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뮤지컬 <임꺽정, 그가 온다!> 공연 사진 뮤지컬 <임꺽정, 그가 온다!>의 공연 및 포스터 이미지. 극단 민들레의 이 작품은 지난 17일 서울 대학로 예그린씨어터에서 개막하여 오는 3월 26일까지 관객을 맞는다. 임꺽정 사후 10년, 시대는 바뀌지 않았고 여전히 핍박받는 백성이 많은 가운데,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이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뭉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임꺽정'이라 칭하기 시작한다.

▲ 임꺽정의 탈을 쓴 사람들극단 민들레의 이 작품은 지난 17일 서울 대학로 예그린씨어터에서 개막하여 오는 3월 26일까지 관객을 맞는다. 임꺽정 사후 10년, 시대는 바뀌지 않았고 여전히 핍박받는 백성이 많은 가운데,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이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뭉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임꺽정'이라 칭하기 시작한다.ⓒ (주)극단민들레


임꺽정의 난이 끝난 지 10여 년이 흘렀다. 함께 청석골에서 싸웠던 가파치는, 고아 난희를 딸처럼 키우며 그저 거스르지 않고 살려고 한다. 가난하긴 하지만, 뭔가 좀 불합리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도저히 못살겠다는 정도도 아니었다. 가끔 악몽을 꾸고, 왜 임꺽정이 이 아이를 데리고 '살라'고 했는지 이해하긴 어렵지만.

난희가 이웃 동네 서우와 결혼할 수 있다면, 멀리 높으신 분들 신을 맞춰드리러 가는 것도 괜찮았다. 돈 한 푼 못 받아도, 이걸 계기로 다른 활로를 뚫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없는 사이 마름의 농간질에, 윤참판의 만행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난희가 먼저 당했고, 이에 항의했던 자신도 모진 고초를 겪는다. 다른 사람을 대신해 군역에 끌려갔던 서우도 간신히 살아 돌아온다. 무엇이든 고치던 천민 가파치는, 세상을 고치자고 일어난다. 백성들은 모여 10년 전 세상을 흔들었던 그 사람, 임꺽정의 탈을 쓰고 모여든다.

전봉준의 동학농민혁명이 무대에 오르고, 홍길동의 이야기가 공중파를 타고 안방에 전해지더니 이번엔 임꺽정이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자연스레 대중문화 콘텐츠를 창작하는 사람의 시선도 이쪽으로 쏠리게 된 것일까. 뮤지컬 <임꺽정, 그가 온다!>는 이처럼 임꺽정 없는 임꺽정의 이야기이다. 지난 2월 17일, 서울 대학로 예그린씨어터에서 개막하여 오는 26일까지 관객을 맞는다.

이 작품이 품은 수많은 단점

뮤지컬 <임꺽정, 그가 온다!> 공연 사진 뮤지컬 <임꺽정, 그가 온다!>의 공연 및 포스터 이미지. 극단 민들레의 이 작품은 지난 17일 서울 대학로 예그린씨어터에서 개막하여 오는 3월 26일까지 관객을 맞는다. 임꺽정 사후 10년, 시대는 바뀌지 않았고 여전히 핍박받는 백성이 많은 가운데,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이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뭉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임꺽정'이라 칭하기 시작한다.

▲ 가파치 '정흥채'대중에게 '임꺽정' 이미지로 잘 알려진 배우 정흥채가 또 다른 종류의 임꺽정 연기에 나섰다. 본래 연극 배우 출신인 그는, 무대에서 대사를 큰 무리 없이 잘 소화한다. 노래가 약간 아쉽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무게 중심을 잘 잡아낸다.ⓒ (주)극단민들레


잔뜩 기대하고 들어갔던 맛집의 음식이 내 취향과 영 안 맞을 때가 있는 반면, 아무 기대도 하지 않고 대충 허기만 때우려고 들어갔던 집에서 의외의 맛을 찾기도 한다. 그릇은 이가 빠져 있고, 플레이팅도 엉망이고, 뭔가 대단한 재료를 넣은 것 같지도 않은데 한 입 물고 나니 '어라?'하게 되는 그런. 뮤지컬 <임꺽정, 그가 온다!>를 보러 갔을 때, 내가 느낀 기분은 확실히 후자에 가까웠다. 전체적으로 만듦새도 투박하고, 엉성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극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포인트들이 분명 있다.

그러나 연극·뮤지컬 장르를 애정하는 마니아들이 쉽게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지점들이 많다. 미리 관객이 염두해두고 가야 할 뮤지컬 <임꺽정, 그가 온다!>의 단점부터 열거해보자. 가장 큰 건 이야기다. 이 작품 속에는 인과가 뚜렷하게 설명되는 사건이 사실 별로 없다. 왜 임꺽정이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찾고자 하는 인물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임꺽정은 어떤 시대정신을 지녔고, 어떤 의기를 사람들에게 전했는지 공감하기 어려우니, 모두가 임꺽정의 탈을 쓰고 나설 때의 감동이 다소 반감될 수밖에 없다.

