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가 세상을 흔들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을 드러내고 피해를 폭로하자, 오랜 기간 지위와 유명세를 이용해 여성들을 억압하던 이들의 추악함도 세상 밖으로 드러났다. 폭로 그 후. 가해자 몇 명을 축출하면, 여성들은 성폭력의 위험에서 자유로운 세상에서 일할 수 있을까? <오마이뉴스>는 미투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편집자말]

 여성학자 권김현영

최근 서울 삼각지역 인근 카페에서 여성학자 권김현영씨를 만났다. 오랜 시간 페미니즘을 연구한 이 여성학자는 '미투 운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 이정민


"참을 만큼 참았으니 터져 나온 거다."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미투 폭로'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미투 폭로'가 이어진 지 두 달여가 넘은 지금. 오랜 시간 여성주의를 연구하고 최일선에서 목소리를 내왔던 이 여성학자는 미투 운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에게도 '미투 운동'의 급진성은 놀라운 것이었다. 권김씨는 "처음에는 성폭행 피해자가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가능했다는 게 너무 놀랍다"고 털어놓았다. 또 "피해자에 대한 비난이 격심하고, 여성혐오가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 폭로를 결정하고 실행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라고 말했다. 

이어 권김씨는 "피해자의 용기에 응답해서 사회가 변해야 한다"면서 "정말 사회가 바뀌려면 전체주의 사회와 권위주의  문화를 유지해온 남성중심성이 달라져야 한다"고 답했다. 다음은 여성학자 권김현영과의 일문일답.

 여성학자 권김현영

권김현영 "피해자들은 '법적으로 고소해도 안 되는구나'라고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데 검사도 똑같다는 걸 안 순간,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이정민


"'미투 운동' 한국 사회가 망가졌기 때문"

- 요즘 대중문화예술계를 포함해 잇달아 나오는 미투 폭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일단 참을 만큼 참았으니 터져 나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작년부터 SNS에서 해시태그를 달고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이어 서지현 검사의 미투가 큰 기폭제가 되었다. 서지현 검사의 미투가 폭발력을 가진 이유는 저 정도의 권력과 지위, 심지어 수사·기소권을 가진 검사조차도 뉴스룸에 앉아야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지 않으면, 피해자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서지현 검사의 메시지가 있었다고 본다."

- 연출가 이윤택의 피해자들이 서지현 검사의 메시지에 답했다. 
"그 메시지에 응답한 사람들 중 문화예술계에 오래 있었지만 절대 폭로를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이 서지현 검사의 메시지에 응답한 것이다. 가장 수단과 방법이 많은 축에 속하는 검사가 뉴스룸에 앉았고 이에 가장 없는 사람들이 먼저 반응한 게 아닐까? 특히 이윤택씨 같은 건은 해결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 사건이다. 피해자들이 20년 전에 이미 사건을 고발했으나 이윤택씨에게 고발했다는 이야기가 바로 들어가 무마됐다. 이후 경찰 고소도 시도해봤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연극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는 상황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 이런 식의 상황에 집단적으로 오랫동안 노출됐으니 수단이 없다고 생각할 만하지 않나. 피해자들은 '법적으로 고소해도 안 되는구나'라고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데 검사도 똑같다는 걸 안 순간,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스템이 무너졌으니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걸고 폭로를 한 거다."

- 현재 나오는 성폭력 폭로 중에는 댓글 폭로 등 법적으로 해결하거나 언론에서 보도하기 다소 어려운 사건들이 있다. 
"기자들이 고민해야 할 부분인 것 같다. '카더라'를 보도하는 게 기자로서 과연 맞는가 이런 고민이 있을 것이다. 댓글을 통해 자기 피해사실을 말한 경우, 알리고 싶다면 아마 이후에 적극적으로 행동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글을 쓴 뒤 지우거나 댓글로 달고 더 이상 기자와 접촉하지 않는 피해자가 있다면, 그 정도의 방법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 아니겠나. 그때 기자들이 더 뭘 캐내거나 섣불리 보도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실제로 피해와 가해 당사자 간의 합의와 조정을 거치는 와중에 언론에 보도가 되어 상황이 더 악화된 케이스도 있다. 피해자를 찾아다니는 게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고 본다.

