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도>의 이준익 감독이 10일 오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광고 기획자, 영화수입자, 그리고 영화제작자와 연출자. 이준익 감독이 충무로와 연을 맺은지도 근 30년이다. <오마이뉴스> 창간 17주년을 맞이해 영화계 인사 중 그를 만났다. ⓒ 이정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그림자에서 영화계 역시 자유롭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이 정부는 문화 분야에 억압적이었다. 실체의 9부 능선까지 접근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그 민낯이다. 많은 문화예술인이 공통적으로 고통을 호소하며 이 정부의 원칙 없음과 문화예술에 있어서 무지에 가까운 태도를 지적한다.

여기에 대해 이준익 감독은 오히려 긍정론을 펼쳤다. 그 자신도 블랙리스트에 올라있었고, 여러 동료 영화인들이 차별 당하는 과정에서 목소리를 내 온 그는 "이 정부의 차별적 태도와 블랙리스트는 곧 또 한 번의 급성장을 예고하는 사건"이라고 정의했다. 약 30년 동안 <메멘토> <헤드윅> 등 외화 수입자로, <간첩 리철진> <아나키스트> 등의 제작자로, 익히 알려진 흥행 영화 감독으로 존재한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한국영화산업의 산증인 중 한 명이니까.  

특별한 개구멍

충무로 역 인근 이준익 감독의 사무실을 찾은 지난 21일 오전, 이제 갓 <박열>의 촬영을 끝낸 그는 편집 작업을 앞두고 상기된 모습이었다. 천만 영화 <왕의 남자> <라디오 스타> 등 그를 수식하는 흥행작이 여럿 있지만, 최근 선보인 <동주>와 준비 중인 <박열>은 의미가 남다르다. 지난해 개봉한 80억 원 이상의 영화 10편 중 8편이 손익분기점을 넘겼고 그 평균수익률이 53.9%에 달했지만, 50억 원 미만 작품의 평균수익률은 마이너스였다(영화진흥위원회 '2016 한국영화산업 결산' 기준).

돈이 돈을 버는 구조, 즉 양극화 현상이 영화 분야에도 고착화 되는 와중에 <동주>는 단 5억 원의 예산을 들여 흥행에 성공했고, <박열> 역시 26억 원 규모의 저예산이다. 관록의 상업영화 감독이 이런 길을 택한다는 건 일단 영화계에 여러 자극으로 작용할 만하다.

 영화 <동주> 촬영 현장. 송몽규 역의 박정민과 윤동주 역의 배우 강하늘, 그리고 이준익 감독의 모습(왼쪽부터).

영화 <동주> 촬영 현장. 송몽규 역의 박정민과 윤동주 역의 배우 강하늘, 그리고 이준익 감독의 모습(왼쪽부터). ⓒ 메가박스플러스엠


- 대규모 예산 일색의 한국영화산업 흐름에서 그 행보가 남다르다. 양극화에 대응하는 일종의 실험의 장 같다.
"지극히 의도한 선택이지. 상업 영화권에서 30년 활동했는데 작금의 영화 시장 변화에서 일종의 대안적 시도가 <동주>다. 제작비 상승과 멀티플렉스 극장 중심의 시스템이 영화라는 매체의 대중성을 더 강화해서 콘텐츠 산업을 확대시키고, 그 파생산업을 성장시키는 순기능이 있긴 하지만, 그만큼 상업영화 자체에 대한 진입장벽을 높게 만들었다. 순기능엔 항상 역기능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 장벽에 일종의 개구멍을 하나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었다(웃음). 그런 노력이 없으면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 자체에 옹색해지거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화는 곧 자본과의 협상이자 약속의 이행이다. 엄밀히 말하면 <동주>는 주류 자본인 메가박스가 있었기에 독립영화가 아닌 저예산 상업영화다. 표현양식 면에선 흑백이라 상업영화에 반하는 측면이 있긴 하지. 과거에 존재했던 여러 영화 제작 방식과 획일화 된 현대 상업영화 제작 방식 사이에서 이처럼 독립영화는 아니면서, 상업영화엔 포함시키는 그런 시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박열>도 그 연장선이다.  

