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th오마이스타

 다큐멘터리 <7년-그들이 없는 언론>의 김진혁 피디가 4일 오후 서울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7년-그들이 없는 언론>은 공정보도를 위해 투쟁하다 해직 당한 언론인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지난 7넨에 대해 김진혁 감독은 긴 한숨과 함께 "격세지감"이라고 운을 뗐다.ⓒ 이정민


우리는 종종 '어쩌면'이라는 가정을 할 때가 있다. 기대했거나 예상한 결과라면 좋겠지만 않았을 때, 특히나 그게 안 좋은 쪽이었을 때 우린 감당하기 어려운 무력감과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이 맥락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7년-그들이 없는 언론>(아래 <그들이 없는 언론>)을 바라본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절대 태어나지 않아도 됐을' 이 작품이 오는 12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연출을 맡은 김진혁 감독을 지난 4일 서울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만났다. 공정보도를 외치다가 해직당한 언론인들 이야기를 전하는 그 역시 언론인으로서 할 일을 하던 중 회사의 방해로 모든 걸 버리고 뛰쳐나왔다. <지식채널e>라는 프로로 EBS PD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는 "해직 언론인 이야기를 전하는 입장에서 거기에 꼽사리 끼기엔 민망할 뿐이다"라며 애써 웃는다. 크게 보면 그 역시 정권의 언론 장악으로 인한 피해자 중 한 명이다. 징계를 받은 셈이다.

2013년 회사를 뛰쳐나온 그는 1년 뒤 전국언론노조의 영화화 제안을 받는다. 20여 명의 해직 언론인, 그 몇 배에 달하는 징계 언론인들이 수년 간 투쟁했지만 돌아온 건 단 몇 명의 복직, 그리고 같은 언론의 무관심이었다. 이쯤에서 김진혁 감독의 말을 빌린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반전이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다들 겉으로 말은 안 하지만 그런 생각을 서로 하고 있었던 거 같다. 좌절감이 최악이었을 때 괜찮은 기획이라고 생각했다. 출구가 별로 없었고, 이슈파이팅도 안 되던 시기였다. 언론노조에서 영화 한다는 게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들이 없는 언론>은 바로 그 '어쩌면'에서 시작된 다큐멘터리다.

좌절감과 모욕감을 견디며

 다큐멘터리 <7년-그들이 없는 언론>의 한 장면.

다큐멘터리 <7년-그들이 없는 언론>의 한 장면. YTN 해직 기자중 결국 노종면, 조승호, 현덕수 기자는 회사로 돌아가지 못했다. 대법원 판결 이후 이들은 <뉴스타파> 등의 대안매체에 몸담거나 개인 사업을 하며 생활하고 있다.ⓒ 인디플러그


언급한대로 영화는 2010년부터 2014년 사이 벌어진 각종 징계와 해직 사태,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언론인들의 지난한 투쟁과정을 가감 없이 담는다. 노종면, 조승호, 현덕수, 권석재, 우장균, 정유신 등의 YTN 기자를 비롯해 최승호, 이용마, 박성제, 최일구 등 MBC 소속 언론인들이 등장한다. 누군가는 전면에 서서 정권의 하수인을 자처하는 꼭두각시 사장단을 향해 일갈하고, 누군가는 옆에서 박수를 치거나 뒤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 화면 곳곳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언론인들 자체가 바로 우리 사회를 상징하는 고감도의 자화상이다.

- 화면에 다양한 언론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 현장에 있었다면 난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떤 모습이었을까 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웃음) 나 역시 그렇다. 난 프로그램 때문에 퇴사한다는 명분은 있었지만 (김진혁 감독은 '반민특위' 관련 프로를 만들다가 회사의 방해로 좌절된 후 사직서를 냈다-기자 주) 좌천, 징계, 사직까지 포함하면 훨씬 많다. 얼마 전 홍보사 요청으로 징계 현황 정보를 찾다 보니 단톡방에 엑셀 파일로 '쫓겨난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캡처된 게 있더라. 큰 화면으로 안 나올 뿐이지 영상 곳곳에 그런 분들이 있다. 당장 해고당하진 않았지만, 모욕감과 자괴감 때문에 그만두신 분들도 많다. 모두 인터뷰하진 못했지만, 훨씬 많은 분이 그 뒤에 계실 거다. 참 그런 게 (대의를 위해) 나중을 생각하며 회사 안에서 버티면 또 그걸 곧이곧대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생긴다. 그냥 월급만 받아먹고 있는 거로 생각하는 거지. 내부와 외부 양쪽에서 두드려 맞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론 보직 변경이 가장 큰 징계라고 생각한다."

- 영화를 보면 제공받은 것과 직접 촬영한 부분이 구분된다. 그 비중이 궁금하다.
"러닝타임 110분 중 인터뷰 부분을 제외하곤 대부분 언론노조를 통해 받은 거다. 회고 부분과 2014년 3월 YTN 행사 이후론 직접 찍었고. 받은 정보량이 엄청나다. 4테라짜리 하드디스크로 4개 정도? 또 인터넷 영상을 받은 것도 있다. 원본을 찾을 수 없는 영상도 있었다. 그래서 영화의 화질이 들쭉날쭉하다. 그 많은 자료를 사실 거의 못 썼다. 극히 일부만 쓴 거다.

