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 방송의 위기'는 더 이상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어제의 '위기'가 채널 다양화로 인한 광고 수익의 감소, 뉴미디어의 등장으로 인한 시청 점유율 하락 등 경영상의 위기였다면, 오늘의 위기는 신뢰도에 대한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촛불 정국, 탄핵, 그리고 지금의 조기 대선까지, 그 어느 때보다 뉴스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진 지금이지만, 지상파 뉴스의 신뢰도는 바닥 수준. 지상파 뉴스에 실망한 많은 국민들은 더 이상 지상파 메인 뉴스를 보지 않고, 믿지 않고 있다. 실망과 분노를 넘어 무관심에 이른 것이다.

<오마이뉴스>는 누구보다 이 상황을 뼈아프게 지켜보고 있을 언론노조 KBS 본부 성재호 본부장, MBC 본부 김연국 본부장, SBS 본부 윤창현 본부장을 지난 14일 만났다.

 언론노조 KBS본부 성재호 본부장, MBC본부 김연국 본부장, SBS본부 윤창현 본부장(왼쪽부터)이 14일 오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박근혜 정부 시절과 탄핵 정국에서의 지상파 방송과 뉴스에 대한 대담을 하고 있다.

언론노조 KBS본부 성재호 본부장, MBC본부 김연국 본부장, SBS본부 윤창현 본부장(왼쪽부터)이 14일 오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박근혜 정부 시절과 탄핵 정국에서의 지상파 방송과 뉴스에 대한 대담을 하고 있다. ⓒ 이정민


지상파 방송 길들이기 10년, 어떻게 변했나

- 이명박-박근혜 정권 들어 지상파 방송 길들이기가 심화되면서 지상파 방송의 보도 기능이 약화됐다고들 한다. 구체적인 내부 사정을 듣고 싶다.

KBS 성재호 본부장(아래 KBS): 우선 시사 프로그램이 많이 없어졌다. 특히 PD들이 만드는 시사 프로그램들이 타격을 크게 입었는데, <시사투나잇>이 없어졌고,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인 <미디어 포커스>가 없어졌다. 사대강 때문인지 <환경 스페셜>도 폐지됐다. 있는 프로그램에서도 민감한 이슈가 다뤄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얼마 전 촛불을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KBS 스페셜>에서 방송되지 못하기도 했다. <창> <취재파일K> 등도 연성 아이템으로 채워지고 있다. 시의성 있는 시사 주제는 권력에 비판적인 이슈가 많은데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MBC 김연국 본부장(아래 MBC): MBC는 2010년 파업 이후 10명이 해고당했고, 노조는 195억의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다. 80여 명이 정직 이상의 징계 받았고, 200명 이상이 현업에서 쫓겨났다. 파업에 대한 보복으로 시사교양국 자체가 아예 해체돼 버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불만제로> <더블유(W)> <미디어비평> <후 플러스>가 폐지됐다. 그나마 <피디수첩> <시사매거진2580>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능력 있는 시사 PD들은 전부 비제작부서나 영업, 경인 지사, 스케이트 관리 등으로 쫓겨나 버렸다. 최근 다큐멘터리 부서에서 6월 항쟁을 다루려고 했지만 김장겸 사장이 불방 시켰고, 탄핵 다루려던 <MBC 스페셜>도 불방시켰다. 세월호 인양될 때는 <시사매거진2580>에 국장이 개입해서 '진실', '원인 규명' 단어 삭제하라고까지 했다. 이렇게 되면 기자·PD들은 일할 수가 없다. 한마디로 기자, PD들에게서 제작의 자율성을 빼앗았고, 아이템을 결정하고 토론하는 문화는 말살돼 버렸다.

SBS 윤창현 본부장(아래 SBS): 시사 프로그램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뉴스토리>는 아무도 안 보는 토요일 아침 7시 40분에 편성됐다. 상식 밖 편성이다. 보지 말라는 것 아닌가. 최근 호평받고 있지만 <그것이 알고싶다> 역시 MB 때부터 살인사건에 치중하는 등 지속적으로 연성돼왔다. 최근 10년간 보도가 얼마나 망가져 왔냐면, 지난해 사드 논란이 뜨거울 때, 모 선배가 후배 기사 데스크를 보면서 야당의 반론을 한 줄 넣었다. 이명박 때 입사한 후배였는데, 그 후배가 '기사 이렇게 써도 돼요?' 하더란다. 이게 뭐냐면, 반론조차 보장하지 않는 엉터리 데스킹, 엉터리 기사가 일상화돼서 후배들에게 DNA처럼 박혀버린 거다. 심각한 문제다. 지난 10년간 언론 장악이 저널리스트들의 영혼을 파괴했다.

