에게, 죠지와의 만남은 두렵기만 하다. 자신이 죽은 듯이 잠을 잘 때, 잠시 자신이 죽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슬퍼서 눈물을 흘린 죠지이니까. 알렉스에게도 죠지는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떠났을 때에 죠지가 자기 때문에 그토록 슬퍼하는 걸 견딜 수 없다.

"우린 얼마간의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겠지. 나이가 들수록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사실은 모든 게 너무 짧다는 거야. 너무나 짧아. 인생이 불공평한 것 같아. 이제야 조금 뭔가 알아가는 것 같았는데 말이지."

중년과 노년이 되어서야 인생의 중요한 걸 알게된 두 사람. 서로 사랑하면서도 앞으로의 관계가 또 어떻게 변할지 몰라서 두렵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간절히 필요한 두 사람. 두 사람은 마지막에 키스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한 번의 섹스를 하는 것도 아니고, 탱고를 춘다. "전문 댄서"하고만 춤을 춘다며, 죠지가 가르쳐달라는 걸 알렉스가 거절했었는데, 언제인지도 모르게 죠지는 알렉스와 탱고를 추려고 이 춤을 배워왔다.

즉흥의 춤. 우리 인생처럼, 다음의 발걸음에 주저앉거나 넘어질지 아니면 또 한 번의 멋진 스텝이 될지는 그 한걸음을 내딛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이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삶이 어느 방향으로 어떤 속도로 갈지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무엇을 선택하든, 그들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관찰하고 있으니까.

가까워질수록 닮아가는 두 사람의 연극 <하이젠버그> 서울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지난 4월 24일에 개막한 연극 <하이젠버그>의 공연 및 콘셉트 이미지. 75세의 알렉스 프리스트와 42세의 죠지 번스의 만남, 성장, 변화 그리고 사랑을 그렸다. 작품의 제목이 <하이젠버그>인 이유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작품에 녹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둘은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한다. 오는 20일까지.

▲ 가까워질수록 닮아가는 두 사람의 연극 <하이젠버그> <하이젠버그>는 연극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한 번은 봐두고 머리와 가슴에 저장해둘 만한 작품이다. 취향에 따라 호일 수도 있고, 불호일 수도 있으나, 이 정도의 관록 있는 배우들이, 이런 텍스트 위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보는 건 결코 흔한 기회가 아니다. 오는 20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 리앤홍 인터내셔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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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불륜'을 저지른 의사, 그가 전쟁터에서 마주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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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안드레예비치 지바고. 부유한 지바고 가의 후계자였으나 어려서 부모님을 잃은 그는 자애로운 그로메코 부부의 손에 자라게 된다. 그로메코 부부의 딸인 토냐는 유리의 친구로서 언제나 곁에서 지지하고 응원해줬다. 시인이자 의사로 성장한 유리 지바고의 미래는 탄탄한 것처럼 보였다.지바고와 그로메코가 하나 되는, 유리와 토냐의 결혼식 날. 한 여인이 결혼식장에 들어와 부패한 법조인이자 부르주아인 코마로프스키에게 총구를 겨눈다. 총알은 그를 빗나가지만, 유리 지바고는 그 여인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독일과의 전쟁을 위해 떠나는 길에 다시 스쳐 마주친 그녀. 