뮤지컬 <임꺽정, 그가 온다!> 공연 사진 뮤지컬 <임꺽정, 그가 온다!>의 공연 및 포스터 이미지. 극단 민들레의 이 작품은 지난 17일 서울 대학로 예그린씨어터에서 개막하여 오는 3월 26일까지 관객을 맞는다. 임꺽정 사후 10년, 시대는 바뀌지 않았고 여전히 핍박받는 백성이 많은 가운데,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이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뭉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임꺽정'이라 칭하기 시작한다.

▲ 난희와 서우두 사람의 러브라인은, 결국 '권력에 의해 핍박받는 백성'을 보여주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만 활용된다는 느낌이 든다. 때문에 본격적으로 난이 시작된 이후에는 별 의미가 사라지고 만다.ⓒ (주)극단민들레


권력자의 겁탈-피해자의 임신-모성 발현-2차 폭력-사산으로 이어지며 여성 캐릭터에게 고통을 가하는 클리셰도 진부하고(그 폭력의 구현도 참 어설프다), 그 캐릭터를 지키지 못했다고 자학하며 분노하는 남성 캐릭터 역시나 뻔하다. 권력을 대표하는 윤참판의 학정도 강간을 제외하면 직접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의 시선은 마름의 악행에 더 쏠리게 되는데(장재윤 배우의 연기가 돋보이는 이유도 있다), 이게 사실 백성의 분노가 민란으로 폭발할 수 있게끔 하는 '트리거'가 되기에는 다소 부족한 느낌이 든다.

또한 대표적인 반동인물로 등장하는 엄기철, 신분제도 아래에서 충실히 자신의 역할을 이행하여 성공을 꿈꾸는 이 남자의 동기도 불충분하다. "아무도 나를 봐주지 않았"지만, 탐관오리를 등에 업은 후 그는 그 작은 권력을 행사하며 칼을 휘두른다. 시스템에 충실하려는 그가, 시스템을 부정하는 임꺽정에게 품는 적개감은 극 중에서 대단히 크게 다가온다. 하지만 어쩐지 뜬구름 같다. 그는 왜 그토록 시스템을 옹호하는가. 왜 성공을 갈망하는가. 왜 임꺽정을 그토록 증오하여 죽이려고까지 하는가. 90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채 설명되지 않는다.

뮤지컬 <임꺽정, 그가 온다!> 공연 사진 뮤지컬 <임꺽정, 그가 온다!>의 공연 및 포스터 이미지. 극단 민들레의 이 작품은 지난 17일 서울 대학로 예그린씨어터에서 개막하여 오는 3월 26일까지 관객을 맞는다. 임꺽정 사후 10년, 시대는 바뀌지 않았고 여전히 핍박받는 백성이 많은 가운데,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이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뭉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임꺽정'이라 칭하기 시작한다.

▲ 돋보이는 두 배우연기와 대사 소화만 놓고 봤을 때 가장 베스트로 꼽고 싶은 건 이 두 배우, 김태완과 장재윤이다. 각각 장사치와 마름 그리고 이외의 멀티를 소화하는 데 별 무리가 없다. 다만 캐릭터 자체의 한계가 있다보니 그 매력이 제 빛을 다 발하지 못한다.ⓒ (주)극단민들레


떠돌이 장사치이자 가파치의 친구인 남상렬의 캐릭터도 그 역할이 다소 모호하다. 친구를 돕는 듯하지만, 결정적으로 가장 큰 해악을 미치게 된다. 친구를 돕는 의리 있는 사람인 것 같지만, 내뱉는 대사들 중에는 다분히 젠더적으로 불편한 말들이 많다. 이와 대비되는 캐릭터로 주체적 여성인 갑순이가 등장하지만 분량이 너무 적어서 1:1 구도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인물의 개별 동기가 부족하니, 이들이 모여서 분출하는 민란의 의의도, 갈등의 크기도 잘 와닿지 않는다. 임꺽정의 탈을 쓰고 놀이를 하며 세상을 풍자하기는 하지만, 윤참판의 가택에 쳐들어가 그를 응징한 것을 제외하면 체제를 전복하거나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가 명쾌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토벌군이 와도 물리적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사상자 하나 없다는 묘사가 극 중 나오는데, 세를 불리기 위해 시간을 끄는 것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비폭력 투쟁을 벌이겠다고 나선 것인지 모를 일이다. 결국 이 혁명의 수단도, 목적도 분명하게 그리지 못한 채 극은 끝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뮤지컬 <임꺽정, 그가 온다!> 공연 사진 뮤지컬 <임꺽정, 그가 온다!>의 공연 및 포스터 이미지. 극단 민들레의 이 작품은 지난 17일 서울 대학로 예그린씨어터에서 개막하여 오는 3월 26일까지 관객을 맞는다. 임꺽정 사후 10년, 시대는 바뀌지 않았고 여전히 핍박받는 백성이 많은 가운데,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이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뭉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임꺽정'이라 칭하기 시작한다.