 언론노조 SBS본부 윤창현 본부장

언론노조 SBS본부 윤창현 본부장 "방송의 공정성과 신뢰도는 단순한 사회적 명제가 아니라, 생존에도 영향을 미친다. 시장 가치로 봐도 중요한 지표라는 거다" ⓒ 이정민


- 현재 사정은 민영 방송인 SBS가 그나마 나아 보인다. 지난해 <그것이 알고싶다> '대통령의 시크릿 편' 방영을 앞두고 SBS 경영진에게 보도 중지 요청이 들어왔지만, 이를 제작진에게 전달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SBS: SBS 경영진은 타 방송사 경영진에 비해 숫자에 민감하다. 시민들이 지상파 방송에 기대하는 역할이 뭘까? 공정하고 심층적인 뉴스, 사회 현안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전달이다. 이런 것들이 마비되니 시청자들이 지상파를 안 보게 되는 거다. 그게 가장 극명하게 증명된 게 지난 최순실 보도였다. 박근혜가 국회에서 개헌안 발표하자 SBS가 개헌안을 쫙 풀어서 11건을 보도했다. 같은 날 JTBC는 태블릿PC를 보도했다. 그때부터 SBS 뉴스 시청층이 그대로 JTBC로 옮겨갔고, 아직까지 회복되지 않고 있다. 당분간 안 될 거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방송의 공정성과 신뢰도는 단순한 사회적 명제가 아니라, 방송사 생존에도 영향을 미친다. 시장 가치로 봐도 중요한 지표라는 거다. 노조는 진작부터 이렇게 (보도)하면 망한다고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 해왔지만, 경영진은 최순실 보도를 기점으로 숫자로 나타나자 깨달았다. 지금은 그나마 바뀌었는데, 문제는 뿌리가 대단히 얕다는 거다. 언제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지 모른다.


MBC: 언론사의 신뢰도라는 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문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돈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난해 태블릿PC 보도 이후, JTBC <뉴스룸>의 광고 몇 달 치가 최고가로 완판됐다고 들었다. MBC <뉴스데스크>의 시청률은 2%다. 창피한 일이지만 지금 <뉴스데스크>에 붙는 광고 중 돈 주고 붙는 광고가 거의 없다. 다 서비스 광고다. 광고나 시청률도 정부의 문제점을 가감 없이 지적하고 비판했을 때 따라 온다는 거다. 신뢰는 유무형의 자산이다. JTBC의 신뢰도가 올라가면서, 'JTBC가 만드는 예능, 드라마도 다 예뻐 보인다'는 댓글이 달리더라. 반대로 MBC 프로그램에는 '꼴도 보기 싫다'는 댓글이 붙는다. 

MBC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면 뉴스와 시사가 망가지면, 결국 드라마와 예능도 급격하게 파괴된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김재철 사장 취임 이후 <뉴스데스크>를 8시로 옮겼다. 편성국은 물론 보도국에서도 다 반대했지만 강행했고, 여기에 공정성까지 심각하게 훼손되면서 뉴스 경쟁력이 약화됐다. 시청률이 떨어지고 광고가 안 붙으니, 방송사에서 유래가 없는 편성을 한다. 뉴스 앞뒤로 일일드라마를 샌드위치 편성한 거다. 매일 방송되는 일일드라마는 공력이 많이 들어 PD들이 굉장히 힘들어한다. 일일을 두 개 운영하다 보니 배우 구하기도 어렵고, 작가 구하기도 어려워졌다. 참신하고 새로운 드라마에 투자되어야 할 것들이 모두 일일드라마로 넘어갔고, 눈앞에 시청률만 좇느라 신인 등용문인 <베스트 극장>도 폐지했다. 창의적인 실험과 시도가 없어졌고, 떨어지는 시청률을 잡기 위해 소재는 점점 막장으로 흘렀다.

뉴스·시사가 무너진다는 건 그 방송국의 신뢰도가 무너진다는 거고, 내부 구성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예전 MBC에는 '보도국 기자, 시사 PD들 돈 신경 쓰지 말고 공정 보도하고 회사 이미지 살려라. 돈은 예능·드라마가 벌어줄게' 이런 분위기가 있었다. 단순하지만 이 구도 속에서 모두가 신나게 일했다. 지금은 이런 구조가 다 무너졌다. 뉴스와 시사프로그램이 무너지고 편파보도하면서 스테이션 이미지가 붕괴됐고, 예능과 드라마에 대한 이미지도 나빠졌다. 한마디로 신나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닌 거다. 최근 5년간 드라마·예능 주력 인력의 절반 정도가 회사를 떠났다. 여기에는 미디어 시장의 변화라는 이유도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PD들이 보람차게 일할 수 없는 분위기 때문이다. 경영진은 뉴스·시사에 소홀해도 예능·드라마가 있으면 스테이션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 착각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결과적으로는 다 무너진다.  

SBS는 늦게라도 방송사 신뢰가 곧 시장 가치라는 걸 깨달았는데, 왜 KBS·MBC는 아직도 못 깨달았을까? 공영방송 경영진들이 언론의 공적 의무는 물론, 경영에조차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혹은 본인의 극우적 신념을 위해서, 방송국은 망가져도 상관없다는 믿음을 가진 분들이 공영방송을 장악하고 있다.

 언론노조 KBS본부 성재호 본부장.

언론노조 KBS본부 성재호 본부장 "영국에는 수상이 가장 친한 친구를 BBC 사장에 앉혀놓으면 가장 적이 된다는 농담이 있다. 우리는 그게 없지 않나" ⓒ 이정민


"'JTBC 보면 되지' 하시는데 언제까지 잘할 수 있을까"

- 공영 방송의 위기에 대해 이야기 할 때, BBC의 사례를 많이 든다. 하지만 BBC 경영위원회도 결국 총리가 임명하기 때문에 MBC 방문진 시스템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왜 BBC와 우리 공영 방송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걸까?