그리고 전선의 야전 의무실 천막에서 세 번째로 마주한다. 라라 안티포바. 참전 이후 소식이 끊긴 남편을 찾으러 왔다는 그녀는 의사 닥터 지바고가 아니라 시인 유리 지바고를 기억하는 이 중 하나다. 모스크바에서는 그가 남긴 시가 많은 이의 위로가 되고 있으니까. 특히 빗속의 여인…. 라라는 지바고의 시에 등장하는 그 빗속의 여인이 자신이란 걸 모른다.전쟁과 혁명이 맞물려 소용돌이치던 격변의 러시아. 그 속에서 유리 지바고와 라라 안티포바 사이에 특별한 감정이 싹 튼다. 그들에게는 이미 다른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선택받지 못한 세계, 사랑 없는 혁명 뮤지컬 <닥터 지바고>를 여는 넘버는 'Two Worlds'이다. <닥터 지바고>는 두 세계의 충돌, 그리고 그 충돌 사이에 어느 쪽 세계도 선택하지 못한 채 끼어버린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이다. 라라는 선택받지 못한 세계의 사람이다. 한때 선택받는 세계를 동경하여 코마로프스키가 건네는 샴페인 잔에 취하고, 흐르는 음악에 몸을 맡겼으나(No.06 'When the music played') 그건 결국 자신을 노예의 길로 묶어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라라는 직접 인쇄한 팸플릿을 파샤에게 나눠줄 정도로 당대 러시아의 현실 문제에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였다. 철도 노동자의 아들이자 마르크스주의자였던 파샤와의 새롭게 시작될 내일을 그리는 사람이, 그와 사상적 접점이 없었을까. 파샤 역시 라라를 사랑했다. 그러나 라라가 코마로프스키에게 성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착취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파샤는 "이 부르주아 개새끼들!"이라고 외치면서 뛰쳐나간다.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계급 사회의 모순이 낳은 직접적 피해자라는 사실을 체감하면서 그는 급진 혁명을 통해서 이 러시아의 앙시엥 레짐을 파괴하기로 마음먹는다. 파샤는 라라에게 새로운 러시아, 완벽한 러시아, 모두가 평등하고, 아무도 착취당하지 않는 세계를 건설하여 선물하고 싶었다. 군인들을 설득하고, 무장봉기를 주도하며 적색군의 사령관이 된 스트렐니코프의 가장 큰 추동력은 결국 이거였다. 그러나 라라는 동시에 지바고의 시를 감상하고 그 시에 감동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파샤가 라라에게 주고자 했던 세계는 그러한 '시'가 발붙일 수 없는 세계였다. 그래서 라라는 파샤의 세상에서 행복할 수 없었다. 파샤를 기다리고, 파샤를 찾아 나서도 그저 파샤는 멀리서 라라를 바라보기만 할 뿐 숨 막히는 투쟁의 공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자신이 줄 수 없는 것을 라라에게 줄 수 있는 부르주아 유리 지바고를 시기했고, 동시에 그렇기에 지바고를 해칠 수도 없었다. 혁명 이후 모스크바에서 유리아틴으로 도망친 지바고를 적군의 전선으로 떨어트려 놓은 것도, 그러면서도 지바고의 신변에 직접적 위해는 가할 수 없도록 관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파샤는 죽을 때가 되어서야 자신의 실패를 인정한다. 라라를 사랑하여 라라를 해방시키고 싶었으나, 정작 그 혁명 안에는 자비도, 시도, 인간애도, 사랑도 없었던 모순에 봉착했다. 그리하여 그는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을 기록하라고 주문한다. 그리고 스트렐니코프가 아니라 파샤 안티포브로 죽는다. 사랑 없는 혁명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그런 혁명 속에서는 라라가 살 수 없음을, 그래서 죽을 때에야 라라의 사랑으로 죽고자 했던 인물이다. 라라는 파샤 안티포브가 아닌 스트렐니코프를 사랑할 수 없었고, 그 대신 유리 지바고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선택받은 세계, 혁명 없는 사랑 반면 유리 지바고는 선택받은 세계의 인물이다. 8살에 아버지를 잃었지만, 귀족 계급의 연대 속에서 그는 따뜻하고 풍요로운 상황에서 자랄 수 있었다. 그러나 유리는 음악이 흐르는 귀족 세계 밖의 움직임에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빵을 요구하며 전쟁을 거부하는 노동자와 시민들. 