- 여러 언론인들을 인터뷰했을 텐데 언론 시사회 때 편집된 부분에 대해 미안하다는 발언도 하셨다. 누가 얼마나 편집된 것이고 기준이 따로 있었는지.
"일단 <국민일보> <부산일보> 선배들을 직접 못 찾아뵀다. MBC도 전부 만난 건 아니고. 영상에 나오는 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시는데 아무래도 영상의 흐름 자체가 개인 스토리보단 사건을 따라가서다. 예를 들면 후배 기자가 집회취재를 갔는데 시민들로부터 욕을 먹은 사건이 있다. 여기에 밀접하지 않은 사람들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횡적으로 같은 시기에 일어난 <국민일보> <전자신문> <부산일보> 사태를 붙이기도 애매했다. 교육 영화가 아닌 이상.

인터뷰해도 안 쓸 가능성이 높아서 하기가 좀 그렇더라. 못해서 죄송하다는 연락을 드리기도 했고, 못 한 분도 있다. 어느 한 분도 사연이 가볍지 않기에 죄송한 마음이다. 오래 인터뷰했어도 조금밖에 쓰지 못한 것도 있고. 다들 극단의 분노와 상실감에 얽혀있다. 나름 그걸 극복하고 해소하기 위해 방식은 다르지만, 굉장히 노력하신다. 그 개인적 몸부림을 다 못 담아서 아쉽다. 만약 관객분들이 이런 사태 전반에 대한 배경지식을 다 갖고 있다면 영화는 달라졌을 것이다. 내 욕심은 영화 개봉 후 이분들이 다 스타가 됐으면 하는 바람인데 영화가 그렇게까지 인물을 받쳐주고 조명하는 건 아니라…."

 다큐멘터리 <7년-그들이 없는 언론>의 김진혁 피디가 4일 오후 서울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다큐 자체는 어떤 감정적 카타르시스 즉 해소과정이 거의 없다. 김진혁 감독은 "나 역시 쑥 몰입해서 감정을 세개 느끼는 걸 좋아하지만 이건 관객들로 하여금 현실과의 괴리를 느끼지 않는 게 중요했다"며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영화와 분리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 감흥이 계속 이어지길 원했다"고 말했다.ⓒ 이정민


- 영화에 자신들의 영상을 보고 눈물 흘리는 해직 언론인들이 담겨있다. 일종의 시사회 같은데 액자 구성 같은 느낌이었다, 특별한 의도가 있었는지.
"지난해 10월 6일로 기억한다. <그들이 없는 언론> 가편집 본을 상영하는 행사였다. 그 장면을 넣은 건 두 가지 의미다. 관객들이 저분들이 가진 (7년이라는) 시간의 누적치에 대한 정서를 현장에서 지켜보게 하자는 거였다. 자신들이 투쟁하는 걸 보는 그분들의 표정을 마치 옆에서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있을 거 같았다. 그게 첫 번째고, 또 하나는 반복성이다. 현실은 내년에 또 이런 행사를 하게 될 거라는 거다. 탈출구 없음과 반복의 지겨움이지.

이게 살짝 거리 두기이기도 하다. 감정을 사실 좀 뺐거든. 그런 연출방식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이 소재 자체가 무슨 카타르시스가 있는 아이템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와 비슷하다.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해결도 안 되는 상황인데 계속 슬픈 거지. 편집은 빠르게 이야기로 몰입감을 주면서 대신 정서적 카타르시스는 없는 채로 뒀다. 그 상태가 되면 원래 대상이 가진 굴레에서 몸부림치는 것도 전달되면서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왜 공영방송을 살려야 하나

- 언론의 위기라는 말과 동시에 언론인에 대한 조롱이 만연해졌다. 자칫 공영방송을 회복하자는 기치 자체가 우습게 들릴 수도 있는 요즘이다.
"그렇다. 공영언론이 무너진 상태에서 그 외의 언론이 역할을 해서 현재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으니, 더욱더 공영언론이란 게 과연 필요한가 의문을 자연스럽게 가질 수밖에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다른 언론인들이 자기 역할을 했다고 해서 최종 결정 과정에 시민들 의사가 반영되는 건 아니지 않나. (결국) 사주의 의사가 들어가지. (잘한다고 하는) 그 종편들이 나중엔 또 다른 결정을 할 수도 있고, 사적 기업이기에 그 결정을 또 뭐라 할 수도 없다.

공영언론은 기본 틀 같은 거다. 지금 상황에서 그 틀이 필요 없다고 하는 건 단견이다. 물론 지금껏 공영언론이 보인 행태로 감정적 반응이 나오겠지만, 소수 임원과 망가진 시스템 때문이다. (국민이) 가져가서 시스템을 새로 만들게 되면 좋지 않나. 마음도 편하고. 조금만 화를 풀어주시고 애정을 갖고 봐주시는 게 필요할 것 같다."

 다큐멘터리 <7년-그들이 없는 언론>의 한 장면.

다큐멘터리 <7년-그들이 없는 언론>의 한 장면. 징계 언론인에 대해 법원이 회사 노조실 사용을 허가했음에도 사측이 출입 자체를 막자 직원들이 가면을 쓰고 출근한다.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게.ⓒ 인디플러그


- 공영언론의 위기가 대안 언론의 기회라는 말도 있다.
"사적 언론, 공영언론, 대안 언론, 뉴미디어 등이 공존하는데 공영언론은 기본 같은 거다. 일단 기본을 해놓고, 그게 제대로 작동될 때 다른 언론들이 균형감 있게 가는 게 좋다고 본다. 지금 언론들이 들쭉날쭉한 건 기본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공연언론의 기본적 역할을 돌려놓는 게 대안 언론의 기회를 뺏는 거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 관점에서 따지면 현재 대안 언론의 입지를 가져간 건 오히려 JTBC지. 좀 다른 문제라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걸 하고, 그 기본이 할 수 없는 걸 나눠 갖는 게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어느 영역에 애정을 갖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이 잘 지켜질 때 시민들이 스트레스를 가장 덜 받을 거다."

