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정은 발라더다. 스스로 그렇게 정의한다. 많은 가수가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음악을 들려드리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다. 발라드 가수로 자리 잡고 싶고, 발라드를 잘 부르고 싶고, 어떻게 해야 박재정 고유의 발라드를 부를 수 있을지 찾고 싶다. 지난 21일 오후 서울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박재정을 만났다.

신곡 '시력', 2년 준비한 이유

박재정 박재정이 29일 오후 싱글 '시력'을 발표한다. 지난 2013년 엠넷 오디션 프로그램 < 슈퍼스타K5 >에서 우승을 차지한 박재정은 편안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특징이다. 신곡 '시력'은 이별 후 겪는 감정을 흐릿해진 시력에 비유한 곡이다.

박재정이 29일 오후 싱글 '시력'을 발표한다. ⓒ 미스틱엔터테인먼트


지난 2013년, 엠넷 < 슈퍼스타K5 >에서 우승을 거머쥔 박재정은 1995년생이다. 올해 23살인 그는 2015년 윤종신이 대표 프로듀서로 있는 미스틱엔터테인먼트에 둥지를 틀었다. 20대 초반에 이미 발라더로서 방향성을 잡은 것이다.

그런데 좀처럼 자주 모습을 볼 수 없었다. 2017년 6월이 돼서야 자신의 이름으로 내는 첫 솔로곡 '시력'을 선보인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걸까. 지난해 5월 규현과 함께 듀엣곡 '두 남자'를 불렀고, 올해는 <월간 윤종신> 5월호 '여권'의 가창자로 참여하긴 했지만 미스틱에 온 후 박재정의 솔로곡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라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이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시간이 필요했다. 자세랄까.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표현의 문제였다. 발라드를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표현하기까지 생각을 많이 했다. 2년 동안 준비했는데 '왜 내가 가수를 해야 하고 노래를 해야 하나' 고민하는 시간이 포함됐다. 윤종신 선생님 노래를 들었을 때 내가 위로를 받았지, 하며 나도 그런 노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력'은 박재정을 위해 윤종신이 작사하고 015B 정석원이 작곡과 편곡을 맡았다. 이별 후의 심정을 흐릿해진 시력에 비유한 곡인데, 박재정을 위해 '맞춤 제작'된 곡이란 점이 흥미롭다. 정석원은 박재정의 음역대를 고려했고, 윤종신은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사랑 노래를 하고 싶다는 박재정의 의사를 반영했다.

인터뷰를 시작하며 '시력'을 들었다. 이어폰을 빼며 "물 흐르듯이 편안하게 들린다"고 소감을 말하자 박재정은 "그렇게 되기까지 오래 걸렸다"고 했다.

"미성을 써서 부드럽게 표현하는 것을 선생님께서도 원하셨고 그렇게 만드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회사 분들과 윤종신 선생님이 기다려주셨다."

윤종신 '애제자' 맞지만 '제2의 윤종신' 아냐

박재정 박재정이 29일 오후 싱글 '시력'을 발표한다. 지난 2013년 엠넷 오디션 프로그램 < 슈퍼스타K5 >에서 우승을 차지한 박재정은 편안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특징이다. 신곡 '시력'은 이별 후 겪는 감정을 흐릿해진 시력에 비유한 곡이다.

지난 2013년 엠넷 오디션 프로그램 < 슈퍼스타K5 >에서 우승을 차지한 박재정은 편안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특징이다. ⓒ 미스틱엔터테인먼트


윤종신은 박재정을 두고 "발라드의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할 줄 아는 흔치 않은 젊은 아티스트"라고 이야기했다. '윤종신 애제자'가 된 배경을 묻자, 박재정은 발라드적으로 잘 통하는 감성에 대해 언급했다.

"윤종신 선생님과 작업할 때 '이건 재정이만 알겠다' 하고 장난스럽게 이야기하실 때가 있어요. 저도 노래 중에 '이 부분이 윤샘이 좋아하는 부분 아니에요?' 하고 여쭤보면 '맞다'고 하세요. 예전부터 윤종신 선생님 음악을 좋아했고, 노래 부를 때 감성적으로 비슷한 게 있다고 윤 선생님도 그렇게 느끼시는 것 같아요."

