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 학생의 죽음, 그 이후... 국립극단의 청소년극 <사물함> 공연 사진. 연극 <사물함>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한 고등학생이 창고 붕괴로 사망한 이후 남은 학생들 간의 갈등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어른들 사이의 계급 문제는 학생들조차도 갈라놓았다. 아이들은 순수하지도 순진하지도 않다. 그러나 이 학생들에게서 나는 냄새는, 어른에게서 옮겨온 냄새들이다.

▲ 편의점 아르바이트 학생의 죽음, 그 이후... 연극 <사물함>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한 고등학생이 창고 붕괴로 사망한 이후 남은 학생들 간의 갈등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어른들 사이의 계급 문제는 학생들조차도 갈라놓았다. 아이들은 순수하지도 순진하지도 않다. 그러나 이 학생들에게서 나는 냄새는, 어른에게서 옮겨온 냄새들이다. ⓒ 국립극단


고등학생 다은은 편의점 아르바이트 노동자다.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그에게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아마도, 생계유지에 필수적인 활동이었을 테다. 그렇기에 다은은 최저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이 자리에 버티고 있다.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닌데도, 창고에서 물건이 떨어지거나 훼손되면 다은의 월급에서 차감된다.

다은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좋은 냄새가 나는,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그곳으로 다은은 갈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 이곳을 벗어났을 때의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불합리하고, 힘들지만, 그래도 이곳은 일하는 공간이자 동시에 얼마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다은은 일하는 와중에 틈틈이 유튜브 방송을 한다. 비록 보는 사람은 1명에서 많아봤자 3명 정도이지만, 다은은 언제나 발랄한 표정과 말투로 SNS 공간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주제는 '편의점 폐기 음식'이다. 폐기 시간까지 팔리지 않는 음식을 직접 먹어보고, 이에 대해 리뷰하는 방송. 장조림 김밥, 트리플 버터 치즈 샐러드, 리얼 스윗 포테이토 샌드위치, 멜론 맛 피자…. 폐기 시간까지 선택되지 않아 버려지는 건 사람인가, 상품인가? 그래도 다은은 신나게 리뷰를 하고, 리뷰하면서 자신의 근무환경에 대해서도 투덜거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 영상은, 비록 별 관심은 못 받을지언정, 차곡차곡 기록이 되어 쌓인다.

편의점은 그런 곳이다. 노동의 공간이자, 유희의 공간, 다은의 삶이 끼어서 머무는 곳. 아니, 그런 곳이'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누구의 책임인가

편의점 아르바이트 학생의 죽음, 그 이후... 국립극단의 청소년극 <사물함> 공연 사진. 연극 <사물함>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한 고등학생이 창고 붕괴로 사망한 이후 남은 학생들 간의 갈등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어른들 사이의 계급 문제는 학생들조차도 갈라놓았다. 아이들은 순수하지도 순진하지도 않다. 그러나 이 학생들에게서 나는 냄새는, 어른에게서 옮겨온 냄새들이다.

▲ 학생들의 관계 고성적을 노리는 학생들의 특별과외반. 이 반에 원래는 없었던 연주가 끼어 들어온다. 연주는 다은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다은과 얽혀 있는 한결과 혜민은 연주가 껄끄럽다. 재우 역시 연주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가운데, 연주가 이곳에 들어오고자 했던 건 단순히 '성적 향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 국립극단


지난 6일까지 서울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공연되고 폐막한 국립극단의 청소년극 <사물함>의 주인공들은 모두 고등학생이다. 다은, 한결, 연주, 재우, 혜민 다섯 명은 각자 꼬인 관계 속에서 정체되어 있다. 직접적인 사건은 없다. 연극은 그저 다은의 죽음을 기점으로 나뉜 두 개의 시간축이 정반대의 방향으로 달려나가는 걸 보여줄 뿐이다. 한 개의 시간은 다은의 유튜브 방송이다. 사고 직전에 있었던 방송부터, 그 전 방송 그리고 그 전 방송으로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또 하나의 시간은 남은 학생들의 이야기이다. 시험은 다가오고, 공부는 제대로 못 했고, 그 와중에 다은의 사물함에서는 정체 모를 냄새가 난다. 아이들은 다시 과외를 시작하고, 시험을 보고, 성적과 소문에 대해 하소연한다.

순행하는 시간과 역행하는 시간 사이에는, 직접적 묘사 없이 그저 설명만 될 뿐인 다은의 죽음이 있다. 다은은 죽었다. 편의점 창고가 무너지는 사고가 있었고, 다은은 살아남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그저 하나의 사건으로만 남는다. 사건. 이 무미건조한 두 글자에는 어떤 추모나 애도도 없다. 남은 건 그저 이 사건을 수습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몸부림이다. 돌아가라고 종용하는 어른들의 태도, 예컨대 누구를 위한 건지 알 수 없는 심리상담 같은 것들을 포함해서.

