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th오마이스타

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극 <블랙버드> 공연 사진 지난 2016년 10월 19일, 서울 대학로 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에서 연극 <블랙버드>의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8년만에 돌아온 이 작품은 15년 전, 12살의 우나와 그를 성폭행했던 40살의 레이(피터)의 이야기를 다뤘다. 27살과 55살이 되어 다시 만난 그들은 당시의 기억을 꿰맞추면서 각자의 진실을 주장한다. 10월 13일 개막하여 11월 20일 폐막했다.

▲ 우나와 레이우나의 시계는 멈췄다. 그러나 레이의 시계는 잠시 멈춘 후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우나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왔다.ⓒ 곽우신


가해자가 기억하는 과거와 피해자가 기억하는 과거는 다를 수밖에 없다. 가해자는 최대한 잘못을 축소하고,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를 최대한 확대하려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은 부정확해지고, 그 부정확해진 기억의 사이는 추정과 확신, 오해와 불신이 채운다. 명확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두 사람의 기억 틈새는 커져만 간다.

15년이 지났다. 15년이 지난 뒤, 피해자가 가해자를 찾아왔다. 가해자는, 어떻게든 살고 있다. 재판도 치렀고, 복역도 했다. 가해자는 애써 잊고 살아오려던 자신 앞에, 간신히 새로 부여잡은 삶 앞에 나타난 피해자를 향해 윽박지른다. 사라지라고, 너와 할 말은 없다고.

"난 내 인생을 살고 있어. 다 잃어버리고 난 후 다시 애써서 싸워 얻은 새로운 인생. 나한테 넌 귀신같은 거야."

하지만 지난 15년간 멈춰 있던 피해자의 시간은 누가 보상해줄 것인가. 피해자는 가해자 앞에 진실을 요구한다.

"15년 동안, 난 모든 걸 잃었어. 난 한 번도 뭘 시작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으니까."

묻혀버린 진실. 그 앞에서 두 사람이 각자의 기억을 토해내며 흐트러진 퍼즐 조각을 맞춰나가기 시작한다. 퍼즐이 완성되고 나면, 피해자의 시간은 다시 흘러갈 수 있을까. 지난 2016년 10월 13일 대학로 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에서 개막하여 11월 20일에 폐막한 연극 <블랙버드>의 이야기이다.

연극, 금기를 건드리다


연극 <블랙버드> 공연 사진 지난 2016년 10월 19일, 서울 대학로 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에서 연극 <블랙버드>의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8년만에 돌아온 이 작품은 15년 전, 12살의 우나와 그를 성폭행했던 40살의 레이(피터)의 이야기를 다뤘다. 27살과 55살이 되어 다시 만난 그들은 당시의 기억을 꿰맞추면서 각자의 진실을 주장한다. 10월 13일 개막하여 11월 20일 폐막했다.

▲ 레이와 우나레이는 순수했다고 주장한다. 자신은 정말로 우나를 아꼈고, 우나를 알기 전까지는 소아성애도 없었다고. 그렇게 어린 아이와 사랑에 빠졌던 건 너가 유일하다고.ⓒ 곽우신


연극 <블랙버드>는 성폭행 가해자 레이와 피해자 우나가 진행하는 2인 극이다. 극의 무대는 레이가 근무하는 공장의 컨테이너 안. 레이는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우나를 만나 당황하고, 그를 이 공간으로 이끈다. 15년 전, 당시 미성년자 그것도 12살밖에 되지 않았던 우나를 강제로 범했다는 이유로 레이는 재판을 받았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은 후 복역했고, 예정된 형량보다 일찍 사회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름도 바꾼 채,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시작했다. 과거의 일은 그저 "끔찍한 실수"로 치부해버리며.

레이를 맡은 조재현의 연기에 대해 이렇다저렇다 할 코멘트가 필요할까. 원캐스트로 극을 끌고 가야 함에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조재현이니까. 관록의 남배우보다는 무대 연기가 익숙하지 않았던 상대 여배우들에 관심이 갔다. 우나 역의 채수빈은 2년 전인 2014년 <그와 그녀의 목요일>에 출연한 게 다이며, 무대 주연은 처음이다. 더블 캐스팅된 옥자연 배우는 여러 작품 경험이 있으나, 이토록 비중 있는 역할에 나선 적은 없다.