총성과 피 냄새가 진동하는 거리에서 유리는 황제의 진압으로 인해 부상을 입은 이를 치료한다. 코마로프스키는 그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며 외면할 뿐인 현장을, 유리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치료가 끝난 후 결혼식장으로 향한 유리. 그러나 결혼식장에서는 샴페인 잔을 부딪치며 궁궐 밖 세상을 폭도들의 소란 정도로 치부한다.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이렇게 우리만 행복해도 되는 걸까. 부르주아 지식인 유리 지바고는 그런 세계에서 살 수가 없었다. 유리가 라라의 눈빛에 흔들린 건, 그 다른 세계를 처음으로 마주했기 때문이다.유리는 전쟁터에서 잠까지 줄여가며 한 명의 병사라도 더 살리기 위해 애썼다. 전쟁에서 그가 목격한 건, 황제의 의미 없는 명령에 애꿎은 목숨을 버려가는 러시아 동포들의 절규였다. 간신히 살려낸 병사(얀코)를 덧없이 다시 잃어야 하는 세상이었다. 황제와 귀족이 지배하는 세계, 어린 병사가 고향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끝내 편지조차 전하지 못하고 죽는 세계. 군인들이 전쟁을 거부했을 때, 그가 만약 선택받은 세계에 충실한 귀족이었다면 다른 장교처럼 전선으로 향하자고 병사들을 재촉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걱정하는 건 부상병들의 안위뿐이었다. 그곳에서 그를 이해하고 함께해주는 건, 다른 세계에서 온 라라뿐이었다. 토냐는 분명 착하고 헌신적이며 사랑스러운 인물이다. 토냐는 선인이고, 지바고를 사랑하지만, 혁명 없는 사랑 속에서 지바고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로메코로 대표되는 토냐의 세계에서 그는 시를 쓸 수 없었다. 혁명 이후에 우리가 예전에 몇 가지 코스 요리를 먹었는지를 헤아리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다고 그저 한숨 쉬는 그로메코이니까. 유리 지바고는 혁명 이후의 세상에서 숨 쉴 수 없지만, 그렇다고 혁명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사람이다. 토냐는 왜 지바고에게 시를 쓰지 않느냐고 다그치지만, 당연하지 않은가. 밖에서 사람은 죽어가고, 시는 단 한 명의 사람도 구하지 못한다. 이런 환경에서 그는 그저 버티는 것만으로도 버겁기만 하다. 혁명 이전의 시기나, 혁명 이후의 시기나, 시처럼 미약한 온기가 깃들어 있기에 러시아는 너무 추운 동토였다. 황제의 군대에 있을 때나, 적색군에 끌려갔을 때나 그들이 찾는 건 의사로서의 지바고 뿐이다.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사람. 그러나 사람을 살리는 건 의료기술만이 아니다. 인간은 빵이나 사상만으로는 살 수 없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건, 그 아무 쓸모없는 시 한 줄, 사랑의 속삭임 한 마디뿐이었다. 적색군에 끌려다니던 그는, 위급한 병사에게 투여하려던 모르핀을 빼앗기고, 자살을 시도한 여인의 숨을 자신의 손으로 끊어주던 그는, 더 이상 이곳에 있어봤자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될 뿐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시를 쓸 수 있는, 라라의 품으로 돌아간다. 혁명 없는 사랑도, 사랑 없는 혁명도 두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다. 유리와 라라는 선택받은 세계와 선택받지 못한 세계 사이에 끼어버린 인물이었다. 각각의 세계를 대표하는 토냐와 파샤는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없었다. 유리와 라라는 오로지 얼어붙은 벼랑 끝에 간신히 하나 남은 겨울나무 새잎이었다.아쉽기만 했던 <닥터 지바고> 2012년 이후 6년 만에 돌아온 뮤지컬 <닥터 지바고>가 지난 7일 폐막했다. '성황리에 폐막했다'라는 상투적 표현을 쓰기에는 머뭇거려지는 성과였다. 스크린에 의존하는 빈약한 무대도 한몫했지만, 뮤지컬 <닥터 지바고>의 진정한 패착은 시대적 맥락을 덜어내고 유리와 라라의 감정에 집중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오히려 그러한 연출적 선택이 유리와 라라의 사랑에 관객이 몰입할 수 있는 길목들을 끊어내 버린 셈이다. <닥터 지바고>의 주제는 '혁명 속에 피어난 운명적 사랑'으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그 '혁명'이 무엇인지, 그들은 왜 이 혁명 속에서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지가 설득되어야 한다. 