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후 3개월, 신임 영화진흥위원회(아래 영진위) 위원장 체제 아래 내부적으로 시스템을 재정비하던 영진위가 가장 먼저 택한 공식 업무는 대국민사과였다. 지난 4월 4일 오석근 영진위원장 이하 영진위 직원들은 혁신과 변화를 주창하기에 앞서 지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발동의 빌미가 된 과오부터 인정하고 반성했다.

실추된 영진위의 위상은 회복될 수 있을까. 감독 출신이자 부산영화제 초대 사무국장, 부산영상위원회 위원장을 두루 거친 오석근 위원장에 대한 영화계의 기대가 높다. 오석근 위원장 체제가 시작되면서 영진위는 반성과 동시에 20년차 미만 인원들을 본부장에 선임하고, 10년차 미만 인원들을 팀장으로 중용하는 등 혁신 인사부터 단행했다. 동시에 독립예술영화 지원 등 역점 사업을 대폭 개편하고, 아시아영화진흥기구라는 청사진까지 제시했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영화계의 중심이 되겠다는 선언이었다. 시스템 정비와 구체적인 비전 수립 전까지는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던 그를 지난 2일 만날 수 있었다. 영화지 외 국내 언론 중에선 첫 공식 인터뷰다.

 오석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취임 후 발빠른 개혁 행보를 보이고 있는 오석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을 만났다. ⓒ 이정민


영진위원장의 호소 "날 이용해 달라"

마침 기획재정부 직원이 영진위 서울 사무실에서 영화인들의 의견을 청취한 직후였다. 지난 10년 간 동결내지는 삭감돼왔던 영진위 예산에 대한 긍정적 신호다. "내년이 한국영화 100주년이기도 하고, 남북 교류의 장도 열린 상황"이라며 "내년도 정부 예산이 긴축될 것 같긴 하지만 영화인들이 함께 뭉쳐서 영진위 예산을 올려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게 고무적"이라며 오석근 위원장은 조심스럽게 증액을 낙관했다.

독립예술영화 지원 사업, 블랙리스트 백서, 100주년 기념사업 등 당장 진행하고 헤쳐 나가야 할 과제를 두고 오 위원장이 가장 먼저 강조한 것은 '영진위 직원들의 사기'였다. 

"결국 한국영화에 대한 행정적인 일을 하는 곳이 영진위인데 이미 직원들은 해법들을 알고 있다. 다만 그걸 그동안 제도화 하지 못했고, 일할 수 있는 구조가 안 돼서 문제였지. 직원들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제가 할 일이라 생각한다. '영진위를 개혁한다' 그런 개념보단 이 상황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대신 (블랙리스트 발동에 협조하는 등) 잘못한 사람은 그들대로 인사 조치하고, 관련한 백서도 만들어야지. 하지만 중요한 건 직원들이 신나게 일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날 좀 부리고 이용해달라고 직원들에게 말한다. 이 사람을 만나고, 저 사람도 만나라고 얘길 해달라고 한다. 위원장인 날 좀 이용하시라고(웃음). 내부적으로 분위기는 좋은 상황이다."

자연스럽게 가장 최근 이슈였던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물었다. 남북 간 영화 교류에도 기대가 모이고 있기 때문. "우선 북한에 영화계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부터 생각할 문제"라며 오석근 위원장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당장 북한 영화인들과 대화할 수 있으면 좋은데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당 차원에서 만들어진 영화 외엔 우리와 할 수 있는 얘기는 제한적일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바라는 건 영화 100주년이 상징적이라고 본다. 그것부터 맞춰봐야지. 정말 1919년을 원년으로 인정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그래야지. 명분이 있다. 일단 필름 복원이 그렇다. 한국전쟁 전까지 북한은 어떤 필름을 보유하고 있는지 아마 디지털 작업이 안 됐을 것인데 이게 다 우리들에게 중요한 자산 아닌가. 빨리 만나서 복원작업을 하자고 하면 거기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게 남북영화교류의 첫 단계라고 생각한다. 정말 말로만 듣던 <아리랑>(1926) 등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한국에선 필름이 완전히 유실됨)가 거기에 있다는 소문도 있던데 그걸 남북 정상이 같이 본다든가 하면 중요한 행사가 될 수 있지. 지금 가장 자연스러운 건 평양국제영화축전에서 한국 영화를 상영하는 거다. 우리가 사절단으로 가서, 그쪽에서 사극 등을 찍을 수 있나 보고, 그곳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는지 알아볼 수도 있겠다."