하지만 우려할 필요가 없었다. 아직 연극 무대에 최적화된 연기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채수빈은 자기만의 색깔을 분명하게 찾아가고 있다. 금세 부서질 것 같은 그래서 그 안에 더 날 서 있는 느낌이 강하다. 옥자연의 우나는 안정적이다. 더 단단하게 여물었다. 두 사람이 소화하는 우나가 달라서, 그 우나들과 호흡하는 레이도 조금씩 달라진다. 페어별로 보는 재미가 확실하다.



연극 <블랙버드> 공연 사진 지난 2016년 10월 19일, 서울 대학로 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에서 연극 <블랙버드>의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8년만에 돌아온 이 작품은 15년 전, 12살의 우나와 그를 성폭행했던 40살의 레이(피터)의 이야기를 다뤘다. 27살과 55살이 되어 다시 만난 그들은 당시의 기억을 꿰맞추면서 각자의 진실을 주장한다. 10월 13일 개막하여 11월 20일 폐막했다.

▲ 기억의 퍼즐각자가 기억하던 것들을 맞춰가면서 그들은 공통 분모를 넓혀가기 시작한다. 그 과정이 참 불편하다. 일방적으로 레이를 공격하는 우나는, 열정에 휩싸였지만 명확한 물증이 없는 검사와 같다. 그러나 이를 변호하는 레이는, 구체적인 정황을 가지고 열성적으로 자신을 변론하는 변호사다.ⓒ 곽우신


하지만 배우의 호연이나 극의 재미와 별개로, 90분의 시간 중 상당 부분, 관객은 가슴 한구석에 큰 불편함을 안고 있어야 한다. 서로의 기억을 짜 맞춰갈수록, 우나보다는 레이를 이해할 여지가 커지기 때문이다. 좁은 컨테이너로 제한된 공간은 팽팽한 긴장감을 주고, 무대만이 아니라 관객까지 답답하게 만든다. 무대는 그렇게 불편함이라는 씨앗이 잘 발아할 수 있는 토양이 된다.

레이는 정말 반성하고 있고,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혹시나' 하는 물음표들이 머릿속을 떠돈다. 어쩌면 둘이 진짜 사랑했던 것일까? 둘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정의해도 괜찮을 걸까? 레이는 정말 소아성애자가 아니었나? 레이는 정말 우나를 배려했나. 그렇다면 이 두 인물의 감정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용인하며, 수용해야 하는가. 40살 남자와 12살 여자의 관계를? 2016년의 우리가?

때때로 예술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금기를 건드린다. 예술만이 지니는 일종의 특권이다. 하지만 동시에, '소아성애'는 소재에 불과하다. 조재현은 프레스콜 당시 "이 작품이 단순히 소아성애자에 관한 얘기였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 중요한 건 이 소재를 통해 이 작품이 던지고자 했던 화두이다. 그 숨겨졌던 화두는 극의 후반부에 폭발하듯이 등장해 관객의 뒤통수를 강타한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진술이 엇갈릴 때


연극 <블랙버드> 공연 사진 지난 2016년 10월 19일, 서울 대학로 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에서 연극 <블랙버드>의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8년만에 돌아온 이 작품은 15년 전, 12살의 우나와 그를 성폭행했던 40살의 레이(피터)의 이야기를 다뤘다. 27살과 55살이 되어 다시 만난 그들은 당시의 기억을 꿰맞추면서 각자의 진실을 주장한다. 10월 13일 개막하여 11월 20일 폐막했다.

▲ 엇갈린 시선우나와 레이의 교차하는 감정은, 결국 사회적으로 버려지고 공격받던 두 약자의 연대로 나아가는 '듯'하다. 만약 레이의 모든 것이 진실이었다면, 이 작품의 결말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순수하고 진실한 우나와 달리, 레이는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위선으로 맞선다. 그는 가해자이다.ⓒ 곽우신


오해가 풀리고, 정서적으로 불안한 삶을 지냈던 우나는 이제 레이를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15년 전 멈췄던 시계를 다시 움직이게 하려고, 우나는 그 15년 전을 다시 마주할 필요가 있었다. 마치 눈싸움을 하듯이 쓰레기를 던지며 노는 레이와 우나. 이 피해자와 가해자의 화해는 생경하다. 바로 몇 분 전까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렸던 두 사람은, 이제 밝게 웃으며 장난친다.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지고, 서로를 탐하려던 그 순간, 갑작스러운 반전이 일어난다. 그렇게, 서로의 입맞춤으로는 도달할 수 없었던 진실이 제3자에 의해 밝혀진다. 그렇게 '뚝' 하고 팽팽했던 긴장의 끈은 끊어지고, 엉켰던 실타래는 한꺼번에 잘려나간다. 그 자리에 남는 건 경악 그리고 배신감. 두 사람의 대결에서 레이에게 점차 쏠리던 관객은, 그 한순간에 의해 우나의 감정에 빨려 들어간다. 전부 거짓말이었다. 이 사람의 지위도, 이 사람의 삶도, 이 사람의 존재 자체도. 마치 레이를 불렀으나 피터가 등장했던 것처럼. 그렇게 한 번 버려졌던 우나는, 또다시 레이에 의해 버려진다.