▲ 말뚝이의 등장오래 전에 교과서에서 봤던 바로 그 장면이 다시 무대 위로 올라왔다. 반갑기도 반가웠지만, 이 봉산탈춤의 한 과장을 이토록 자연스레 극에 풀어낸 게 놀랍다.ⓒ (주)극단민들레


<임꺽정, 그가 온다!>의 극적 완성도가 허술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 이 극을 볼 만한 이유는 있다. 일단은 음악적 성취. 뮤지컬은 물 건너 온 장르이다. 이 장르에 우리 색을 입힌다고 한들, 악기든 선율이든 서양적 요소가 들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극 중에 창이 들어가거나, 일부 넘버가 혹은 오케스트라의 일부 악기가 전통 악기가 들어가는 경우는 있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전통악기의 선율만 가지고 넘버를 배치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각 곡의 개별적 완성도도 나쁘지 않다. 듣는 재미는 분명 보장한다.

여기에 탈과 인형극의 활용이 또한 훌륭하다. 대체로 '우리 것'을 강조하다가 그 요소가 작품 전체의 톤에서 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극에서는 굉장히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있다. 배우들 전부가 임꺽정의 탈을 쓰고 군무와 대사를 하는 부분도 괜찮지만, 봉산탈춤의 6과장을 응용하여 대사를 주고받던 탈춤 부분은 굉장히 훌륭했다. 기존의 봉산탈춤을 잘 재현하기도 했고, 이를 극 안에 잘 녹아들도록 살짝 변주한 것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궁중의 늙은 간신들이 등장하는 인형극 장면에서는 극단 배우들의 개인기가 마음껏 발휘된다. 꽤 익살스러워서, 인형극 장면이 조금 더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치있다. 풍자로서도 합격점 이상.

안무에서도 의외의 성과를 보여준다. 탈을 쓰고 진행되는 몸짓들이 볼 만하다. 중간중간 조금 과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지만, 대체로 배우들의 군무는 극과 잘 어우러져 분위기를 고조하는 데 일조한다. 베스트는 극 후반부에 등장하는 엄기철과 서우의 격투 신. 순간 극의 장르가 바뀌었나 싶을 정도로 임팩트 있는 합을 보여주는데, 짧지만 굉장히 인상적이다. 젊은 배우들이 흘리는 땀에 비례해 멋진 무술 장면이 연출됐다.

뮤지컬 <임꺽정, 그가 온다!> 공연 사진 뮤지컬 <임꺽정, 그가 온다!>의 공연 및 포스터 이미지. 극단 민들레의 이 작품은 지난 17일 서울 대학로 예그린씨어터에서 개막하여 오는 3월 26일까지 관객을 맞는다. 임꺽정 사후 10년, 시대는 바뀌지 않았고 여전히 핍박받는 백성이 많은 가운데,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이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뭉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임꺽정'이라 칭하기 시작한다.

▲ 인형극의 풍자꼭두각시 왕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인형극을 소화하는 배우들의 재주가 아주 재미지다.ⓒ (주)극단민들레


위에 잠깐 언급했지만 풍자의 활용도 적정 수준을 잘 지켰다. 최근 시국이 무대에도 많이 반영되면서, 때때로 맥락 없이 되풀이되며 '오버'하는 풍자들이 있다. 이런 풍자가 반복되면 재미있지도 않고, 비판의 날카로움은 무뎌지고, 극의 흐름과 분위기만 깨게 된다. <임꺽정, 그가 온다!>는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꼭두각시 왕의 부족한 말주변, 왕에게 재가를 올리기 전에 꼭 사전에 논의를 거쳐야 하는 '올림머리' 큰상궁의 존재, 검은 장부를 만들어 저잣거리 놀이를 통제하는 술수 등 현 시국에서 따온 많은 풍자 포인트가 있다. 그러나 극의 서사를 해치지 않고 오히려 보완해가면서 객석으로부터 웃음을 이끌어낸다.

임꺽정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

뮤지컬 <임꺽정, 그가 온다!> 공연 사진 뮤지컬 <임꺽정, 그가 온다!>의 공연 및 포스터 이미지. 극단 민들레의 이 작품은 지난 17일 서울 대학로 예그린씨어터에서 개막하여 오는 3월 26일까지 관객을 맞는다. 임꺽정 사후 10년, 시대는 바뀌지 않았고 여전히 핍박받는 백성이 많은 가운데,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이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뭉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임꺽정'이라 칭하기 시작한다.

▲ 끝나 버린 꿈엄기철이 이끄는 토벌군에 의해 결국 진압되는 꿈. 끝까지 북을 치다가 끝나버리는 이들의 싸움에서 비장미가 흐른다. 다만, 그 비장미가 임계점을 넘어서 폭발하지 못하고 적당한 수준에서 끝나버리고 만다. 이전부터 차곡차곡 관객을 설득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어야 하는데 이에 실패한 탓이다. 엄기철이 갑자기 토벌군에 참가하게 된 것도 그렇고, 그의 증오의 이유도 잘 와닿지 않는다.ⓒ (주)극단민들레


산다는 것은 생존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살아도 죽은 채로 있는 이, 죽었어도 여전히 살아있는 이를 우리는 여럿 알고 있다. 내 삶의 이유와 존재의 가치를 느끼고, 스스로 삶을 걸어가는 것. 그것이 생존을 넘어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러나 제도와 환경, 국가와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 속에 갇히면서 우리는 때려도 아프다 말 못하고 그저 참고만 살고는 한다.