이 작품에서 어른은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청소년극이니까. 그런데 그 청소년들의 처지는 결국 어른들의 처지가 대입되고 재생산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편의점의 점주는 혜민의 부모였고, 그 편의점이 입점한 건물의 주인은 한결의 부모이다. 이런저런 전조 현상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다은을 착취하는 데 급급했던 혜민의 부모. 그런 부모를 둔 혜민은 주변의 소문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고, 자신을 향한 손가락질을 견딜 수 없다. 그것은 혜민의 잘못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그건 혜민의 부모 잘못인가?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임금까지 줄여가며 자신들이 직접 점포를 운영해야 했던, 그렇게 해도 사실 삶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던 그들. 혜민의 부모는 절대 악이 아니다. 그저 여러 나쁜 어른들 중 하나였을 뿐. 그리고 그 죄악은 세입자를 착취하던 한결의 부모로 이어진다.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정점에 자리 잡은 부동산 소유자들. 그렇다면 또 한결의 부모가 절대 악인가? 쉽게 답할 수 없다. 그렇게 그들은 다은의 목숨값을 서로 떠넘기며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죽음을 하나의 사고로 박제하려할 뿐이다. 그 갈등에 치이는 건 그들의 자녀이고, 학생들 사이 소문에 괴로워하는 게 그들의 아이들인데도.

그저 시험을 잘 보라고, 성적이나 잘 유지하라고, 심리상담 후 빠르게 공부에 복귀해서 부모의 자랑이 되라고 할 뿐이다. 학생은 부모의 욕망을 대리 실현하는 도구로서 기능한다. 자아의 욕망은 거세되고, 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의 감정은 언제 터트려도 이상하지 않을 듯이 부풀어 오른다.

냄새의 정체

편의점 아르바이트 학생의 죽음, 그 이후... 국립극단의 청소년극 <사물함> 공연 사진. 연극 <사물함>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한 고등학생이 창고 붕괴로 사망한 이후 남은 학생들 간의 갈등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어른들 사이의 계급 문제는 학생들조차도 갈라놓았다. 아이들은 순수하지도 순진하지도 않다. 그러나 이 학생들에게서 나는 냄새는, 어른에게서 옮겨온 냄새들이다.

▲ 어른들의 관계가 미치는 영향 건물주의 자녀와 세입자의 자녀 관계는, 알게 모르게 그 부모의 관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부유한 한결보다 중산층 혜민의 공부가 훨씬 더 절박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그들의 관계가 위태로운 만큼 그 편의점 알바인 다은은 아예 이 특별과외반에도 끼지 못하는 처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 국립극단


삼면의 무대는 단출하고, 기이한 각도로 돌출되어 있다. 특별한 장치도, 드라마틱한 사건도 없이 배우의 대사와 연기로만 극을 끌고 가야 한다. 심지어 <사물함>은 불친절하다. 학생들의 전사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니, 각자의 사연이나 동기 역시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부모의 계급 차이는 그나마 어느 정도 설명되나, 학생들의 개인사는 어디까지나 관객이 유추해야 하는 영역으로 남는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랴. 학생들은 이미 그들 개인이 아니라 어른들의 대리로만 존재하는데.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조여진 채, 대사와 대사 사이 침묵이 극장을 짓누르는 순간들이 무겁다. 단조로운 톤의 이 극은, 70분이라는 길지 않는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자칫 지루하게 혹은 관객을 지치게 만드는 포인트들이 있다. 그러나 산발되어 있던 퍼즐이 하나로 모이는 후반부로 갈수록, 이 치열한 감정들을 어떻게 분출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며 흔들리는 학생들에게 몰입된다. 이 미니멀리즘이 힘을 받는 건, 작가와 연출이 의도적으로 배치한 연극적 장치들을 묵묵하게 소화하며 돌파해나가는 배우들의 열연이 있기에 가능했다.

사물함 속에 들어있던 물건의 정체도, 각자의 관계도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그저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억지로 좁은, 그 네모난 사물함 속으로 하나씩 들어가는 것 같다. 그렇게 네모진 사각형들의 집합체는 개성의 죽음, 영혼의 유골함, 오늘 하루도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청소년의 분향소가 된다. 적당히 이용하고, 적당히 배신하고,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며, 필요하다면 '뇌물'도 '여론 선동'도 쓰이는 곳. 학생들은 순수하지도, 순진하지도 않다. 그것은 누구의 탓인가?