미성년자를 향한 성범죄는 그 죄질이 매우 나쁘다. 연극 <블랙버드>는 그 성범죄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궁극적으로 소아성애 혹은 성범죄를 옹호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세상의 수많은 폭력 사이에서, 우리는 때때로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손가락질하는 경우가 많다. 네가 짧은 옷을 입어서, 네가 먼저 유혹해서, 네가 여지를 줘서라고. 가해자가 호소하는 억울함이 설득력을 가질 때도 있다. 나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고, 기억이 나지 않고, 순수한 마음에서 그런 것이라고.

하나의 사건을 경험한 두 명의 인물. 각자의 처지에 따라 당연히 기억은 다를 수밖에 없다. 각자의 기억이 각자에게는 대체 불가능한 진실이기에, 명확한 증거 없이 우리는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난감하다.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사이에 애매한 중립을 취하거나, 타협을 종용한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가해자에게 유리한 길로 귀결되는 걸 여러 번 목격했다. '합의'나 '화해' 그리고 '용서'라는 말은 분명 좋은 가치를 지닌 좋은 말이지만,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극 <블랙버드> 공연 사진 지난 2016년 10월 19일, 서울 대학로 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에서 연극 <블랙버드>의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8년만에 돌아온 이 작품은 15년 전, 12살의 우나와 그를 성폭행했던 40살의 레이(피터)의 이야기를 다뤘다. 27살과 55살이 되어 다시 만난 그들은 당시의 기억을 꿰맞추면서 각자의 진실을 주장한다. 10월 13일 개막하여 11월 20일 폐막했다.

▲ 레이의 쓰레기이 컨테이너라는 공간. 그 공간 한쪽에 쌓아 올려진 쓰레기. 레이는 자신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아니다. 그 역시 사회적으로 내몰린, 불안한 지위의 노동자일 뿐이다. 자신의 그 불안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그는 자신을 거짓으로 보호한다. 하지만 그 쓰레기로 쌓아올린 방벽 따위 쉽게 허물어진다.ⓒ 곽우신


레이에게도 권리가 있다. 가해자에게도 물론 억울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죗값을 치렀다면, 진실을 인정하고 참회한다면 그에게도 새로운 삶을 살아갈 기회를 줘야 한다. 처벌의 주목적은 공적 복수에 의한 법감정 해소가 아니라, 교화와 계도를 통한 재사회화에 있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전제가 있다. 그는 정말로 '반성'했는가.

그는 우나를 찾아간 적이 없다. 그 자리에, 그 이름 그대로 살아서 고통받는 그에게 직접 용서를 구한 적이 없다. 수많은 책을 읽으며 자신이 전형적인 소아성애자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려 했을 뿐, 자신이 지은 죄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레이가 말한 모든 것이 진짜였다면, 정말로 그를 용서할 여지가 생겼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처절하고 현란한 자기변론 속에 진실의 함량은 극히 미미했다. 이 세상 수많은 가해자가 그랬듯이.

재판정에서, 혹은 대한해협 건너에서, 아니면 여의도 청문회장에서, '피해자 코스프레'로 일관하며 자신의 가해를 부정하는 이들이 차고 넘치는 요즘이다. 가해자의 말은 언제나 그럴듯했다. 컨테이너 문을 열고 들어왔던 한 사람에 의해 레이의 거짓이 드러났듯이, 그들의 거짓 역시 결국 드러날 것이다.

연극 <블랙버드> 포스터 지난 2016년 10월 13일, 서울 대학로 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에서 개막하여 11월 20일에 폐막한 연극 <블랙버드>의 포스터. 15년 전의 사건에 대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기억이 엇갈린다. 15년 만에 가해자를 찾아온 피해자는 진실을 요구한다. 조재현·채수빈·옥자연 등.