코마로프스키 캐릭터도 헷갈렸지만(그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철저했던 악인인가, 아니면 라라를 사랑했으나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인물인가) 결국 파샤와 토냐의 세계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 명강사 최진기까지 불러들여 <닥터 지바고>의 배경이 되는 혁명사에 대해 개괄적으로 설명했지만, 작품 안에서 설명되지 않는 걸 외부 요소로 충족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됐다. 외부 요소를 통해 더 재미와 의미가 확장되는 건, 작품 안에서 충분히 이해되고 설명되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만 가능한 이야기이다. 두 세계는 왜 갈등했는지, 유리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황제와 귀족의 치세 하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느낀 건지, 파샤와 러시아 민중은 왜 그토록 혁명을 간절히 원했었는지, 그 혁명은 왜 애초 목표와 다른 방향으로 굴러갈 수밖에 없었는지, 구시대를 대표하는 귀족들은 왜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 왜 라라는 파샤와 행복할 수 없었는지, 무엇보다 왜 유리는 토냐의 사랑만으로는 살 수 없었는지….적절한 부재료가 있을 때 주재료도 빛난다. 약간의 소금이 단맛을 더 강하게 한다. 적당한 안개꽃이 가운데 장미꽃을 더 빛나게 한다. 유리와 라라의 사랑에 집중하다가 오히려 유리와 사랑의 설득력을 잃어버렸다. 그러다보니 뮤지컬 <닥터 지바고> 속에서 유리는 지고지순한 토냐를 배신한 불륜남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그저 유약하고, 욕망에 쉽게 흔들리는 부르주아 지식인의 한 사람일 뿐이다.작품 속에서 지바고가 시를 쓰는 순간들은 라라를 통해서 숨 쉴 여유를 찾았을 때뿐이었다. 그의 시는 러시아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지만, 혁명으로 완성된 러시아에서는 금서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다른 세상에서는 인류애를 간직하고픈 이들에게 한줄기 빛이 되어 어둠의 시대를 지탱하는 글이 되었다. 그러나 허술한 서사 속에서 그들에게 왜 '시'가 의미가 있었는지,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는 제대로 드러나지 못한 채 퇴색되어 버렸다.<닥터 지바고>는 우리가 건설하고자 추구해야 할 세계가 무엇인지 제시할 수 있었다. 현실에 눈 돌린 채 낭만과 환상만이 가득한 사회는 위선과 착취의 세계이다. 반면 현실의 불평등을 제거하여 인간을 해방하겠다는 목표 아래에 또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세계는 모순적이다. 혁명 없는 사랑은 공허했으며, 사랑 없는 혁명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바고와 라라가 원했던, 사랑과 혁명이 공존하는 세계를 두 사람의 연결을 통해 더 강렬하게 보여줘야 했다.결과적으로 <닥터 지바고>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음율, 시적이고 미려한 가사 위에서 섬세하게 조율된 배우들의 감정 연기를 감상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동시에 2018년의 <닥터 지바고>는 그 감정들이 엉성한 서사 위에서 긴 여운을 남기지 못한 채 순식간에 흩어져 버려서 화가 났다. 이렇게 훌륭한 배우들을 데리고 이 정도로밖에 뽑아내지 못한 것은 프로듀서의 역량이 부족한 탓인지, 연출이 방향을 잘못 잡은 탓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이대로는 <닥터 지바고>의 브로드웨이 재도전도, 국내 세 번째 공연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뮤지컬 '웃는 남자' 뒤에서 벌어진 일... 씁쓸하다