<사물함>은 청소년을 대상화함으로써 대상화의 함정에서 벗어난다. 청소년은 어떠어떠한 존재라고 규정하거나 특별히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기둥도 아니고, 내일의 희망을 품은 새싹들도 아니다. 어른들에 의해 대상화되고 도구화되어 네모난 틀 안에 갇혀버린 존재들일 뿐이다. 청소년극 <사물함>은 그런 청소년들을 내세워 극 중 한 번도 직접 등장하지 않는 어른들을 호출한다. 이따위 세계를 만들어놓고, 이런 관계망 안에 학생들을 가둬놓은 어른들. 고작해야 새로 건물을 짓고, 새 점포 계약을 맺어주고, 젓갈을 담그는 그들. 특별면담이나 심리상담이니 모두 사실은 그들 스스로를 위한 것이다. 예수의 핏값에 책임지지 않으려고, 빌라도가 물로 그 손을 씻는 것처럼 치사한 면피용 행위일 뿐이다.

<사물함>의 학생들에게서는 악취가 진동한다. 다은의 사물함에서 나는 악취의 정체가 모호한 것처럼. 그 악취의 정체도 모호하다. 생리대를 살 돈이 없어서 더 심하게 나는 냄새, 폐기 음식을 보관했다가 썩어가는 냄새, 아니면 애써 무시하고자 했던 죄책감이 만들어낸 환상…. 돈으로 거래되는, 돈으로 환산되는 무언가들. 어른들의 생존 전략을 그대로 터득해 반복하는 아이들에게서 나는 악취는, 학생들의 영혼이 죽어가며 풍기는 '시취'일지 모른다. 나는 이 작품을 보다가 그 냄새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더 무서웠던 건, 극장을 나와 눈에 보이는 저 빌딩숲에서 그 냄새가 더 진하게 풍겨 나왔다는 것이다.

편의점 아르바이트 학생의 죽음, 그 이후... 국립극단의 청소년극 <사물함> 공연 사진. 연극 <사물함>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한 고등학생이 창고 붕괴로 사망한 이후 남은 학생들 간의 갈등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어른들 사이의 계급 문제는 학생들조차도 갈라놓았다. 아이들은 순수하지도 순진하지도 않다. 그러나 이 학생들에게서 나는 냄새는, 어른에게서 옮겨온 냄새들이다.

▲ 사건으로 남은 죽음 시간은 흐른다. 학생들은 선택을 유보한다. 그저 공부를 한다. 누구는 떨어진 성적을 만회하기 위해 과외를 받는다. 누구는 성적을 올리기 위해 이 과외반에 들어온다. 누구는 떠났던 과외반에 다시 돌아온다. 그래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물함에 가둬놓고 외면한 물건에서 악취가 나는 것처럼, 이들이 애써 외면한 죽음은 평생 이들에게 악취의 근원으로 남을 것이다. 그 근원은 결국, 어른들이 심은 것이다. ⓒ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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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장엄하게 펼쳐진 적벽대전, 이곳의 제갈량은 여성이었다