▲ 연극 <블랙버드> 포스터지난 2016년 10월 13일, 서울 대학로 대명문화공장 1관 비발디파크홀에서 개막하여 11월 20일에 폐막한 연극 <블랙버드>의 포스터. 8년만에 돌아온 이 작품은 15년 전, 12살의 우나와 그를 성폭행했던 40살의 레이(피터)의 이야기를 다뤘다. 15년 전의 사건에 대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기억이 엇갈린다. 27살과 55살이 되어 다시 만난 그들은 당시의 기억을 꿰맞추면서 각자의 진실을 주장한다. 조재현·채수빈·옥자연 등.ⓒ (주)수현재컴퍼니



임꺽정이 죽은 지 10년, 백성들은 탈을 쓰기 시작했다

[안 뻔한 티켓북] 많은 단점이 있는 뮤지컬 <임꺽정, 그가 온다!> 하지만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임꺽정의 난이 끝난 지 10여 년이 흘렀다. 함께 청석골에서 싸웠던 가파치는, 고아 난희를 딸처럼 키우며 그저 거스르지 않고 살려고 한다. 가난하긴 하지만, 뭔가 좀 불합리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도저히 못살겠다는 정도도 아니었다. 가끔 악몽을 꾸고, 왜 임꺽정이 이 아이를 데리고 '살라'고 했는지 이해하긴 어렵지만.난희가 이웃 동네 서우와 결혼할 수 있다면, 멀리 높으신 분들 신을 맞춰드리러 가는 것도 괜찮았다. 돈 한 푼 못 받아도, 이걸 계기로 다른 활로를 뚫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없는 사이 마름의 농간질에, 윤참판의 만행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난희가 먼저 당했고, 이에 항의했던 자신도 모진 고초를 겪는다. 다른 사람을 대신해 군역에 끌려갔던 서우도 간신히 살아 돌아온다. 무엇이든 고치던 천민 가파치는, 세상을 고치자고 일어난다. 백성들은 모여 10년 전 세상을 흔들었던 그 사람, 임꺽정의 탈을 쓰고 모여든다.전봉준의 동학농민혁명이 무대에 오르고, 홍길동의 이야기가 공중파를 타고 안방에 전해지더니 이번엔 임꺽정이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자연스레 대중문화 콘텐츠를 창작하는 사람의 시선도 이쪽으로 쏠리게 된 것일까. 뮤지컬 <임꺽정, 그가 온다!>는 이처럼 임꺽정 없는 임꺽정의 이야기이다. 지난 2월 17일, 서울 대학로 예그린씨어터에서 개막하여 오는 26일까지 관객을 맞는다.이 작품이 품은 수많은 단점 잔뜩 기대하고 들어갔던 맛집의 음식이 내 취향과 영 안 맞을 때가 있는 반면, 아무 기대도 하지 않고 대충 허기만 때우려고 들어갔던 집에서 의외의 맛을 찾기도 한다. 그릇은 이가 빠져 있고, 플레이팅도 엉망이고, 뭔가 대단한 재료를 넣은 것 같지도 않은데 한 입 물고 나니 '어라?'하게 되는 그런. 뮤지컬 <임꺽정, 그가 온다!>를 보러 갔을 때, 내가 느낀 기분은 확실히 후자에 가까웠다. 전체적으로 만듦새도 투박하고, 엉성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극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포인트들이 분명 있다.그러나 연극·뮤지컬 장르를 애정하는 마니아들이 쉽게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지점들이 많다. 미리 관객이 염두해두고 가야 할 뮤지컬 <임꺽정, 그가 온다!>의 단점부터 열거해보자. 가장 큰 건 이야기다. 이 작품 속에는 인과가 뚜렷하게 설명되는 사건이 사실 별로 없다. 왜 임꺽정이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찾고자 하는 인물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임꺽정은 어떤 시대정신을 지녔고, 어떤 의기를 사람들에게 전했는지 공감하기 어려우니, 모두가 임꺽정의 탈을 쓰고 나설 때의 감동이 다소 반감될 수밖에 없다. 권력자의 겁탈-피해자의 임신-모성 발현-2차 폭력-사산으로 이어지며 여성 캐릭터에게 고통을 가하는 클리셰도 진부하고(그 폭력의 구현도 참 어설프다), 그 캐릭터를 지키지 못했다고 자학하며 분노하는 남성 캐릭터 역시나 뻔하다. 