"그렇게 시도하려 했으나 계획과 다르게 오차가 생겨 제작비가 좀 증가했다. 26억 원이 들어갔는데 기본적으로 컬러영화에, 배경이 100프로 도쿄여야 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도 있어야 했고(웃음). 합천 쪽에 근대 현대를 아우를 수 있는 세트가 있어서 그걸 활용했다."

- 영화의 다양성 면에서 과거와 비교해 보자면 어떤가. 또 대규모 자본에 대한 부담 등으로 새로운 도전이 좀 위축돼 있진 않은지.
"결과적으론 더 다양해진 거다. 과거엔 1년에 개봉되는 영화가 300에서 400편, 극장 수가 1000개 미만이었다면 지금은 거의 3000개 정도다. 개봉 영화도 1000편을 넘었고. 같이 상승 비례한 거지. 근데 시장점유의 양극화는 그때에 비해 훨씬 커졌다. 자본주의에선 일견 필연적인 면이다. 양극화라는 게 누군가 의지를 갖고 만든 게 아니라 시장 자체가 갖고 있는 성질이 그걸 조장할 수밖에 없다. 자연발생적이지.

근데 지금 지적하는 문제는 2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더 나아진 게 있다면, 그때는 한국영화자체의 위기론이었지만 이젠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 50프로를 이미 확보한 상황에서 한국영화끼리 양극화를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엔 할리우드와 홍콩영화가 시장의 80프로를 차지했다. 할리우드나 외국영화에 비했을 때 시장주도성은 어느 정도 앞선 상태에서 그 안에서 발견되는 문제를 삼고 있다. 예전보단 좋아진 면이 있다."

 영화 <동주> 촬영 현장.

영화 <동주> 촬영 현장. ⓒ 순천시제공


- 이런 양극화로 신인감독이 급하게 데뷔한다거나 중견 감독이 너무 빨리 시장에서 사라지는 현상도 있다. 자본의 통제가 상대적으로 쉽다는 이유다.

"분명 한국영화 감독들의 조로현상이 있다. 미국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리들리 스콧, 유럽엔 최근의 켄 로치 등을 보면 노장 감독들이 여전히 건재하다. 한국영화는 과거 일제강점기 때 영향을 받았다. 일본은 또 미국과 유럽에서 답습한 거고. 서로를 답습하는 과정이 1990년대 초까지 왔고, 그때까지 영화는 산업이 아니었다. 문화였지. 산업이라는 건 소위 수치로 계량화가 가능하고 예측 가능할 때 성립한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1990년 중반 이후 나타난 감독은 앞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할 거다. 산업화 이전에 영화를 생산하던 인력은 수명이 단축됐지. 강제규, 강우석,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등 이 중견들은 길이 열려있다. 훨씬 더 다양한 영화가 나올 거라 기대하고 있지(웃음)."

정치권력의 발목잡기

 영화<사도>의 이준익 감독이 10일 오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인터뷰 중 이준익 감독은 "지금의 10대, 20대가 20년 뒤에는 훌륭한 콘텐츠 생산 주체가 돼 있을 것"이라며 "지금부터라도 콘텐츠 지원 정책의 방향이 바로 서야 한다"고 말했다. ⓒ 이정민


다양성을 얘기하는 대목에서 이준익 감독은 10여 년 전 국내영화계에 뜨겁게 불었던 스크린쿼터 폐지 반대운동을 언급했다. 요약하자면 당시 시장경쟁력과 자생력이 떨어지던 때 무분별한 개방으로 한국영화가 고사상태에 빠질 뻔했던 위기를 연대의 힘으로 국면전환시켰다는 자평이었다. 프랑스나 독일, 일본 등이 그 문제에 소극적이었고, 현재 그들의 자국 영화 점유율이 30프로가 채 안 된다는 사실을 덧붙였다. 여기서 핵심은 스크린쿼터 찬반 여부가 아닌 '저항정신'이다. 이준익 감독은 "영화인들의 강력한 저항 에너지가 곧 창작에 대한 의지로 전환됐다"고 강조했다.