또한 지금은 어떤 방식이 맞고, 뭐가 옳고 그른지 이야기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닌 것 같다. 법적 유죄 판단 기준은 증거나 진술의 일관성, 정합성 등이다. 언론은 언론대로 기존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이런 법적 엄밀성이나 언론의 기준에 부합하지는 않는 '미투 폭로'가 있다. 그런데 그러한 미투 운동이 어떻게 신빙성을 확보했나? 피해자들의 '이어지는' 목소리로 특유의 신빙성을 확보해갔다. 문화예술계 성폭력의 경우 특히 그렇다. 복수의 피해자가 비슷한 경험을 폭로하기 때문에 그 진술의 신빙성이 재판으로 가기 전에 이미 공론장에서 얻어진다. 이럴 경우 가해자가 부인하기 어렵다. 그 반복성과 당사자의 복수성 때문에 사람들이 피해 진술을 신뢰하고 이 문제가 해당 집단 전체 내부의 개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미투 운동'이 이래야만 의미가 있다는 건 아니다. 서지현 검사의 경우 상습적이거나 여러 명의 피해자가 있는 게 아닌 단독 사건이었다. 동일한 가해자에 대해 여러 명의 사람들이 증언해 신빙성을 얻는 방식이 한 축으로 있고 또 다른 축으로 서지현 검사처럼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위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지위와 사생활, 얼굴을 다 드러내고 사람들 앞에서 '이것이 진실'이라고 말했을 때 얻어지는 진실성이 있다. 그 존재를 건 진실성에 사람들이 응답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최근 가해 교사 혹은 교수가 저질러온 오래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후배들이 연구실 앞에 포스트잇을 붙이는 등의 직접행동주의도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나왔다. 지금은 새로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이다. 기존 질서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기존 질서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게 명백해졌다. 언론이 '이렇게 했어야 한다, 아니다'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읽어낼 수 있는 정도의 자세는 있어야 하지 않나 적어도."

- 연극계에서 특히 미투 폭로가 많았다.
"이윤택씨가 연희단거리패에서 했던 일들은 적어도 내부에선 정상적이거나 문제를 제기할 만한 일이 아닌 걸로, '선생님이 그러실 수도 있는 일'로 오랫동안 여겨졌을 거다. 내부 공동체의 농밀한 질서가 있는 곳일수록 이런 일이 더 많다. 공동체 구성원들 내부의 폭력에 민감해져야 '다른 질서'의 가치가 의미 있게 된다.

 여성학자 권김현영

권김현영 "서지현 검사처럼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위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지위와 사생활, 얼굴을 다 드러내고 사람들 앞에서 '이것이 진실'이라고 말했을 때 얻어지는 진실성이 있다. 그 존재를 건 진실성에 사람들이 응답했다고 생각한다." ⓒ 이정민


하지만 실제로 일은 어떻게 벌어졌나. 이윤택씨나 김기덕씨 같은 가해자가 있고, 그들의 가해 행위를 용인해주고 떡고물을 받아먹으려고 공동으로 가해 행위를 하는 네트워크가 구성되었다. 조재현씨의 매니저는 김기덕과 조재현에게 피해를 입은 피해자에게 "왜 쟤한테는 주고 나한테는?"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가해자는 집단의 질서를 만드는 사람으로 군림하며, 피해자는 그 질서에 순응하지 않으면 배제되어 버린다. 이때 김수희 대표처럼 자기 극단도 있고 더 이상 자기가 이 문제 때문에 연극을 그만두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인프라가 있는 여성 리더십들이 나서주었다. 어느 정도 힘을 가진 피해자가 차곡차곡 힘을 쌓아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이런 식의 조건이 있었다고 본다. 최영미 시인도 마찬가지다. 나름의 일가를 이룬 중간 단계의 여성 리더들이 결심을 하고 목소리를 낸 거다. 그게 미투 초반의 양상이었다. 지금은 학생들이 문제제기가 이어지고 있다." 