권력을 대표하는 윤참판의 학정도 강간을 제외하면 직접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의 시선은 마름의 악행에 더 쏠리게 되는데(장재윤 배우의 연기가 돋보이는 이유도 있다), 이게 사실 백성의 분노가 민란으로 폭발할 수 있게끔 하는 '트리거'가 되기에는 다소 부족한 느낌이 든다.또한 대표적인 반동인물로 등장하는 엄기철, 신분제도 아래에서 충실히 자신의 역할을 이행하여 성공을 꿈꾸는 이 남자의 동기도 불충분하다. "아무도 나를 봐주지 않았"지만, 탐관오리를 등에 업은 후 그는 그 작은 권력을 행사하며 칼을 휘두른다. 시스템에 충실하려는 그가, 시스템을 부정하는 임꺽정에게 품는 적개감은 극 중에서 대단히 크게 다가온다. 하지만 어쩐지 뜬구름 같다. 그는 왜 그토록 시스템을 옹호하는가. 왜 성공을 갈망하는가. 왜 임꺽정을 그토록 증오하여 죽이려고까지 하는가. 90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채 설명되지 않는다. 떠돌이 장사치이자 가파치의 친구인 남상렬의 캐릭터도 그 역할이 다소 모호하다. 친구를 돕는 듯하지만, 결정적으로 가장 큰 해악을 미치게 된다. 친구를 돕는 의리 있는 사람인 것 같지만, 내뱉는 대사들 중에는 다분히 젠더적으로 불편한 말들이 많다. 이와 대비되는 캐릭터로 주체적 여성인 갑순이가 등장하지만 분량이 너무 적어서 1:1 구도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인물의 개별 동기가 부족하니, 이들이 모여서 분출하는 민란의 의의도, 갈등의 크기도 잘 와닿지 않는다. 임꺽정의 탈을 쓰고 놀이를 하며 세상을 풍자하기는 하지만, 윤참판의 가택에 쳐들어가 그를 응징한 것을 제외하면 체제를 전복하거나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가 명쾌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토벌군이 와도 물리적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사상자 하나 없다는 묘사가 극 중 나오는데, 세를 불리기 위해 시간을 끄는 것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비폭력 투쟁을 벌이겠다고 나선 것인지 모를 일이다. 결국 이 혁명의 수단도, 목적도 분명하게 그리지 못한 채 극은 끝나고 만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꺽정, 그가 온다!>의 극적 완성도가 허술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 이 극을 볼 만한 이유는 있다. 일단은 음악적 성취. 뮤지컬은 물 건너 온 장르이다. 이 장르에 우리 색을 입힌다고 한들, 악기든 선율이든 서양적 요소가 들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극 중에 창이 들어가거나, 일부 넘버가 혹은 오케스트라의 일부 악기가 전통 악기가 들어가는 경우는 있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전통악기의 선율만 가지고 넘버를 배치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각 곡의 개별적 완성도도 나쁘지 않다. 듣는 재미는 분명 보장한다.여기에 탈과 인형극의 활용이 또한 훌륭하다. 대체로 '우리 것'을 강조하다가 그 요소가 작품 전체의 톤에서 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극에서는 굉장히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있다. 배우들 전부가 임꺽정의 탈을 쓰고 군무와 대사를 하는 부분도 괜찮지만, 봉산탈춤의 6과장을 응용하여 대사를 주고받던 탈춤 부분은 굉장히 훌륭했다. 기존의 봉산탈춤을 잘 재현하기도 했고, 이를 극 안에 잘 녹아들도록 살짝 변주한 것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궁중의 늙은 간신들이 등장하는 인형극 장면에서는 극단 배우들의 개인기가 마음껏 발휘된다. 꽤 익살스러워서, 인형극 장면이 조금 더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치있다. 풍자로서도 합격점 이상.안무에서도 의외의 성과를 보여준다. 탈을 쓰고 진행되는 몸짓들이 볼 만하다. 