윤종신에게 많이 배우고 있지만 "그렇다고 제2의 윤종신"은 아니라고 그는 분명히 말했다. "윤종신이 프로덕션한 가수 박재정, 여기까지는 제 정체성이 맞지만, 그 이상은 제가 찾아야 한다"며 "윤종신 선생님은 제가 잘 걷도록 만들어주시는 분이고, 제가 스스로 잘 걸어갈 수 있도록 제가 저를 만들어 한다"고 덧붙였다.

'시력'을 2년에 걸쳐 다섯 번 이상 녹음한 이유에 대해선 "'시력' 하나로써 제가 어떤 발라더인지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윤종신과 함께했지만, 윤종신이 아닌 박재정의 색깔이 나는 발라드를 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엿보였다.

'진정한 위로'... 내가 노래하는 이유

박재정 박재정이 29일 오후 싱글 '시력'을 발표한다. 지난 2013년 엠넷 오디션 프로그램 < 슈퍼스타K5 >에서 우승을 차지한 박재정은 편안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특징이다. 신곡 '시력'은 이별 후 겪는 감정을 흐릿해진 시력에 비유한 곡이다.

박재정의 신곡 '시력'은 이별 후 겪는 감정을 흐릿해진 시력에 비유한 곡이다. ⓒ 미스틱엔터테인먼트


"오디션 프로그램이 끝나고 대중으로부터 관심을 많이 못 받았다고, 내가 큰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더 많이 사랑받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는데, 사랑을 받기 위해 노래하는 게 아니라 제가 진짜 노래하는 동기와 의미를 다시 다듬고 갖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박재정은 자신이 어떤 발라더가 될 것인지 방향성을 찾기 위해, '왜'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것이 방향을 잡는 첫 단계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앨범을 내면 얼마나 좋을까'란 상상을 하곤 했는데 이건 어쩌면 '내가 이런 이런 사랑을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말과 같다. 사랑을 못 받으면 상처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보다 내가 '왜' 사랑받아야 하는지, 내가 '왜' 노래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것이 먼저인 것 같다."

박재정은 이렇듯 이상적 발라더가 되기 위한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어떤 발라더가 되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묻자 "위로를 주는 발라더 박재정이고 싶다"고 답했다. 그는 "위로 안에 되게 많은 것들이 있다"면서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됐으면 좋겠고, 제 노래가 힘이 되는 5분이면 좋겠다"고 말했다.

'진정한 위로'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하림 선배님은 외국인 노동자 등 타지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분들을 위해 공연도 많이 하신다"고 예를 들며 "외로운 사람들에게 치유를 주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런 것들(위로)을 꿈꾸고 만들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큰 그림은 이게 다가 아니다. 작사 작곡을 하는 싱어송라이터를 꿈꾸고 있고, 지금도 계속 곡을 만들고 있다. 그런데 또 말하길 "10년 후쯤엔 제가 쓴 곡을 들려주고 싶다"고 해서 "10년이면 너무 늦지 않느냐, 빨리 선보이고 싶지 않느냐" 되묻자 이렇게 답했다.

"무엇을 하나 하더라도 10년을 해보라고 하지 않나. 10년 동안 많이 느끼고 배워서 오래 걸려도 좋은 곡을 쓰고 싶다."

많은 걸 이루고 싶은데 그러면서도 조급하지 않기란 힘들 법도 한데 박재정은 나이에 비해 꽤 성숙한 생각을 하는 듯했다. 하지만 진지한 이야기 중에도 중간중간 꾸준히 터뜨린 '웃김'은 그의 반전 포인트였다. 평소에도 '웃긴다'는 박재정은 "어색한 것보다 편안한 분위기가 좋으니까요"라며 잔잔한 유머를 예찬했다.

박재정 박재정이 29일 오후 싱글 '시력'을 발표한다. 지난 2013년 엠넷 오디션 프로그램 < 슈퍼스타K5 >에서 우승을 차지한 박재정은 편안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특징이다. 신곡 '시력'은 이별 후 겪는 감정을 흐릿해진 시력에 비유한 곡이다.