[안 뻔한 티켓북] 모순에 둘러싸인 뮤지컬 산업... <웃는 남자> 보고 웃지 못한 이유

잔인한 시대였다. 식민지 개척이 시작되면서 막대한 부가 쏟아지던 영국. 부를 독점한 귀족들은 자신들의 부유함을 과시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희소한 물건을 넘어, 이국적 동‧식물로도 만족하지 못한 그들은 사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기형의 아이들이 전시용으로, 애완용으로 거래되었다. 그러나 선천적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는 아이들의 '공급'은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수요가 있는 곳에 시장이 생기는 법. 이제 전문적으로 기형의 아이들을 만들어 내는 집단이 출연했다. 콤프라치코스. 아이들을 납치해 뼈를 뒤틀고 입을 찢은 뒤 팔아넘기는 자들. 어린 그윈플렌 역시 콤프라치코스에게 붙잡혀 강제로 입이 찢어졌다. 그리고 버려졌다. 숲 속에서 추위에 떨던 그윈플렌은 동사한 한 여인의 품에서 죽어가고 있는 어린 아이를 발견한다. 그윈플렌은 그 여자 아이를 품에 꼭 안은 채 방황하다가 떠돌이 약장수인 우르수스의 마차를 마주한다. 세상의 끔찍한 섭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그렇기에 그 섭리를 지극히 혐오하면서도 가장 충실히 따르는 우르수스. 그러나 입이 찢어진 남자아이와 눈이 먼 여자아이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자기 품으로 거둔다. 우르수스의 보살핌 아래에서 장성한 그윈플렌과 데아는 길거리에서 공연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유복한 건 아니었지만, 그윈플렌과 데아는 그래도 함께 노래하고 함께 꿈꿀 수 있었다. 이 쇼의 주인공은 찢어진 입 덕분에 '웃는 남자'로 불리는 그윈플렌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이 독특한 광대의 얼굴을 구경거리 삼아 몰려들었다. 앤 여왕의 이복동생 조시아나 공작은 그윈플렌을 보자마자 이 기괴한 외양의 남자에게 매료된다. 그윈플렌의 혈통에 대해 알게 되기 전까지는… 관객의 기대를 충족하다 EMK뮤지컬컴퍼니(아래 EMK)의 신작 <웃는 남자>는 '역작'이라 불릴 정도로 공을 들인 티가 많이 나는 작품이다. EMK는 라이선스 작업을 통해 체득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EMK산(産) 대형 뮤지컬을 성공적으로 올리기 위해 무던히도 애써왔다. <웃는 남자>는 그 우여곡절의 역사에 기념비가 될 만한 성과이다. 2013년부터 5년 동안 175억 원의 제작비를 쏟았다는 <웃는 남자>는 그 돈을 쓴 값을 톡톡히 보여준다. 우선 외형적으로 딱히 흠결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체에 가깝다. 모두가 경탄하는 무대가 우선 그 첫째이다. 오필영 무대감독은 자신의 결과물을 자랑스러워 할 자격이 충분하다. 상하좌우뿐만 아니라 전후로도 무대를 적극 활용하면서 대극장 무대의 공간감을 극대화시켰다. 전형적인 프로시니엄 무대에 충실하면서도, 기존까지 관객들이 프로시니엄에 가지고 있던 인식을 깨트린다. 로버트 요한슨의 연출, 프랭크 와일드혼의 작곡, 잭 머피의 작사라는 트라이앵글은 권은아 협력연출의 번역과 김문정 음악감독의 손끝이 더해지며 보다 완벽해졌다. 음악의 힘은 미려한 가사를 통해 보다 폭발적인 힘을 갖게 되었고, 그 힘은 김문정 음악감독의 지휘와 오케스트라에 의해 객석 전체를 전율케 한다. 물을 튀기는 빨래터 신을 포함해 작품 전체적으로 안무의 구성도 짜임새가 확고하다. 의상은 매혹적이면서도 세련됐고, 적재적소에 쓰인 영상도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일관성 있게 끌고 간다. 이 작품을 구성하는 외적 요소들 하나하나가 치밀하게 서로 조응한다. 결과적으로 <웃는 남자>는 대극장 뮤지컬을 보러 가는 관객의 시각적‧청각적 기대를 십분 만족시킨다. 최단 기간 10만 관객 돌파에 연장 공연까지 괜히 이뤄진 게 아니다. 물론, 내적으로 들여다보았을 때 아쉬움은 있다. 특히, 데아와 조시아나로 대비되는 여성 캐릭터 쓰임이 그렇다. 크게 보면 <지킬 앤 하이드>의 엠마와 루시의 대비에서 여전히 채 벗어나지 못한 모양새다. 데아는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주로 그윈플렌을 기다리는 역할로 한정된다. 흰색을 활용하여 순수함을 부각시키고 이미지화하는 여성 캐릭터는 사실 많이 전형적이다. 