중간중간 조금 과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지만, 대체로 배우들의 군무는 극과 잘 어우러져 분위기를 고조하는 데 일조한다. 베스트는 극 후반부에 등장하는 엄기철과 서우의 격투 신. 순간 극의 장르가 바뀌었나 싶을 정도로 임팩트 있는 합을 보여주는데, 짧지만 굉장히 인상적이다. 젊은 배우들이 흘리는 땀에 비례해 멋진 무술 장면이 연출됐다. 위에 잠깐 언급했지만 풍자의 활용도 적정 수준을 잘 지켰다. 최근 시국이 무대에도 많이 반영되면서, 때때로 맥락 없이 되풀이되며 '오버'하는 풍자들이 있다. 이런 풍자가 반복되면 재미있지도 않고, 비판의 날카로움은 무뎌지고, 극의 흐름과 분위기만 깨게 된다. <임꺽정, 그가 온다!>는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꼭두각시 왕의 부족한 말주변, 왕에게 재가를 올리기 전에 꼭 사전에 논의를 거쳐야 하는 '올림머리' 큰상궁의 존재, 검은 장부를 만들어 저잣거리 놀이를 통제하는 술수 등 현 시국에서 따온 많은 풍자 포인트가 있다. 그러나 극의 서사를 해치지 않고 오히려 보완해가면서 객석으로부터 웃음을 이끌어낸다.임꺽정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 산다는 것은 생존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살아도 죽은 채로 있는 이, 죽었어도 여전히 살아있는 이를 우리는 여럿 알고 있다. 내 삶의 이유와 존재의 가치를 느끼고, 스스로 삶을 걸어가는 것. 그것이 생존을 넘어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러나 제도와 환경, 국가와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 속에 갇히면서 우리는 때려도 아프다 말 못하고 그저 참고만 살고는 한다.임꺽정은 죽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때를 자꾸 회고하게 되고, 그를 그리워한다. 그를 통해 분출됐던 분노, 잠시의 해방감을 기억한다.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그때의 승리가 다시 불의를 용서치 않고 일어나게끔 하는 힘이 된다. 체제에 순응하여 성공해봤자, 여전히 자신을 잃고 생존만 간신히 유지하는 저 여럿 중 하나에 불과하다. 나 자신을 지키면서, 사람답게 고통 받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을 이뤄야 하기에, 인간은 수많은 역사의 변곡점에서 체제를 거부하고 싸워왔다. "혼자 꾸는 꿈은 꿈일 뿐이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그 명언을 충실히 이행하면서.임꺽정과 홍길동, 박종철과 이한열이 크게 다르지 않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저절로 굴러가지 않기에, 이를 진보의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인류는 무수한 혁명을 이룩해왔다. 그 역사를 배우고, 앞장 서 깃발을 들었던 사람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역사가 퇴보하려고 할 때,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그들을 기억하며 일어서기 위해서이다.단순히 시국에 편승하기 위해 대충 만든 작품에서는 그런 결의를 느끼기 어렵다. 그렇다고 결기와 목적의식으로만 똘똘 뭉쳐 극적 재미를 잃어버린 작품은 관객에게 다가설 수 없다. 비록 많은 단점을 지니고 있지만, <임꺽정, 그가 온다!>는 최소한 '우리의 목소리'로 '우리의 이야기'를 하려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조금 더 섬세하고 세련되게 조율했다면 훨씬 더 완성도가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있지만, 가능성이 없다면 '아쉽다'는 감정 자체가 나오지 않을 테니까.격동의 시대. 시계는 이제 또 하나의 중대한 갈림길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 이 작품은 그 갈림길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말하고 있다.