KBS: 우리 공영방송과 BBC를 직접 비교하는 건 맞지 않다고 본다. 기본적으로 그 나라의 공영방송과 조직, 기구는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역사와 전통에 맞게 변형될 수밖에 없다. 영국에는 수상이 가장 친한 친구를 BBC 사장에 앉혀놓으면 가장 적이 된다는 농담이 있다. 그게 그들의 문화고 전통인 거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어떤가.


SBS: 결국 그 사회의 수준이다. 누가 권력을 잡든, 언론의 독립성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인식은 있어야 한다. 영국 수상이 자기 성향에 맞는 정치인을 BBC에 보낼 수는 있지만, MBC 고영주 이사장(방송문화진흥회) 같은 사람을 내려 보내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신뢰는 전제돼 있지 않나.

그런 사람이 경영진에 앉아있을 정도의 여론 지형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미디어법이다. MB 때만해도 MBC가 광우병 보도했지 않나. 사회적 논란이 있고, 검찰 통해 쑥대밭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가능했다. 하지만 미디어법 통과된 후에는 수준 이하의 뉴스가 무차별적으로 살포되기 시작했고, 사회 저변으로 퍼져갔다. 이런 여론이 시간이 지나면서 일정 포션을 차지해버렸다. 친박집회에서 난동부리고 백색테러가 난무하는 이런 환경, 10년 전만해도 상상 못 했잖나. 다 언론이 만든 환경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종편이 어젠다 세팅 기능을 심각하게 왜곡했다는 거다. 종편이 일정 영향력을 확보하기 시작하면서, 거기서 떠드는 뉴스를 지상파가 받아 나를 수밖에 없게 됐다. '518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설' 같은 말 같지 않은 소리도 논란 여론이 형성돼 버리니까, 진짜든 가짜든 지상파가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가 파괴된 거다. 타이완도 똑같은 경험을 했다. 타이완도 미디어법 통과 이후 우리 종편에 해당하는 케이블에서 극단적 여론을 부추겼고, 결국 지상파가 다 망가졌다.

 언론노조 MBC본부 김연국 본부장.

언론노조 MBC본부 김연국 본부장 "공영 방송은 버려두기엔 너무 소중한 우리의 자산이다.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 시민이라면 되찾아와야 한다" ⓒ 이정민


MBC: BBC가 어떤 지배구조이든 간에, 권력과 불편한 관계를 마다치 않는다는 게 중요하다. 공영이든 민영이든, 언론은 권력과 긴장 관계에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의 공영방송 체제는 크게 보면 1987년 6월 항쟁의 산물이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 체제 안에서 언론의 자유는 꾸준히 신장돼왔고, 정치적 독립성도 조금씩 높아졌다.

김영삼 정부부터 노무현 정부까지는 불편한 일이 없었을까? 당시 사장들도 정부 여당의 입김으로 임명됐고, 그때도 청와대든 여당이든 전화 여러 통 했을 거다. 하지만 그때는 분위기가 달랐다. 후배들에게 빼라 말아라 이야기하는 걸 창피해했다. 이 정도는 막아줘야겠다, 이 정도는 받아줘도 되겠다, 판단은 하시던 분들이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부터 무너졌다. 급격한 퇴행이 시작된 거다.

고영주 방문진 위원장은 현재 유력 대선 후보를 '빨갱이 공산주의자'라고 발언한 분이다. 군사독재 종식 이후 처음으로, 이런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분위기가 도래한 거다. 만약 BBC에서, 이런 극우 인사가 경영위원장을 차지하고 앉아 이런 발언을 했다고 생각해보자.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라면, 시민들이 나서서 왜 우리의 소중한 공영방송 사장에 그런 인물을 앉혔느냐고 들고 일어나야 한다.

이라크전쟁 파병문제로 BBC가 토니 블레어 총리를 비판적으로 한 뒤, BBC 사장이 물러난 적이 있다. 이때 BBC 구성원들은 물론, 시민사회도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시민들 중에는 망가져 버린 공영방송 냉소하고 없어져 버려도 좋다고 이야기하시는 분들도 계시다. 물론 그 심정을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버려두기엔 너무 소중한 자산이다. 다른 누구의 자산도 아닌, 국민의 자산이다.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 시민이라면 되찾아와야 한다. 더 많은 질책과 비판,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KBS: 맞다. '공영방송 저러다 망하든지 말든지 관심 없어' 하시는 분들 많을 거다. 그래서는 우리 언론 환경 절대 좋아지지 않는다. 지금은 'JTBC 보면 되지' 하시는데, JTBC가 언제까지 잘할 수 있을지 장담 못 한다. MBC도 한때는 국민에게 사랑받고 신뢰받던 방송국이었다.

 언론노조 KBS본부 성재호 본부장, MBC본부 김연국 본부장, SBS본부 윤창현 본부장(위부터)이 14일 오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박근혜 정부 시절과 탄핵 정국에서의 지상파 방송과 뉴스에 대한 대담을 하고 있다.

지상파 방송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 지배구조를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까? ⓒ 이정민


"타사보다 박근혜 더 띄우라던 간부들 여전... 사장은 여전히 박근혜"

- 우리 공영방송의 경우 공적 자본이 투입되면 그만큼 정치적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는 것 같다. 지상파 방송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 지배구조를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까?

