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놈의 신경 세포를 마비시키는 거야. 여기 들어있는 말레이산 클로르페니라민이 몸속에 침투하게 되면 저놈들 신경전달 물질인 트라산 크라산트 메이트에협착하게 되고 그게 특탄트린과 메스메트린 이 두 가지 물질로 파괴되어 버려."

쏟아지는 외계어의 향연, 아무리 봐도 멀끔한 사람을 외계인이라고 몰아대는 두 남녀, 우스꽝스러운 소품과 과장된 대사. 언뜻 보면 정신이상자의 헛소리 같은 병구의 이야기는, 극이 진행될수록 밝혀지는 그들의 과거를 통해 우리 사회의 어두운 현실과 점차 맞닿아 간다. 다소 황당한 결말임에도 불구하고 공연장을 나서는 관객들은 왠지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과연 우리의 옆에도, 병구가 찾아 헤매는 외계인이 살고 있는 걸까.

2017년의 <지구를 지켜라>, 무엇이 달라졌나

올해 두 번째로 무대에 오르는 연극 <지구를 지켜라>의 프레스콜이 지난 9일 오후 2시, 서울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열렸다. 이 작품은 2003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인 20대 청년 병구는 조력자 순이와 함께 유제화학 강만식 사장을 납치해 은신처로 데려간다. 그들은 만식이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며 온갖 고문을 시작하고, 지구를 지키기 위해 '왕자님'을 만날 방법을 찾는다. 극의 주된 배경은 병구의 은신처다. 조연인 멀티맨과 순이를 제외하면, 단 두 명의 배우만이 여러 시간대와 장소를 바삐 넘나들며 이 황당한 주장의 당위성을 만들어가는 셈이다. 다소 휑한 무대를 채우는 두 배우의 촘촘한 심리 게임이 돋보인다.

외계인으로부터 지구를 지킬 수 있을까 지난 9일 오후, 서울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열린 연극 <지구를 지켜라> 프레스콜 현장. 작년에 이어 올해도 돌아온 이 연극은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B급 정서의 사회비판극인 연극 <지구를 지켜라>는, 어렸을 때부터 학대를 받아온 병구가 부패한 대기업 회장 만식을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그린다.

지난 9일 오후, 서울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열린 연극 <지구를 지켜라> 프레스콜 현장. 작년에 이어 올해도 돌아온 이 연극은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 이혜민


영화의 줄거리와 캐릭터 설정을 그대로 따랐던 초연과 달리, 재연에서는 두 주인공 병구와 만식의 캐릭터에 변화를 두었다. 초연에서 나이가 지긋한 대기업 회장으로 묘사되었던 것과는 다르게, 2017년의 만식은 연령대가 확 낮아진 '안하무인 재벌 3세'이다. 또 다른 주인공 병구와 비슷한 나잇대로, 두 인물의 환경 차이에 따라 극명하게 갈리는 두 개의 인간상을 더욱 잘 나타낸다. 또한, 다소 무거운 원작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군데군데 추가된 희극적 요소와 멀티 배우 한 명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통해 연극 장르만이 가질 수 있는 현장성의 매력을 살렸다.

외계인으로부터 지구를 지킬 수 있을까 지난 9일 오후, 서울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열린 연극 <지구를 지켜라> 프레스콜 현장. 작년에 이어 올해도 돌아온 이 연극은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B급 정서의 사회비판극인 연극 <지구를 지켜라>는, 어렸을 때부터 학대를 받아온 병구가 부패한 대기업 회장 만식을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그린다.

B급 정서의 사회비판극인 연극 <지구를 지켜라>는, 어렸을 때부터 학대를 받아온 병구가 부패한 대기업 회장 만식을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그린다. ⓒ 이혜민


하지만 '연극이기 때문에' 보여주지 못하는 이야기에 대한 아쉬움 역시 크다. 같은 무대, 같은 세트에서 연기되어야 하는 특성으로 인해 각 배우는 무대 중앙의 회전문을 돌며 시간의 흐름을 표현한다. 하지만 같은 의상을 입은 배우 두 명이 동일한 자리에서 재연할 수 있는 기억의 스펙트럼은 영화의 플래시백 기법에 비하면 비교적 한정적이다. 단편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병구의 아픈 기억 회상 장면은, 영화의 사실적인 스토리텔링에 비하면 다소 미약해 보인다. '연쇄 살인마'가 되어 버린 병구를 관객들이 이해하게 하기 위해, 배우가 흘려야 하는 눈물의 힘이 더욱 커 보인다.

선과 악 혹은 절대 악과 차악

외계인으로부터 지구를 지킬 수 있을까 지난 9일 오후, 서울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열린 연극 <지구를 지켜라> 프레스콜 현장. 작년에 이어 올해도 돌아온 이 연극은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B급 정서의 사회비판극인 연극 <지구를 지켜라>는, 어렸을 때부터 학대를 받아온 병구가 부패한 대기업 회장 만식을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그린다.

순이를 매수해 탈출하려고 하는 만식. 여의치 않자 만식은 순이의 트라우마를 건드리기 시작한다. ⓒ 이혜민


"순이씨, 여기 카드 있거든. 이거 한도 없다? 마음대로 쓰고 나 좀 풀어줘, 씨발!"

극의 전반에 걸쳐 만식은오직 돈으로밖에 사람을 생각할 줄 모르는, 이기적이고 피도 눈물도 없는 안하무인 재벌 3세로 묘사된다. 그에게 타인의 고통은 자신의 안위를 위한 '필요'일 뿐이다.