임꺽정은 죽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때를 자꾸 회고하게 되고, 그를 그리워한다. 그를 통해 분출됐던 분노, 잠시의 해방감을 기억한다.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그때의 승리가 다시 불의를 용서치 않고 일어나게끔 하는 힘이 된다. 체제에 순응하여 성공해봤자, 여전히 자신을 잃고 생존만 간신히 유지하는 저 여럿 중 하나에 불과하다. 나 자신을 지키면서, 사람답게 고통 받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을 이뤄야 하기에, 인간은 수많은 역사의 변곡점에서 체제를 거부하고 싸워왔다. "혼자 꾸는 꿈은 꿈일 뿐이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그 명언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임꺽정과 홍길동, 박종철과 이한열이 크게 다르지 않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저절로 굴러가지 않기에, 이를 진보의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인류는 무수한 혁명을 이룩해왔다. 그 역사를 배우고, 앞장 서 깃발을 들었던 사람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역사가 퇴보하려고 할 때,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그들을 기억하며 일어서기 위해서이다.

단순히 시국에 편승하기 위해 대충 만든 작품에서는 그런 결의를 느끼기 어렵다. 그렇다고 결기와 목적의식으로만 똘똘 뭉쳐 극적 재미를 잃어버린 작품은 관객에게 다가설 수 없다. 비록 많은 단점을 지니고 있지만, <임꺽정, 그가 온다!>는 최소한 '우리의 목소리'로 '우리의 이야기'를 하려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조금 더 섬세하고 세련되게 조율했다면 훨씬 더 완성도가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있지만, 가능성이 없다면 '아쉽다'는 감정 자체가 나오지 않을 테니까.

격동의 시대. 시계는 이제 또 하나의 중대한 갈림길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 이 작품은 그 갈림길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말하고 있다.

뮤지컬 <임꺽정, 그가 온다!> 공연 사진 뮤지컬 <임꺽정, 그가 온다!>의 공연 및 포스터 이미지. 극단 민들레의 이 작품은 지난 17일 서울 대학로 예그린씨어터에서 개막하여 오는 3월 26일까지 관객을 맞는다. 임꺽정 사후 10년, 시대는 바뀌지 않았고 여전히 핍박받는 백성이 많은 가운데,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이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뭉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임꺽정'이라 칭하기 시작한다.

▲ 뮤지컬 <임꺽정, 그가 온다!> 포스터좋은 의미의 작품이 반드시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뮤지컬이 '좋은 극'이냐고 묻는다면 쉽게 답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 좋은 요소들은 가지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실험들이 주목받아야 이 무대 생태계도 보다 풍성해지고 활력이 넘치지 않을까. 조금은 관대한 마음으로 한 번쯤 봐두어도 괜찮다.ⓒ (주)극단민들레