-소위 진보진영에서 미투 폭로가 많은 이유는?
"좀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진보 진영에서 성폭력 피해 고발이 더 많이 나오는 이유는 문화예술계가 진보 진영과 좀 더 가깝기도 하지만 그동안 피해자들이 참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권이 바뀌기 전까지 참고 상황이 바뀌고 난 뒤에 해결해보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일상이 민주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다. 정말 바뀌려면 전체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인 문화와 위계질서·권위주의가 없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를 지탱하고 있던 남성적인 문화도 없어져야 진정한 민주화가 이뤄질 것이다. 하나의 사건에 집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화가 바뀌는 것 역시 중요하다. 예를 들어 문화예술 관련 지원금 집행을 누가 결정하는가? 청년 비례대표처럼 이런 (정책적인) 데서 모두 남녀 동수가 돼야 한다. 그 권한을 계속 분산시키고 성평등한 민주주의를 어느 조직에서나 기본적인 원칙으로 만드는 것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이라고 본다."

 여성학자 권김현영

권김현영 "미디어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이었는지에 대해 지금보다 많이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이정민


"남성중심적 구조가 대중문화계 지배"

- 미디어에 나오는 남녀의 모습이 대중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한 듯하다.
"한국의 대중문화 장(場) 전체가 문제제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남성중심적이고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취급하는 방식이 천편일률적이다. 남녀의 발언권도 기울어져 있다. 여성 배우들은 조금이라도 나이가 들면 주요 배역을 맡기 어려워진다. 심지어 감독을 하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남자 배우들은 40, 50대에 꽃이 피면서 국민 배우가 되는데 여자 배우들은 '국민 엄마'가 되어야 한다. 여성 예능인이 아무리 많이 활약해도 쉽게 자리를 주지 않는다. 어떻게든 여성을 폄훼하고 비주류화 하려는 문화가 전반에 깔려있다.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도전'이라며 남자들끼리 노는 걸 '국민 예능'이라며 15년 동안 소비해 왔다. 드라마에서는 (결혼과 출산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여기는) '정상 가정'에 기반을 둔 이성애 로맨스를 대중들에게 주입시켰다. 미디어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이었는지에 대해 지금보다 많이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그러고 보니 <무한도전>이 인기를 끄니 <무한걸스>를 만들었고 <라디오스타> 뒤에 <비디오스타>를 만들었다. 
"여성을 이등시민화한 거다. <무한걸스>나 <비디오스타>도 심지어 케이블 채널에서 방송된 프로그램이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B급 예능조차 남성 예능인으로 출연진을 채운다. 여성 예능인은 여기서 또 밀려 팟캐스트나 유튜브로 간다. 물론 다시 돌아오기도 하지만 그리 쉽게 귀환하지 못한다. 이 벽이 얼마나 대단한지 지금 눈 뜨고 보고 있지 않나. 흔히들 콘텐츠의 주 소비층이 여성이고 여성들이 남성이 나오는 걸 좋아해서 남성 예능이 많다고 말하는데 <언니들의 슬램덩크> 같은 여성 출연자가 나오는 프로그램도 여성 시청자들이 좋아했다. 걸그룹 팬덤도 여성들이 더 많다. 그런 말은 현실에 대한 굉장히 게으른 변명이다."

- 남성중심적 문화가 굉장히 뿌리 깊다. 
"정봉주 사건을 보라. 피해자는 외모에 대한 평가부터 시작해 성추행이 일어났던 것까지 꽤 긴 시간 동안의 연속적인 과정을 증언했다. 하지만 정봉주씨는 과정을 모두 없애고 '그날 나 알리바이 있는데?'라고 대응을 했다. 그러면 이를 접한 사람들은 '저 사람은 부정확한 기억으로 사람 잡을 일을 하고 있네?'라고 바라본다. 대부분의 사건들이 이런 방식이다. 사건은 보통 일련의 연속된 사건 속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 연속된 사건들은 한 문화의 결과물이다.

고은 시인이 성추행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하는 순간 법적으로는 문제 삼기 어렵다는 말을 하고 '그 사람은 기인이니까'라며 문화적으로 정당화한다. 가해자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구체적인 말이나 행동 자체가 실제로 있었는지를 이야기하고,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은 이런 게 만연해 있었다고 말한다. 그 문화가 뿌리 깊고 만연해 있다는 것, 이것이 진실이다. 나는 두 가지 진실이 부딪혔을 때 우리가 어떤 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인지의 문제라고 본다.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의 싸움이 아니라 무엇이 우리 사회에서 중요하고 정의로운 진실이라 여길 것인가의 문제다. 특정한 시점과 사건의 단일 맥락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은 결국 아무 것도 바꾸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런 이들은 피해자가 얼마나 정확하지 않은 기억을 갖고 있는지에 집중해서 기억의 오류를 계속 지적한다. 자신이 향유하고 정당화했던 문화의 문제를 되돌아보지도 않고, 그 문화 속에서 저질러진 연속된 행동들의 결과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을 부인하고 싶어 한다. 정봉주는 끝까지 피해자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젊은 여성 팬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고 접근하고 외모 품평을 하고 자기가 밀어주겠다는 등의 행동을 하다가 나중에 강제로 키스를 시도하는 데에 이르는 과정 전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언급하지 않았다.