[안 뻔한 티켓북] 판소리 뮤지컬 <적벽>이 더 재미있는 이유

한나라 중산정왕의 후손 유비. 그러나 후한의 국운은 다했고, 촌수도 까마득한 방계의 혈통 따위 그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전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유비는 한나라 부흥의 깃발을 내걸고 백성을 품에 안는다. 관우, 장비와의 도원결의 이후 거칠게 달려온 길. 일당백의 용장은 있으되 현묘한 지략으로 그를 도울 책사가 없어 유비는 고전 중이었다. 통탄해 마지않던 그에게 서서는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으나, 그마저 유비의 진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서, 조조를 위해서는 어떤 계책도 내놓지 않겠다고 말하며 동문수학했던 제갈량을 본인 대신으로 천거한다.관우, 장비와 함께 제갈량의 거처까지 직접 찾아온 유비. 그러나 융중의 동자는 공명이 뱃놀이하러 출타 중임을 알린다.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리며 유비는 당부한다.그러나 두 번째 방문도 헛걸음하고, 세 번째로 남양 땅을 찾아와 재차 유비는 묻는다. "선생님 계옵시냐?"는 질문에 동자는 공명이 낮잠을 자고 있다고 답한다. 장비가 분개하여 집에 불을 놓으려고 하고, 관우도 불편한 내색을 감추지 못하나 유비는 이들을 만류하고 제갈량이 일어날 때까지 곁에서 기다린다. 단잠에서 깨어난 공명, 뒤늦게 동자에게 사정을 듣고 유비를 만나니, 유비 공손히 그에게 청한다.농사짓는 자신이 무슨 재주가 있냐며, 헛걸음하셨다고 거절하는 공명. 돌아가는 그의 앞을 관우와 장비가 각기 무릎을 꿇어 막는다. 유비,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세상에 나서지 않으려는 용에게 다시 한 번 부탁한다.제갈량, 주저하더니 결국 고민 끝에 유비가 건넨 부채를 쥔다. 누워있던 용은 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장원에서 별이 질 때까지 대륙을 뒤흔든다. 그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은 군웅할거의 시대가 난세의 간웅 조조의 손에 정리가 되어가려는 때였다. 난세의 판도가 적벽에서 뒤바뀐다.보는 맛과 듣는 맛 모두 잡은 호쾌한 작품 지난 3월 15일 개막해 오는 15일까지 서울 정동극장에서 상연되는 기획공연 <적벽>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삼국지> 속 '적벽대전'의 이야기이다. 판소리 다섯마당 중 유일하게 중국 원전을 기반으로 한 '적벽가'를 토대로 제작된 판소리 뮤지컬이다. '적벽가'의 대목을 취사선택해 그대로 대사로 만들었다. 도원결의로 시작하여 삼고초려까지 빠르게 진행되고, 적벽대전을 묘사한 후에는 도망가는 조조와 병사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러나 과거에 입은 은혜 때문에 결국 조조를 베지 못한 관우는, 제갈량에게 문책을 받는다. 관우를 벌하려거든 의형제인 자신들도 벌해야 한다며 유비와 장비가 간청하자 제갈량은 이를 눈감아준다. 도원결의 때의 맹세를 형제들은 되새기며 난세를 평정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극은 막을 내린다. 이후의 역사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형주장악, 입촉, 한중공방전 승리와 한중왕 즉위까지 촉한의 최고전성기이다.<적벽>은 호쾌하다. 배우들은 맨발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홀로 혹은 함께 소리한다. 판소리를 극의 소재로 활용하거나 혹은 극의 중간중간 배치하는 게 아니다.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기본적으로 '소리'이다. 무대의 상하좌우를 관통하여 쭉쭉 뻗는 소리들을 듣는 맛이 그저 시원하다. 낡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꽹과리, 북, 아쟁과 같은 전통악기부터 신디사이저와 드럼 같은 현대악기가 같이 어울렸다. 깔리는 음 자체에 듣는 재미가 있다. 동양과 서양 혹은 고전과 현대를 억지로 조합한 게 아니다. 그 배합 자체가 대단히 화려하지는 않지만, 화학적으로 잘 되어 있다.초연에 비해 의상은 보다 단정하면서도 깔끔해졌고, 분장의 힘을 다소 뺐다. 대신 무대와 의상의 색조를 하얗고 까맣고 붉게 정리했다. 흑·백·적 단 세 가지 색만으로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만들어낸다. 무대는 단출하다. 조조가 도망갈 때 쓰는 이동벽을 제외하면 특별히 쓰는 장치도 없다. 그러나 소박하면서도 크게 비어보이지 않는다. 여러 배우가 무대를 꽉 채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색조의 활용과 조명의 변주가 활약하는 덕도 크다. 유비, 관우, 장비나 조자룡처럼 주요 캐릭터 각자가 제 역할에 맞게 관객에게 임팩트를 줄 수 있는 파트를 가지고 있다. 여러 대중 매체에서 익히 묘사된 이미지를 잘 차용했으며, 배우들이 이를 뛰어나게 재현했다. 귀가 늘어지고 팔이 길지 않아도 유비에게서는 인자함과 단호함이 같이 느껴진다. 긴 수염이 없어도 관우의 카리스마(그리고 팔뚝의 힘줄)는 압도적이다. 모든 동선과 액션에서 신체 무게중심을 잘 잡는 장비는 그 옛날 장판파의 그가 현신한 것 같다.그러면서도 주요 캐릭터만이 극을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앙상블 배우들의 합과 힘이 빛날 수 있는 시간도 확실하게 배치했다. 배역을 맡은 배우는 전면으로 나섰다가 다시 앙상블로 녹아들었다가를 반복하며 서로가 서로의 완급을 조절한다. 