"해방되고 싶어요"... 엄마는 아픈 딸에게 죽음의 주사를 놓았다

[안 뻔한 티켓북] 서풍을 타고 날아간 작은 꿀벌의 이야기, 연극 < BEA >

*주의!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중문화의 매력 중 하나는, 어려운 문제에 대한 고민거리를 딱딱하지 않게 던져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덕분에 사형제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고, 소설 <도가니> 덕분에 아동 성폭행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울 수 있었다. 무대도 다르지 않다. 연극 <프라이드>는 억압된 시대 분위기 속에서 성 소수자라는 정체성 탓에 괴로워하는 이들의 아픔을 풀어냈고, 뮤지컬 <스위니토드>는 가진 자들의 위선을 폭로한다.지난 11월 11일 프로젝트박스 시야에서 개막하여 11월 30일에 폐막한 연극 <BEA>도 위에 열거한 작품들과 궤를 같이했다. 논쟁적 화두를 던짐으로써 관객들에게 토론의 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우선 탁월하다. 그 메시지의 전달력을 유지하면서도 극의 완성도 역시 훌륭한 수준으로 유지한다.원작자 믹 고든이 쓴 대본의 힘도 크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영민해지는 김광보 연출의 터치가 빛을 발휘한다. 경험의 차이를 결코 무시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그는, 기존의 자신이 보여주던 무대와는 다른 매력을 시도한다. 백지원, 전미도, 이창훈 배우의 연기는 더하고 뺄 것이 없다. 대학로에서 정식 공연으로 빨리 만나고 싶을 정도로. (주인공 '비'를 연기한 배우 전미도는 이 작품으로 2016 스테이지톡 오디언스 초이스 어워즈에서 연극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비, Bea, Be a, Bee 베아트리체는 자신의 본명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비'라고 불리는 걸 좋아한다. 이 밝고 화사한, 자유분방한 성격의 주인공은 혼자서 눕기엔 조금 넓은 듯한 침대를 방방 뛰어다닌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병 때문에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기에, 자신의 욕구를 발산할 곳이 없다. 변호사로 일하는 엄마 캐더린마저 집에 잘 없는 터라 비의 외로움은 더욱 커져만 간다.그래서 비는 새로 온 간병인 레이가 퍽 마음에 든다. 레이는 섬세하고 다정하며 재미있는 사람이다. 북부 아일랜드 출신의 이 독특한 간병인이 캐더린은 석연찮지만, 비의 강한 고집 덕분에 결국 레이를 고용하기로 한다. 비는 캐더린에게 쉽게 밝힐 수 없는 비밀을 레이와 공유하며, 이 침대라는 감옥 속 일상을 살아간다.프로그램 북이나 예매 페이지에 나와 있는 시놉시스를 살펴보지 않은 관객은, 비가 어떤 상황인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배우 한 명의 연기를 통해 드러나는 반전이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만큼 비의 정신세계와 실제 육체 상태의 간극이 크다. 이처럼 발랄한 주인공을 옭아매는 정체불명의 병은, 그를 침대에 누운 채 아무것도 할 수 없게끔 한다. 말하기조차 쉽지 않은 육신과 활달한 영혼의 차이는 그만큼의 낙차가 되어, 극도의 절망으로 돌아온다.대소변도 못 가리고, 누군가 쑤어준 미음을 간신히 받아먹을 수밖에 없다. 8년 동안 그는 침대에 누워서 방 안의 모든 작은 디테일들을 헤아리며 기억한다.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을 때 침대에 있는 물건을 집어 던지거나, 상태가 아주 좋은 날에는 귀고리도 만들 수 있지만, 그게 다다. 그조차도 다 끝낸 후에 남는 건 없다. 그 외에 모든 건 고통이다. 병이 주는 고통, 약이 주는 고통. 가장 끔찍한 건 이 고통을 견딘다고 해서, 호전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이 병은 낫지 않는다. 지난 8년간 몸 상태는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진 적이 없다. 이미 예정된 끝을 위해 왜 이토록 힘들게 버텨야 하는가. 비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비를 유일하게 살도록 하는 이유는 하나이다. 엄마. 자신이 떠나고 나면 엄마가 너무 슬플까봐. 그 하나 때문에 어떻게든 아등바등 이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렸지만, 그마저도 늦어버렸다. 아빠도 떠났는데. 엄마와 아빠는 아직 서로를 잊지 못하는데. 그저 나 때문에, 자신의 삶을 포기한 엄마가 비는 너무 안쓰럽다. 그래서 결국 엄마에게 권한다. 이 의미 없는 고통에 종지부를 찍자고."나는 덫에 걸렸어요, 엄마. 이제, 해방되고 싶어요. 그리고 엄마도 해방됐으면 좋겠어요."베아트리체의 이름은 왜 비(Bea)였을까. 비는 그저 평범한 한 명의 사람(Be a)이기를 바랐다. 예쁜 옷도 입고, 데이트도 하고, 학교도 다니며, 수다도 떠는 그 나잇대의 평범함. 대단한 특별함을 꿈꾼 것이 아니었음에도, 마치 <넥스트 투 노멀>처럼 그에게는 그 평범함이 너무 멀리 있는 무언가였다.비는 또 꿀벌(Bee)과 발음이 똑같다. 붕붕 나는 꿀벌의 노래를 좋아했던 비. 캐더린이 '붕붕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던 비. 비는 레이를 처음 만난 날, 레이에게 물어봤다. 제피(Zephyr)라는 말이 무엇이냐고. 