"저 역시도 만식을 연기할 때, 우리 사회 속 '악의 표본'을 보여 드리고자 했습니다. 특히 병구와 갈등하는 장면에서, 상반된 환경에서 자라난 두 인물 간 서로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괴리감에 대해 중점을 두었어요." (허규)

하지만 극의 가장 중요한 대립 구도가 다소 평면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 또한 든다. 2003년 영화 원작의 힘 없는 청년 병구와 재벌 노인 만식의 대립 구도는, 14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매체를 통해 재생산되어 왔다. 이지나 연출은 이 구도에 최근 새롭게 등장한 '수저론'을 양념처럼 더해 현실의 사회를 반영하려 한다. 하지만 요즘의 우리 사회는 그것보다는 조금 더 복잡해 보인다. 극 안의 병구와 만식 역시 그렇다. 흑과 백처럼 세상의 선과 악을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외계인으로부터 지구를 지킬 수 있을까 지난 9일 오후, 서울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열린 연극 <지구를 지켜라> 프레스콜 현장. 작년에 이어 올해도 돌아온 이 연극은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B급 정서의 사회비판극인 연극 <지구를 지켜라>는, 어렸을 때부터 학대를 받아온 병구가 부패한 대기업 회장 만식을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그린다.

확신을 가지고 만식을 고문하는 병구와 순이. 영화보다는 장면 묘사가 훨씬 부드럽게 처리됐지만, 현장성이 있는만큼 보는 관객이 다소 불편할 수도 있다. ⓒ 이혜민


"이 특수 기구로 얼굴 껍질을 벗길 거야. 부작용이 있다면, 아주 많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거지."

놀랍게도, 힘없는 청년 병구 역시 사회의 시선으로 볼 때는 여러 사람을 잔혹하게 살해한 연쇄 살인마이다. 비록 피해자들이 병구에게 잊지 못할 폭력과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은 병구의 범죄를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어 주지만, 그럼에도 병구가 또 다른 가해자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폭력에 대응하는 더 큰 폭력은 과연 옳은가, 라는 의문이 남는다. 초연부터 지적됐던, 관객들이 '병구에게 온전히 이입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절대 악'이지만 극 속에서는 물리적 피해자인 만식과, 실질적인 피해자로 그려지지만 눈앞에서는 가해자인 '차악' 병구의 싸움에서, 선택을 내리는 것은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지구를 지켜라>, 폭파되지 않으려면

외계인으로부터 지구를 지킬 수 있을까 지난 9일 오후, 서울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열린 연극 <지구를 지켜라> 프레스콜 현장. 작년에 이어 올해도 돌아온 이 연극은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B급 정서의 사회비판극인 연극 <지구를 지켜라>는, 어렸을 때부터 학대를 받아온 병구가 부패한 대기업 회장 만식을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그린다.

'인류에게는 희망이 있을까. 인간은 계속 생존할 자격이 있는 걸까. 우리는 잘 살고 있는가.' 작품을 보다 보면 그런 질문을 스스로 던질 수밖에 없게 된다. ⓒ 이혜민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혹은 극의 마지막 장에서, 병구는 결국 지구를 지키지 못하고 납치범을 쫓던 강 형사에 의해 사살당하고 만다. 그리고 모두가 믿지 않았던 병구의 처절한 주장 역시 사실로 밝혀진다. 놀랍게도, 만식은 진짜 안드로메다 PK-45 행성에서 온 '외계인 왕자'였던 것이다. 하지만이 놀라운 사실과는 별개로, 그 역시 결국 지구를 살릴 방법을 찾지 못한다.

"삭제시켜, 저 별엔 희망이 없어."

"지구를 어떻게 할까요?"란 물음에 외계인 왕자 만식이 답한다.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결국 우리의 지구는 산산조각으로 폭파되어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는 결말이다. 하지만 연극 밖 진짜 지구에 살아가는 우리는, 아무리 꿈도 희망도 없는 사회라도 폭파는커녕 탈출마저도 힘든 상황이다. 병구처럼 모든 외계인을 잡아 산산조각낼 수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 '지구인'들은 지금까지 그럭저럭 잘 맞서 싸워 왔다. 이미 몇 명의 외계인을 잡아 별의 왕좌에서 끌어내려 그들의 나라로 돌려 보냈으니. 하지만 아직도 지구에는 시시각각 우리의 파괴 본능을 자극하는 '외계인'들이 많다. 평생을 바친 일터에서 내쫓고, 병에 걸리게 하고, 가족의 행복을 빼앗고, 역사의 그릇됨을 감추어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또 다른 '강만식'들, 바로 그 '외계인'들 말이다. 그들이 선물 받은 공연 티켓 중 <지구를 지켜라>라는 극이 꼭 들어 있기를 바랄 뿐이다.

외계인으로부터 지구를 지킬 수 있을까 지난 9일 오후, 서울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열린 연극 <지구를 지켜라> 프레스콜 현장. 작년에 이어 올해도 돌아온 이 연극은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B급 정서의 사회비판극인 연극 <지구를 지켜라>는, 어렸을 때부터 학대를 받아온 병구가 부패한 대기업 회장 만식을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그린다.

아직 보기에는 평화로운 지구 앞에서, 출연진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혜민


범우주적코믹납치극 <지구를 지켜라>는 오는 8월 10일부터 10월 22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공연된다. 이지나 각색/연출, 조용신 극본, 김성수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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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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