- 영화는 대의를 위해 투쟁하는 언론인들의 모습과 동시에 언뜻언뜻 이들이 먹고사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모습도 묘사한다. 그 지점에서 균형감을 잡는 게 중요했을 것 같다.
"다큐를 만드는 사람 입장에선 기존 정보보다 새로운 정보에 쏠리는 면이 있다. 새로운 정보를 넣는 게 문제가 뭐냐면 관객 입장에선 배경 지식이 없으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는 거다. 저 사람들이 왜 울지? 의아해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난 끊임없이 앞단으로 가야 한다고 스스로 채근했다. 그리고 또 다른 우려는 이분들이 개인적으로 직장을 잃고, 이러쿵저러쿵 이게 파편화되면 언론이 전반적으로 망가졌다는 것과 잘 연결이 안 된다는 점이다. 이분들이 해직돼서 가슴 아픈 것과 세월호 참사의 오보를 사람들이 연결해서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물론 그리 보시는 분도 계시지만 대부분은 따로 생각하시거든. '해직 언론인은 안타까우니 얼른 직장으로 돌아가셔야지' 하시면서도 '언론은 기레기!' 이러신다. 이게 사실 별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둘 사이를 연결하는 걸 최대목표로 하고 그 안에서 밸런스를 어떻게 할까를 고민했다."

'기레기'라는 단어의 헛헛함

- 세월호 참사 오보에 대한 생각을 더 듣고 싶다. 해직 언론인들이 그날 제 자리에 다들 있었다면 그런 오보는 없었을 거라는 게 영화의 주요 메시지이기도 하고.
"데스크에서 어떤 판단을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시청자와 독자에게 직결되는 거잖나. 데스크에서 전원구조라고 판단했기에 (목포 MBC에선 아니라고 수차례 보고했지만) MBC가 그렇게 보도한 거다. 그걸 본 다른 언론사나 국민 역시 '그런가? 심각하지 않나 보다?' 생각한 거지. 만약 (MBC 해직 기자이며 영화에 등장하는) 박성제 기자가 데스크에 있었다면 다른 결정을 했을 거라고 본다. 설사 경영진이 지금과 동일하더라도 말이다. 굳이 오보를 낼 이유는 없잖나. 해직언론인의 수가 몇천 명이 아니거든. 20여 명이거든. 소수의 언론인만 빠져도 이렇게 망가지는 상황인 거다. 세월호 참사를 이 각도에서 보시면 굉장히 다르게 다가올 거로 생각한다."

 다큐멘터리 <7년-그들이 없는 언론>의 김진혁 피디가 4일 오후 서울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진혁 감독은 지금의 기레기들의 탄생은 기자 개인의 일탈이 아닌 시스템의 문제로 진단했다.ⓒ 이정민


- '기레기'라는 단어가 그래서 뼈아프다. 이 단어에 대한 감독의 생각을 듣고 싶다.
"인터넷 댓글에서만 쓰이는 단어가 아니라 설득력을 얻고 통용되는 단어가 됐다. 주원인은 역시 세월호 참사 때 수많은 오보, 혹은 왜곡되고 잘못된 정보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어느 날 갑자기 이 단어가 튀어나온 건 아니다. 이명박 정권 때 이미 많은 분이 해직되고 징계를 당했다. 박근혜 정권 초기까지 이어지며 (언론장악) 세팅이 끝난 거지. 그때까지만 해도 큰 사건이 없다 보니 국민은 그냥 '아, 너희들은 정권 편향적 언론이 됐구나!' 생각하시다가 참사 이후 그 수준이 아니라는 걸 아신 거지.

이념 문제가 아니라 언론인으로서 기본 역할을 하는 이들과 시스템 자체를 무너뜨린 게 기레기라는 거다. 단지 개인 언론인이 '오늘 난 열심히 보도 안 할 거야' 혹은 '출세하기 위해 이런 식으로만 할 거야'라 생각한다고 기레기가 될 수 없는 거다. 다양한 욕망은 누구나 있다. 앞으로도 있을 거고. 약간 다른 얘기일 수 있는데 기레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해직 언론인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걸로 출발해서 잘못된 시스템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즉, 언론인이 잘리고 좌천되거나 편성과 보도를 견제하는 장치를 회복해야 한다. 대통령이 마음대로 사장을 임명 못 하게 하고, 나아가 본질적 시스템 그러니까 출입처 체제라든지 보도자료를 지나치게 의존하는 행태, 광고 비중이 높은 수익 구조 등을 타파해야 한다. 이게 기레기를 양산하는 온상이거든. 물론 이 영화만 보면 그것까지 떠올리지 않겠지만, 요는 기레기는 곧 시스템의 결과물이지, 기자 개인 인성의 문제는 아니라는 거다. 물론 인성도 중요한데 시스템이 있다면 안 무너질 거다."

-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과 어떤 부분을 가장 소통하고 싶은지. 제안할 부분도 덧붙여주시길 바란다.
"영화는 해직 언론인 이야기지만 이건 우리가 함께 산 역사다. 화면에 흘깃흘깃 보일 거다. 예를 들면 2008년 YTN 대량해고 사태 때 이걸 MBC에서 보도한 게 나온다. 옛날 뉴스 로고 음이 들린다. 또 해직 언론인들이 국토 순례를 하면서 쌍용차 노동자들을 만나고, 제주 강정마을을 찾는다. 비록 해결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무시한 건 아니었던, 노력했지만 결국 졌던 자국들이 곳곳에 있다. 이걸 반추해보면서 보시면 꼭 그게 절망으로 느껴지진 않으실 거다. 기존 언론에서도 소외된 언론인들이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힘껏 싸웠고, 싸우고 있다. 서글프지만 한편으로 위로가 될 거로 생각한다."