KBS: 공영 방송의 사장은 정부가 임명하고, 그 사장은 권력의 정점에 앉아 인사권 등을 행사한다. 그래서 그 지배구조가 매우 중요하다. 지금 국회 계류돼 있는 '방송법 개정안'과 '언론장악 방지법'에는 이사회 선입구조, 방송사 지배구조, 사장 선출 구조를 바꿔야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사실 이 법안도 완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급하다. 우리 언론 환경은 1989년 방송법 통과될 때, 그 수준에 멈춰있다. 그나마 그 안에서 조금씩 향상되고 있었지만, 이명박-박근혜 새누리 정권에서는 완전히 퇴행됐다. 공영 방송에 경찰을 투입해서 사장을 끌어내리는 아주 야만적인 일까지 벌어졌다. 공영방송에 대한 언론 자유가 완전히 장악 된 거다. 그 퇴행 과정에서 생겨난 적폐들과 부역 행위들을 청산하는 게 시급하다. 퇴행의 시기에 낙하산처럼 꽂아놨던 적폐들을 물러나게 해야 새 출발이 가능하다.

방송법 개정안에는 지배구조에 대한 개선뿐 아니라 내부 구성원들이 침해받지 않고 언론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내부적 장치도 포함돼 있다. 지난 9년 동안의 경험에서 뽑아낸 거다. 단체협약, 말뿐인 편성규약을 지키도록 강제하고, 이행하지 않으면 처벌할 수 있는 내용도 있다. 민영방송인 SBS도 마찬가지다. 현 소유주와 언론 내 기능 담당하는 SBS를 명확히 구분해서 법제화해놓지 않으면 또 다른 정권 들어서면 과거처럼 눈치 보는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다. 어느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국민의 편에서 언론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미디어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SBS: MB때부터 MBC에는 '역투석작업'이 진행됐다. 투석하면 좋은 피를 넣어서 나쁜 피를 걸러내는 건데, 그 작업을 거꾸로, 나쁜 피를 계속 넣어서 조직을 망가뜨렸다. 아직 투석 바늘이 꽂혀있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다른 주사약 집어넣는다고 나아지나. 바늘을 빼는게 첫 번째 작업이다. 방송장악 방지법이 그거다. 그 법 자체가 완결적 구조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아주 극단적으로 쏠려있는 정치적 편향을 완화하는 정도의 역할은 할 수 있다.완벽한 정치적 독립은 여든 야든, 정치권이 방송 이사회에 개입 못 하게 하는 거다.


 언론노조 SBS본부 윤창현 본부장.

"언론 노동자들에게는 아이템을 선정하고, 고민하는 일이 굉장히 중요한 근로 조건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부당한 게이트 키핑과 자기검열로 이런 근로 조건이 침해당해왔다." ⓒ 이정민


- 촛불 정국 이후 대통령이 물러났고, 정권 교체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국민들은 새 정부가 들어서면, 지상파 방송사들에 제 모습을 찾을 거라 기대하고 있는데. 촛불 정국 이후로 달라진 분위기가 있나.

SBS: <뉴스토리>에서 삼성과 국민연금 관련 아이템을 다루었는데, 이때 이를 저지하려는 일부 보직자들의 시도가 있었다. 이전 같으면 저지됐겠지만, 노조에서 강력하게 문제제기하니 못 막더라. 굉장히 중요한 변화다. 노조원들이 노조를 믿고 가보자, 믿고 돌파해보자, 하는 힘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언론 노동자들에게는 아이템을 선정하고, 어떻게 다룰지, 어떻게 비판할지 고민하는 일이 굉장히 중요한 근로 조건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부당한 게이트 키핑과 자기검열로 이런 근로 조건이 침해당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구성원들이 각성하기 시작했다.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KBS: KBS는 솔직히 안 바뀌었다. 정권도 바뀌게 생겼고, 언론 장악 세력도 사실상 힘을 못 쓰게 생겼는데 왜 안 바뀔까? 그래서 지배구조가 중요한 거다. 여전히 사장과 이사회는 박근혜가 임명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지금도 인사권을 꽉 쥐고 있다. '최순실이 박근혜 측근인 거 네가 어떻게 장담하냐'면서 깔아뭉개던 국장이 여전히 뉴스를 좌지우지 주무르며 대선 보도까지 책임지고 있다. 편집권 가진 책임자가 그대로인데 어떻게 바뀌겠나. 공영 방송의 사장은 여전히 박근혜인 거다. 그 정점이 바뀌지 않으면, 쉽게 바뀌지 않는다.

MBC: 이쯤에서 우리 김장겸 사장님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다. 2011년 정치부장, 보도국장, 보도본부장까지. 직행 엘리베이터 타신 분이다. 심지어 대통령이 탄핵 소추 결정을 앞두고 있던 지난 2월, 방문진 이사진이 선임을 강행해서 3년 임기 사장까지 되셨다. 고영주 이사장 외 상당수 극우 인사들로 구성된 방문진의 임기는 1년 6개월이 남았다. 공영방송 사장으로서 자격이 없고, 방문진 이사 중에는 비리 혐의로 검찰 수사 진행되던 와중에 선임된 분도 있다. 현재로썬 이분들을 법적·제도적으로 걸러낼 장치가 없다. 