장밋빛 상상을 하면서도 오석근 위원장은 "이 모든 건 영진위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닌 정부 차원의 문제인 만큼 협력 관계가 중요하다"는 전제를 달았다. 오 위원장은 "첫 단추를 어떻게 끼울 것인가가 중요한데 그 방법 중 하나가 중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중국을 포함한 남북 합작영화 등을 언급하며 그는 현재 중국과의 파트너십에서 현실적으로 구상하고 있는 몇 가지 방안을 비보도 전제로 설명했다.   

  오석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 이정민



독과점 문제, 해법은? 

100주년 기념사업에 대해 물었다. 지난 기자회견에서 오 위원장은 "화합이 주요 키워드가 될 것"이라며 "추진 사업단을 만들겠다"고 밝힌 바 있다. 신구 영화인들이 분리돼 독자적인 행사를 치르거나 일부 현안에서 각 영화계 직능 단체들이 의견이 갈리는 등 지난 10년이 지나며 만연해진 갈등을 봉합하겠다는 의지로 풀이할 수 있다. 추진사업단에 누가 어떤 방식으로 결합할지 여부도 영화계 관심사 중 하나다.

이 부문에서 오석근 위원장은 일단 창작환경조성, 국내극장사업자, 그리고 최근 중국의 광전총국이 해체되며 중앙선전국으로 영화 업무가 이전되면서 예견되는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로 영화인들까지 뭉쳐서 기초적인 환경을 생각해야 하고, 극장 사업자들에게도 우리가 무엇을 요구할 수 있을지 정리 중"이라며 "추진 위원단은 아직 구성되진 않았는데 그 동력은 감독님들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다"고 전했다. 

극장사업자 대목에서 오석근 위원장은 최근까지 강화되고 있는 독과점 문제, 상업영화와 독립영화 간 괴리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현재 한국 영화는 한국화 된 할리우드 스타일과 김기덕 아니면 홍상수 감독 스타일, 그리고 사회적 행동으로서의 영화 외에 자기만의 새로운 언어를 구사하는 영화들이 부족해 보인다"며 그는 "새로운 영상언어가 상업영화로 선순환 되어야 하는데 우리 영화계는 서로 갈라져 있다. 영진위가 그런 점을 부양하고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베트남만 하더라도 그곳 영화 시장의 80프로 이상을 CJ가 장악하고 있더라. 베트남 언론에서 한국 CGV의 움직임에 대해 비판하는 기사들을 봤다. 우선 우리 내부적으로 저예산 독립영화들이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주고 그런 영화들이 아시아를 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10년 간 그게 잘 안 됐다.

독과점문제는 우선 구조를 단순화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입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적극 법제화를 추진해야지. 영화 및 비디오물 진흥에 관한 법률(아래 영비법) 개정에서 영진위가 관심을 갖고 강하게 목소리를 낼 것이다. 지금 지방선거 기간이라 선거 이후 적극적으로 의원들을 만날 예정이다. 또한 여러 불공정 사례를 채집하면서 공정거래위원회와도 소통해야지. 공정위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논의하고, 마지막으론 과거 동반성장위원회? 그걸 다시 정리해서 부활시켜 새로운 합의기구를 만들 필요가 있다."

