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혜수.

배우 김혜수가 영화 <미옥>으로 본격 액션 장르에 도전했다. 범죄조직의 2인자로 뭇 남성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꿈을 펼치려는 현정 역을 맡았다. ⓒ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영화 <차이나타운>의 엄마, <굿바이 싱글>의 주연, 그리고 <미옥>의 현정까지. 장르와 주제의식은 모두 다르지만 근래 배우 김혜수가 선보인 이 캐릭터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야기 안에서 소모되고 끝나는 기능적 캐릭터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김혜수가 입은 이 세 캐릭터는 누군가의 대상이자 어떤 사건 안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이 아닌 관객에게 동질감을 주고 이입할 수 있는 온전한 사람이었다. 각박한 삶 속에서 고아들을 통제하는 엄마는 그 자체로 사회 시스템을 벗어난 어두운 사람들의 상징이 됐고, 톱스타로 자기만 알던 주연이 미혼모의 삶을 인정하면서 우리 주변에 실재하는 여성들의 아픔을 끌어안았다.

<미옥>의 현정은 자기가 몸담은 조직에서 어떤 욕심을 부리려는 인물이 아니다. 범죄조직에서 합법적 기업으로 거듭나려는 조직을 위해 온갖 뒷수습을 담당하지만 정작 현정은 자신의 과거와 결별해 새롭고도 평범한 삶을 꿈꾼다. 성매매 여성이라는 과거가 부끄러운 게 아니다. 현정과 함께 했던 여성들 역시 남성의 노리개를 거부하며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삶을 품기 시작한다. 현정으로 인한 변화였다.

개봉을 앞둔 시점,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배우 김혜수를 만나, 그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었다.

 영화 <미옥>의 한 장면.

영화 <미옥>의 한 장면. ⓒ 씨네그루


과거에서 벗어나려는 여성

"어떤 범죄조직을 다룬 영화든 그간 여성이 주요한 인물로 등장하진 않았잖나. 검찰이나 경찰을 다룬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이 작품에 끌린 건 기본적으로 조직과 그 안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지만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해서다."

"모든 걸 끊고 떠나려는 현정의 모습이 흥미로웠다"고 김혜수는 작품 선택 이유에 대해 덧붙였다. 사실 이 흥미엔 배우로서 자신의 삶 또한 이 영화를 통해 돌아보던 자연인 김혜수로서의 고민도 함께 담겨 있었다.

"조직 생활을 해 본 적은 없지만 어쨌든 저 역시 보편적 직업을 갖고 살진 않았다. 물론 직업을 떠나 어떤 다른 삶을 꿈꾸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평범한 삶을 살고 있기도 하지만 이렇게 인터뷰를 할 때도 그렇고 '내가 과연 이 일을 할 만한 자격이 되는 사람일까'를 생각한다. 성인이 되면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에 고민을 하잖나. 잘 해왔어도 잠시 멈추고 생각할 때가 있다. 부지불식간에 고민할 때도 있고. 직업적인 면에서 고민을 하게 된 셈이다."

그렇기에 <미옥>이 일종의 여성이 전면에 드러난 '여성 누아르', 즉 여성 캐릭터 중심의 영화라는 건 김혜수가 <미옥>을 선택한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그보단 인간관계 그리고 자아와 꿈에 대한 고민 등 보다 본질적인 요소가 그의 마음을 이끌었다고 보는 게 맞다.

"촬영 시작 때까지 어떤 여성 누아르에 대한 책임감 등의 마음은 없었다. 개봉 직전, 작품을 홍보하면서 그 지점에 초점이 맞춰진 면이 있더라. 또 최근 관객분들이 영화에서 여성의 능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잖나. 그러다 보니 지금 시점에서 부담이 되는 게 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분명 (여성 누아르적인) 그런 요소가 있으니. 이를테면 이후에 새롭게 도전할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거나 그러면 안 될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배우 김혜수.

ⓒ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후회 없는 선택

개봉 이후 하나의 짐을 더 떠안은 것이지만 외적 요소를 빼면 작품에 임하는 김혜수는 꾸준했다. 사전 기획 단계부터 적극적으로 현정의 헤어스타일과 의상, 대사 톤 하나하나까지 의견을 냈고, 스태프들과 치열한 논의를 거쳤다. 여기에 더해 그가 처음으로 본격적인 액션에 도전한다는 면도 짚을 수 있다. 당시 <굿바이 싱글>과 tvN 드라마 <시그널> 촬영 등이 겹쳐 제대로 액션 기본기를 다질 수 없었기에 일정에 맞게 최대한 집중력을 발휘해 맞춤형 액션을 준비해야 했다.

"의상이면 의상, 헤어면 헤어. 팀별로 정말 많은 아이디어가 오갔다. 헤어스타일에 대해선 만장일치였지만 색깔은 좀 더 고민했다. 의상과 분장 등도 여러 아이디어를 비교하고 수렴했지. 본래 제가 그렇게 작품을 찍지 않는데 다른 작품과 촬영이 겹치게 돼서 액션은 현장에서 하나씩 익혀갔다. 제 액션을 받아주시는 분들이 진짜 잘한 거다. 저에 맞춰서 해주신 거니까. 