"'연기 잘 한다' 소리도 듣고파..." 잊을 수 없는 노래, 팬텀의 여인

[inter:view] 뮤지컬 <팬텀> 속 뮤즈,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 이지혜

프랑스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 수많은 이의 꿈과 낭만이 모이는 이곳. 시골에서 올라온 크리스틴 다에는 어렸을 적 잠깐의 기억을 토대로 이 화려한 파리에 올라온다. 음악적 재능은 있지만, 아직 세공되지 않은 보석, 크리스틴을 필립 드 샹동 백작은 한 번에 알아본다. 거리에서 노래하며 악보를 파는 그녀에게 '재능 낭비'라며 훈련을 받을 것을 적극적으로 권한다. 꿈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그녀는 뛸 듯이 기뻐하며 오페라 하우스로 들어간다. 비록 그것이 의상 보조에 불과한 자리일지라도.프랑스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 그 화려함 밑에 모든 추한 것들을 감춰놓은 곳. 어려서부터 끔찍한 외모를 갖고 태어난 에릭은 이 오페라 하우스 지하에서 유령으로서 살아간다. 언제나 가면을 쓴 그는, 혹시나 이 가면 안을 본 사람을 죽여버릴 정도로 폐쇄적이고 뒤틀린 존재이다. 그 역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지니고 있지만, 그 장기를 펼칠 수 있는 무대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존재마저 부정당한 채, 오페라 무대의 그림자 예술 감독으로 간간이 개입할 뿐.그 두 사람이 만난다. 무대 뒤에 가려져 재능을 미처 꽃피지 못하던 여자는 그의 재능을 발아시킬 유일한 남자를, 인생 자체를 부정당한 남자는 자신을 유일하게 인정해줄 여자를.에릭의 뮤즈, 목말랐던 모성을 충족해줄 존재, 유일한 그리고 영원한 사랑. 결국, 에릭을 파멸시키고 동시에 구원하는 천사. 뮤지컬 <팬텀>의 '크리스틴 다에'는 이토록 다양한 의미를 지닌 인물이다. 크리스틴에 트리플 캐스팅된 배우 중 가장 어린, 그래서 이제 막 파리로 상경한 듯한 크리스틴인 것처럼 반짝이는 배우 이지혜. 그를 지난 2016년 12월 29일에 만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성장하는 크리스틴을 보여주기 위해 "<팬텀>은 정말 '큰 산'이었죠. 너무 많이 부담됐고, 많이많이 걱정했는데 만나고 나니 너무 행복하고 매일매일 꿈만 같고…."<팬텀>을 맡은 소감을 물으니 너무 '전형적인' 답이 나왔다. 심지어 '큰 산' 이야기는 타사 인터뷰에서도 나왔던 대답이었다. 이 점을 지적하니 이지혜는 '빵' 터져서 한참을 웃는다. 그러고는 "진심이니까 반복할 수밖에 없는 거죠!"라고 항변한다. 이 배우, 참 웃음도 많고 밝다. 처음 파리에 올라왔을 때의 크리스틴처럼."크리스틴과 첫인사는 잘한 것 같은데, 아직 친해지는 중이에요. 하면서 새로운 게 계속 생겨나고 있거든요. 하나하나씩 '크리스틴은 이랬겠구나', '크리스틴은 저랬겠구나'하면서요. 처음에는 저로 대입해서 생각하려고 했어요. 저를 캐릭터화하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지금은 크리스틴을 제 안에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2016년 11월 26일 개막한 뮤지컬 <팬텀>은 이제 공연 중반을 지나가고 있다. 그런데도 배우 이지혜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그것도 '엄청'. 캐릭터에 대한 공부도, 연기와 노래에 대한 고민도 아직은 '현재진행형'이었다.특히나 극을 여는 첫 신이자 크리스틴의 등장 장면인 '파리의 멜로디'가 그렇다. 부푼 꿈을 안고 파리에 도착한 크리스틴은 파리에 관한 곡을 써서 그 악보를 판매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아름다운 파리의 낭만을 노래하는 크리스틴. 그런데 왜인지 음정이 약간 불안하다. 깨끗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에릭을 만나서 훈련을 받으면 받을수록 크리스틴의 소리는 더 안정되고, 훌륭해진다. 그래서 긴가민가했다. 배우가 정말로 떨었던 걸까. 아니면 파리에 갓 올라온, 꿈 많지만, 아직 훈련이 안 된 예술가의 소리를 의도한 걸까."맞아요! (손뼉 치며) 캐릭터로 승부를 보려고 했던 부분인데…. (웃음) 크리스틴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특히 '파리의 멜로디'와 '비스트로'가 멜로디가 똑같거든요. '파리의 멜로디' 때는 훈련 받지 않은 날 것의 소리를 내려고 하고 '비스트로' 때는 완성된(?) 소리를 들려드리려 하고 있어요. 약간 단순할 수도 있지만, 소리를 통해 극단적인 차이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캐릭터를 풀어봤어요. (웃음)관객분들이 성장하는 크리스틴을 보면서, 배우와 함께 '내가 키웠다!'는 느낌으로 뿌듯해 하시기를 바라요. '파리의 멜로디' 제가 처음 부르고 나면 '갸우뚱'하는 분들이 분명 있을 거예요. '크리스틴이 왜 이렇게 노래를 별로, 깨끗하게 못하지?' 그러다가 레슨 받으면서 '오, 잘한다, 잘한다', '성장하고 있어!'라고 느끼시고, 그 다음에 '비스트로'에서는 집중하고 보시는 거죠. 모두가 그러시는 건 아니겠지만…. (웃음) 최소한 앞 열에 앉아 계신 분들이 저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시골에서 올라온 이 소녀의 성장기 "크리스틴은 굉장히 열성적인 아이예요.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열정이 정말 커요. 혼자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생계 수단도 해결하면서 꿈을 이루고자 하는 모습이 되게 멋있었어요. 저도 시골에서 올라왔거든요. (웃음) 크리스틴은 굉장히 자기 주도적이잖아요. 성장해가는 과정도, 물론 좋은 선생을 만난 것도 크지만, 특별히 무언가에 의지하거나 기대지 않고 노력하면서 이뤄가잖아요. 크리스틴을 통해서 항상 반성하게 되어요. '더 열정적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라고…. (웃음)"극 중 크리스틴이 성장하듯이, 배우 이지혜도 크리스틴을 만나 성장하고 있었다. 2012년,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엠마'로 데뷔한 이후 그는 꾸준히 자라왔다. 