박재정은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 미스틱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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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이 여성을 이렇게 만들었나, 최희서가 품은 그 억울함

[inter:view] 영화 <박열>의 가네코 후미코 역... "비밀 발견한 기분"

아나키스트 박열의 평생 동지이자 글로써 자기 생각을 온전히 알리고 싶었던 가네코 후미코(金子 文子). 그리고 배우로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었던 최희서(본명 최문경). 모두 이름에 글월 '문'이 들어간다. 약 100년의 시차를 두고 영화 <박열>을 통해 만난 후미코를 두고 최희서는 "우울함 속에서 본인의 빛을 찾은 사람"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그를 온몸으로 품었다.제목은 <박열>이지만 이 영화, 다시 보면 가네코 후미코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유년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고 친척에게 학대받던 소녀는 자신의 삶을 비관하는 대신 일본 천황을 죽이고 권력을 조롱하는 길을 택한다.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최희서는 후미코와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비밀의 발견 "이준익 감독님이 일단 자서전을 읽어보라 하셔서 봤다. <무엇이 날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는 책 제목이 참 매력적이었다. 그 자체로 아나키스트로 살던 후미코의 모습을 상징한다. 박열과의 만남 이후보단 유년기, 청소년기 이야기가 주로 담겨 있었는데 여성으로, 무적자로, 가난한 계급으로 어떻게 무시당했는지 잘 나온다. 우울증이 올 정도로 암흑기였는데 어떻게 그걸 헤쳐 나갔는지…. 자살을 시도하다 '지금 내가 죽으면 사람들은 사고사로 생각하겠지? 아무도 나 같은 불쌍한 계급을 몰라주겠지' 생각한 대목이 있다. 14살에서 15살 때였는데 그걸 '우울한 검은빛이 생겼다'고 표현한다. 아나키스트가 되기로 한 출발점이었다. 그 나이에 그런 생각을 품고 갈 길을 찾았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비장해 보이기까지 한 표현이지만 최희서는 후미코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다. 이준익 감독이 "블랙 코미디에 어울리는 인물"이라 표현할 정도로 후미코는 감정이 풍부했다. 최희서는 참고한 몇 편의 영화를 언급하며 "생각의 필터가 없고, 감정을 꾸미지 않는 맑은 인물"로 후미코를 이해했다. 물론 쉽진 않았다. 대본을 받고 첫 촬영이 들어가기 직전인 약 두 달 동안 최희서는 말 그대로 칩거했다. "빨리 친해지고 싶은 생각에 방에서만 생활했다"며 그는 "책상 스탠드만 켜놓고 살았다"고 고백했다. <박열> 캐스팅 과정과 촬영 당시 소회를 한 사이트에 기고한 최희서의 글엔 '방에서 웅크리고 후미코를 상상했다'라고 돼 있다."그러고 보면 저도 이상한 사람인 것 같다. 스스로를 괴롭히는 걸 싫어하지 않는다. 우리 시나리오에 여백이 참 많았고 그걸 내가 채워야 했는데 그게 기쁘기도 힘들기도 했다. 방에서 나오지 않는 건, 사실 여태껏 그랬다. 조연을 하든 연극을 하든 방에 박혀서 시나리오를 읽고 또 읽었거든. <박열> 역시 자서전과 재판 기록 등 여러 자료를 함께 봤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봤는데 그게 발견의 연속이었다.실제 박열과 후미코의 말이 담겨있는데 일본어로 돼 있어서 그걸 자세히 보신 분이 안 계시더라. 아마 한국인 중에선 처음 읽는 사례였을 거다. 마치 둘만의 비밀을 발견하는 희열이 있었다. 그 기록 그대로 대사에 넣은 게 바로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평등한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그걸 유린하는 천황과 왕세자는 악마적 권력' 등이다." 어떤 열등감 유년 시절(최희서는 아버지 직업 때문에 일본에서 조선인 학교에 다녔다-기자 주)을 일본에서 보낸 최희서는 <박열> 대본의 일본어 번역을 맡기도 했다. 