이처럼 <적벽>은 듣는 재미와 보는 재미를 확실하게 보장한다. 퓨전을 위한 퓨전이 아니라 장르의 '세련된' 퓨전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걸 스스로 증명한다. 90분의 시간이 상당히 짧게 느껴진다. <적벽>도 완벽한 극은 아니다. '적벽가'의 수많은 한자어와 어려운 표현 중 상당수를 어느 정도 순화하였다고 하나, 여전히 그냥 듣는 것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구절이 많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단어를 현대어로 순화하면 본래 소리가 가지고 있는 언어유희의 재미와 어휘 자체가 갖는 맛이 사라질 터이다. 전달력과 언어적 재미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경계선이 어디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멋있는 무대에 눈이 쏠리면서도, 대사를 확인하고 싶어서 자꾸만 자막을 보려 왼쪽 액정으로 눈이 돌아가는 건 고통스러웠다. 인간이라는 종의 시야각 한계가 원망스러웠다.본래 '적벽가'의 의의는 '영웅중심'의 <삼국지>에서 탈피하여 '민중의 관점'을 적극 도입했다는 데 있다. 간웅 조조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는 건 저잣거리에서 권력가들을 희롱하던 우리네 전통 서민 문화의 맥과 맞닿아 있다. 군사점고와 같은 신에서 각 병사들의 사연과 아픔이 해학적으로 전시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영광스러운 승리 혹은 비장한 패배 뒤에 가려진 민초의 아픔을 드러내는 것이다.그러나 <적벽>은 적벽대전까지의 충격에 비해 이후 나오는 신들의 연출적 임팩트가 살짝 떨어진다. 재기발랄한 배우들이 개인기로 이를 돌파하고는 있다. 그러나 본래 '적벽가'의 정수가 여기에 담겨 있고 <적벽> 역시 이를 적극 계승하기로 천명한 만큼, 후반부도 전반부 이상으로 돋보일 수 있는 극적 장치를 더 설계해보면 어떨까 하는 약간의 아쉬움이 든다.<삼국지>의 책사를 여성이 연기한다는 것 <적벽>에서 특히나 눈여겨봐야할 것이 있는데, 바로 극 중 모든 '책사' 캐릭터를 여자 배우들이 소화한다는 것이다. 극 초반에 잠깐 등장하는 서서는 말할 것도 없고, 촉(극 중에서는 한나라)의 책사 제갈량, 오의 책사 주유, 위의 책사 정욱까지 모두 여배우가 연기한다. <삼국지>의 또 다른 한계 중에 하나는 '남성 중심'의 서사라는 것이다. 이는 당대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대부분의 문화콘텐츠가 공통으로 지니는 한계다. 여성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역사에서 지워졌고, 있더라도 남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만약 <적벽>이 고증에 충실했다면, 이 무대에는 여자 배우가 올라올 여지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액션을 하든, 춤을 추든, 남배우와 여배우가 구분 없이 함께 어우러지며 전쟁을 표현하는 장면들이 일단 위엄 있다. 여기에 본래라면 남자가 연기했어야 할 책사들을 각자 다른 모양새로 여자들이 표현한다. 배우 임지수가 연기한 제갈량은 근엄하며 진중하다. 그가 유비와 함께하기로 처음 결의할 때부터 뭉클하고 올라오는 감동이 있다. 부채를 들고 눈을 내리깔며 좌중을 둘러볼 때의 위엄이 상당하다. 기존의 미디어에서 주유를 대체로 섬세한 외모의 귀공자로 그렸던 데 비해, <적벽>에서 주유(이금미 분)는 강단 있고 힘 있는 캐릭터로 묘사된다. 화공을 설계하고, 제갈량을 경계하며, 오군의 진군을 명할 때는 정말로 대군을 통솔하는 도독인 것마냥 강렬하다. 연합군의 화공을 뒤늦게나마 꿰뚫어보아 조언하고, 패주 중에도 조조를 끝까지 보위하는 정욱(정지혜 분)은 골계미로 뭉쳐있다. 조조의 행태를 비꼬면서 주변의 웃음을 만들어내면서도, 자기자신은 웃음거리로 전락하지 않는 인물이다.결과적으로 <적벽>은 여배우가 연기하는 여성 캐릭터의 다양성을 남배우가 연기하는 남성 캐릭터의 스펙트럼만큼이나 넓힐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일종의 '젠더 프리'이다. 남성이 할 수 있는 것과 여성이 할 수 있는 것은 나면서부터 구분되어 있는 게 아니다. 여성은 예쁜 것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엄마나 딸로서만이 아니라, 멋들어진 역사의 주체도 될 수 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인간적인 존엄을 갖출 수 있다. 이 인물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멋. 그 멋에서 기인한 아름다움이 황홀하기까지 하다.창작진이 과연 그런 부분까지 고려하여 이렇게 배역과 배우를 배치했는지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때로는 피조물이 시대와 호흡하면서 창조자가 의도했던 것 이상의 의의를 가지기도 하고, 의도하지 않았던 의미를 더하기도 한다. <적벽>은 그런 의미에서 지금 시대의 관객을 만나 본래 의도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멋있게 빛나고 있다. 그 색이 참으로 붉다. 보고만 있어도 매료될 만큼 멋들어진 붉은색의 향연. 저 붉은 절벽을 낀 중국 강가의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 더욱 장엄하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불륜'을 저지른 의사, 그가 전쟁터에서 마주한 건