'자연인 박근혜'가 갈 길, 이 뮤지컬이 보여주다

[안 뻔한 티켓북] "정의는 갖는 자의 것"... 사필귀정의 뮤지컬 <몬테크리스토>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드몬드 단테스는 전도가 유망한 선원이었다. 그의 앞날은 보장되어 있었다. 모렐 선주로부터 차기 선장감으로 신임 받고 있었고, 연인 메르세데스와의 사랑도 두터웠다. 그러나 친구에게 사적인 편지를 전달해달라는 나폴레옹의 부탁을 받고 나서 무언가 꼬이기 시작했다. 모렐 선주로부터 선단을 탈취하고 싶은 당글라스, 메르세데스를 짝사랑하여 빼앗고 싶은 몬데고. 두 사람은 나폴레옹의 편지를 빌미로 단테스를 몰래 고발한다.그저 '사적인' 편지를 배달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던 단테스. 검사장 빌포트는 끌려온 단테스를 심문하지만, 그의 순수함을 믿고 풀어주려 한다. 하지만 편지의 수신인이 한때 황제파였던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대로 놓아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아버지와 이 사건을 연관시킬 끈을 끊어버리기 위해, 빌포트는 단테스가 억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샤또 디프 감옥으로 보내버린다."우리는 친구야, 원하는 것도 같지. 뜻을 함께해, 어떻게든 죄를 씌워야지. 우리가 살려면 어쩔 수가 없는 일. 협상을 하자. 조작 하자, 사실을 남몰래. 죄를 뒤집어씌우고 없애 버려. 우리끼리만 뜻을 함께 해. 항상 역사는 승리한 자들만의 작품이니까. 살짝 거짓 보태고, 멍청한 녀석들을 우리에게 믿게 해. 어서 사인을 해야겠어. 공식적인 것이 진실이지. 우리가 정의. 우리가 진실. 우리의 비밀." - 뮤지컬 <몬테크리스토>, 제1막, No.04 '역사는 승리자의 작품(A Story Told)' 중에서정치적, 경제적, 사적 이해관계가 얽힌 이들이 의기투합했다. 그렇게 누명을 쓴 단테스가 갇히고, 그들은 각자가 원했던 걸 손에 넣는다. 법도, 원칙도, 정의도 사라진 것만 같은, 부정의가 판치는 세상. 그대로 이들의 승리가 확실시되는 듯했다. 14년이 지날 때까지는….꾸준하게 사랑받는 작품 알렉상드르 뒤마의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한 뮤지컬 <몬테크리스토>. 지난 2월, 서울 공연이 끝난 이후 지방 순회공연에 돌입했다. 제주와 전주, 천안을 거쳐 26일 울산 공연을 마친 <몬테크리스토>는 오는 6월까지 창원·수원·광주·이천·부산·인천·안산·대구·대전 일정이 남아 있다.2010년 초연 이후 벌써 네 번째 시즌을 맞은 <몬테크리스토>는 EMK뮤지컬컴퍼니를 대표하는 레퍼토리가 됐다. 고전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데다가 시즌이 계속되다 보니, 극 중에는 지금의 관점에서 봤을 때 촌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시퀀스들이 있다. (예를 들면, 단테스가 파리아 신부 덕분에 너무 '쉽게' 세상에 복수할 수 있는 모든 기반을 마련한다든가) 주변부 캐릭터의 단발성 소비(특히 루이자와 발렌타인)도 심한 편이다. 하지만 '완벽한' 작품이 아님에도 매번 <몬테크리스토>가 '평타 이상'의 성과를 거두는 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많은 국내 팬을 보유한 프랭크 와일드혼의 음악적 작업은 이 작품에서도 훌륭한 성취를 보인다. 화려한 의상과 군무도 쇼 비즈니스라는 장르에 충실하다. 서사가 특별히 복잡하거나 어렵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유치하거나 가볍지도 않다. 원작에 비해 권선징악이 뚜렷하고, 뒷끝이 씁쓸하지 않도록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점 역시 관객이 무대에 쉽게 다가올 수 있도록 돕는다. 역시 대극장 뮤지컬의 교범처럼 되어가고 있는 작품임엔 틀림없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는 탄탄하고 안정적인 캐스팅이 돋보인다. '새신랑'이 되어 모든 연극·뮤지컬 팬을 대동단결케 한 류정한, 지금까지 모든 <몬테크리스토> 시즌에 참여한 '지옥송' 장인 엄기준, <복면가왕> 이후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카이, 전작 <키다리 아저씨>에서 인생 연기를 보여준 신성록이 주연 에드몬드 단테스(몬테크리스토 백작) 역에 쿼드러플 캐스팅됐다.단테스의 연인이자, 그가 회심할 수 있도록 돕는 메르세데스 역에는 처연한 눈빛 하나만으로도 무대 위에 자기만의 공간을 만드는 조정은(관련 기사: 아들 몰라보고 죽일 뻔한 남자, 그를 붙잡은 유일한 여자), 필모그래피를 쌓아갈수록 빛을 더해가는 린아가 나섰다. 역시 <몬테크리스토> 전 시즌에 참여 중인 '잘생긴' 최민철은 반동 인물 몬데고를 맡아 훌륭한 무게감을 보여준다. 알버트를 맡은 빅스의 정택운(레오)은, 전작 <마타하리>에 이어 작은 비중임에도 성실한 연기와 노래를 선보인다. 앞으로의 뮤지컬 무대가 기대될 정도로.무엇보다 이 작품을 주목해야 할 이유는 따로 있다. 부패한 권력자들의 결탁에 맞서 정의를 실현하는, 이른바 복수의 카타르시스. 간명한 스토리에 담긴 이 '사필귀정'의 시원한 메시지야말로 <몬테크리스토>의 매력이다.지옥의 문 앞에서 "웃기는 세상, 사악한 자들이 판치는 곳. 내게 소중한 것 빼앗아간 그 순간마저 짓밟은. 비열한 것들, 너희도 금방 겪게 해주지. 벼랑 끝까지 너희를 몰아 넣고, 죄악의 대가 치러야겠지. 기대해도 좋을 걸 나의 심판을. 혹시 믿었나, 영원한 행복을. 설마 믿었나, 완벽한 인생. 선물할게, 끔찍한 지옥. 너희들에게. 분노한 신의 뜻을 대신하겠어. 신의 뜻으로 아멘." - 뮤지컬 <몬테크리스토>, 제1막, No.12 '너희에게 선사하는 지옥(Hello to Your Doorstep)' 중에서에드몬드 단테스는 샤또 디프에서 탈옥을 시도하던 파리아 신부를 만난다. 뱃일 말고는 특별히 아는 게 없었던 단테스는, 파리아 신부를 통해 여러 종류의 지식과 검술뿐만 아니라 통찰력도 전수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자신이 왜 이 감옥에 갇힐 수밖에 없었는지, 누가 자신을 모함하여 이 구렁텅이로 처넣었는지.사고로 인해 결국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파리아 신부. 그의 목숨을 빚으로 삼아, 단테스는 무사히 탈출에 성공한다. 