뿌리 깊은 남성중심적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고 그것을 오히려 풍류 혹은 자유로서 즐겨온 예술인, 정치인, 진보지식인들은 자기 권력에 도취돼 '여자들이 벌거벗고 달려든다니까?' '그러니 내가 금욕주의자가 아닌 다음에 버티겠어?' 이런 이야기를 흔하게 한다. 이들은 자기와 관련된 모든 여자들을 성적 대상이 될 여자인가 아닌가로 분류하며 여성을 남성의 시선에 따라 가치를 매기는 데 열중한 나머지 여성들과 동료로 선후배로 친구로 지내는데 실패해왔다. 앞으로도 그 실패가 이어질 거라고 본다. 하지만 이러한 남성중심적인 일방적 진실을 이제 더 이상 승인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등장했고, 이들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현재의 '실체적 진실'에 훨씬 가깝다고 생각한다."

 여성학자 권김현영

ⓒ 이정민


 여성학자 권김현영

권김현영 "어떤 말이 문제라며 치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말이 뭐가 문제인지 같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위력에 의한 추행'에 대한 판례들이 아직 적은데 안희정 사건이 중요한 판례가 되면 또 달라질 것이다." ⓒ 이정민


"집단으로 토론하는 문화 필요해"

- 여성들과 남성들 사이의 간극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정말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 체질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 진짜로 '민주화'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남자들은 반발이 심하고 여자들은 너무 실망한다. 그래서 요즘 강의하기가 너무 어렵다. (웃음) 앞으로 남자들은 더 방어적으로 나올 거다. 하지만 여자들이 계속 참아주진 않을 것 같다. 일단 어떤 종류의 '일상적인' 집단행동이 필요하다. 남성들은 대체로 '여자들 무서워서 못 살겠어' 같은 애매한 이야기들을 한다. 제대로 토론하려 하지 않고 방어적으로 나오거나 감정적인 불안과 불편함을 표시한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똑바로 말해보라'고 말하면 '됐다'고 하거나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한다. 나는 지금 우리에게 더 많은 토론과 논쟁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종교, 성평등 문제에서 언제나 나오는 질문인 역차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 성폭력인지 아닌지에 대해 논쟁하지 말고 상황 자체에 집중해서 문제해결을 제안해보기, 첨예하게 입장이 갈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반드시 양쪽 입장을 다 들어볼 수 있는 방식으로 토론 이끌기, 3-5분 스피치를 하기, 앞에 비상벨 같은 걸 꺼내놓고 5분 동안 토론하기 등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잠정적이고 뜨거운 토론 시간들이 필요하다. 물론 아무 말 대잔치로 끝나지 않기 위한 제어장치가 필요하다는 전제 하에.