배우 이지혜의 별명은 여전히 '엠마'이다. '지혜엠마' 줄여서 '졤마'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그. 심지어 인스타그램 아이디도 'jjae_emma'이다. 크리스틴을 맡았음에도 여전히 데뷔작의 캐릭터로 불리는 게 부담이 되지는 않을까."전 너무 좋아요. 엠마를 너무 사랑하거든요. 사실 새 작품과 새 캐릭터를 만날 때마다 애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발견해요. 근데 엠마는 처음 만난 캐릭터이기도 하고, 두 번 하기도 했기 때문에 애정이 더 가는 것 같아요. 그렇게 불러주시니까 너무 좋아요."그렇게 배우 생활을 시작했고, <오필리어>를 제외하면 모두 대극장 주연만 맡았다. 나름 '꽃길'만 걸었을 것 같은 이 배우는 여전히 배울 것이 많다며 '성장'에 목말라 했다. 혹시 대극장 위주로 필모그래피를 쌓은 것도 일부러 그 '성장'을 위한 것이었을지 모르겠다."네? (웃음) 절대 아니고요. 진짜 아닌데…. (웃음) 전 소극장도 정말 하고 싶었는데 그런 오디션 기회 자체가 별로 없었어요. 저를 불러주시는 데도 없고…. 저 소극장 진짜 하고 싶어요. 좋은 작품 많잖아요. 그런데 안 불러주셔서…. (웃음) 이거 꼭 적어주세요. '불러주는 데가 없었다.'이번 <팬텀>이 대극장이기는 하지만, 객석과 무대가 가까운 편인데 제가 객석 코앞까지 무대를 쓰거든요. 그럴 때는 관객들 움직이는 것도 다 느껴져서 색다르거든요. 블루스퀘어가 이 정도인데 소극장은 어떻겠어요. 관객의 반응을 바로 알 수 있을 테니까. 소극장도 꼭 하고 싶어요. 불러주세요!" 5년 차를 지나 이제 6년 차가 된 이 배우는 여전히 신인의 자세였다. "이제 신인상 후보에도 안 오르더라고요"라면서 너스레를 떨지만, 아직은 성장 가능성이 더 많은 배우이다. 자신의 가능성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뮤지컬 배우 중에서 연기와 노래 둘 다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배우는 매우 드물다. 이지혜는 연기보다는 노래에 강점이 찍힌 배우이다. 호불호도 갈리고 팬과 안티도 확연하게 나뉘는 편이다. 연기에 대한 아쉬움은 없는지 물어보니 망설이지 않고 답이 나온다."후기를 일일이 찾아보지는 않아요. 2013년도 <베르테르> 때 너무 충격 먹어서…. (웃음) 그래도 저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시는지는 알죠. 연기적으로 많이 아쉽죠? (웃음) 물론, 10명이 있으면 10명이 저를 다 좋아할 수는 없죠. 내가 설득시킬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죠. '개취(개인 취향)'의 세계는 넓고도 다양하니까. (웃음)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최선을 다해 해내면, 모두는 아니어도 저를 안 좋게 보셨던 분 중 일부라도 좋아해 주지 않으실까요. 언젠가 꼭 보여드릴 거예요. (웃음)'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해요. 내가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할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하고 늘 생각해요. '노래를 괜찮게 하는데, 연기도 괜찮게 하네?'라는 소리를 들으려고 '많이많이많이' 노력해요. 여러 가지로 계속 부딪혀 보고, 욕을 먹으면서도 그런 역할들을 하고…. 사실 소극장에 도전하고 싶은 것도 그런 걸 만나면서 연기적으로 깨고 싶은 게 있어서예요."그는 아직 단단하게 여물진 못했지만, 자기만의 생동감 있는 아우라를 만들고 있었다. 커팅이 미처 다 끝나지 않았음에도 반짝이는 원석처럼.크리스틴 그리고 에릭 "시골에서 왔다. 그리고 좋은 선생님을 만났다? 저는 입시 때부터 정말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 왔거든요. 저 대학 입시 때 선생님이 전동석 오빠랑 같은 선생님이에요. 선생님께서 몇 년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선생님이 항상 저랑 동석 오빠 작품 하는 걸 보고 싶어 하셨어요. 선생님 돌아가시기 전에, 작은 음악회를 하자고 해서 동석 오빠랑 같이 노래를 불러드렸던 적이 있어요. 그때 선생님께서 너무 좋아하셨거든요. 이번에 기회가 되어서 동석 오빠랑 같이 무대에 서게 됐는데, 올라갈 때마다 선생님 생각 진짜 많이 하게 돼요. 극 중에서 오빠가 또 선생님이다 보니까….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들어요."자연인 이지혜와 크리스틴의 교집합에 관해 물었더니 '선생님' 얘기가 나왔다. 중앙대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한 그녀가 처음부터 뮤지컬 배우를 꿈꾸지는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오디션을 봤고, 그게 데뷔작이 됐다. 엉겁결에 시작한 뮤지컬로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데에는 그때 선생님께 배웠던 것들이 바탕이 됐을 터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극 중 선생님인 '에릭'을 만난다. 원석인 자신을 깎아 빛나게 할, 최고의 세공사."에릭과의 관계에서, 크리스틴은 남녀 간의 사랑이라기보다는 조금 더 큰 의미를 가진 것 같아요. 우선은 뮤즈라고 생각해요. 그 이상의 어머니 느낌도 있죠. 그 두 가지를 다 표현하기 위해서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 고민이 많아요. 특히 에릭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더 마음이 가는 게 있거든요. 어린 에릭이 연기하는 걸 보면, 그다음의 피크닉 신이 겹쳐 보여요. 얼마나 저 어린아이가 힘들었을까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거든요.