영진위 정책이 법적 강제력이 없다는 한계를 오석근 위원장은 잘 알고 있었다. "행정 명령으로 우리 직권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바꾸되, 필요한 경우 국회와 공정위, 외교부 등 전방위적으로 만나서 소통하겠다"며 그는 "블랙리스트 건 등으로 영진위 자체가 침체돼 있고, 네트워크가 제대로 작동 안 했는데 다른 조직과 협력을 되도록 빨리 해나갈 것"이라 덧붙였다. 

"최근 국내 6대 국제영화제 장들을 만났다. 영진위가 무엇을 지원하고 무엇을 육성하느냐 부터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난해 김지석 전 부산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이 사망했을 때(오석근 위원장은 고인과 동갑내기 친구로 오랜 기간 영화로 인연을 이어왔다-기자 주) 난 하루아침에 그가 20년 간 쌓아왔던 아시아 네트워크가 사라지는 걸 봤다. 각 영화제 간 네트워크가 사유화 되고 권력화 되면 안 된다. 서로 공유해야 한다. 국고로 해외에 나가 사람들 사귀고 영화제를 키우는 건데 사적 네트워크로 가지고 있으면 무슨 의미가 있나. 

영진위가 영화계와 소통하는 데 있어서 그냥 지원만 하는 게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해서 진행하려 한다. 100주년 기념사업도 마찬가지다. 영진위는 공적인 조직이잖나. 영화계와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전 3년 하고 갈 사람이다. 하지만 (시스템을 마련해서) 영화인들은 그들로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지." 

  오석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 이정민


난제들

이어서 나온 이야기는 첨예한 논쟁과 갈등이 예상되는 문제다. 바로 부산에 새로 지어질 종합촬영소와 최근 부산으로 이전한 한국영화아카데미 건. 제 역할을 해오던 남양주 종합촬영소가 정부 방침에 의해 부산 이전키로 결정됐지만 새 부지 마련과 운영 방식 논의과정에서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부영건설이 남양주 종촬소 부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도 최순실 K스포츠재단과 연루 가능성이 제기되는 등 석연찮은 부분이 최근 김한정 민주당 의원 발언으로 공론화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기존 남양주 종촬소를 임시로 임대하는 방안, 지자체의 협조를 구해 또다른 촬영소를 마련하는 방안 등이 나오고 있지만 이미 정책적으로 부산 기장군 지역으로 이전이 결정된 이상 그 틀 안에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게 영진위의 입장이었다. 해당 부지를 5년 임대해서 종촬소를 짓는 걸로 알려지며 영화계에선 강하게 반발했고, 영진위는 대안을 고민 중이었다.

"남과 북이 함께 쓸 수 있는 종촬소 이야기, 일부 수도권에서 새로운 종촬소를 만든다는 이야기 등은 모두 영진위와 논의가 이뤄진 건 아니다. 정부가 한 약속인 만큼 종촬소는 부산 기장에 지어져야 한다. 개성이나 판문점에 만들자는 건 지금으로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기장 부지를 영진위가 사느냐 아니냐인데 일단 그쪽(기장군, 부산시 등)에선 땅을 매각할 의사는 있다고 한다. 우리도 살 의사가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기장군수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고 부산시장과 문체부도 관여해야 한다.

남양주 종촬소를 임시로 임대하는 방안도 당연히 알아보고 있다. 근데 부영건설이 정확히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모르겠다. 다른 수도권 지역 스튜디오를 사용하는 방안도 나왔는데 비행기 소음이 너무 심하다는 등 제한조건이 많다. 지방선거가 끝난 뒤 이 문제는 새롭게 이야기 해볼 것이다."

부산 이전과 함께 최근 성추행 논란 등 악재가 겹친 한국영화아카데미 문제에 대해 오석근 위원장은 다른 문제보다 강경한 자세였다. 부산이 서울만큼 인프라가 없기에 교수진 마련이 수월하지 않을 것이고, 학생들의 기숙사 문제, 영화 제작시 제작비용이 급격히 올라갈 것이라는 주변 우려에 오 위원장은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한다"며 운을 뗐다.