그리고 파리아 신부가 남겨준 지도를 통해 숨겨진 막대한 보물도 손에 얻는다. 단테스는 자신의 이름을 몬테크리스토로 바꾸고, 파리아 신부로부터 배운 지식과 예법, 그리고 막대한 부를 활용해 백작 행세를 시작한다. 그 사이 자신의 친부는 사망했고, 자신을 아껴준 모렐 선주는 파산했고, 자신이 사랑했던 메르세데스는 한때 친구라고 생각했었던 배신자 몬데고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을 모함했던 이들이 어떻게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지 알게 된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화려한 복수를 계획한다. 자신이 지옥에 갈지언정, 그들 모두 역시 함께 지옥으로 떨어트릴 것을 맹세하며. 뮤지컬 <몬테크리스토>의 캐치프레이즈는 "정의는 갖는 자의 것, 사랑은 주는 자의 것"이다. 정의는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 할 대상이다. 내 손에 쥐기 위한 치열한 노력을 통해 정의는 실현된다. 그러니 '갖는 자의 것'이다. 에드몬드 단테스가 바로 정의를 가지려는 자이다. 몬데고와 당글라스, 빌포트 등 힘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이 정의라며 더럽혔던 그 가치를 단테스는 탈환하려 한다. <몬테크리스토>의 재미 중 하나가 바로 이 복수의 과정에서 나오는 카타르시스이다.그러나 <몬테크리스토>는 사적 복수를 통한 자력 구제가 정답이라고 이야기하는 작품이 아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된 에드몬드 단테스가, 끝까지 복수심에 미쳐 날뛰었다면 정의는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복수하겠다며 자신에게 결투를 신청한 몬데고의 아들 알버트, 단테스가 그를 총으로 쐈다면 어땠을까? 알버트의 약혼녀이자 빌포트의 딸인 발렌타인은 알버트를 살려달라며 간청한다. 만약 단테스가 발렌타인까지 연좌제로 묶어 죗값을 치르도록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이 작품의 끝은 전혀 다른 결말을 초래했을 것이다. 복수에 취해 지옥의 문 앞까지 걸어가던 그를 붙잡은 건 메르세데스였다. 욕망에 취한 이들은 몬테크리스토 백작이 에드몬드 단테스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하지만 메르세데스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14년의 풍파가 그의 외모를 변하게 하였지만, 거친 수염과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고 있지만, 단테스를 사랑하는 메르세데스는, 자신이 기억하는 그 눈빛 속 영혼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단테스와의 사랑을 맹세했던 반지가 반짝이고 있으니까.단테스가 정의를 상징한다면, 메르세데스는 사랑을 상징한다. 정의가 내 손으로 쟁취해야 할 대상이라면, 사랑은 내 손에서 떠나보내 상대의 손에 쥐어줘야 할 것이다. 한 번도 몬데고에게는 준 적이 없었던 사랑을, 메르세데스는 단테스에게 준다. 이 사랑은 온전히 메르세데스의 것이며, 그 사랑은 단테스에게 전달됨으로써 완성된다. 메르세데스로부터 사랑을 받은 단테스는 지옥의 문턱에서 발길을 돌린다. 그리고 메르세데스와 진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한다. 정의와 사랑을 동시에 손에 쥔 채로."놀라운 일 많았고, 수많은 삶 살아도 느껴본 적 없었지. 경이로운 순간, 이렇게 뒤늦게야 나 용서를 배우네. 날 버티게 한 분노, 물거품처럼 사라졌어. 모두 끝났어. 다시 돌아갈 수 있어, 그 시절로. 그 동안의 고통은 끝나고, 희망만 남아." - 뮤지컬 <몬테크리스토>, 제2막, No.20 '과거의 나 자신(The Man I Used to Be)' 중에서정당한 복수에 반기를 드는 이들에게 근대 국가의 '법치'는 사적 복수를 금지하고, 공적 복수로 정의의 실현을 일원화한다. 억울하고 부당한 일이 있을 때, 법과 제도는 힘없는 자들을 대신해 힘 있는 자들을 심판한다. 그것이 '공권력'이다. 법에 대한 불신이 팽배할 때, 사람들은 제도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다. 복수가 복수를 낳고, 피가 피를 부르는 세상은, 법치가 정의 구현과 국민의 법 감정 해소에 실패했을 때 도래한다.에드몬드 단테스가 살았던 세계는 그 공권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던 곳이었다. 혁명과 반혁명이 교차하는 혼란기,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사람들은 외곽으로 밀려나며 애꿎은 피해를 본다. 정의를 실현해야 할 권력이 오히려 몇몇 권력자의 손아귀에서 잘못 운용되었다. 때때로 우리도 그런 세상을 본다. 법은 이 사회의 기득권을 위해서만 존재할 것 같고, 저들만의 카르텔이 평생 지속하리라는 착각.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고, 결국 내 살길만 내가 잘 보전하면 될 것 같다는 오해. 지금 여기의 대한민국. 아버지로부터 딸까지 이어져 영원히 역사에 존속할 것만 같았던 독재의 신화가 부서졌다. 청기와집 아래에서 결탁하여 정치적·경제적·사적 이득을 취하던,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던 이들이 법의 심판대에 섰다. 우리는 공정하고 올바른 법적 절차를 통해 저 위에 군림하던 자를 고꾸라트렸다. 헌법과 법률에 보장된 제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구해냈다. 정의를 우리 손에 쥐었다. 이제는 서로 사랑하며 새 시작을 준비할 때이다. 자연인 박근혜씨는 내일(30일), 구속영장 심사를 위해 검찰에 출석한다.물론, 이 정당한 분노, 정의로운 복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복수를 복수로 갚고야 말겠다고 이를 갈고 있는 이들이 태극기를 들고 여기저기에서 설치고 있다. 그 세력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이들을 취하려는 권력자들도 있다. 그들에게 이 작품의 마지막을 상기시키고 싶다. 에드몬드 단테스는 복수하겠다며 칼을 뽑아 달려드는 몬데고에게 마지막 기회를 줬다. 그 기회를 몬데고는 걷어찼고, 그 결과는, 추락 그리고 사망이었다.