에릭은 나(크리스틴)의 큰 꿈을 열어준 사람이고, 나한테 정말 좋은 선생님인데 내가 이 사람한테 뭘 해줄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의 아픔을 만져주고,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죠. 아무래도 극이다 보니까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가 많잖아요. 함축적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고. 친절하지 못한 부분도 생기고. 저도 제 마음을 조금 더 보여주고 싶고, 에릭과의 얘기들도 더 풀어내고 싶은데 시간상 그러지 못해 아쉬워요." 뮤지컬 <팬텀>은 태생적으로 <오페라의 유령>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같은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다른 창작진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두 작품의 단순 비교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무엇보다 결말부로 갈수록 <팬텀>은 서사의 축이 원작에서 크게 휘어 나간다. 비극으로 치닫는 <팬텀>은 결국 '팬텀'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평생 애정을 갈구했던 에릭은, 그 삶의 끝에야 자신을 구원해줄 존재를 만난다. 에릭은 크리스틴의 품에서 영원한 작별의 입맞춤을 나눈다."제가 에릭의 가면 벗은 얼굴을 보고 처음에 도망가잖아요. 그 이후로 에릭과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신이 없어요. 마지막에 에릭의 가면을 올렸을 땐, 정말 이 사람한테 미안하다는 말 이상의 뭘 할 수 있겠느냐고 고민해요. 아, 웃는 얼굴로 보내줘야겠다. 너무 눈물이 나기 때문에 울음을 아예 멈출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울상인 모습을 안 보여주려고 노력해야 겠다…. 울지 않으려는 제 얼굴을 보고 에릭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 신은 너무 어려워요. 울지 않기도 어렵고, 말이 없고 노래이기 때문에, 함축적인 의미를 담아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한소절 한소절 꾹꾹 눌러 담아서 부르고 있어요."또 크리스틴으로 만날 수 있을까 슬픈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면서도, 노래하는 배우 자신은 눈앞의 캐릭터를 위해 애써 울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넘치려는 감정을 일부러 눌러 담으며 극을 매조 짓는다. 감정도 체력도 소모가 많이 되는 공연을 소화하는 게 여러모로 쉽지 않을 것 같다. 장기 공연될 예정인 <팬텀>은 오는 2월 26일까지 서울 공연을 마친 후 4월까지 지방 투어에 나선다. 과연 끝까지 잘해낼 수 있을까."사실 감기 기운이 아직 좀 있어요. 지금 감기에 안 걸린 배우가 없을 정도예요. 공연장이 실내이다 보니까 아무래도 먼지도 많고, 독감도 유행이고…. 독감 주사를 미리 맞았는데, 맞아도 감기는 걸릴 수 있으니까요. 워낙 초고음을 내는 역할이다 보니까 조금만 목이 안 좋아도 소리가 탁하게 나오거든요. 이 공연만큼 소리적으로 부담되는 역할을 해본 적이 없어요.4월까지면 환절기가 딱 걸쳐있으니까 더더욱 걱정되죠. 그래서 매일 땀 흘리면서 운동하고, 신 들어가기 전에도 복근 운동하고 들어가요. 항상 했던 만큼 컨디션을 잘 유지하면서 마무리했으면 좋겠어요. 캐스팅 교체 없이 풀로 소화하는 것, 큰 무리 없이 인사하고 잘 보내는 게 이번 <팬텀>의 목표예요. 그래야 또 크리스틴을 만날 수 있겠죠?"질문하지 않았는데 먼저 크리스틴을 '또' 만나고 싶다는 얘기가 나왔다. 이전에는 매체 인터뷰 때마다 입버릇처럼 <베르테르>의 롯데를 다시 하고 싶다던 그녀였다. 그리고 '말하는 대로' 2013-2014에 이어 2015-2016시즌에 다시 롯데를 맡았다. "사실 서른이 넘고 더 원숙해졌을 때 다시 도전해 보고 싶다는 얘기였는데, 소속사에서 너무 빨리 수락했더라고요"하면서 웃는다. 그렇다면, 크리스틴은?"너무 하고 싶죠. 크리스틴은 정말 제가 소리가 나오는 그 날까지 하고 싶어요. (웃음) 제가 너무 좋아하는 음역의 노래를 할 수 있고, 저에게 맞는 역할이니까…. 저에게 맞는 음역을 맡은 적이 없었거든요. 제가 잘할 수 있는 걸 맡았으니까, 당연히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부담이 더 커졌던 것 같아요. 그래도 지금은 속 시원함을 느끼면서 하고 있어요. 힘닿는 데까지! 크리스틴 하겠습니다!"<팬텀>의 삼연, 사연, 오연이 될 때까지 크리스틴을 하고 싶다고 동석한 홍보팀 직원에게 강하게 어필하는 그녀. 어디 배역이 배우가 원한다는 이유로 다시 할 수 있을까. 이지혜의 크리스틴을 본 주변의 코멘트도 꽤 중요할 터이다."로버트(연출·각색)가 얼굴까지 빨개지면서 칭찬해줘서 너무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있는데…. 사실 처음에는 제가 어떻게 하나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어요. 만나자마자 믿을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같이 연습하면서 동료분들께서 저를 점점 믿어주시는 게, 마음을 열어주시는 게 느껴졌어요. '비스트로' 때 다 같이 응원의 에너지를 받아요. 마이크가 꺼져 있을 때도, (복화술로) '파이팅, 파이팅'해주세요. 눈 마주치면 키스 날려주시기도 하고…. (웃음) 그런 게 다 힘이 돼요."이지혜를 무결점의 배우라고 칭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베테랑도 신인도 아닌 그 어디쯤에서 그녀는 어딘가 부족하고, 어딘가 아쉬운 점을 지닌 채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파리의 멜로디' 때의 '갸우뚱'을 '비스트로'에서 환호로 바꾸듯이, 결국 성장하며 동료의 신뢰를 얻었듯이 그녀는 아직 발전하고 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배우 중 하나인 이지혜. 그녀가 얼마나 성장할지 그 폭을 가늠하기 위해서라도, 이지혜의 크리스틴을 봐 둘 가치가 있다.