[안 뻔한 티켓북] 6년 만에 국내 재연 마친 '닥터 지바고', 이 작품이 놓쳤던 무언가

유리 안드레예비치 지바고. 부유한 지바고 가의 후계자였으나 어려서 부모님을 잃은 그는 자애로운 그로메코 부부의 손에 자라게 된다. 그로메코 부부의 딸인 토냐는 유리의 친구로서 언제나 곁에서 지지하고 응원해줬다. 시인이자 의사로 성장한 유리 지바고의 미래는 탄탄한 것처럼 보였다.지바고와 그로메코가 하나 되는, 유리와 토냐의 결혼식 날. 한 여인이 결혼식장에 들어와 부패한 법조인이자 부르주아인 코마로프스키에게 총구를 겨눈다. 총알은 그를 빗나가지만, 유리 지바고는 그 여인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독일과의 전쟁을 위해 떠나는 길에 다시 스쳐 마주친 그녀. 그리고 전선의 야전 의무실 천막에서 세 번째로 마주한다. 라라 안티포바. 참전 이후 소식이 끊긴 남편을 찾으러 왔다는 그녀는 의사 닥터 지바고가 아니라 시인 유리 지바고를 기억하는 이 중 하나다. 모스크바에서는 그가 남긴 시가 많은 이의 위로가 되고 있으니까. 특히 빗속의 여인…. 라라는 지바고의 시에 등장하는 그 빗속의 여인이 자신이란 걸 모른다.전쟁과 혁명이 맞물려 소용돌이치던 격변의 러시아. 그 속에서 유리 지바고와 라라 안티포바 사이에 특별한 감정이 싹 튼다. 그들에게는 이미 다른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선택받지 못한 세계, 사랑 없는 혁명 뮤지컬 <닥터 지바고>를 여는 넘버는 'Two Worlds'이다. <닥터 지바고>는 두 세계의 충돌, 그리고 그 충돌 사이에 어느 쪽 세계도 선택하지 못한 채 끼어버린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이다. 라라는 선택받지 못한 세계의 사람이다. 한때 선택받는 세계를 동경하여 코마로프스키가 건네는 샴페인 잔에 취하고, 흐르는 음악에 몸을 맡겼으나(No.06 'When the music played') 그건 결국 자신을 노예의 길로 묶어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라라는 직접 인쇄한 팸플릿을 파샤에게 나눠줄 정도로 당대 러시아의 현실 문제에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였다. 철도 노동자의 아들이자 마르크스주의자였던 파샤와의 새롭게 시작될 내일을 그리는 사람이, 그와 사상적 접점이 없었을까. 파샤 역시 라라를 사랑했다. 그러나 라라가 코마로프스키에게 성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착취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파샤는 "이 부르주아 개새끼들!"이라고 외치면서 뛰쳐나간다.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계급 사회의 모순이 낳은 직접적 피해자라는 사실을 체감하면서 그는 급진 혁명을 통해서 이 러시아의 앙시엥 레짐을 파괴하기로 마음먹는다. 파샤는 라라에게 새로운 러시아, 완벽한 러시아, 모두가 평등하고, 아무도 착취당하지 않는 세계를 건설하여 선물하고 싶었다. 군인들을 설득하고, 무장봉기를 주도하며 적색군의 사령관이 된 스트렐니코프의 가장 큰 추동력은 결국 이거였다. 그러나 라라는 동시에 지바고의 시를 감상하고 그 시에 감동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파샤가 라라에게 주고자 했던 세계는 그러한 '시'가 발붙일 수 없는 세계였다. 그래서 라라는 파샤의 세상에서 행복할 수 없었다. 파샤를 기다리고, 파샤를 찾아 나서도 그저 파샤는 멀리서 라라를 바라보기만 할 뿐 숨 막히는 투쟁의 공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자신이 줄 수 없는 것을 라라에게 줄 수 있는 부르주아 유리 지바고를 시기했고, 동시에 그렇기에 지바고를 해칠 수도 없었다. 혁명 이후 모스크바에서 유리아틴으로 도망친 지바고를 적군의 전선으로 떨어트려 놓은 것도, 그러면서도 지바고의 신변에 직접적 위해는 가할 수 없도록 관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파샤는 죽을 때가 되어서야 자신의 실패를 인정한다. 라라를 사랑하여 라라를 해방시키고 싶었으나, 정작 그 혁명 안에는 자비도, 시도, 인간애도, 사랑도 없었던 모순에 봉착했다. 그리하여 그는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을 기록하라고 주문한다. 그리고 스트렐니코프가 아니라 파샤 안티포브로 죽는다. 사랑 없는 혁명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그런 혁명 속에서는 라라가 살 수 없음을, 그래서 죽을 때에야 라라의 사랑으로 죽고자 했던 인물이다. 