40살에게 성폭행 당한 12살 소녀... 왜 가해자를 찾아갔나

[안 뻔한 티켓북] 가해자의 말은, 언제나 '그럴듯'하다... 연극 <블랙버드>

*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해자가 기억하는 과거와 피해자가 기억하는 과거는 다를 수밖에 없다. 가해자는 최대한 잘못을 축소하고,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를 최대한 확대하려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은 부정확해지고, 그 부정확해진 기억의 사이는 추정과 확신, 오해와 불신이 채운다. 명확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두 사람의 기억 틈새는 커져만 간다.15년이 지났다. 15년이 지난 뒤, 피해자가 가해자를 찾아왔다. 가해자는, 어떻게든 살고 있다. 재판도 치렀고, 복역도 했다. 가해자는 애써 잊고 살아오려던 자신 앞에, 간신히 새로 부여잡은 삶 앞에 나타난 피해자를 향해 윽박지른다. 사라지라고, 너와 할 말은 없다고."난 내 인생을 살고 있어. 다 잃어버리고 난 후 다시 애써서 싸워 얻은 새로운 인생. 나한테 넌 귀신같은 거야."하지만 지난 15년간 멈춰 있던 피해자의 시간은 누가 보상해줄 것인가. 피해자는 가해자 앞에 진실을 요구한다."15년 동안, 난 모든 걸 잃었어. 난 한 번도 뭘 시작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으니까."묻혀버린 진실. 그 앞에서 두 사람이 각자의 기억을 토해내며 흐트러진 퍼즐 조각을 맞춰나가기 시작한다. 퍼즐이 완성되고 나면, 피해자의 시간은 다시 흘러갈 수 있을까. 지난 2016년 10월 13일 대학로 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에서 개막하여 11월 20일에 폐막한 연극 <블랙버드>의 이야기이다.연극, 금기를 건드리다 연극 <블랙버드>는 성폭행 가해자 레이와 피해자 우나가 진행하는 2인 극이다. 극의 무대는 레이가 근무하는 공장의 컨테이너 안. 레이는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우나를 만나 당황하고, 그를 이 공간으로 이끈다. 15년 전, 당시 미성년자 그것도 12살밖에 되지 않았던 우나를 강제로 범했다는 이유로 레이는 재판을 받았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은 후 복역했고, 예정된 형량보다 일찍 사회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름도 바꾼 채,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시작했다. 과거의 일은 그저 "끔찍한 실수"로 치부해버리며.레이를 맡은 조재현의 연기에 대해 이렇다저렇다 할 코멘트가 필요할까. 원캐스트로 극을 끌고 가야 함에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조재현이니까. 관록의 남배우보다는 무대 연기가 익숙하지 않았던 상대 여배우들에 관심이 갔다. 우나 역의 채수빈은 2년 전인 2014년 <그와 그녀의 목요일>에 출연한 게 다이며, 무대 주연은 처음이다. 더블 캐스팅된 옥자연 배우는 여러 작품 경험이 있으나, 이토록 비중 있는 역할에 나선 적은 없다.하지만 우려할 필요가 없었다. 아직 연극 무대에 최적화된 연기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채수빈은 자기만의 색깔을 분명하게 찾아가고 있다. 금세 부서질 것 같은 그래서 그 안에 더 날 서 있는 느낌이 강하다. 옥자연의 우나는 안정적이다. 더 단단하게 여물었다. 두 사람이 소화하는 우나가 달라서, 그 우나들과 호흡하는 레이도 조금씩 달라진다. 페어별로 보는 재미가 확실하다. 하지만 배우의 호연이나 극의 재미와 별개로, 90분의 시간 중 상당 부분, 관객은 가슴 한구석에 큰 불편함을 안고 있어야 한다. 서로의 기억을 짜 맞춰갈수록, 우나보다는 레이를 이해할 여지가 커지기 때문이다. 좁은 컨테이너로 제한된 공간은 팽팽한 긴장감을 주고, 무대만이 아니라 관객까지 답답하게 만든다. 무대는 그렇게 불편함이라는 씨앗이 잘 발아할 수 있는 토양이 된다.레이는 정말 반성하고 있고,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혹시나' 하는 물음표들이 머릿속을 떠돈다. 어쩌면 둘이 진짜 사랑했던 것일까? 둘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정의해도 괜찮을 걸까? 레이는 정말 소아성애자가 아니었나? 레이는 정말 우나를 배려했나. 그렇다면 이 두 인물의 감정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용인하며, 수용해야 하는가. 40살 남자와 12살 여자의 관계를? 2016년의 우리가?때때로 예술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금기를 건드린다. 