하일지씨가 했던 말들 사실 남자들이 다들 하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을 강의실에서 했기 때문에 문제인가? 아니면 저잣거리에서 해도 문제인가? 이런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정말 무엇이 문제인지 이야기를 하고 '적어도 교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는 식의 합의를 해볼 수도 있다. 차곡차곡 사회적 합의를 밟아가야 한다. 어떤 말이 문제라며 치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말이 뭐가 문제인지 같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위력에 의한 추행'에 대한 판례들이 아직 적은데 안희정 사건이 중요한 판례가 되면 또 달라질 것이다. 위력을 가진 사람들이 조금 더 조심하게 되겠지. 이런 판결만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가 같이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더는 놀랍지 않은 상황이 올까봐 걱정스럽다는 사람들도 있다.
"무기력해지는 게 문제다. 무뎌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 구체적인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특정되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만일 그래도 달라지지 않으면 무기력해질 것이다. 그러면 다신 말하려 하지 않을 거다. 각각의 사건들마다 놀라움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계속 '어떻게 그런 일이?'라면서 순진하게 놀라자는 게 아니라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된다는 걸 전제로 무뎌지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그 감정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사회를 바꾸는 중요한 원동력이 될 거다. 괜히 말했다가 나만 손해봤다고 생각하면 말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 공간 안에서 '너 덕분에 정말 상황이 바뀌었어'라며 문제제기를 해준 당사자에게 고마워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 남성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원론적으로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그래야 한다. 그런데 손나은이나 아이린 같이 여성 연예인의 경우 페미니즘 슬로건에 가까운 것을 갖고 있거나 페미니즘 도서를 읽는다는 것만으로 마녀사냥을 당한다. 반면 남성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면 존경을 받거나 기회가 더 주어진다. 이런 격차가 존재한다는 걸 모른다면 실망스러운 일이다. 사실 남성이 본인을 페미니스트라 선언했을 때 잃을 게 없다. 여성들은 잃을 게 생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성들도 페미니스트가 되면 괴롭힘을 당해야 공평하다고 생각하면 결국 아무도 이기지 못하는 싸움이 된다. 결국 여성인 페미니스트가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 또한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건 앞으로 어떤 실천 속에서 나를 증명하겠다는 이야기이지 정체성이 아니다. 아무 것도 바꾸려 하지 않고 '나는 페미니스트야'라는 식의 삶은 불가능하다. 페미니즘은 활동 속에서 갱신을 통해 증명되는 사상이다. 사상과 실천이 동시에 따라와야 한다. 연구하지 않는 페미니즘? 실천하지 않는 페미니즘? 둘 다 있을 수 없다."

 여성학자 권김현영

권김현영 "미투 이후에 대해 전망은 못하겠고 바람은 말하고 싶다. 우리가 서로를 인간적으로 대하는 사회. 여자도 인간의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인정되는 사회가 오길 바란다." ⓒ 이정민


- 여성학을 오래 공부하고 연구한 만큼 미투 운동을 바라보는 감정이 남다를 것 같다. 다수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힘을 얻는 부분도 있지 않나.
"물론 그런 부분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대중화가 되면서 그동안의 지식과 경험으로 필요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든다. 미투 운동은 내 해석을 초과하는 일이었다. 우리 사회가 피해를 폭로한 여성에 대해 책임 있는 응답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피해자에게 감히 권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피해자는 어쨌든 그렇게 하기로 한 거다. 그 선택이 경이롭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가 저걸 책임질 수 없을 것 같아서 정말 두렵다. 한국 사회가 변해야 하는데 어쩌지? 그런 면에서 나는 일부 언론에서 얼굴과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피해자를 비난하는 건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폭로자 개인이 책임을 지니까. 반면 나쁘다면서 신중을 기하자고 말할 수도 없다. 그 둘 사이에서 걱정이 돼 잠이 안 온다."

- 미투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이윤택씨의 경우 법적인 처벌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그런 일이 가능했던 내부 문화가 다 바뀌어야 하는 문제이다. 안희정씨의 경우 폭로가 안 됐으면 대선 후보가 됐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김지은씨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이 정치인은 공적 영역에 나오면 안 될 것 같아'라고 생각해 폭로를 할 수도 있는 거다. 가족들과 비서가 자신의 수족이 아니라 중요한 지지자이자 자신을 평가하는 감시자라는 걸 지도부가 알아야 몸조심도 하고 갑질도 안 할 것이다. 공적 관계 내부의 서사가 바뀌어야 할 부분이 굉장히 많다.

또한 법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사회규범의 변화로, 개인의 치유로 각자 다 다르게 해결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탤런트 이영하씨 사건의 경우 피해자는 자신의 치유를 위해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피해자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했으면 됐다. 한 번은 어떤 배우가 가해자로 지목을 당했는데 피해자에게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 끝난 사건이 있다. 그런데 법적 처벌을 두려워하는 가해자들은 사과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거나 물결모양 같은 것을 넣어서 문제를 사소화하여 분노를 키운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서로에게 인간적으로 대하기 어려워지는 것 같다. 미투 이후에 대해 전망은 못하겠고 바람은 말하고 싶다. 우리가 서로를 인간적으로 대하는 사회. 여자도 인간의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인정되는 사회가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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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권김현영 미투 운동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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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스타팀에서 방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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