대통령이 탄핵당했고, 새 정부가 곧 들어서겠지만, 탄핵당한 대통령이 임명해놓은 사장은 3년 갈 수밖에 없다. 이러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MBC의 변화는 박근혜가 임명한 사장을 끌어내리는 것부터 시작이다. 그럴만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이 사장을 그대로 둔다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거다.

KBS: KBS와 MBC는 정말 시급하다. 자유한국당이 계속 방송법 개정안 통과를 막고 있다. 죽을힘을 다해 막고 있다. 일단 버티면서 재기를 도모해보려는 밑그림이 있는 것 같다. 그걸 깨부수지 않고서는 최소한 공영 언론에서 새로운 혁신이나 출발은 당장 기대하기 힘들다.

MBC: 우리 김장겸 사장님과 백종문 부사장님은 새 정부 들어서도 대놓고 지금처럼 하실 것 같다. 거의 훈장으로 생각하시기 때문에.

SBS: 공영 방송의 구조 문제를 반드시 바로 잡아야 경쟁의 방향을 똑바로 잡을 수 있다. 정권이 바뀐 뒤에도 극우 진영의 스피커 노릇 해온 사장, 이사진이 자리를 보전하고 목소리를 내면 다시 여론의 지형이 흔들릴 거다. 지금 SBS가 지상파 방송 중에 그나마 나은 목소리 내고 있다지만, 비슷한 세력들이 여전히 우리 안에 있다. 내가 세월호 관련 아이템 발제했을 때 '세월호의 시옷도 듣기 싫다. 지겨워 죽겠다'고 말하던 분이 아직도 보직을 꿰차고 앉아 지금은 세월호 관련 아이템을 열심히 발제하고 있다. 이런 양반들은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대로 열심히 바꾼다. 적어도 이런 문화를 지상파에서 끝내기 위해서라도, 방송 지배구조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

 언론노조 KBS본부 성재호 본부장.

"KBS는 6000억 수신료 내고 있지 않나. 그거 왜 버리나. 계속 감시하고, 못하면 채찍질하고, 항의해야 한다." ⓒ 이정민


"이대로 가면 다음정부, 어떤 개혁과제도 수행 못 해"

- 지상파 방송의 역할에 대해 공감한다. 하지만 지금은 지상파가 아니더라도 양질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창구가 늘어났다. 시민들이 지상파를 꼭 지켜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KBS: 지상파 3사, YTN, 연합까지. 공적 미디어 안에는 매우 능력 있고 경험 있는 인적 자원들이 매우 많다. 너무 아깝다. 더군다나 KBS에는 6000억 수신료 내고 있지 않나. 그거 왜 버리나. 계속 감시하고, 못하면 채찍질하고, 항의해야 한다. 그렇게 해주셨으면 한다. 지금의 JTBC만한 언론이 3개, 4개 더 생긴다고 생각해보라. 가짜들, 선거판에서 명함도 못 내민다. 정치가 바뀌고 사회가 바뀔 거다.

SBS: 가장 강하고 경험 있는 저널리스트들과, 그들을 뒷받침할 재원과 장비가 가장 많은 곳은 여전히 지상파다. 환경이 만들어지면 지상파가 가장 잘할 수 있다. 지상파 3사가 제대로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누가누가 박근혜 잘 띄워주나 경쟁하고, 왜 우리는 타사보다 박근혜 못 띄우냐, 이런 말 같지 않은 지시들이 내려오는 코미디 같은 상황은 끝내야 한다. 지상파가 제대로, 정말 의미 있는 단독으로 경쟁하는 풍토가 남아있었다면, 최순실이 저 난리 칠 수 있었겠나. 지상파의 몰락과 한국 사회의 퇴행은 맞물려 있다. 무엇보다 이대로 가면 다음 정부, 어떤 개혁 과제도 수행할 수 없을 거다.

MBC: 87년 6월 항쟁 때 MBC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 퇴사하신 최일구 선배가 2~3년 차 기자였을 때, MBC 취재 차량이 명동성당에 가면 시민들이 돌을 던졌다고 한다. 그러고 회사에 들어와 보면 송고한 기사는 구겨져서 휴지통에 들어가 있고... 그때 선배들을 생각해본다. 그분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희망을 봤을까? 이렇게까지 개판이 된 언론을 자조하며 술이나 마셨을까? 

그렇지 않았다. MBC는 6월 항쟁을 계기로 '땡전뉴스'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했다. 그해 12월에 방송 사상 처음으로 노조를 만들었고, 내부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1989년에는 광주 항쟁 다룬 다큐 <어머니 노래>를 만들었고, 우루과이 라운드에 대한 다큐도 내보냈다. 결정적으로 군사독재 시절 MBC가 어떻게 아부하고 편파·왜곡 보도했는지에 대한 자기반성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이때도 수차례 파업했고, 많은 분들이 해고됐다. 그 결과 1990년대 중반부터 굉장히 신뢰받는 방송이 됐다. 드라마·예능·뉴스 모두 최전성기를 달렸다. 

돌 맞던 MBC가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기까지, 10년 안 걸렸다. 지금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물론 미디어 환경이 변했다. 법적 제도적 정비도 시급하고, 내부적으로는 파업 이후 대거 채용돼 보도국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시용 기자들이 있다. 어렵겠지만, 지혜롭게 풀어나갈 수 있다. 쫓겨나 있는 괜찮은 기자·PD들, 그저 쫓겨나 있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더 좋은 방송 만들기 위해, 더 강하게 단결하고 있다. 이분들의 에너지로 다시 국민들의 신뢰 받는 MBC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본다.