화려한 색감의 조시아나 공작은 본인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나,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지는 못한다. '내 안의 괴물'을 부르며 외양은 아름다우나 내면의 뒤틀림을 인정한 조시아나는 그윈플렌과 정반대의 위치에 놓여있던 인물이다. 오히려 그 인물이 그윈플렌의 의회 연설을 유일하게 귀담아 듣게 된다. 모순적이면서도 풍성한 매력을 더 뿜어낼 수 있었던 조시아나이지만, 안타깝게도 극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너무 제한적이다. 그래도 여성 원톱극을 표방했음에도 여성 혐오적 캐릭터 설정으로 수준 이하의 완성도를 보였던 <마타하리>보다 훨씬 낫다. 또한, 이는 전체적으로 주연과 조연의 밸런스가 잘 안 맞은 탓도 있다. 앤 여왕이나 더리모어 경처럼 훌륭한 신 스틸러들이 있음에도 역량을 발휘할 기회가 충분치 않다. 바꿔 말하면, 그 적은 기회 속에서 조연 배우들 중 누구 하나를 지칭할 것 없이 모두가 제 역할의 이상을 해낸다. <웃는 남자>의 휴머니즘 어렸을 때 버려졌던 그윈플렌은 사실 고귀한 혈통이었다는 점이 밝혀진다. 그는 '최고로 높은' 귀족이 됐다. 거대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화려한 옷을 입고, 하얀 가발을 썼다. 그윈플렌은 '모두의 세상(I Could Change The World)'을 부르며,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세상을 보다 평등하게 바꾸려고 한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우르수스에게 보낸 금화는 '배달 사고'로 인해 대부분 전달되지 못했다. 의회에서 부르는 '그 눈을 떠(Open Your Eyes)'의 울림은 여왕과 귀족에게 전혀 닿지 못했다. 그가 천국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사실 진정한 천국이 아니었다. 영국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빅토르 위고가 프랑스를 배경으로 쓴 <레미제라블>과 여러 면에서 대조된다. 혁명을 통해 사회적 부조리를 뒤엎으려고 시도하는 <레미제라블>에 비해, <웃는 남자>는 그윈플렌이 부와 신분을 포기하고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현실적으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바꿀 수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구조를 바꾸는 건 개인 혼자서 불가능하다. 그윈플렌이 아무리 신분이 높아도, 그가 눈물을 흘리며 의회에서 혼자 절규하더라도, 권력의 단맛에 취한 이들이 스스로 그 기득권을 포기할 리 만무하다. <웃는 남자>는 세계를 변혁시키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지만, 그저 한 사람의 대화와 설득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윈플렌의 노래를 향한 관객의 박수가 끝나기가 무섭게 앤 여왕이 그윈플렌을 향해 날리는 조롱과 멸시는, 기실 이 사회의 기득권이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의 한 단편이다. <웃는 남자>를 관통하는 메시지이다. 지옥에 있는 이들은 낙원을 동경한다. 하지만 그 낙원을 등지고 기꺼이 지옥으로 발걸음을 돌린 그윈플렌을 통해, <웃는 남자>는 누가 더 '인간적'인지 역설한다. 장애를 지니고 있고, 상처 받고, 소외당하며 버려진 이들이지만 서로 연대하여 희로애락을 나누는 밑바닥 인생들. 이 낮은 자들은 카르텔 안으로 똘똘 뭉쳐 착취에 열을 올리는 높으신 분들과 강렬하게 대비된다. 민중 지향적이었던 빅토르 위고의 휴머니즘이 뮤지컬 <웃는 남자>에도 남아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메시지 탓에 <웃는 남자>를 보고 나오는 뒷맛이 매우 씁쓸해진다. 이 거대한 형용모순 연극‧뮤지컬 배우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난한 직업군 중 하나이다. 한국고용정보원이 2016년에 발표한 '2015 한국의 직업정보'에 따르면, 연극‧뮤지컬 배우의 평균 초임연봉은 703만 원, 평균연봉은 980만 원이었다. 3년 전 조사이지만, 2018년의 현실이 2015년과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반면, 어떤 배우는 회당 5000만 원 이상을 받는 게 현실이다. 1년에 980만 원을 버는 배우와 한 회차에 5000만 원을 버는 배우가 공존하는 걸 그저 자본과 시장의 논리로만 이해해도 되는 걸까. 