감독의 제안이었다. 전작 <동주> 때도 일부 번역을 맡았는데 "전문 번역가의 손을 거친 후 수정하는 것보다 직접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사실 일어뿐만 아니라 미국 유학 경험 등으로 영어와 스페인어, 중국어 등도 꽤 수준급이다. 내로라하는 명문대학교를 졸업했지만, 오디션을 위한 그의 프로필엔 학교 이름이 빠져 있다. 문경에서 희서로 직접 이름을 바꾼 것도 "연기를 하고 싶은데 너무 학구적으로 보인다"는 이유 때문이다."학력에 대해서 사람들이 많이 말씀하시는데 그게 콤플렉스가 될 정도였다. 학교라는 프레임 때문인지 역할을 맡아도 리포터, 비서를 많이 시켜주시더라. 스스로 제 프로필을 봐도 선입견이 생기겠더라(웃음). 이름은…. 소설 <토지> 속 주인공 이름이 서희잖나. 효자동에 유명한 작명소에 갔는데 희서와 연우를 주셨다. 그중에 서희랑 비슷한 희서를 고른 거다. 호적 자체를 바꾼 건 아니라 그냥 예명이다."이름을 새로 지을 정도로 배우 일에 애착이 컸지만, 이 과정은 쉽지 않았다. 일본 생활 때 학예회에서 심청전에 출연한 이후 막연하게 꿨고, 대학 진학하자마자 연기를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이렇다 할 두각을 보이지 못했다. 상업영화의 단역, 자비를 털어 만든 연극 무대에 오르며 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나갔다. 2년 전 지하철 안에서 열심히 대본을 외우던 그를 맞은편에 앉아 있던 신연식 감독이 우연히 보고 이준익 감독에게 소개한 건 이젠 유명한 일화다. 그 인연이 <동주>와 <박열>까지 이어진 것이다."그때 교대에서 경복궁을 가는 길이었는데 절실함을 보신 거 같다. 그때 스스로 제가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차였다. 돈을 버는 게 아닌 돈을 쓰면서 연기를 하던 때였는데 신인도 아닌 이미 데뷔한 지 6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래도 연습실 가면 즐겁긴 하고, 내가 어떻게 하면 배우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각하던 때였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 자신에게 조금만 더 버티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웃음)" 밝게 웃는 그 모습에 <박열> 속 후미코의 호기로운 표정이 비쳤다. 아무래도 <동주>와 <박열>이 최희서의 인생에 크게 남을 수밖에 없을 터. 최희서는 "앞으로 어떤 작품을 만날지 모르지만, 이준익 감독님의 평소 지론처럼 영화가 아닌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함께 즐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동시에 "너무도 짧게 살고 간 후미코가 안타깝다"며 새로운 포부를 밝혔다."아나키즘, 페미니즘에 대해 거의 모르고 살았다. 1920년대 평등을 외친 후미코를 알게 되면서 내가 너무 지금 세상을 선입견을 가진 채 살지 않았나 반성했다. '난 여자니까', '여배우니까' 하는 생각 말이다. 페미니즘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여성을 존중해 달라'가 아닌 '남성과 같은 선에서 생각해 달라'가 핵심 같더라. 별생각 없이 지나치는 여성휴게소, 여성 주차장 이것도 마냥 반길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냥 받아들여지는 것들에 대해 질문하는 계기가 됐다.칸 영화제에 참석한 제시카 차스테인 인터뷰라든지, 엠마 왓슨의 인터뷰를 보면서 과연 우리나라 어떤 배우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생각해봤다. 혹은 그런 이야기를 할 자리가 있을까. 후미코의 재판기록을 보면 당시 스물두 살이었는데 정말 논리적이고 비상하더라. 그가 오래 살았다면 일본 혹은 동북아를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이 됐을 건데 너무 안타까웠다. 제가 꼭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이건 아니지만 언젠가 여성 캐릭터의 전형성을 벗어날 기회가 생긴다면 조금이라도 기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후미코가 내 생각의 틀을 바꿔놨다. (웃음)"