 언론노조 MBC본부 김연국 본부장.

"돌 맞던 MBC가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기까지, 10년 안 걸렸다. 지금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 이정민


SBS: 지난 10년 동안 지상파 3사가 자기 발등 찍었다고 본다. 미디어 환경이 변했다. 지상파가 정보를 제공하지 않아도 깨어있는 시민들은 스스로 옳은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이미 세상은 바뀌었는데 지상파 경영진은 여전히 우리만 감추면 세상이 모를 거라는 착각에 빠져있었던 거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지상파가 가장 순도 높은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왔다면 그 신뢰가 유지됐겠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했고, 신뢰를 잃었다.

정부가 바뀌고 우리가 제대로 보도하면, 떠나간 시민들이 돌아 와줄까? 지난 몇 년간 우리의 부재가 아쉽지 않은 환경이 만들어졌는데? 지상파 방송이 시민들의 신뢰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 앞으로 대단히 지난한 과제가 남았다고 생각한다.

MBC: 지난해 MBC 막내 기자들이 만든 동영상이 올린 반성문이 있었다. 마지막 말이, 더 비판해 달라, 냉소하고 포기하지 말아 달라는 거였다. 성재호 본부장(KBS) 말처럼, 공영 방송을 국민이 통제할 수 있는 국민의 자산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럴 수 있도록 압박하고 법적 제도적 장치 만들고 비판해야 한다. 공영 방송은 그냥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다. 더 감시하고 더 비판해주셨으면 한다.

SBS: 머릿속에 여러 그림이 떠오른다. 너무 마음 아픈데 (MBC 해직기자) 이용마씨 이야기 안 할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SBS 면접 볼 때 내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언론사 시험은 막판 면접 가면 비슷한 사람들이 계속 올라온다. 운이 좋으면 먼저 붙고, 나중 붙고 그런다. 만약 운명이 조금 달랐으면 아마 내가 그 처지가 되어있었을 거다. 이용마 기자 가슴에 시커멓게 자란 암 덩이가 역설적으로 시민들의 가슴에 민주주의의 씨앗으로 자라난 것 같다. 너무 안타깝다.

지난해 촛불 집회에 초등학교 6학년 아들 데리고 갔더니 구호가 '언론도 공범이다' 더라. 아빠가 기자인 거 아는 아들이 왜냐고 묻는데 대답하기 어려웠다. 거창한 가치 다 떠나서, 이런 일이 반복되면 이제 내가 내 새끼 얼굴 볼 낯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국민들도 공적 기능 수행해야 할 언론이 입을 다물고 있으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충분히 겪으셨지 않나. 수많은 국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런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국민의 자산에 기반을 두고 있는 지상파 방송들이 더이상 망가지면 안 된다. 끊임없이 감시해주시고, 호되게 비판해주시고, 응원할 땐 응원도 해주셨으면 한다. 공적 기능을 안전하게 보전해놔야 우리 사회가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그것만 가슴 속에 담아주시면 싸우는 데 큰 힘이 될 것 같다.

 언론노조 KBS본부 성재호 본부장, MBC본부 김연국 본부장, SBS본부 윤창현 본부장(왼쪽부터)이 14일 오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박근혜 정부 시절과 탄핵 정국에서의 지상파 방송과 뉴스에 대한 대담을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언론노조 KBS본부 성재호 본부장, MBC본부 김연국 본부장, SBS본부 윤창현 본부장(왼쪽부터)이 14일 오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박근혜 정부 시절과 탄핵 정국에서의 지상파 방송과 뉴스에 대한 대담을 마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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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배필립', 배수빈의 마지막 연기