스타마케팅에 의존한 대한민국 공연계에서, 주연 배우와 조연‧앙상블 배우의 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동시에 앙상블에서 조연을 거쳐 주연까지 성장할 기회의 사다리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특정 배우의 회차당 출연료가 갱신되면, 다른 인기 주연급 배우들의 몸값도 덩달아 상승하게 된다. 물론, 그만큼 객석을 채울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계약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그 주연 배우의 몸값을 위해 어딘가에서는 희생이 불가피하다. <웃는 남자>에 출연 중인 한 배우는 최근 자신의 SNS에 부실한 무대 환경과 별반 달라지지 않는 열악한 처우에 대해 토로하기도 했다. 배우만이 아니다. <웃는 남자>는 화‧수‧목 평일 티켓값과 금‧토‧일 주말 티켓값이 다르다. 주말 티켓값이 평일보다 1만 원 더 비싸다. 같은 공연의 평일과 주말가에 차등을 둔 국내 첫 사례라는 점에서 <웃는 남자>는 대한민국 뮤지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VIP석 14만 원'이란 관객들의 심리적 상한선이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이 훌륭한 선례를 오디컴퍼니의 <지킬 앤 하이드>도 그대로 따라했다. 주말을 이용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공연을 보는 관객에게 피해가 더 쏠리는 건 덤이다. 관객이 지불하는 티켓값이 오르는 만큼 주연뿐만 아니라 그 외 배우들의 처우도 개선되고 있는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연습 기간 동안 아무런 페이를 받지도 못하고, 차기작 캐스팅을 빌미로 출연 단가를 후려치기 당하고, 그나마 정산조차 제대로 못 받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올라가기로 했던 공연이 갑자기 엎어져도 어디 호소할 곳도 없는 게 다수 배우의 현실이다. 앙상블들의 페이는 동결된 지 꽤 오래이다. 스태프는 또 어떠한가. 어떤 회사가 갑작스럽게 폐업을 해도 그 회사에서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다른 회사에서 비슷한 일을 또 하지만, 일반 스태프는 퇴직금조차 못 받고 생계를 걱정해야 한다. 2500시간 넘게 무료노동을 해야 했던 충무아트센터 노동자들이 지난 5월부터 파업에 돌입했다. 해결된 것 없이, 노동쟁의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지난 9월 6일, 김천시 문화예술회관에서 무대를 준비하던 조연출이 추락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해당 조연출은 계약서도 쓰지 않고 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어떤 회사는 '또' 페이가 밀리기 시작했다는 뒷말이 들려온다. 이 모든 게 EMK의 혹은 <웃는 남자>의 탓은 아니다. 몇몇 작품에서 높은 몸값을 받는 배우 개인의 문제도 결코 아니다. 그러나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 것이다"라는 <웃는 남자>의 메시지에서 굉장한 형용모순이 느껴진다. <웃는 남자>라는 무대 자체가 부자들의 낙원이라면, 이 낙원은 어떤 사람들의 지옥으로 세운 것일까. 귀족들을 향해 "끝도 없는 욕망 속에, 길들여진 시선 속에, 누군가의 지옥으로 세운 천국"이라고 그윈플렌은 일갈하지만, 정작 그 그윈플렌의 낙원을 위해 희생된 누군가는 없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 것이다"라는 그 문장 자체를 <웃는 남자>는 가장 잘 표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 뮤지컬 산업의 외양적 화려함과 내면적 부실함, 밖으로는 낭만을 팔면서 안으로는 착취로 굴러가는 거대한 모순이 이 작품 하나에 다 집약되어 있는 것일지 모른다. <웃는 남자>를 보며 내가 웃을 수 없었던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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