그런 말이 있는지 레이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비와 마지막으로 만나는 날, 레이는 그 질문에 답을 한다. 그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에서 따온 말이라고. 그렇게 이 좁은 침대에 갇혀 있던 작은 꿀벌은, 서풍을 타고 훨훨 날아간다.제피로스는 세상 모든 식물의 꽃을 틔우는 여신 플로라의 남편이다. 제피로스의 도움으로, 이 꿀벌은 자기만의 꽃을 찾아간 것일까. 그곳에서 비는 행복할까. 미친 듯이 웃으며 온 방 안을 휘젓는 비의 뒤로, 남은 캐더린은 침대에 주저앉아 서럽게 오열한다. 캐더린의 어원은 여신 헤카테, 죽음을 관장한다. 누구도 남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없다우리는 쉽게 말한다. '살아 있으면 언젠가 좋은 일이 있을 거야'라든가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낫지'와 같은. 그러나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죽음보다 더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대꾸하면 뭐라 답할 텐가. 에밀리아 클락(루이자 역)과 샘 클래플린(윌 역) 주연의 영화 <미 비포 유>를 본 사람이라면 '안락사'에 대해 제3자가 쉽게 말할 수 없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윌이 유일하게 눈 뜨는 이유는 루이자 때문이지만, 이렇게 사는 게 괜찮을 수도 있지만, 그런데도 그것이 자기 인생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을 너무도 사랑했던 그는 '이기적인' 선택을 한다."그래, 아마도 공감에는 한계가 있나 봐. 지리학적으로, 비행기가 어디 뭐, 인도나 파키스탄에서 추락했다고 해봐. 누가 신경이나 써? 정말로 신경 쓰지는 않는다고. 레이 말이 맞는 것 같아. 우린 모두 마음 장님이야."연극 <비>는 공감에 대한 작품이다. 장애는 몸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마음에도 장애가 있다. 우리는 모두 사실, 상대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장애를 가진 '마음 장님'들이다. 이 마음 장님들은 서로를 자신의 기준에 끼워 맞추고, 상처 주고, 상처받는다. 캐더린은 죽음을 택하려는 비를 처음에 이해하지 못한다. 비의 상황을 체험도 해보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비와 캐더린의 가교 구실을 해주는 것이 바로 새로 온 간병인 레이이다. (이 극을 열고 닫는 노래가 마돈나의 'Ray of Light'인 점도 의미심장하다) 자신의 말투나 행동에 대해서 그리고 성 정체성에 대해 갖은 편견과 핍박에 시달렸을 그이기에, 그래서 더더욱 서로를 사랑함에도 온전히 자기 얘기를 하지 못하는 모녀를 연결해 줄 수 있었다. 마지막 비의 생일 파티, 세상에 다시는 없을 것처럼 즐거운 시간을 세 사람은 보낸다. 서로의 아픔에 대해 이해하게 된 이들은 결국 선택한다. 비가 원했던 그 선택지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읽어주다가 열정에 휩싸였던 레이와 비. 만약 그때 비가 쾌락을 느꼈다면, 내 몸이 느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픔만이 아니라 기쁨도 있다는 걸 알았다면 조금은 달랐을까. 이 삶을 살아갈 이유를 찾는데 레이라는 친구를 얻은 것만으로는 부족했을까. 비를 붙잡고 있는 캐더린이 이기적인 만큼, 캐더린을 놓고 떠나려는 비도 이기적인 건 아니었을까. 연극 <비>는 이런 물음표들에 명쾌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다만, 서로를 존중하는 법에 관해 이야기한다. 안락사에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다. 논쟁적 사회 문제에 대해 정답과 오답이, 옳고 그름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자신이 어느 편에 서 있다고 하더라도, 상대편에 있는 이 그리고 정작 그 처지에 있는 당사자에 대해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이 상식적인 진리를 <비>는 재확인시켜준다. 이들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건, 여러 가지 선택지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완벽하지 않기에, 누군가의 가슴에는 크나큰 구멍을 남길 수밖에 없는 선택지. '해방'된 두 모녀를 보며 눈물이 나는 건 그 때문이다.안락사는 아직 우리나라에서 불법이다.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극소수의 국가에서 그것도 상당히 제한적인 형태로 허용될 뿐이다. '웰빙'을 넘어서 '웰다잉'의 개념에 대한 논의가 진전되면서 안락사에 대한 이야기도 언젠가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다. 그때가 되었을 때, 죽음을 택한 사람에 대해서 혹은 남는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않는 법을 이 작품을 말해준다. 그때가 올 때까지, 우리가 이 작품을 되새겨야 할 이유이다.

after before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사심을 담습니다. 다만 진심입니다. 제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제 진심이 닿으리라 믿습니다. 공채 7기 입사, 사회부 수습을 거쳐 편집부에서 정기자 생활을 했고 지금은 오마이스타에 있습니다.

top