[inter:view] 연극 <프라이드>의 필립 역 맡은 배수빈, 작품과 시대에 대해 말하다

잘생겼다. 그리고 섹시하다.연극 <프라이드>의 '필립'으로 다시 대학로에 돌아온 배수빈을 따라다니는 평가다. 단순히 마스크에서 나오는 평가가 아니다. 그는 순간적으로 무대를 휘어잡을 줄 아는 배우이고, 자신이 지배할 수 있는 공간을 두는 배우이다. 그런 아우라를 풍기는 배우에게 어찌 반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다른 장르에서 활약하던 배우 중 무대로까지 영역을 넓히는 이는 여럿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 이렇게 단기간에 안착하여 팬들의 검증을 통과한 이는 손에 꼽는다. 인지도만 가지고 섣불리 나섰다가 무대를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에 실망과 상처를 준 배우가 어디 한둘인가. 그런데 그 어려운 걸, 배수빈은 해냈다. 여전히 그를 '배필립'으로 불러주는 팬들이 제법 많다.다른 작품 경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연극' 배우 배수빈을 대중에게 각인케 한 건 2015년 <프라이드>였다. 배수빈의 필립으로 무대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존재감을 알린 그는, 이후 <킬 미 나우>의 제이크, <카포네 트릴로지>의 올드맨 모두 자기만의 매력으로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그리고 배수빈의 두 번째 <프라이드>가, 두 번째 '필립'이 왔다.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일 '배필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지난 12일,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나눈 이야기를 기록했다.배수빈 그리고 필립의 마지막 재회 연극 <프라이드>는 1958년 런던과 2017년 런던을 교차로 보여주면서, 동명이인 필립, 올리버, 실비아가 겪는 상황을 펼쳐 보인다. 1958년의 필립과 올리버, 2017년의 필립과 올리버 모두 서로를 사랑하는 게이이지만, 억압의 시대였던 과거와 해방의 시대인 현재가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이들의 이야기도 톤이 완전히 바뀐다. 3시간이라는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는 러닝타임이 정신없이 흘러갈 정도로 관객의 혼을 그리고 눈물을 빼놓는다. 2014년 초연, 2015년 재연을 거쳐 이번 2017년 공연이 벌써 국내 삼연이다. 세 번이나 올라왔다는 건, 그만큼 팬들 사이에서는 정평이 익히 나 있는,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붙잡은 극이라는 뜻이다.그렇다. 마지막이다. 배수빈의 <프라이드>가 언젠가 돌아올지 모르겠지만, 배수빈의 필립은 이번이 끝이다. 재연은 안 하는 주의라는 것은, 배수빈의 '제이크'도 배수빈의 '올드맨'도 앞으로 영영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갑자기 '내가 왜 그때 더 예매하지 않았는가'하는 후회와 안타까움이 몰려온다. <프라이드>는 그가 처음으로 대학로 마니아에게 인정받은 작품이고, 배수빈은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특별히' 두 번째 필립을 맡기로 결심했다.필립이라는 인물이 지닌 아픔 <프라이드>는 분명 재미있는 작품이다. 마냥 진중하게 시대의 아픔만을 고발하는 작품이 아니다. 1958년과 2017년이 병치 되는 과정에서, 관객을 위한 숨구멍을 여기저기에 마련해 두었다. 순간순간 터지는 웃음 포인트들 덕분에 관객은 지치지 않고 작품의 종막 종장까지 함께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쉬운 작품도 아니다. 한 마디 한 마디 곱씹을수록 진하게 배어 나오는 대사들이 그렇고, 관객의 가슴까지 와 닿는 인물들의 아픔이 그렇다.특히 1958년 필립은 시대의 피해자이자 동시에 이 관계의 가해자이기도 하다. 그는 물리적, 육체적 폭력을 통해 자신을 사랑과 진심으로 다 했던 올리버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다. 그 옆에 머물며 필립이 치유되기를 바랐던 실비아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마냥 미워할 수도, 마냥 사랑할 수도 없는 이 애잔한 인물. 과연 배우 배수빈이 아닌 자연인 윤태욱(배수빈의 본명)이었다면, 1958년 런던에서 어떻게 살아갔을까.시대 그리고 소수자 시대라는 단어가 배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1958년은 그런 시대였고, 2017년은 또 이런 시대이다. <프라이드>가 고발하는 건 필립과 올리버라는 이 게이 커플의 개인적 아픔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를 병으로 규정하고, 낙인찍고, 차별하던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대의 억압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마음껏 드러내지 못하고, 혼자 인정도 못 하고 이성애자인 척 살아야 하는 시대. 그래서 배우자에게도, 연인에게도 나쁜 사람일 수밖에 없는 시대.소수자의 아픔을 대변하고 이에 공감하는 것, 그것이 예술인의 '과업'이라고 무대를 서는 사람이 말했다. 그의 선언이 참 다행스럽기도 하고, 동시에 아리기도 하다. 퀴어들의 아픔이 주요한 소재로 채택되는 작품이 대학로엔 참 많다. 무대를 사랑하는 관객의 젠더 감수성도 무척 높은 편이다. 연극 <프라이드>를 관람하는 사람 중에서 성 소수자를 향한 차별에 찬성하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정작 이러한 목소리를 잠재우는 이들은 무대밖에 따로 있다.성 평등이 시대의 화두가 되고, 페미니즘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어느 면에서, 우리는 분명 더 나은 내일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주요 대선 후보 5명 중 4명이 동성혼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십자가를 내세우며 퀴어 퍼레이드를 반대하고, 차별금지법의 의회 통과를 무력화한 세력이 있다. 그들은 여전히 이 사회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성 소수자들의 '프라이드 퍼레이드'를 즐겁게 관람하는 극 중 2017년 런던과, 지금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2017년 서울의 간극이 크게만 느껴진다. 그런 세상에 이 연극 한 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잠 못 이루는 돌고래의 속삭임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걸 좋아하는 이 배우. 스스로의 연기에 대한 질문도 많이 던지는 그이다. 몇 년 전 타사 인터뷰에서 밝혔던 것처럼, 그는 여전히 자신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혼자 술을 마신단다. 후배들의 조언에 기꺼이 먼저 귀를 기울여가며 연습하고 공부하고, 결코 '꼰대'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그런 질문의 일환이다. 언젠가 셰익스피어의 <햄릿> 같은 정극 무대에도 서고 싶고, <카포네 트릴로지>처럼 실험적인 다른 작품도 만나고 싶단다.불혹을 넘어서 흔들림 없어 보이는 그에게, 문득 궁금해졌다. '잠 못 이루는 밤'들을 겪으며 고민하는 작 중 인물들처럼, 그에게도 '잠 못 이루는 밤'이 있는지.그를 깨어있게 하는 흔들림을 부여잡고, 그는 여전히 배우로서 살고 있다. 아마도 그의 연기 인생에서 다시는 없을 '두 번'의 필모그래피 <프라이드>. 그리고 '두 번' 만난 인물, 필립. 모든 배우는 작품과 인물을 만날 때마다 하나씩 얻으며 성장한다. 배수빈은 필립을 통해 무엇을 배웠을까. 인간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만, 돌고래는 위기에 처한 동료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작품 속에서 돌고래에 대한 잠깐의 설명이 와 닿는 건, 우리 모두가 그 인간과 돌고래 어딘가쯤에서 흔들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상처를 준 인간 배수빈이 있듯이,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는 돌고래 배수빈도 그 안에 있다.극 중 실비아는 필립을 향해 말한다. "내가 멀리서 속삭일 게요. 내 목소리가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당신이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라고. 그리고 다독인다.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모두 괜찮아질 거예요"라며. 그렇게 우리는 관계를 통해 상처를 안고, 관계를 통해 회복하며 살아간다. 성숙해진다. 지금의 아픔이 모두 '괜찮은' 이유이다. 필립과 재회 없는 이별을 해야 하는 배수빈. 지난 3월 21일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에서 개막한 <프라이드>는 오는 7월 2일까지 계속된다. 오는 7월 이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필립에게, 배수빈은 어떤 목소리를 속삭이고 싶을까.