이원근, 김하늘·유인영 사로잡은 마성의 수다쟁이

[inter:view] 영화 <여교사>의 이 남자, 2017년이 기대된다

"출출하지 않으세요?"배우 이원근이 인터뷰를 준비 중인 기자들에게 건넨 첫 마디였다. 괜찮다는 말에도 "지금 한창 당 떨어질 시간이잖아요. 우리 뭐 먹으면서 해요~"라며 조각 케이크와 호떡을 바리바리 챙겨 왔다. 기자들에게 포크를 하나씩 나눠주며 라운드 인터뷰(여러 명의 기자가 한 명의 취재원을 인터뷰하는 것)가 처음인데 종일 카페에 갇혀있으니 답답하다며 앓는 소리를 했다.테이블 위에 단 것을 한 상 펼쳐놓고서야 대화, 아니 수다가 시작됐다. 종일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느라 지쳤을 법도 하건만, 그는 내내 밝고 유쾌한 톤으로 이야기를 쏟아냈다. 첫 영화, 첫 언론 시사, 첫 영화 인터뷰. 이원근에게는 <여교사>와 관련된 모든 일이 아직은 신기하고 즐겁기만 한 듯했다첫 영화라 더 특별했다 "시사회 전날 잠도 안 오더라고요. 자다 깨다 자다 깨다, 꿈까지 꿨다니까요. 제게는 정말 기념비적인 날이었거든요!"그는 <여교사>를 "흥행과 상관없이, 복덩이 같은 작품"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100살까지 살더라도, <여교사>를 인생의 가장 큰 변환점으로 꼽을 것"이라면서 "감독님께 몇 번이나 말했는데 자꾸 '거짓말하지 마라'고 한다. 의심하지 마시라 해도 만날 의심한다"며 밝게 웃었다. 김태용 감독과는 영화를 찍는 동안 형·동생처럼 친해졌다더니, 그의 디렉션이 얼마나 꼼꼼하고 치밀했는지, 이르듯 설명하는 말투에 김태용 감독을 향한 애정이 듬뿍 담겨있었다.<여교사>에서 이원근이 맡은 역할은 두 여교사 효주(김하늘 분)와 혜영(유인영 분)의 욕망을 자극하는 고등학생 재하다. 두 교사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하는 재하의 표정 하나, 눈빛 하나, 대사 하나, 모두 <여교사>의 긴장을 극대화하는 요소다."감독님은 목소리, 호흡까지 성인 느낌이 나는 걸 싫어하셨어요. 교복만 입는다고 학생이 아니다, 교복 입었으면 학생이 돼야지 왜 성인 연기를 하려고 하느냐고요. 전 혜영과 지하주차장에서 실랑이하는 장면도 남자답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감독님은 정말 애 같아야 한다, 18살짜리가 사랑을 해봤으면 얼마나 해봤겠느냐 하시더라고요. 한번은 상반신 노출 촬영 앞두고 몸매 관리하다 '식스팩 있는 고등학생이 어디 있냐'고 엄청 혼났다니까요. 하하하." 진짜 고등학생 연기하기 재하의 표정이나 대사는 영락없는 10대 남학생. 그래서 그의 의뭉스러움과 영악함이 더 날카롭게 드러난다. 재하의 아이 같은 말투를 위해 이원근의 목소리라도 잠겨있으면 풀릴 때까지 기다려주고, 후시 녹음까지 했지만 '발음이 너무 또박또박하면 인위적'이라는 이유로 뭉개진 현장음을 그대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감독과 이원근의 이런 세밀하고 디테일한 노력 덕분에, 재하의 '묘한 느낌'은 뭉게뭉게 피어난다."재하가 효주에게 '찜질방 갈 거예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제일 여러 번 촬영했어요. 살짝 끼 부리는 느낌이 살아야 하는데, 저는 진짜 찜질방 갈 것 같이 말한다고요. (웃음) 얘가 진짜 찜질방을 간다는 건지, 효주를 유혹하는 건지, 알듯 말듯, 갈듯 말듯….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재하의 매력을 살려야 한다셨죠. 그 장면을 제일 먼저 찍었는데, 덕분에 재하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김 감독은 허리를 굽히고 있으면 '구부정한 무용수가 어디 있느냐'며 곧은 자세를 유지하도록 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대사하면 '재하는 건방진 아이는 아니'라고 알려주고, 우는 연기를 할 때는 비슷한 감정의 다큐멘터리까지 구해다 줬단다. 일대일 과외마냥 세심한 지도 덕분에 이원근도 배우로서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었다."<여교사> 이후에 <환절기>라는 작품을 찍었는데,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었어요. 주변에서 <환절기>에 대해 좋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저도 제 연기인데 너무 마음이 아픈 거예요.하루는 김태용 감독님이 술이 엄청 취해서 전화하셨더라고요. 너는 내가 다 알려줬더니 다른 데서 써 먹냐고요. 화나서 <환절기>도 안 보신대요. 하하하.<여교사>는 1년 반 전에 찍은 작품이라 지금 보니 아쉬운 부분도 많이 보였어요. 지금 다시 찍으면 물론 더 잘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감독님과 울고, 싸우고 하면서 정말 최선을 다해서 찍었어요. 