손대는 작품마다 화제, 배우들이 욕심내는 작가 지이선

[inter:view] 연극 <킬 미 나우> <프라이드>의 각색... 작가 지이선의 고민

아이러니하게도, 좋지 않은 인터뷰가 오히려 훨씬 쓰기 쉽다. 안 좋은 대부분을 버리고, 살릴 수 있을 만한 약간의 부분들만 재가공하면 된다. 반면, 좋은 인터뷰는 쓰기가 어렵다. 버릴 곳 하나 없이 극상의 품질로 올라온 재료, 예컨대 참치를 보는 느낌이다. 나가야 할 요리는 1인분, 욕심을 부린다고 부려 보아도 곱빼기가 한계이다. 그보다 많은 양의 음식을 손님 한 분께 내어드릴 수는 없다. 그러면 이제부터 눈물을 흘리며 취사선택이다.지이선 작가와의 인터뷰가 딱 이런 경우였다. 지난 2일 오후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다. 1시간 조금 넘지 않을까 생각했던 인터뷰는 1시간 30분을 넘겨서 그것도 기자의 다음 일정 때문에 중단해야 했다. 그리고 주말에 연락이 왔다. 답변이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한 것 같다고, 그 캐릭터를 아끼는 마음에 비해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한 것 같다고 말이다. 그래서 5일 늦은 오후, 공연이 끝난 후 간단하게 맥주를 곁들이며 이야기를 또 나눴다. 그것이 2시간. 지이선 작가는 본인의 다른 작품인 연극 <모범생들>의 술자리로 이동해야 한다며 자리를 옮겼다.정신을 차려보니 연극 <프라이드>가 이번 주말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연극 <킬 미 나우>는 오는 7월 16일까지 고작 2주 남짓 남았다. 1등급 재료를 눈앞에 두고 당황스러워한 2등급 요리사. 그의 어설프고 부끄러운 요리를 이제야 독자들 앞에 내놓는다.글을 쓰는 것은, 언제나 고통 어떤 관객은 "지이선은 역시 지이선" "지이선답다"라고 엄지를 추켜세우고 누구는 "역시 나는 지이선하고 안 맞는 것 같아"라고 고개를 젓는다. 호불호가 갈린다는 건, 그에게 확실한 스타일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지이선'다운', 지이선의 스타일. 그렇기에 지이선이라는 이름 자체가 곧 하나의 브랜드이자, 극의 간판이자, 관객의 선택 기준이 된다. 이름 자체가 브랜드화된 연출은 몇몇 있지만, 작가의 이름을 보고 관객이 찾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배우 신성민은 지이선에 대한 평가를 부탁하자 "제가 감히..."라며 말을 아꼈다. 물론 이 말을 전하니 지 작가는 "그거 저 (물) 먹이려고 한 거예요!"라며 겸양과 위트를 섞어 부정했다.하지만 지이선이 유능한 작가라는 건 부정하기 어렵다. 확실히 지이선 작가는 대학로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이다. 2017년 6월 한 달만 생각해도 각색으로 참여했던 <프라이드>와 <킬 미 나우>가 호연 중이고, 김태형 연출과의 첫 호흡이자 올해 10주년을 맞은 <모범생들>도 개막하여 관객몰이에 들어갔으며, 관객참여형 실험극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가 큰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정작 지이선에게 글을 쓰는 것은 '고통'이다. 그리고 그 고통을 계속 감내하고 있다. 왜 글을 쓰는 것은 고통이고, 그런데도 글을 쓰는 것일까.각색의 어려움 연극은 마법이다. 그 마법의 힘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도 어쨌든 지이선은 펜을 움켜잡고 있다. 관객과 창작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마법. 그래서 지이선은 관객들을 '동반자'로 여기고 있단다. 그리고 그 동반자들 덕분에 지이선은 지이선으로 존재할 수 있다. 자연인 박지선은 그렇게 작가 지이선이 되고, 그 마법으로 가득 찬 공간에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고 있다. 지이선이 지이선으로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있을 수 있는 공간으로. 인간이 인간답게 존중받는 것. 연극 <킬 미 나우>와 <프라이드>를 관통하는 주제, 아니 어쩌면 연극이라는 무대를 아우르는 주제가 바로 인간이 아닐까.연극 <킬 미 나우>와 <프라이드>는 모두 원작이 있는 라이선스 작품이다. 라이선스 작품을 한국에 가지고 오면서 번역과 각색 작업은 필수다. 지이선은 모두 이 작품의 '각색' 작가이다. 창작보다 받는 페이는 훨씬 적지만, 각색에 드는 품은 창작이나 진배없다. 지이선은 번역가와 함께 원문과 번역 대본을 펴놓고 한 문장 한 문장씩 밑줄 그어가며 확인한다. 