폐차장 액션은 10일 남짓 촬영했고, 마지막 신의 액션 역시 일주일 정도 찍은 거 같다. 오래 찍었지(웃음). 사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부터 액션이 있음을 알고 한 거니까 겁이 많이 나긴 했다. 그간 (촬영장에서) 사고가 나는 걸 많이 봐서 트라우마가 있었다. 다행히 우리 촬영 중에 큰 사고는 없었다. 근데 마지막 액션 촬영을 앞두고 차 안에서 대사를 익히고 있는데 큰 트럭이 우리 차를 뒤에서 밀고 왔다. 차는 파손됐지만 다행히 나는 크게 다치진 않았는데 함께 있던 스태프들이 다쳤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가슴을 쓸어내릴 사고였음에도 그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동석했던 스태프들을 걱정하며, 이 이야기에 놀라는 기자들을 그는 애써 안심시키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미옥> 속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꾹 누르며 사건을 처리하던 현정의 모습이 잠시 보였다.

"모든 작품이 그렇겠지만 <미옥>은 어느 때보다 감독과 동료배우들과 함께 열정적으로 의견을 나누고 고민한 작품이다. 그래서 결과물이 어떠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관객 분들의 몫인 거 같다"며 대사의 수위와 감정 수위 등 치열하게 고민했던 지점을 전했다.

"보스의 아이를 가졌지만 실제 사랑하는 감정은 아니었을 거다. 또 상훈을 냉정하게 대하지만 동료 이상의 감정을 가졌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감정을 차단해야 했다. 현재의 삶을 떠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거든. (보스의 자리를 차지하고픈) 상훈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 여자의 목표와 꿈은 좌절되는 것이지. 모성애에 대한 부분도 전 드러나지 않게 건조하게 하려했다. 모든 상황이 다 끝났을 때 뭔가 씁쓸한 여운이 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의 이전 제목이 <소중한 여인>이었잖나. 보스에게도, 상훈에게도 현정은 소중한 여인이었던 거다. 다만 그 남자들은 이 여인을 지키는 법을 몰랐던 것이고."

진정한 여성 캐릭터, 그리고 도전

앞서 언급한 세 작품을 언급하며 그에게 진짜 한국 영화 속 여성 캐릭터에 대해 물었다. 기능적으로 담겨 왔던 다수의 한국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이 제대로 표현될 날이 올까. 적어도 김혜수 등 몇몇 여배우가 출연한 최근 몇 작품들은 이런 혐의에서 자유로워 보인다. 

"작품 속에서 '여성의 주체성 여성이 왜 이리 없냐' 혹은 '왜 여성 캐릭터가 제대로 등장하지 않냐'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제 생각은 이게 어떤 캐릭터의 비중 문제나 캐릭터 수의 많고 적음의 문제는 아니라는 거다.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그리고 관객이 그 캐릭터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의 문제지. 

<차이나타운>엔 '엄마'가 19신 나온다. (전체 중 그리 많지 않은 비중인데) 그만큼 분량의 문제는 아니라는 거지. 여성 배우가 주연이어서 '여성 영화'라고 우길 수는 있지만 결국 연출자가 어떻게 운용하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다."

 배우 김혜수.

ⓒ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핵심은 양이 아닌 질이니까. <미옥>을 하며 자신을 투영해 본 김혜수는 직업적으로 고민은 했을지언정 그만큼 그의 연기 엔진은 보다 배기량이 커진 느낌이었다. 엔진에 비유해 그의 앞으로의 꿈을 물었다.

"연료도 적당하다. 더 채워도 되고 더 써도 지장이 없을 정도? 제가 좀 오래 달렸다(웃음). 그래도 나름 잘 달려온 거 같다. 이젠 차의 고유성을 손상시키지 않고 잘 발휘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는 지점인 거 같다. 스스로 운전하는 거니 누구와 함께 타는지도 굉장히 중요하겠지. 이 비유가 재밌다(웃음).

장르로 치면 안 해본 게 여전히 많다. 음…. SF도 안 해봤고, 밀도 높은 멜로물도 안 했고. 그간 액션이라는 말 자체에 위축된 면이 있었는데 <미옥> 하나 했다고 엄청난 용기가 생긴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액션을 겁낼 거 같진 않다. 작품 내에서 액션이 필수불가결이라면 피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작품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가 중요하다. 메시지를 위해서라면 (주연이 아닌) 부수적 역할도 할 거 같다. 

<시그널>도 그랬다. 본래 제 일정이 안 되는 거였는데 4부까지 이야기를 봤을 때 차수현이 중심인물은 아니었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이야기가 모두 피해자나 유가족 입장에서 전개된다는 거였다. 그리고 미해결 사건을 다룬다는 것도 좋았고. 감독님을 만났을 때 제가 물은 건 내 캐릭터가 어떤지가 아니라 이 드라마가 몇 개의 미제 사건을 다루고, 얼마나 어떻게 다루는 건지였다. 게다가 주인공들조차도 형사인데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피해 대상이라는 설정도 놀라웠다. 그게 잘 살아서 다행이었다. 근데 가장 중요한 건 시청자 분들의 공감이다. 우리가 살면서 강력사건을 얼마나 경험할 수 있을까. 거의 못하겠지만 부조리는 종종 겪잖나. <시그널>은 그 부조리를 간접 경험하게 해준 것이다."

사실 영화 <관상> 속 연홍, <타짜> 속 정 마담도 '비중'이 아닌 메시지를 본 김혜수의 선택이었다. 꽤 오래전부터 그의 선택 기준이 분명했다는 증거다. 배우가 왜 그 작품에 있어야 하는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려는 태도. 배우 김혜수가 갖고 있는 특별한 미덕임이 분명해 보인다.

 배우 김혜수.

그는 12월 부터 새 작품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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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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