예술만이 지니는 일종의 특권이다. 하지만 동시에, '소아성애'는 소재에 불과하다. 조재현은 프레스콜 당시 "이 작품이 단순히 소아성애자에 관한 얘기였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 중요한 건 이 소재를 통해 이 작품이 던지고자 했던 화두이다. 그 숨겨졌던 화두는 극의 후반부에 폭발하듯이 등장해 관객의 뒤통수를 강타한다.피해자와 가해자의 진술이 엇갈릴 때 오해가 풀리고, 정서적으로 불안한 삶을 지냈던 우나는 이제 레이를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15년 전 멈췄던 시계를 다시 움직이게 하려고, 우나는 그 15년 전을 다시 마주할 필요가 있었다. 마치 눈싸움을 하듯이 쓰레기를 던지며 노는 레이와 우나. 이 피해자와 가해자의 화해는 생경하다. 바로 몇 분 전까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렸던 두 사람은, 이제 밝게 웃으며 장난친다.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지고, 서로를 탐하려던 그 순간, 갑작스러운 반전이 일어난다. 그렇게, 서로의 입맞춤으로는 도달할 수 없었던 진실이 제3자에 의해 밝혀진다. 그렇게 '뚝' 하고 팽팽했던 긴장의 끈은 끊어지고, 엉켰던 실타래는 한꺼번에 잘려나간다. 그 자리에 남는 건 경악 그리고 배신감. 두 사람의 대결에서 레이에게 점차 쏠리던 관객은, 그 한순간에 의해 우나의 감정에 빨려 들어간다. 전부 거짓말이었다. 이 사람의 지위도, 이 사람의 삶도, 이 사람의 존재 자체도. 마치 레이를 불렀으나 피터가 등장했던 것처럼. 그렇게 한 번 버려졌던 우나는, 또다시 레이에 의해 버려진다.미성년자를 향한 성범죄는 그 죄질이 매우 나쁘다. 연극 <블랙버드>는 그 성범죄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궁극적으로 소아성애 혹은 성범죄를 옹호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세상의 수많은 폭력 사이에서, 우리는 때때로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손가락질하는 경우가 많다. 네가 짧은 옷을 입어서, 네가 먼저 유혹해서, 네가 여지를 줘서라고. 가해자가 호소하는 억울함이 설득력을 가질 때도 있다. 나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고, 기억이 나지 않고, 순수한 마음에서 그런 것이라고.하나의 사건을 경험한 두 명의 인물. 각자의 처지에 따라 당연히 기억은 다를 수밖에 없다. 각자의 기억이 각자에게는 대체 불가능한 진실이기에, 명확한 증거 없이 우리는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난감하다.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사이에 애매한 중립을 취하거나, 타협을 종용한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가해자에게 유리한 길로 귀결되는 걸 여러 번 목격했다. '합의'나 '화해' 그리고 '용서'라는 말은 분명 좋은 가치를 지닌 좋은 말이지만,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레이에게도 권리가 있다. 가해자에게도 물론 억울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죗값을 치렀다면, 진실을 인정하고 참회한다면 그에게도 새로운 삶을 살아갈 기회를 줘야 한다. 처벌의 주목적은 공적 복수에 의한 법감정 해소가 아니라, 교화와 계도를 통한 재사회화에 있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전제가 있다. 그는 정말로 '반성'했는가. 그는 우나를 찾아간 적이 없다. 그 자리에, 그 이름 그대로 살아서 고통받는 그에게 직접 용서를 구한 적이 없다. 수많은 책을 읽으며 자신이 전형적인 소아성애자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려 했을 뿐, 자신이 지은 죄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레이가 말한 모든 것이 진짜였다면, 정말로 그를 용서할 여지가 생겼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처절하고 현란한 자기변론 속에 진실의 함량은 극히 미미했다. 이 세상 수많은 가해자가 그랬듯이.재판정에서, 혹은 대한해협 건너에서, 아니면 여의도 청문회장에서, '피해자 코스프레'로 일관하며 자신의 가해를 부정하는 이들이 차고 넘치는 요즘이다. 가해자의 말은 언제나 그럴듯했다. 컨테이너 문을 열고 들어왔던 한 사람에 의해 레이의 거짓이 드러났듯이, 그들의 거짓 역시 결국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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