라라는 파샤 안티포브가 아닌 스트렐니코프를 사랑할 수 없었고, 그 대신 유리 지바고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선택받은 세계, 혁명 없는 사랑 반면 유리 지바고는 선택받은 세계의 인물이다. 8살에 아버지를 잃었지만, 귀족 계급의 연대 속에서 그는 따뜻하고 풍요로운 상황에서 자랄 수 있었다. 그러나 유리는 음악이 흐르는 귀족 세계 밖의 움직임에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빵을 요구하며 전쟁을 거부하는 노동자와 시민들. 총성과 피 냄새가 진동하는 거리에서 유리는 황제의 진압으로 인해 부상을 입은 이를 치료한다. 코마로프스키는 그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며 외면할 뿐인 현장을, 유리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치료가 끝난 후 결혼식장으로 향한 유리. 그러나 결혼식장에서는 샴페인 잔을 부딪치며 궁궐 밖 세상을 폭도들의 소란 정도로 치부한다.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이렇게 우리만 행복해도 되는 걸까. 부르주아 지식인 유리 지바고는 그런 세계에서 살 수가 없었다. 유리가 라라의 눈빛에 흔들린 건, 그 다른 세계를 처음으로 마주했기 때문이다.유리는 전쟁터에서 잠까지 줄여가며 한 명의 병사라도 더 살리기 위해 애썼다. 전쟁에서 그가 목격한 건, 황제의 의미 없는 명령에 애꿎은 목숨을 버려가는 러시아 동포들의 절규였다. 간신히 살려낸 병사(얀코)를 덧없이 다시 잃어야 하는 세상이었다. 황제와 귀족이 지배하는 세계, 어린 병사가 고향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끝내 편지조차 전하지 못하고 죽는 세계. 군인들이 전쟁을 거부했을 때, 그가 만약 선택받은 세계에 충실한 귀족이었다면 다른 장교처럼 전선으로 향하자고 병사들을 재촉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걱정하는 건 부상병들의 안위뿐이었다. 그곳에서 그를 이해하고 함께해주는 건, 다른 세계에서 온 라라뿐이었다. 토냐는 분명 착하고 헌신적이며 사랑스러운 인물이다. 토냐는 선인이고, 지바고를 사랑하지만, 혁명 없는 사랑 속에서 지바고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로메코로 대표되는 토냐의 세계에서 그는 시를 쓸 수 없었다. 혁명 이후에 우리가 예전에 몇 가지 코스 요리를 먹었는지를 헤아리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다고 그저 한숨 쉬는 그로메코이니까. 유리 지바고는 혁명 이후의 세상에서 숨 쉴 수 없지만, 그렇다고 혁명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사람이다. 토냐는 왜 지바고에게 시를 쓰지 않느냐고 다그치지만, 당연하지 않은가. 밖에서 사람은 죽어가고, 시는 단 한 명의 사람도 구하지 못한다. 이런 환경에서 그는 그저 버티는 것만으로도 버겁기만 하다. 혁명 이전의 시기나, 혁명 이후의 시기나, 시처럼 미약한 온기가 깃들어 있기에 러시아는 너무 추운 동토였다. 황제의 군대에 있을 때나, 적색군에 끌려갔을 때나 그들이 찾는 건 의사로서의 지바고 뿐이다.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사람. 그러나 사람을 살리는 건 의료기술만이 아니다. 인간은 빵이나 사상만으로는 살 수 없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건, 그 아무 쓸모없는 시 한 줄, 사랑의 속삭임 한 마디뿐이었다. 적색군에 끌려다니던 그는, 위급한 병사에게 투여하려던 모르핀을 빼앗기고, 자살을 시도한 여인의 숨을 자신의 손으로 끊어주던 그는, 더 이상 이곳에 있어봤자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될 뿐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시를 쓸 수 있는, 라라의 품으로 돌아간다. 혁명 없는 사랑도, 사랑 없는 혁명도 두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다. 유리와 라라는 선택받은 세계와 선택받지 못한 세계 사이에 끼어버린 인물이었다. 각각의 세계를 대표하는 토냐와 파샤는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없었다. 유리와 라라는 오로지 얼어붙은 벼랑 끝에 간신히 하나 남은 겨울나무 새잎이었다.아쉽기만 했던 <닥터 지바고> 2012년 이후 6년 만에 돌아온 뮤지컬 <닥터 지바고>가 지난 7일 폐막했다. '성황리에 폐막했다'라는 상투적 표현을 쓰기에는 머뭇거려지는 성과였다. 