- 현장에서 정말 그런 창작자들의 창작력이 불타고 있는가.
"물론! 한국영화의 자생력을 지속시키는 가장 큰 힘이 창작력인데 이건 영화계뿐만 아니라 게임이든 온라인 비즈니스 등 다양한 콘텐츠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봤을 때도 절대 뒤처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자본의 방향성, 그러니까 대기업이나 정부의 지원 방향이 창작자들의 에너지를 수용하는 쪽으로 나가면 시너지 효과가 날 것이다. 그 지원 결과가 지금의 한국영화 시장이기도 하다. 대기업이나 정부 모태펀드가 끊임없이 지원했기에 싹이 튼 거지.

이젠 예측과 계획이 필요하다. 지금 현상을 보면 미국 할리우드가 한국의 창작력을 흡수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밀정> <곡성> 등이 그 예다. 한국영화는 우리나라 시장에 국한한 게 아닌 세계시장에 이미 편입된 거다. 천만 영화가 10편 넘게 나온 거 차제를 문제 삼을 순 없다. 그 순기능을 존중하되 거기서 발생하는 역기능을 어떻게 막고, 대안적 사고를 할 것인가가 문제다."

- 그 대안적 사고라는 건?
"독립영화 지원 정책이라든가 저예산영화 배급 환경 조성이라든가 여러 갈래가 있지. 다수의 창작자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이 기존 주류의 것뿐만 아니라 또 다른 프로젝트를 과감하게 시도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하고, 시장 역시 그걸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기성 감독인) 난 유리한 위치에 있긴 했다. 그래서 <사도> 같이 기존 방식의 영화를 하면서 그 대척점에 있는 <동주> 같은 영화를 한 거다. <동주>로 성과를 냄으로써 가능성을 열어보자! <박열>은 2차 시도고."

- 앞서 나온 지원의 방향성 이야기다. 정부 주도의 문화 정책의 중요성을 언급한 만큼 그 방향성 역시 중요한데 근 9년은 방향 자체에 의문이 크지 않나. 
"그렇지. 나름 잘 나가다가 거꾸로 간 지난 9년이었다고 생각한다. 정치권력이 우선하는 나라는 후진국이다. 북한 같은 몇몇 공산국가 체제 국가가 여기에 해당하지. 중진국은 경제권력이 우선하는 나라고, 선진국은 문화권력이 우선하는 나라다. 한국은 1980년대까지가 정치권력의 시대였다면 90년대 들어선 대기업을 위시한 경제권력의 시대, 2000년에 와선 문화권력으로 전환되는 시점이었다. 그러다 2010년에 와서 다시 경제권력으로 회귀하는 조짐이 있다가 최근엔 정치권력으로 역행하게 된 거다.

문화적 성숙도와 창작자의 의지가 증가하는 와중에 경제, 정치권력이 문화성장의 발목을 잡는 기간이라 본다. 역기능인데 여기엔 또 순기능도 있다! 뭐냐고? 지난 4년 간 문화콘텐츠 생산자들 의지를 더욱 불태우게 했다는 것! (웃음) 모든 진화는 작용과 반작용 사이 진폭만큼 이뤄지거든. 최근까지 등장한 사회비판 영화뿐만 아니라 집회 문화, 그리고 뉴스가 예능보다 주목받는 현상을 보자. 이게 모두 놀라운 사회 성숙도의 증가로 작용했는데 문화 가치가 미래 성장의 동력임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영화<사도>의 이준익 감독이 10일 오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문화의 중요성. 이준익 감독은 "결국 우리는 강력한 콘텐츠 생산 국가를 희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정도면 강력한 문화중심주의자로 명명하고 싶을 정도다. 이를 인지한 듯 그는 "그런 희망조차 없다면 앞으로 우린 뭐 먹고 살 건데?"라며 반문했다. "이것을 위해 옳은 방향의 정책이 필요하다"고 그가 덧붙였다.

"구체적인 방법은 생산자들의 몫이다. 정책이 방법까지 만들 순 없잖나. 전략과 전술 개념인데 전략이 정책이라면, 전술은 콘텐츠 생산자들이 구사해야지. 어떻게 전략가가 전술까지 짜. 그건 자질이 없는 거다. 방법은 방향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다. 좋은 방향이 그래서 절실하다."