낯 가리는 안재홍, 그가 영화 소품을 모으는 이유

[inter:view] 영화 <임금님의 사건수첩> 속 윤이서... "상업과 예술 영화 다르지 않아"

요즘 악기 하나 제대로 배워볼까 생각 중이다. 얼마 전 SNS에 올린 영화 <라라랜드> 피아노 연주 영상에 어떤 이는 "여전히 라라랜드냐"며 댓글로 핀잔 아닌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그는 진지하다. "제일 배우고 싶은 건 기타"라며 왕성한 예술혼을 드러내기도 했다.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를 오가며 이젠 명실상부 <임금님의 사건수첩>의 주연을 맡은 안재홍이다.그가 이번 영화에서 맡은 역은 다름 아닌 사관 윤이서, 그냥 사관이 아니라 임금 예종(이선균 분)과 함께 고관대신들이 벌이는 역모를 추적하는 임무까지 맡는다. 매우 중요한 일임에도 어딘지 모르게 어수룩하다.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도 이서의 재능을 이미 알아본 임금은 그를 꾸준히 중용한다. 평범해 보이는 영웅의 이야기. 안재홍은 "그런 이야기를 평소에 좋아했다"고 말했다.첫 주연, 그리고 이선균 두 남자의 추리 활극이라는 틀에서 보면 <임금님의 사건수첩>은 한국 관객에게 익숙한 몇 가지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조선 명탐정> 시리즈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 말이다. 다만 임금과 신하의 조합, 그 연기의 주체가 이선균과 안재홍이라는 점에선 충분히 신선하다. 두 배우 모두 사극 코미디라는 장르에서 전혀 소모되지 않은 이들이기 때문이다.더욱이 안재홍은 이선균과 인연이 깊다. 대학교 은사기도 한 홍상수 감독 작품을 통해 이선균을 만났고, 이선균은 종종 후배들에게 소고기를 사주며 챙긴 일은 꽤 알려진 일화다. "귀한 소고기를 사주시다니 좋았다. 물론 지금도 귀하지만"이라며 그가 멋쩍게 웃어 보였다. 건데 참고가 될 만한 영화가 생각나면 찾아보고, 혼자서도 생각을 많이 한다. <임금님의 사건수첩>을 준비하면서는 <머니볼>(브래드 피트 주연의 미국 프로야구 구단에 대한 영화 - 기자 주)이라는 작품을 많이 참고했다. 빌리 빈(브래드 피트)과 피터 브랜드(조나 힐)의 관계를 집중해서 봤다. 그 영화를 연출한 배넷 밀러 감독의 작품을 다 좋아한다."비급 정서 상업영화 최전선에 나섰지만 여전히 안재홍은 몇 가지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깊이 각인돼 있다. <족구왕> 속 복학생, <응답하라 1988>의 정봉이 등으로 친숙한 그는 은근하게 존재감을 넓혀온 경우다. 여기에 전공을 살려 두 편의 단편영화 연출 경험도 있다. 분명 주류 감성은 아닌 우리 곁에 있을 법한 친숙한 모습으로 그는 제법 다양한 옷을 입어왔다. 그의 연기와 작품이 이질적이지 않으면서도 신선한 이유다. 이를 비급 정서라고 정의해봤다.기억의 힘 인터뷰 내내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스스로도 낯을 가린다고 말할 만큼 자기를 말로 표현하는 데 인색하지만 영화에 대한 애정만큼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극장에서 본 영화에 대한 기억, 지금까지 거쳐 온 여행지, 그리고 출연작들에 대한 세세한 사항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자연스러운 연기의 원천이 이런 기억 본능에 있지 않을까.출연작 모두가 깨물어 안 아픈 손이 없듯 소중하겠지만 안재홍이 꼽은 자신의 소중한 필모그래피는 <1999, 면회>였다. "가장 청순했던 모습이 담겨 있다"며 "내 초심이라 생각하고 가끔씩 돌려 보고 있다"고 말했다. 희망 출연 장르는 SF. 사뭇 이 장르에서의 안재홍 모습이 급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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