 홍댕 인근에 위치한 한국영화아카데미. 3월 9일로 수업을 끝내고 4월부터 부산으로 이전한다.

서울 홍대 부근에 있던 한국영화아카데미는 지난 4월 부산으로 이전했다. ⓒ 성하훈


"우선 한국영화아카데미가 무엇인지 정의부터 했으면 한다. 제 생각엔 국립영화학교다. 미국의 AFI(American Film Institute)처럼. 지금의 한국영화아카데미는 학생들이 영화를 찍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누군가는 아카데미가 제작지원센터 역할만 하고 있다는데 그 말에 일정 부분 동의한다. 지금까진 그런 목적으로 뽑았기에 일단은 가되, 내년부턴 새롭게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직 새로운 영화아카데미 원장 선임을 안 했다. 영진위 담당자를 대행으로 해서 새 판을 짜려고 한다. 그 구상에 '부산'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영진위가 왜 부산에 있는지, 아카데미와 종촬소가 왜 부산에 있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부산시와 부산지역영화인들과 논의해 본 적이 없더라. 영진위 신사옥 기공식이 올 가을 있는데 이건 곧 영진위가 부산에 뿌리를 내린다는 의미다. 

우리가 부산에 왜 내려왔냐 이 물음에 부산이 답을 해야 한다. 한국영화계가 못하는 걸 부산이 하고, 영진위가 미처 못 한 일을 부산영상위와 부산영화인들이 해주면 보완적 관계가 되는 것이지. 단지 서울에 있는 제작사를 부산에 유치해야 한다? 이런 구도로 가면 영진위가 부산에 있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개인적으로 부산이 아시아 다른 도시들과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아카데미가 부산에 있으면 부산아카데미라 생각하시는데 크게 보자는 것이다.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아시아 영화 교육까지 담당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게 방향을 잡으면 우리가 서로 할 일들이 많아지지."

네트워크를 이용해 기존 강사진뿐만 아니라 세계 거장들도 강사진에 참여시킬 수 있다는 게 오 위원장의 생각이었다. "온라인 등 방법은 충분히 많다"며 "서울 강사, 서울 현장 사람이 부산에 못 오는 것에 대한 충분한 대안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새롭게 선출되는 부산시장과 국내 영화인들이 아카데미 문제, 나아가 영화산업 문제를 함께 논의하길 원한다"고 바람을 밝혔다.

  오석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 이정민


남은 질문들

예정된 인터뷰 시간을 훨씬 넘기면서까지 이야기는 식을 줄 몰랐다. 영진위의 핵심 사업인 지원 사업이 콘텐츠진흥원 등 다른 유사 기관과 중복되는 문제, 그리고 오는 2021년까지 징수하기로 한 영화발전기금(아래 영발기금) 문제도 빼놓을 수 없었다. 영발기금은 영진위 예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사실상 관객에게 강제로 징수하는 이 기금이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는 논란이 꾸준히 있었고, 결국 국회는 오는 2012년까지 영발기금 징수를 연장시킨 상태다. 

"콘텐츠진흥원뿐만 아니라 영상자료원, 영상물등급위원회 등과도 이미 정서적으로는 함께 하자는 분위기다. 지금까진 각 기관이 따로 정책을 진행했다면 이젠 같이 가는 구조로 가려고 한다. 100주년 기념사업을 위해서라도 지금 뭉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영발기금. 이건 제 숙원 사업 중 하나다. 임기가 끝난 직후 영발기금이 끊기게 되어 있다.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문제는 제가 임기 내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다. 일단 내년도 예산부터 올리는 방안을 생각하느라 구체적으로 고민하진 못하고 있다. 예산부터 올려놓고 하나씩 해결해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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