스크린에 의존하는 빈약한 무대도 한몫했지만, 뮤지컬 <닥터 지바고>의 진정한 패착은 시대적 맥락을 덜어내고 유리와 라라의 감정에 집중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오히려 그러한 연출적 선택이 유리와 라라의 사랑에 관객이 몰입할 수 있는 길목들을 끊어내 버린 셈이다. <닥터 지바고>의 주제는 '혁명 속에 피어난 운명적 사랑'으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그 '혁명'이 무엇인지, 그들은 왜 이 혁명 속에서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지가 설득되어야 한다. 코마로프스키 캐릭터도 헷갈렸지만(그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철저했던 악인인가, 아니면 라라를 사랑했으나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인물인가) 결국 파샤와 토냐의 세계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 명강사 최진기까지 불러들여 <닥터 지바고>의 배경이 되는 혁명사에 대해 개괄적으로 설명했지만, 작품 안에서 설명되지 않는 걸 외부 요소로 충족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됐다. 외부 요소를 통해 더 재미와 의미가 확장되는 건, 작품 안에서 충분히 이해되고 설명되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만 가능한 이야기이다. 두 세계는 왜 갈등했는지, 유리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황제와 귀족의 치세 하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느낀 건지, 파샤와 러시아 민중은 왜 그토록 혁명을 간절히 원했었는지, 그 혁명은 왜 애초 목표와 다른 방향으로 굴러갈 수밖에 없었는지, 구시대를 대표하는 귀족들은 왜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 왜 라라는 파샤와 행복할 수 없었는지, 무엇보다 왜 유리는 토냐의 사랑만으로는 살 수 없었는지….적절한 부재료가 있을 때 주재료도 빛난다. 약간의 소금이 단맛을 더 강하게 한다. 적당한 안개꽃이 가운데 장미꽃을 더 빛나게 한다. 유리와 라라의 사랑에 집중하다가 오히려 유리와 사랑의 설득력을 잃어버렸다. 그러다보니 뮤지컬 <닥터 지바고> 속에서 유리는 지고지순한 토냐를 배신한 불륜남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그저 유약하고, 욕망에 쉽게 흔들리는 부르주아 지식인의 한 사람일 뿐이다.작품 속에서 지바고가 시를 쓰는 순간들은 라라를 통해서 숨 쉴 여유를 찾았을 때뿐이었다. 그의 시는 러시아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지만, 혁명으로 완성된 러시아에서는 금서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다른 세상에서는 인류애를 간직하고픈 이들에게 한줄기 빛이 되어 어둠의 시대를 지탱하는 글이 되었다. 그러나 허술한 서사 속에서 그들에게 왜 '시'가 의미가 있었는지,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는 제대로 드러나지 못한 채 퇴색되어 버렸다.<닥터 지바고>는 우리가 건설하고자 추구해야 할 세계가 무엇인지 제시할 수 있었다. 현실에 눈 돌린 채 낭만과 환상만이 가득한 사회는 위선과 착취의 세계이다. 반면 현실의 불평등을 제거하여 인간을 해방하겠다는 목표 아래에 또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세계는 모순적이다. 혁명 없는 사랑은 공허했으며, 사랑 없는 혁명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바고와 라라가 원했던, 사랑과 혁명이 공존하는 세계를 두 사람의 연결을 통해 더 강렬하게 보여줘야 했다.결과적으로 <닥터 지바고>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음율, 시적이고 미려한 가사 위에서 섬세하게 조율된 배우들의 감정 연기를 감상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동시에 2018년의 <닥터 지바고>는 그 감정들이 엉성한 서사 위에서 긴 여운을 남기지 못한 채 순식간에 흩어져 버려서 화가 났다. 이렇게 훌륭한 배우들을 데리고 이 정도로밖에 뽑아내지 못한 것은 프로듀서의 역량이 부족한 탓인지, 연출이 방향을 잘못 잡은 탓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이대로는 <닥터 지바고>의 브로드웨이 재도전도, 국내 세 번째 공연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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