더 적확한 단어를 찾기 위해, 더 전달력 높은 뉘앙스를 위해 고민한다. 그리고 새로운 요소들을 만들어 집어넣는다. 어떨 때는 재창작 수준으로 고심하기도 한다. 이렇게 힘들 줄 알면서도, 굳이 각색으로서 이 작품들을 대학로로 가져왔다.지이선의 욕심 지금, 여기의 맥락에서 작품이 더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예컨대 <킬 미 나우>를 대표하는 오브제인 오리도, <프라이드>의 명대사로 꼽히는 문장 속 돌고래도 모두 지이선의 작품이다. 관객은 분명 지이선의 그런 노력을 그리고 작품에 대한 애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 '오리'나 '돌고래'가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면서 웃음 짓고 또 감사해 하는 걸 보면, 그런 자신의 노력을 알아주는 관객에게, 지이선은 무척 고마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각색은 각색일 뿐이다. 자신이 직접 쓴 작품이라면, 자신이 얼마든지 손을 댈 수 있다. 각색은 다르다. 원작자와 협의도 해야 하고, 자신이 어디까지 만질 수 있고 또 만져야 하는지 끊임없이 갈등할 수밖에 없다. 원작을 '복사+붙여넣기' 하는 데 그친다면 그건 기만이고 책임 방조다. 동시에 우리 관객이 더 재미있게 즐기고, 더 잘 이해할 수 있게끔 바꾼다는 핑계로 원작의 주요한 줄기나 메시지까지 훼손할 수는 없다. 각색은 동시에 그 원작의 "파수꾼" 역할을 해야 한다고 지이선은 믿고 있었다. 그래서 걱정이다. 원작의 한계가 눈에 들어왔을 때, 각색 작가는 어디까지 그 한계와 싸워야 하는가.실비아 그리고 트와일라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한계선은 존재하고, 구멍도 있다. 한 작품이 그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완벽한' 그릇일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그 작품이 처음 탄생했을 때는 날카로운 첨단이었어도, 시간이 지나고 시대가 흐르면서 투박해지고 촌스러워지기도 한다. 소수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여성 인물을 단순히 소비하는 것은 아닌지, 캐릭터가 너무 납작하지는 않은지, 지나치게 나이브하지는 않은지 등…. 각색이 덧대서 구멍을 메우고 원작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지울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있다. 연극은 시대와 호흡한다. 시대적 맥락에서, 연극은 때론 더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하고 그 힘을 잃기도 한다. 연극의 수명은, 그 시대와 현실에 가장 날카롭게 던질 수 있는 그 메시지가 효력을 다할 때까지일 것이다. 그래서 지이선 작가는 <프라이드>가, <킬 미 나우>가, 혹은 <모범생들> 같은 작품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 그때가 되면 웃으면서 즐겁게 문을 닫을 수 있을 것 같다고.그런 세상이 올까? 그러면 세상은 아마 또 다른 종류의 연극을 필요로 할 것이고, 그런 연극을 지이선은 옮겨오거나 직접 쓸 것이다. 지이선은 원작의 한계만큼이나 자신의 미숙함을 탓한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꾹꾹 작품에 많은 것을 눌러 담고 있다. 나는 지이선의 그 밀도를 좋아한다. 치밀하고 촘촘하게 짜인 대본 위에서 인물은 울고 웃고 춤춘다. 어쩌면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걱정하고, 그래서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그 태도가 지금의 지이선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걱정과는 달리 오래도록 그의 감수성과 비판 의식이 대학로에 남아있을 것 같다. 내일도 나는 여전히, 작품의 홍보 포스터에 '지이선 작' 혹은 '지이선 각색'이라고 쓰인 글자에 설레며 극장에 들어설 것이다. 연출이 작가 앞에 무릎을 꿇는 장면은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언젠가 '김태형 연출 없는 김태형 연출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일종의 뒷담화 인터뷰. 그리고 그 인터뷰의 인터뷰이 1호는 지이선인 것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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