숨은 부역자들

- 질문을 좁혀보자. 블랙리스트의 전말이 드러나고 있다. 정부 주도로 누군가를 대거 배제하려는 리스트가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는지.
"이 역시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 헌법에 위배되는 아주 부당한 짓이다. 동시에 모든 예술가는 부조리를 가장 최전선에서 느낀다. 과거 유럽이 근대를 맞이하게 된 것도 억압과 부조리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시민정신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모든 억압은 변화의 시작점이다. 지금 겪고 있는 정치적 분란, 지원 차별, 블랙리스트 현상은 또 한 번의 급성장을 예고하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 창작 의지와는 별개로 물리적으로 직접적으로 피해를 보는 문화예술인이 많다. 당장 제작사나 극장 문을 닫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고.
"그렇다. 그 분들에겐 더욱 폭력적인 정부다. 정치권력이 우선인 정책이면 국민이나 당사자들은 억압의 대상이 된다. 그만큼 권력에 불만이 커지고, 반작용이 클 수밖에. 이 과정에서 블랙리스트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거 아닌가. 전 국민이 알게 됐다. 만약 다들 정치논리에 순응하며, 이 정권에 부역만 했다면 블랙리스트가 까발려지진 않았겠지. 그 안에서 사다리 타려는 인간들만 있었겠지."

- 감독님도 블랙리스트인데 피해를 입은 건 없나?
"정부 돈을 지원받는 것에 장애가 있을 뿐이지 사실 체감한 건 없다. 그 블랙리스트는 내 영화 생산 활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내가 정부지원을 한 번도 신청해 본 적이 없거든. 정부를 별로 신임하지 않는다(웃음)."

- 이런 상황에서 영화계는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이미 잘해오고 있는 거 같다. 각 단체에서 성명서를 여러 차례 냈고, 그래서 문제가 더욱 공론화 됐다고 본다. 앞으로 재현되지 않길 바란다. 다들 숨어 있기만 하고 기생하려 했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졌겠지. 이슈화가 됐고, 책임자가 처벌을 받으려고 하는 상황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그 중심에 우리(시민)들이 있다."

17주년 맞이한 <오마이뉴스>에 바란다
"지금 국내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주변국과 지구 반대편 나라에까지 어떤 역학 관계가 있는지 많이 서술됐으면 좋겠다. 사드 문제, 위안부 문제, 김정남 피살 사건이 됐든 이게 국내사건 기사로 머물기보단 국제 상관성으로 풀어본다면 훨씬 현재를 다양한 결로 볼 수 있게 될 것 같다.

또 언어적인 면에서 확장이 필요해 보인다. 최소한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까진 번역이 되면 어떨까. 한국에서 나오는 모든 <오마이뉴스> 기사를 누군가 계속 번역해 올리기만 해도 전 세계에서 볼 수 있다. 그게 온라인 장점 아닌가. 우리가 <알자지라>를 인용하듯 <오마이뉴스>도 전 세계 매체에 인용되기 쉬울 것이다. 이렇게 형식적 확대를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받다 보면 내용의 방향성도 정해질 것이다.

<오마이스타>는 비주류의 발견에 힘을 썼으면 좋겠다. 기존 연예 뉴스는 스타 따라잡기다. 그게 포털사이트 진입을 가장 손쉽게 하기에 그렇다. 기존 매체들이 스타덤을 쫓는다면 <오마이스타>는 팬덤을 쫓길 바란다. 물론 스타를 쫓는 팬덤도 있지만 비스타의 팬덤을 주목해봤으면 한다. 이제 막 생성되는 팬덤들은 그 수는 적을지언정 에너지 총합은 웬만한 스타의 팬덤에 맞먹을 것이다. 꾸준히 집중한다면 일종의 스타권력을 해체하는 힘이 될 것이다. 좋은 의미로의 해체다. <오마이뉴스> 정체성이 바로 그런 권력의 해체를 통해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를 널리 알리려 한 데 있지 않은가. 스타가 아닌 사람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가 되었으면 한다. 제호 자체가 그걸 증명하지 않나. 우리의(our) 스타가 아닌 나의(my) 스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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