그래서 후회는 없어요. (웃음)"김하늘의 눈동자 김태용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한바탕 쏟아낸 그는, 이번엔 김하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무 아름다워 모든 동작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는 들뜬 말투에서, 좋아하는 스타를 만난 팬의 생생한 후기가 느껴져 절로 웃음이 터졌다."제가 첫 현장이라 굳어있고 긴장하고 있었거든요. 하늘 선배님이 그걸 아시고는 '이거같이 먹자', '뭐 했어?' 이러면서 먼저 다가와 주셨어요. 저는 낯가림이 심한 데다 선배님께 다가가는 게 실례일 것 같아 주저하고 있었거든요. 먼저 다가와 주시니 너무 감사했죠."김하늘의 연기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것 역시, 이원근에게는 큰 공부가 됐다. 특히 그가 감탄한 부분은 눈동자였다. 눈동자 떨림에서까지 감정이 느껴지는 그의 연기를 보며 "시선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는 법을 배웠다"고. 그런 깨달음은 <환절기>를 촬영할 때 큰 도움이 됐다."<환절기> 감독님이 시선의 떨림으로 감정을 표현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어떤 느낌인지 몰라 생각을 많이 했는데, 문득 하늘 선배님의 눈동자 떨림이 생각났어요. 하늘 선배님 모니터했던 기억을 되짚으며 연기했죠. '(하늘 선배님은) 이런 걸 고민하셨구나', '이렇게 연기 하셨겠다'고 하면서요. 큰 도움이 됐죠. 이게 성장하는 건가 싶었어요. (웃음)"<여교사>가 넘어야할 산 <여교사>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 있다. 영화 <여교사>는 거칠게 표현하자면, 고등학생 제자를 사이에 둔 두 여교사의 치정극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자존심이 짓밟힌 두 여자의 무력감과 분노가 촘촘히 담겨 있다. 치정극의 탈을 쓴 감정 스릴러인 셈이다.영화 안에 어떤 메시지가 담겨있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든, '10대 제자와 교사들의 삼각관계'라는 소재가 주는 거부감은 <여교사>에 분명 마이너스 요소다. 우리 관객들 중에는 이런 소재 자체에 보수적인 이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노출이나 소재는 사실 <여교사>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키'예요. 그로 인해 사건이 발생하고 갈등이 촉발되는 거지, 그게 전부는 아니거든요. <여교사>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인간의 질투심은 끝이 어디인가', '열등감은 어떤 일들을 일으키나' 같은 거죠. 관객분들도 유인영 선배님이 연기하는 혜영의 얄미운 미소, 제가 연기하는 재하의 영악함, 김하늘 선배님이 연기하는 효주의 서늘한 감정을 섬세하게 따라가 주셨으면 좋겠어요."<굿 와이프>의 이준호 변호사, <여교사>의 재하, 최근 웃는 얼굴 뒤로 의뭉스러움을 감춘 역할을 연달아 연기한 탓일까? 처음에는 밝은 표정으로 먹을 것까지 주며 먼저 다가온 그였지만,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거리감은 채 10분이 가지 않았다. 질문할 틈도 없이 이야기를 술술 쏟아내던 그는 귀여운 수다쟁이였고, 진지한 표정으로 연기와 영화에 관해 이야기할 땐 다음 작품이 더 기대되는 유망주였다.분명 <여교사>는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는 영화다. 개인적으로 '불호'에 가까웠던 <여교사>의 결말은, 그와의 대화하는 동안 두 번 세 번 곱씹으며 '호'로 바뀌었다. <여교사>가 원래 그런 영화인 것인지, 이원근의 힘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처럼, 그 역시 보면 볼수록,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호감이 상승하는 배우 그리고 사람이었다.2017년 첫 개봉작인 <여교사>부터, <환절기> <그대 이름은 장미> <괴물들> 등 그가 지난 시간 차곡차곡 쌓아온 작품들이 잇따라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2017년은 배우 이원근의 연기를 차근차근 곱씹을 수 있는 해인 셈이다."<여교사>를 기점으로 여러 오디션에 합격했고, 거의 쉬지 않고 여러 작품을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더 특별하고 감사한 작품인 것 같아요. 흥행과 상관없이, 제게는 복덩이 같은 작품이죠. 감사한 분들, 좋은 분들도 너무 많이 만났고요. 음…. 흥행까지 하면 더 감사하겠지만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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